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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다스리기(15)-팔복 마음-2(마음 애통)

by 【고동엽】 2022.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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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다스리기(15)-팔복 마음-2(마음 애통)

마5:4

오늘 본문에서 사용되고 있는 哀痛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펜토스"인데, 이 말은 슬픔을 표현하는 말 중에서 가장 강한 단어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눈물과 더불어 터져 나오는 가장 격심한 비통을 뜻합니다. 심장을 꿰뚫는 슬픔이요, 가슴을 부수고, 창자를 끓게 하고, 뼈를 깎는 듯한 哀痛을 말합니다. 꾸밈 없는 속에서 울어 나오는 애통입니다.

▶ 우리 예수님도 평생을 눈물로 哀痛하며 사신 분이셨습니다.

히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 눈물의 사람 세 분을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① 가장 많이 울었던 사람은 다윗입니다

그는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띄우며, 요를 적셨고(시 6:6), 또 그의 눈물이 주야로 음식이 될 만큼 눈물 많은 인생을 살았습니다(시 42:3).

시 102:9-10 나는 재를 양식같이 먹으며 나의 마심에는 눈물을 섞었사오니 이는 주의 분과 노를 인함이라 주께서 나를 드셨다가 던지셨나이다

② 가장 깊이 울었던 사람은 바울입니다

우리가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의 적나라한 진면목을 보게 됩니다. '그는 자기 속에 선한 마음은 있으나, 행동이 따라주지 못하기에 가슴속으로 애태우며 통절하게 눈물짓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마음의 원함과 실제 능력 사이의 심각한 갈등과 모순을 통감하며 울었던 것입니다.

③ 가장 크게 울었던 사람은 베드로입니다

그는 실수가 많기는 했으나, 참 순박한 사람입니다. 참 청순한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얼떨결에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는 곧바로 대문 밖에 나가서 대성통곡하는 청순한 모습을 보여줍니다(눅 22:62).

이처럼 그렇게도 많이 울고, 가슴 아프게 울고, 크게 울었던 사람들이 가장 幸福하게 살았음을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들은 뼈저리게 울었는데도 한량없이 幸福한 삶을 영위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무엇 때문에 마음을 아파하며 哀痛하며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실까요?

1. 죄 때문에 마음으로 哀痛하면 위로를 받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 때문에 울어보셨습니까? 왜 우셨나요?

예수님께서는 영적으로 죄 때문에 진통하는 자가 幸福하다고 강조하십니다. 내 속의 죄성으로 인해 마음 아파하는 자의 幸福을 역설하십니다.

내 마음속에 하나님의 거룩함이 있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없어야 할 죄가 머무르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이 죄가 나를 지배하여 다스리기 때문에 속이 쓰린 것입니다.

욜2:12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哀痛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슥12: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哀痛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哀痛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사22:12 그 날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명하사 통곡하며 애호하며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 하셨거늘

약4: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찌어다

시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6:6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 영국의 신학자요 설교가인 John Stott 목사님은 이런 지적을 합니다. "현대인은 죄에 대한 회심 혐오증에 걸려 있습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강단에서 죄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과, 회개하라는 말을 하는 것을 싫어하는데,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곧 죄입니다.

▶ 어떤 분이 죄에 관하여 이런 도식을 만들었습니다. 소위『죄의 수학』입니다.

더하기 : 죄는 문제를 더한다. 죄 된 방법을 쓰면 점점 더 얽히고 골치 아파진다.

빼기 : 죄는 정력을 뺀다. 죄가 깊어 갈수록 의욕은 빠지고 무력해 진다.

곱하기 : 죄는 그대의 아픔을 곱한다.

나누기 : 죄는 이웃을 나눈다. 죄는 가족까지 쪼갠다. 죄는 친구를 잃게 한다. 죄는 영혼을 찢을 것이다.

한마디로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므로 낙원에서 쫓겨나게 했고, 육체와 영혼을 분리시키므로 죽음이라는 비극을 가져왔습니다.

죄는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죄의 결과는 불행뿐입니다. 죄의 결과는 아픔과 슬픔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죄 때문에 회개의 애통을 하는 것이 절대적이고, 필요적이고, 최선, 행복의 필수 조건입니다.

▶ 다윗이 幸福한 인생을 살 수 있었던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평생 성령 충만하게 살면서 그가 가장 자주 고백하는 표현 중 하나가 이것입니다. "내가 범죄하였다"는 고백입니다. 시편51:3 오 하나님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 속에 본질적인 죄가 잠재하고 있음을 통탄하고 있습니다(시 51:3).

▶ 인간적으로는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세 번씩이나 번복했던 베드로가 인생의 불행을 幸福으로 바꿀 수 있었던 비결이 있었다면 무엇이었겠습니까?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와 통곡이었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죄 없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죄를 회개하는 자, 죄를 哀痛해 하는 자, 죄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자, 죄를 통절히 느끼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계 22:14).

▶ 종교개혁자 루터는 어그스틴 수도원에서/ 죄 때문에 고민하여서 여러번 졸도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날마다 자기의 영혼을 위하여서 슬퍼한 자입니다.

▶ 로마7:24/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라 누가 이 사망의 골짜기에서 나를 건져줄것인가 하면서 자신의 심령을 향하여서 애통을 하였습니다.

▶ 바울 사도는 이런 역설적인 고백을 들려줍니다(롬 5:20).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 죄를 깨달을수록, 아파할수록, 哀痛할수록 은혜가 더욱 충만해진다는 체험적인 고백입니다.

▶ 청교도 시대에 유명한 설교자였던 Thomas Watson은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지 않고는 낙원에 이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시편51:7 하나님은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멸시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라고 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믿음의 영웅들과 교회사에 나타나는 신앙적 거성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죄에 대하여 민감했던 자들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마음 속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통회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 사울 왕에게는 심령의 죄를 깨우치시고 회개케 하시는 성령이 떠나셨기 때문에 비운이 찾아 왔으나, 다윗에게는 성령께서 죄를 뉘우치게 하시는 哀痛하는 마음을 주시므로 幸福을 되찾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죄를 깨닫게 하시는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말아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시 51:11).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수록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됩니다. 성령은 죄에 대하여 깨우치시는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 작가 이범선씨의 수필 "사기당한 과부"에 있는 이야기이다.

평양 대동강변에 "백선행 기념관"이 서있다. 이 건물은 콩나물 장수 할머니 "백선행"씨가 사재를 드려 세운 건물이라 한다. 일생을 콩나물을 팔며 외롭게 살아온 한 할머니의 거룩한 뜻을 살려 사람들은 그 건물의 이름을 "백선행 기념관"이라 정했다는 것이다.

이 할머니에게 어느 날 이웃에 있는 한 토지 거간꾼이 찾아 왔다. 평양교외에 좋은 땅이 있으니 사 두면 좋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한두 번도 아니고 끈질기게 권고하기에 이 할머니는 모아 놓은 돈을 몽땅 그 거간꾼에게 건네주면서 땅을 사기로 했다. 스스로는 현지답사도 하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그만큼 이웃끼리는 믿고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틈을 내어 할머니가 그 땅을 찾아가 보았다. 이 어찌된 일인가? 산은 풀 한 포기없는 돌산이었다. 너무나 실망한 백 할머니는 이웃의 배신에 분하고 원통해서 결딜 수 없었다. 땅이 꺼지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절망 속에 또다시 콩나물 장사를 계속했다. 그야말로 눈물겨운 나날을 보내며 일했다. 세상에 사기 행각을 일삼아도 분수가 있어야지 이 외롭고 불쌍한 노인에게까지 그와 같은 악행을 저지르다니---, 그러던 어느 날 이 거간꾼이 또다시 나타났다.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사람으로 여긴 할머니는 아예 상대하려 하지 않았다. 한번 속지 두 번씩이나 속을 수 없다는 경계심을 품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돌산을 팔라는 것이었다. 좋은 값을 치루어 줄 것인즉 팔라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사기당한 것은 자기만으로 족하지 또 다른 사람까지 손해를 입게 하고 싶지 않았다. 역시 완강히 거절했다. 거간꾼 이웃 아저씨는 포기하지 아니하고 부지런히 들락거리더니 어느 날 원매자를 데리고 왔다. 뜻밖에도 원매자는 일본 사람이었다. 장본인의 간곡한 청을 거절할 수 없어 팔기로 했다. 엄청난 이득을 취한 것이다.

그 돌산은 후일 "오노다 시멘트공장"으로 둔갑했다. 그 돌산은 쓸모없는 잡석산이 아니라 시멘트원료인 석회석 돌산이었다.

할머니는 자신의 소견이 짧아서 이웃의 선량한 복덕방 아저씨를 사기꾼으로 매도했던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죄스럽게 느꼈다. 너무나 후회되고 얼굴을 들고 다닐 용기마저 잃을 지경이었다. 할머니는 죄와 어리석음을 부끄러워하며 참회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할머니는 선량한 이웃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미워하며 저주했던 지난 일을 참회하며 애통하였다. 그리고 그 뜻밖의 재물은 자기 몫이 아니라 생각하고 사회를 위해 바치기로 한 것이다. 그 열매가 "백선행기념관"이다. "자기 죄와 허물로 인하여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다. 그는 위로를 받을 것이다."

할머니가 그 재산을 그대로 자기소유로 여기고 은행에 저축했거나 토지에 투자했었더라면 제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돈은 쓸모없게 되었을 것이고, 땅은 북한의 토지개혁 정책에 의해 몰수되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할머니는 지주라는 죄목으로 인민재판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바친 사회복지관은 오늘도 한작가의 글을 통해 우리들에게 그 이름을 빛내 주고 있다.

"성령이여 강림하사 나를 감화하시고 哀痛하며 회개할 맘 충만하게 합소서

예수여 비오니 나의 기도 들으사 哀痛하며 회개할 맘 충만하게 합소서" (찬 177장)

2. 원한 때문에 마음으로 哀痛하면 위로를 받습니다

1) 자기 연약, 실패의 한을 하나님 앞에서 哀痛해야합니다

심리학자들의 분석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두개의 자아(ego)가 있다고 합니다. "행동을 하는 내가 있고, 그리고 그 행동을 평가하는 내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아도 그리스도인의 심령 속에는 분명히 두개의 자아가 있습니다. "옛사람과 새사람" "성령의 사람과 육체의 사람" "속 사람과 겉 사람" "선한 본성과 악한 본성"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서로 투쟁하며 대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내면 속에서는 성령의 소원과 육체의 소원이 서로 대립하며 투쟁을 합니다. 겉 사람과 속 사람이 날마다 싸웁니다.

▶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이 문제를 적나라하게 서술해 주고 있습니다. 매우 실질적인 문제요, 심각한 현실입니다. 아마도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아무도 이 사실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매우 허심탄회하게 고백합니다

롬 7:15-25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나는 내 속에, 곧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나에게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내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하면, 그것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 속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고,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에다 나를 사로잡는 것을 봅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내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에 복종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의 솔직한 고백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마음은 있으나, 행동이 따라주지 못하고, 마음의 소원은 있으나 뜻대로 되지 않는 내면 세계의 심각한 갈등과 모순을 탄식하는 고백입니다.

겸손해야지 하고 마음먹고 만나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교만해져 버렸습니다. 친절해야지 했는데 매정해 버렸고, 사랑해야지 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는데도 멀리서 보는 순간 벌써 미운 감정이 솟구치고 있음을 절감하며,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잘 참아야지 하고 출근길을 나서는 순간부터 화를 내는 경우가 얼마나 자주 반복됩니까?

오늘 모임에서는 꼭 필요한 말만하도록 침묵을 지켜야 하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하고 참석했는데 돌이켜 보면 다른 때보다 더 말을 많이 하고 말았습니다. 어쩔 때는 내가 죽어야지 하는 그 순간에 벌써 내가 더 팔팔하게 살아서 사탄에게 농간을 당하곤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러한 자기 모순 때문에 영혼의 탄복을 합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나의 원수는 바로 내 속에 있습니다. 싸워야 하고, 이겨야 하고, 정복해야 할 사람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갈등과 투쟁 속에서 자신의 무능함과 무력함에 개탄하는 자가 幸福한 그리스도인입니다.

▶ 어떤 성경학자는 哀痛의 체험이야말로 자신이 깨어지는 체험이라고 정의합니다.

나에게 아픔을 주는 그 사람 때문에 비통해하지 말고, 아직도 나의 자아를 죽이지 못함을 哀痛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지극히 사소한 일에 나 자신을 죽이지 못함을 哀痛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강함 때문에 비통해 하지말고, 나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나의 자존심을

哀痛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사람으로 입은 원한을 하나님 앞에서 哀痛해야 합니다.

▶ 한나의 원한에 맺힌 기도와 주님의 위로

▶ 과부의 원한과 낙심 않은 기도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하나님 앞에 애통으로 털어 놓을 때 하나님은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3. 사명 때문에 마음으로 哀痛하면 위로를 받습니다 .

1) 영혼사랑의 열정 때문에 哀痛할 줄 알아야 합니다.

고후 2:4 내가 큰 환난과 哀痛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세상을 향한 哀痛입니다. 즉, 사랑의 눈물입니다.

▶ 눈물의 선지자인 예레미야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운 것이 아닙니다. 그가 사는 세상을 위한 사명감으로 울었습니다.

렘4:19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나 이는 나의 심령 네가 나팔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

렘 13:17 너희가 이를 듣지 아니하면 나의 심령이 너희 교만을 인하여 은근히 곡할 것이며 여호와의 양 무리가 사로잡힘을 인하여 눈물을 흘려 통곡하리라

애 3:48 처녀 내 백성의 파멸을 인하여 내 눈에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죄로 사무친 세상을 보면서 마음이 아프고, 그리고 조만 간에 멸망될 죄악 된 도성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哀痛함이 있어야 합니다.

현대인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다른 사람의 형편이 어떤지 관심을 가지려 하지 아니합니다. 무관심입니다.

▶ A. 링컨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잔등에 내린 채찍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딱하게 생각한다". 그의 봉사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사랑에서부터입니다.

▶ 몰로카이 섬에서 자신이 문둥병으로 앓으며 문둥병자를 위하여 생을 다한 다미안 신부나, 자신의 부귀영화를 버리고 고통 당하는 흑인을 위하여 평생을 바친 아프리카의 성자로 불리우는 슈바이쳐 박사의 그런 희생은 결국 그 사람들을 보고 哀痛하는 사명감에서 울어나온 것입니다.

▶ 예수님의 눈물을 보십시요. 나사로의 무덤 옆에서, 예루살렘 성의 장래를 생각하시면서 그는 우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재는 바로미터는 우리가 얼마나 이웃을 이해하고 동정하고 사랑했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심판의 기준은 얼마나 많은 업적을 이루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사랑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흘리는 눈물은 약함에서 오는 것이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은 힘의 표시입니다.

이사야 66: 8에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순식간에 나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구로하는 즉시에 그 자민을 순산하였도다"라는 귀절이 있습니다.

이 말은 아직도 영적으로 탄생되지 못한 세계를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만큼 哀痛하며 안타깝게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해산의 고통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 John 낙스와 같은 사람은 "나에게 스코틀렌드를 달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달라"고 했습니다. 조국의 복음화를 각오한 애절한 기도입니다. 그의 이와 같은 哀痛의 결과로 스코틀렌드 교회는 신앙을 회복하게 됩니다.

▶ 우리나라 기독교 초기에 돈키호테적인 인물이 한 분 계셨습니다. 소위 "예수 천당"으로 알려진 최권능 목사님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과 열정적인 전도자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에게 또 하나의 특징이 있었습니다. 그분의 눈에는 항상 눈물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분이 기도를 마치고 나올 때는 언제나 두 뺨에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된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항상 성령 충만하게 사셨던 최권능 목사님은 눈물의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웃을 위하여 여러분들은 얼마나 哀痛하는 기도를 하셨습니까? 나는 기도도하지 아니하며, 그저 이웃의 영혼을 믿음 있는 다른 이들에게 맡겨 버리신 분은 안 계십니까? 우리에게 영혼의 탄생을 위한 哀痛이 있어야 합니다. 복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눈물이 있는 사람입니다. 다른 이를 사랑하는 사람은 幸福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2)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지 않음을 哀痛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거역 당하고, 정의가 패배 하고, 하나님의 뜻이 방해를 받을 때, 통분히 여기는 그것이 哀痛하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죄악 된 세상을 보시고 哀痛해 하신 것과 같습니다. 이 사악한 세상에는 불의한 자가 칭찬을 받고, 존경을 받고, 오히려 선한 사람이 멸시와 천대를 받고 고통을 받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런 현상을 보며 哀痛해 하는 자는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다고 그 시대를 탄식한 것처럼, 슬퍼할 시대를 슬퍼하지 않는다면 그 시대는 분명 불행한 시대입니다.

▶ 다윗의 정의를 위한 눈물

불의한 세상을 바라보면서 비통할 줄 모르는 사람은 참 삶의 의미를 모르고 사는 동물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악의 세력을 볼 때 哀痛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성도와 하나님은 같이 하시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 주님은 이런 놀라운 약속을 보장해주십니다.

『哀痛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

성령님께서 곁에 오셔서 힘과 위로를 주신다는 뜻입니다(롬 15:13).

위로 = ‘파라클레쎄손타이’, 마라톤 선수가 숨을 헉헉거리며 달릴 때 누군가가 옆에 가서 함께 달려주며 물병도 주고, 힘을 북돋아줄 때 쓰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순간마다 내 속에 있는 죄성을 아파하며 탄식할수록 위로의 성령님께서 곁에 오셔서 쓰다듬어주실 줄 믿습니다. 성령님은 위로의 영이십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참회록에서 이런 체험을 들려줍니다. "나는 죄를 깨달을수록 점점 더 비참해졌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주님은 나에게 점점 더 가까이 다가 오셨습니다."

출처 : 목회자의 요람 한서노회
글쓴이 : 일사각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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