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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마음

마음 다스리기(18)-팔복 마음-5 (마음 긍휼)

by 【고동엽】 2022.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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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다스리기(18)-팔복 마음-5 (마음 긍휼)

마 5:7 『矜恤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矜恤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

▶ 한 젊은 사람이 직장을 잃어버리고 몇 달 동안 놀았습니다. 그래서 초조하게 지내다가 어느 회사에서 사원 모집하기에 입사원서를 내고 인터뷰를 하게 됐습니다. 면접시험을 보러, 그는 차를 몰고 부지런히 그 회사로 가는 길인데, 가다 보니까 바로 길 옆에, 아주 뜨거운 여름인데, 중년부인이 자동차에 타이어가 펑크가 나서, 그 펑크 난 타이어를 갈아 끼우느라고, 땀을 흘리고 있는 걸 보고 "아무리 바빠도 이럴 수 없지" 차를 멈추고 그 중년부인에게 "제가 대신 하겠습니다." 그리고 타이어 교체를 해 드렸습니다. 이러느라고 시간이 지체됐습니다. 그리고 다시 차를 타고 회사에 가 보니까, 회사 면접 시간이 벌써 끝나 버렸습니다. 그러나 인사과에 들어갔더니 "시간 지났어요." 냉정하게 거절했습니다. "제가 좀 오다가 지체돼서 그러는데 대단히 죄송하지만 면접이 안 될까요?" 사정을 해 봤으나 "안됩니다." 거절을 하여, 아주 실망하고 낙심하고 있는데, 바로 그 시간에 옆에서 어깨를 "탁" 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돌아 보니까 "내일부터 회사에 나오십시오!" 그래 보니깐 바로 아까 그 아주머니였던 것입니다. 그 사람이 이 회사의 사장이었던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엄숙한 선언을 합니다(야고보서 2:13).

『矜恤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矜恤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그런데 여기에 예수님은 이런 幸福論을 말씀하십니다.

『矜恤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矜恤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

오늘 예수님께서 사용하시는 矜恤(헤세드)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단어 가운데 하나입니다.

히브리어로는 헤세드, 헬라어로는 Eleemon인데 약 500번 이상 나옵니다. 그리고 이 단어가 사용된 경우의 90% 이상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낼 때 사용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矜恤이야말로 하나님의 가장 대표적인 성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청교도 신학자 Thomas Watson은 이렇게 정의해줍니다.

"사랑과 은혜와 矜恤은 하나님의 품속에서 나란히 살아가는 세 자매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矜恤 때문에 우리가 죄와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에베소서 2:4-5 "矜恤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베드로전서 1:3에는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矜恤 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을 있게 하시며 라고 하나님의 矜恤 하심에 감격하였습니다.

예수님의 탕감 비유는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는 긍휼히 여겨여 됨도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마18:24-34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矜恤하심을 힘입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엄청난 矜恤에 빚진 자입니다. 그 풍성한 矜恤로 나 같은 죄인을 사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런 하나님의 가슴으로 矜恤을 베푸는 인생을 살아야 참된 幸福을 맛봅니다.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예수님의 여덟 가지 幸福論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동안 생각해온 네 가지는 대신 관계의 복이요, 오늘부터 생각할 네 가지는 대인 관계의 복입니다. 이제 그 첫 번째가 다른 사람을 矜恤히 여기는 幸福입니다.

1. 구원받지 못한 자를 안타까이 여기는 慈愛心입니다

矜恤이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것은 곧 구원받지 못하고 죽어 가는 사람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입니다.

이것이 곧 예수님의 가슴입니다.

예수님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너무 안타깝게 여기시고, 아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마태복음 9:23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보실 때 그가 잘 살든지 못 살든지, 그가 귀족이든지 천민이든지 상관하지 않고 하나님이 없는 인생을 살면 그들을 심히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불쌍히 여기셨다고 합니까? 목자가 없어서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뿔뿔이 흩어져 헤매이며 고생하는 양처럼 보이신다고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矜恤입니다.

예수님은 어릴 때 귀신들려 말 못하고 발작을 일으키고 거품을 내 뿜고 이를 갈며 몸이 뻣뻣한 아이에게도 矜恤을 베푸셨습니다.

귀신들려 고통당하는 딸을 둔 가나안 여인에게도 矜恤을 베푸셨습니다.

외아들을 잃은 과부를 보시고 측은히 여기고 울지 마라 위로하신 후 외아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배고픈 자에게도, 소경 된 자에게도, 귀먹고 혀가 어눌한 자에게도, 마지막 십자가상에서 강도에게도 예수님께서 주신 것은 矜恤히 여기시는 뜨거운 마음이었고 여기에 구원의 은총을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솟아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고대광실을 지어놓고 살면 무엇합니까? 이 세상에서 출세하면 무엇합니까? 남보다 건강해서 몇 년 더 살면 무엇합니까? 결국은 구원받느냐 구원받지 못하느냐가 그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할텐데, 만약에 영원한 운명이 잘못 된 길로 가야 되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불쌍하냐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구령의 열정을 가지고 모든 삶의 에너지를 다 쏟아 바쳤습니다.

그런데 오늘 현대 크리스챤들에게는 이런 숭고한 영혼 사랑이 별로 없습니다. 저부터가 그렇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안타깝게 여기고 민망히 여기며 불쌍히 여기는 矜恤이 있어야 幸福합니다.

▶ 성 어거스틴은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에 대하여 이렇게 호소합니다.

"우리가 영혼이 떠난 육신을 앞에 놓고 통곡을 한다면, 하나님을 떠난 영혼을 놓고 어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도전을 받아야 할 말입니다.

주님, 저의 마음속에 구원받지 못한 자를 민망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심장과 같은 矜恤의 가슴을 주옵소서!

마치 구조대원처럼 절박한 마음으로 죽어 가는 영혼을 살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구원의 慈愛心이 있을 때 참된 幸福이 주어집니다.

2. 고통 당하는 자를 안타까이 여기는 慈愛心입니다

우리가 누구나 다 공감하듯이 예수님의 본성은 矜恤 그 자체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고통 중에 있는 자들을 특별히 矜恤히 여기십니다. 병든 자, 장애인, 세상에서 버림받고 천대받는 죄인들, 사고 당한 자, 이런 어려운 사람들을 주님이 얼마나 불쌍히 여기시는지요!

그래서 사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고통 당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민망히 여기셨다, 측은히 여기셨다, 안타깝게 여기셨다, 때로는 아픈 가슴으로 함께 우셨던 장면들을 자주 묘사합니다.

예수님의 가슴에는 矜恤의 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아프고 어려운 자를 보면 그 연민의 정 때문에 견디지 못하여 하셨습니다.

▶ 矜恤이라는 말의 어원적 뜻은 그 사람의 피부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서 그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의 생각, 그의 감정, 그의 처지와 형편 속에 동참하면서 사랑을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영어로는 이것을 Empathy(공감)라고 합니다. 고통과 아픔을 함께 나눈다는 뜻입니다.

T.H. Robinson은 헤세드에 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矜恤은 다른 사람들과 공감하면서 바라보는 것이다. 그들과 더불어 느끼며, 그들의 피부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입장과 관점에서 인생을 바라볼 수 있는 힘이다."

그러므로 矜恤이라는 단어를 다른 말로 표현해본다면 『동일시』( Identification with him)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처지에서 가슴아파하고, 그 사람의 입장에서 느껴보며, 그 사람과 똑같은 형편에 처해보는 구체적인 사랑의 행동입니다.

아이가 아플 때 어머니는 같이 잠 못 이루며 밤을 지새우시는 矜恤의 자애심을 보여줍니다.

▶ 이것이 곧 예수님의 성육신입니다. 그분은 우리와 똑같은 입장이 되어보시려고 연약한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矜恤의 완벽한 표출입니다.

히브리서 2장 17절 "그러므로 그는 모든 점에서 그의 형제자매들과 같아지셔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비롭고 성실한 대제사장이 되심으로써 백성의 죄를 대속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당신의 아픔과 고통에 직접 동참하고 계십니다.

아픈 자의 상처를 사랑의 손으로 싸매 주시고, 눈물을 닦아주시며, 멍든 가슴을 어루만져 주시고, 치료해 주시며, 애절한 심정으로 민망히 여겨주시며 측은히 여겨주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이런 矜恤의 가슴을 품어보라는 것입니다.

▶ 눅 10:30-37에는 이웃에 대한 명쾌한 정의가 내려진 부분입니다. 피해서 다른 길로 내뺀 유대 제사장과 레위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측은히 여기어 다가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선한 사마리아인을 이웃이라고 정의하셨습니다.

▶ 그래서 청교도 설교자 Thomas Watson은 이렇게 정의해주기도 합니다.

"사랑이 애인을 방문하는 친구와 같다면, 矜恤은 병자를 방문하는 의사와 같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향한 애정 때문에 행동하고, 矜恤은 상대방의 필요 때문에 행동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렇게 간단하게 말씀하십니다(마태복음 9:13).

『너희는 가서 내가 矜恤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 세계 제2차 대전이 발발했을 때 프랑스 어느 항공회사의 한 조종사가 자신의 조국 폴란드에 전쟁이 발발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조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미 나치의 치하에 들어있는 오스트리아의 한 호텔에 묵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곳에서 독일 비밀경찰에게 쫓기어 살려달라고 간구하는 한 유대인 젊은이를 만났습니다. 그 당시 나치치하에서 유대인을 구해준다는 것은 생명놀음이나 다름없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이 폴란드인은 고민하다가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라고 생각하고 그를 힘들게 숨겨 해외로 탈출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조국 폴란드로 돌아가서 조국을 위하여 전투 조종사로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가 몰던 전투기가 격추 당하여 영국에 불시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머리 부분에 큰 부상을 당하여 입원하였지만 영국 전역에 그를 수술할만한 군의관이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절박한 시간이 다가오자 공군본부에서 한 민간인 의사를 보내어 그의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었습니다. 그 의사는 폴란드 조종사가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구해준 바로 그 유대인 젊은이였습니다.

폴란드 조종사에 의해서 영국으로 탈출한 그 유대인 젊은이는 늘 폴란드의 비행 중대 소식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이 조종사의 내용을 듣고 자신이 수술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더 감사한 것은 부상을 입은 사람이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어쩌면 자기를 구해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하나의 예감만으로 달려왔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뜻밖의 고통을 당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누군가의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이 필요합니다. 다정한 손으로 붙잡아주는 것이 기다려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눈높이를 조금 만 낮추고 주변을 살펴보면 矜恤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대합시다. 쌀쌀한 눈을 가지고 사람을 보지 맙시다. 예수님은 심판의 눈으로 보지 않고, 사랑과 矜恤의 눈으로 보셨습니다.

3. 나에게 상처를 준 자를 容恕하는 慈愛心입니다

▶ 人種差別이 아주 심할 때 미국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느 백인이 정원에 앉아서 시원한 바람을 쏘이면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 때 지나가던 아메리칸 인디안 한 사람이 마침 배가 고프고 목이 말라서 그의 곁으로 찾아와 "제게 물 한 그릇 줄 수 있겠습니까?"하고 했더니 "없어!" 그러더랍니다.

"그러면 당신이 마시는 맥주라도 한잔만 좀 주시지요" 하니까 "인디안 놈한테 못 줘!" 그랬답니다.

그래서 인디언은 맥없이 떠나갔습니다.

바로 몇 일 후에 그 백인이 사냥개를 데리고 사냥을 하러 나갔다가, 사냥개를 잃어버렸어요. 그리고 길도 잃어버려 조난 당한 채 헤매다가 배가 고프고 목이 말라 쓰러졌어요. 깊은 산중에 쓰러져 있는 그를 이 아메리칸 인디언이 발견하고 자기 집에 데려다 간호해주고 죽을 써주어서 정신을 차리게 됐어요.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보니까 자기가 물을 거절했던 그 인디언 추장이에요. 기가 막혀서 깜짝 놀라니까 그때 그 인디언이 빙그레 웃으면서 하는 말이 "당신이 나에게 한 것처럼 내가 당신에게 했더라면 당신은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것을 矜恤이라고 말합니다.

矜恤이란 당연히 보복을 해야하는데 하지 않는 역동적인 사랑의 마음입니다.

矜恤이란 자기에게 피해를 준 사람을 단호하고 엄격하게 대우하지 않는 慈愛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矜恤의 본질은『容恕』입니다.

이 말씀은 가해자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아니라, 피해자를 위한 幸福론입니다.

내 편에서는 피해를 입었어도 상대편한테는 선행과 사랑을 베풀라는 적극적인 幸福론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矜恤이란 나에게 잘못한 사람에게 단호하고 엄격하게 대우하지 않는 애심을 뜻합니다.

◘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에 헤세드의 慈愛心이 있는 사람의 幸福론을 이렇게 결론지으십니다.

『矜恤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矜恤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

어떤 幸福을 보장하고 계실까요?

① 버클리라고 하는 사람이 "矜恤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를 연합시키고, 矜恤이 여기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를 갈라놓는다" 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가 矜恤히 여기면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됩니다. 그의 마음이 곧 내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흐뭇한 幸福이 있습니다.

내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幸福을 누리십시오.(잠언 11:17).

②矜恤히 여기는 자는 자신의 미래를 보장받습니다.

矜恤이야말로 보증 보험과 같고, 부메랑과 같다고 생각합니다(삼하 22:26).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선언해주십니다(마태복음 6:14).

『너희가 남의 잘못을 容恕해 주면,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容恕해 주실 것이다.』

▶ 셰익스피어도 그의 명작「베니스의 상인」에서 矜恤을 이렇게 아름답게 정의합니다.

"矜恤은 베푸는 자와 받는 자를 다같이 축복한다"

▣ 그런데 오늘날 현대인들은 너무나 무정해졌습니다. 잔혹하고 무자비합니다. 慈愛心이 없습니다.

우리 예수님처럼 영혼을 사랑하는 가슴이 필요합니다.

내 곁에서 힘겹게 고통 당하는 분들을 향해 민망히 여길 수 있는 건강한 가슴이 그립습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나의 容恕가 필요한 사람, 그 사람 이름을 부르며 가슴에 품어 보십시다.

오히려 주님의 마음으로 그분을 사랑해보세요. 당신의 가슴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임할 것입니다

출처 : 목회자의 요람 한서노회
글쓴이 : 일사각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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