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시 32:1-11)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의 첫 머리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묻지 말라,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냐고! 그것은 너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울려지는 것이기에...' 그런데 마치 이러한 내용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 다윗의 생애 가운데 나타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암몬족속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 출신 우리아가 죽었습니다. 그의 시체가 성안으로 들어오고 있을 때, 울린 조공에 대하여 다윗은 슬퍼하기는커녕 은근히 기뻐하며 그의 첩 밧세바를 위해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묻지 마라,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냐고? 그것은 너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울려지는 것이기에...' 그리고 축배를 들며 '바보 같은 녀석, 내가 죽였나? 암몬 족속이 죽였지'라며 억지로 자위하며 태연자약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실로 임금의 권력을 이용하여 엄청난 죄를 저지르고 백성을 우롱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삼하11장 이하에 그 다윗의 범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번 간추려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느 날 오후 다윗 왕은 낮잠을 잔 후 왕궁 발코니에 올라가서 바람을 쏘이다가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때 그는 문득 한 젊고 아리따운 여인이 우물가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그만 유혹에 끌리고만 다윗은 신하를 보내 그 여인의 신분을 알아보게 했습니다. 그리고 곧 그녀가 전쟁터에 나가 나라를 위해 싸우고 있는 군인 우리아의 아내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정도 알았으면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을 돌려야 할 임금이 정욕을 이기지 못해 그 여인을 은밀히 불러들여 침실로 유인해서는 불륜의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임금의 권력을 남용한 것 자체가 한심스러운 일이거니와 높은 사람이라면 무슨 요구라도 따르는 밧세바라는 여인 또한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어쨌든 일은 이미 벌어졌는데 그대로 끝났으면 좋았으련만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밧세바라는 여인이 사람을 보내 임금의 아이를 잉태했음을 알려온 것입니다. 한번 죄를 짓게 되면 그 죄를 은폐하기 위해 더 큰 죄를 짓게 마련입니다. 왕은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하여 급히 전쟁터에 있는 우리아를 불러 들렸습니다. 그리고는 전쟁터에서 고생이 많았으니 집에서 며칠 쉬라는 명을 내립니다.
그러나 우리아의 대답은 임금의 계획을 허사로 만듭니다. 삼하11:11절 "우리아가 다윗에게 고하되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영채 가운데 유하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신복들이 바깥 들에 유진하였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치 아니하기로 왕의 사심과 왕의 혼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나이다" 우리아는 집에 돌아가지 않고 왕궁 뜰에서 노숙하며 전쟁 중에 있는 동료들의 고생에 동참했습니다. 이 얼마나 진실한 충신입니까?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왕은 제2의 흉계를 세웠습니다. 술을 잔뜩 먹여 취하게 하고 집에 들어가 자도록 하여 그 부인의 임신을 커버하려는 계산이었습니다. 그리나 또 집에 가지 않고 왕궁 문에서 잡니다. 그것도 실패로 돌아가자 또 제 3의 흉계로 우리아를 아예 죽여 없애려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왕은 우리아를 통해 전쟁터에 있는 요압이란 대장에게 편지를 써 보냅니다. 내용인즉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저로 맞아 죽게 하라(삼하11:15)'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자를 맹렬한 싸움 맨 앞에 두어 죽게 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래서 요압이 명령대로 해서 이 우리아는 맹렬한 전쟁 맨 앞에 서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싸우다가 전사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다윗과 요압이 짜고 한 것입니다.
그때 동료들이 슬퍼하자 왕은 '이 일로 걱정하지 말라,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죽이느니라!'고 하면서 그의 죽음이 마치 남의 일인 양 태연스럽게 행동했습니다. 그리고 얼씨구 좋다 밧세바를 왕궁으로 불러 첩으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행위는 하나님 앞에 악한 것이었으며(삼하11:27) 백성을 사이에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널리 소문이 퍼져 나갔습니다.
다윗은 나라의 지도자로써의 신의를 잃어버리게 되었으며 백성들의 원성은 나날이 고조되었습니다. 그러나 누구하나 감히 왕 앞에 나가 왕의 잘못을 지적하지 못했습니다. 한번 죄악에 빠지게 되자 다윗 왕은 신령한 눈을 상실하고 사리분별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된 채 권위와 권력의 아성에만 사로잡히게 되었으며, 밧세바의 치맛자락만 잡고 희희낙락하는 생활만 즐기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칭찬까지 들었던 그렇게 높은 신앙의 경지에 있던 사람이 '그렇게 쉽게 타락할 수 있을까?'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①자기 직무에 태만했기 때문입니다.
죄는 자기 직무에 태만한 사람에게서 기회를 찾고 접근하게 됩니다. 삼하11:1절 '해가 돌아와서 왕들의 출전할 때가 되매' 여기에 때는 이스라엘과 암몬과의 전쟁 때였습니다. 암몬이 그들의 도성 '랍바'라는 곳으로 쫓겨가서 끈질긴 저항으로 이스라엘과 교전하고 있을 때입니다. 당시 전황을 보면 이스라엘의 요압 장군이 이끈 군대가 적군의 성을 완전히 포위하고 있어 유리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다윗은 자신은 출전하지 않고 요압과 부하들만 내 보낸 것입니다. 자기가 나갈 전쟁에, 즉 '왕들의 전쟁'이었는데 자기 대신 장군을 보내놓고 그는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위기였습니다.
②한가한 시간 때문이었습니다.
삼하11:2절 '저녁때에 다윗이 그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이것은 다윗의 한가했던 시간을 말해주는 말로 부하들은 전쟁에 나가있는데 왕은 낮잠 자고 있다가 무료해서 저녁때에 일어나 왕궁 지붕을 산책하는 장면입니다.
고여 있는 물은 썩기 마련입니다. 한가한 시간은 사탄의 기회가 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시간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남는 시간이 주님 앞에 없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한가한 시간, 이것은 뜻하지 않은 태풍을 내 인생에 몰고 옵니다. 열심히 일할 때는 범죄하지 않습니다. 한가하고 여유가 생길 때 우리에게 다가오는 죄의 유혹하는 발자국 소리를 듣게 됩니다. 한가함, 이것이 다윗에게서 성취감과 더불어 넘기기 어려운 위기였습니다.
③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2절에 이어지는 말씀에 보면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그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범죄는 두 가지 경로를 통해 들어옵니다. '보는 것'과 '듣는 것'입니다. 다윗은 한가한 시간에 왕궁의 지붕 위를 거닐다가 목욕하고 있는 여인을 보고 음욕이 생겨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시골에서 나단 선지자가 다윗 왕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다윗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한 마을에 양과 소가 참으로 많은 어느 부자가 자기에게 찾아온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가난한 어느 농부의 한 마리밖에 없는 양을 빼앗아 자기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왕이여 당신 같으면 그 사람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그러자 다윗은 그래도 한가락의 양심은 남아 있었는지 '그런 사람이 있다니 죽어야 마땅하지, 그로 하여금 당장 4배나 갚아 주도록 하라'고 버럭 큰소리쳤습니다. 그때 나단 선지자가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지적하며 다윗 왕은 호되게 견책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목동인 당신을 왕이 되게 하시고 이스라엘의 권세를 한 손에 거머쥐게 해 주셨는데 무엇이 부족해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하나밖에 없는 아내를 빼앗았는가?'하고 호되게 책망했습니다. 삼하12:9절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권력자들에게는 듣기 싫다하더라도 옆에서 바른 말을 해주고 견책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또 권력자 역시 그러한 꾸중을 겸손하게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한 사람의 위대한 인격은 '성공했을 때보다 실패했을 때, 칭찬보다 책망을 들을 때' 더 두드러지게 돋보이는 법입니다.
▶나단의 견책을 받은 다윗의 반응은 무엇인가?
삼하12:13절에 보면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다윗이 솔직하게 변명 없이 자기의 죄를 시인하는 말입니다. 이때부터 다윗은 죄악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였고, 결국에는 시32편/6편/38편/51편/102편/130편/143편, 이 일곱 편은 다윗의 위대한 회개의 시라고 부릅니다. 특별히 사순절 기간에 많이 읽는 시편입니다. /할/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의 잘못을 보고 배우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남의 잘못을 보고 배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기 난로가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것에 덴 사람을 보고 '저것은 만져서는 안 되는 물건이로구나!' 라는 교훈을 얻는 반면, 어리석은 사람은 그것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고 결국 자기도 그것에 데고 혼이 난 다음에야 거기에 손을 안 댄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여러 사람들의 실수가 나옵니다. 그것을 보고도 자기도 똑같은 실수를 하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교훈 삼아 실수 안 하는 사람 있습니다. 누가 지혜로운 사람이고 누가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를 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말씀, 다시 말해서 지혜롭게 살도록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말씀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해야 할 것을 배우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배워야 합니다. /아멘!/
▶이런 다윗이 범죄를 통해서 우리가 몇 가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①사람은 누구도 범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도소에 선교하는 목사님들이 죄수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해 보면 어쩌면 그렇게 한결같이 순진하고 착하고 또 잘 생긴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죄를 지을 수 있을까 생각할 때가 많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다윗을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 같은 사람이 어떻게 그런 죄를 지을 수 있을까? 그러나 성경은 그도 죄를 지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오늘 우리도 얼마든지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성경은 '섰다고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하고 계십니다. /믿/
우리가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알고, 기도를 많이 하며, 구제도 많이 하고 이런 저런 봉사를 많이 한다 해도 죄에서 면제된 것은 아닙니다. 죄는 누구에게도 찾아 올 수 있습니다. 누구도 넘어뜨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죄와 싸우는 일입니다.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우리의 죄 성은 남자의 수염과 같다. 아침에 그것을 깎지만, 그래서 깨끗하게 보이지만, 그 다음날이면 또 자란다. 그래서 매일 아침 깎아야 한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의 죄와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지만 그러나 죄 성은 계속 우리 속에 남아 있어서 매일 자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그 죄 성을 다스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날마다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삶을 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할/ 우리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살아야 합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본시 유명한 깡패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고 새 사람이 되기로 작정하고 난 뒤에 자기를 아는 사람들에게 부고 장을 돌렸습니다.
'여러분, 과거의 김익두는 죽었습니다. 이제 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김익두입니다. 그동안의 저의 잘못을 진심으로 사죄합니다.'
뒤에 그는 신학교에 들어가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목사가 되고 난 뒤에도 이따금씩 과거의 깡패기질이 불쑥불쑥 되살아나려고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자기 자신을 향해서 이렇게 호통 쳤습니다. '죽은 김익두야!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아직 울려 퍼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너는 왜 벌써부터 되살아나려고 하느냐? 아직은 때가 아니다. 더 죽어 있어라' 그러면서 그는 끓어오르는 혈기를 삭였다고 합니다.
②죄는 점점 더 커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이자 돈 써 보신 분들은 아시지요. 나중에는 원금보다 이자가 더 커져서 결국은 파산하고 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죄도 가만히 놔두면 눈덩이처럼 커집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여자에 대한 성적 욕망이 나중에는 남편이 있는 여인을 탐내게 되었고 급기야는 그와 간음하게까지 되었습니다. 그것이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 남편을 속이게 되었고 결국에는 자기의 충신을 죽이게까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순식간에 십계명을 네 개나 범하게 되었습니다.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제10계명을 범하게 되었고, '거짓증거하지 말라'는 제9계명을 범하게 되었으며, '간음하지 말라'는 제7계명을 범하게 되었고, '살인하지 말라'는 제6계명을 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죄는 작을 때 빨리 청산해야 합니다. 행여나 무슨 죄 속에 짜져 있습니까? 더 커지기 전에 빨리 자복하고 회개하는 길이 살길입니다. /믿/
③죄는 숨길 수 없음을 가르쳐 줍니다.
삼하11:27절(하)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사람들의 눈은 피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눈은 속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늘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즉 신전의식입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이런 죄를 피할 수 있고 이길 수가 있습니다. /믿/아멘!/
▶오늘 본문의 표제를 보면 '다윗의 마스길'이라고 했는데 마스길이란 말은 교훈이라는 말입니다. 이 사건이 '너희에게 교훈이 되리라'는 권면입니다. /할/
다윗은 본문에서 '죄가 얼마나 심각한 아픔을 가져오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마음속에 죄를 품고 있을 때의 고통을 '뼈가 쇠한다'고 고백합니다. 3절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여기 '뼈가 쇠하였다'는 말을 다른 번역에서는 '닳아서 없어졌다'라고 했습니다. 죄는 우리 영혼으로 하여금 종일토록 신음하게 하여 마지막에는 닳아 없어지듯이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입니다. 또 4절 후반부를 보면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 '진액'이란 양분이나 힘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세상을 살 인생 에너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죄는 그 진액이 여름 가물에 바싹 마르듯이 말라 버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죄는 생명 에너지를 고갈시켜 창조적 인생을 살지 못하게 만듭니다. 죄에 사로잡히면 아름다운 것을 창출할 힘을 잃게 됩니다. 세상을 건설적으로 살지 못하게 하고, 살고 싶은 생각마저 없어지게 합니다.
▶이처럼 죄가 엄청난 고통을 가져오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4절에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성경에서 하나님의 손은 두 가지 정반대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를 쓰다듬으시는 사랑의 손'입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이 지쳐 있을 때 그를 어루만지셨습니다. 예수께서 소경의 눈을 어루만지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을 쓰다듬으셨습니다. 이런 사랑의 손길이 우리에게 임하시길 기원합니다. /할/
그런데 때로 하나님의 손은 무서운 심판의 손이 되기도 합니다. 출7:4절을 보면 '바로가 너희를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더하여 여러 큰 재앙을 내리고' 이 때 하나님의 손은 채찍을 들고 계시는 무서운 손입니다. 다윗은 본문에서 바로 그 무서운 하나님의 손이 죄를 지은 자신을 누르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기름이라도 짜려는 것처럼 꽉 누르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낮과 밤이 없습니다. '주야로' 누르신다고 했습니다. 이게 바로 죄로 인한 행복의 파괴입니다. 죄를 품은 사람은 낮에도 밤에도 눌린 삶을 살게 됩니다.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1-2절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여기에 보면 죄 사함의 성격을 나타내는 단어가 셋이 있습니다. '사함, 가리움, 정죄를 당치않음'입니다. 무슨 말씀인가?
⑴사함: 이것은 율법과의 관계에서 죄의 용서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죄는 우리의 회개를 근거로 해서 사함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께 회개하면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이 취소되고 우리의 모든 죄는 무효가 됩니다.
⑵가리움: 이 말씀은 벌거벗은 몸의 수치가 보이지 않도록 가리우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어떠한 죄도 문제삼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죄가 용서될 때, 범죄로 인하여 수치스러운 우리의 모습을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으로 가리어집니다. /할/
⑶정죄를 당치 않음: 죄의 결과를 죄인에게 책임 지우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죄 사함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요일1:9절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할/
▶3-4절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본문에서 다윗의 새로운 면모와 신앙을 엿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저지른 죄악에 대하여 무척 괴로워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배울 점이 바로 이점입니다. '자신의 저지른 죄악에 대하여 무척 괴로워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
▶사람의 본능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 중 강렬한 본능 중에 하나가 자기 보호 본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이 노출되는 경우 세 가지 반응을 보이기 쉽습니다.
①죄를 숨겨 덮어 버리려고 합니다.
②핑계를 대거나 변명을 합니다. 즉 책임 회피하거나 모호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③합리화, 정상화를 시키려고 합니다. 이를테면 다윗과 같은 경우 '내가 그래도 일 국의 왕인데 그 정도야 뭐!'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자신의 잘못이 지적되었을 때 '하나님의 손이 나를 짓누르는 것 같도다. 내 뼈가 쉬하여지고 내 진액이 여름 가뭄의 마름 같이 되었도다.'라고 고백하며 무척 괴로워했습니다. 그는 또 시51:3절에서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회개란 죄의 고백과 새롭게 살려고 하는 의지를 말합니다. 회개하기 전에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가 있습니다.
①경건한 근심을 해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의 근심은 죄에 대한 근심보다는 죄를 지은 자신의 자존심 때문에 고통스러워합니다. 근본적인 죄의 문제를 생각하기보다는 자기의 실수로 인하여 자신의 명예가 손상된 것을 슬퍼하고 권위가 실추된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그러나 경건한 근심은 참으로 죄를 미워하고 죄지은 자신의 연약함을 미워하고 하나님의 거룩에 동참치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근신함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합니다. /아멘!/
②하나님의 손길에 민감해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주님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실제로 죄지은 자는 담대해질 수가 없습니다. 다윗의 위대한 점을 그는 자신의 죄를 자각하고 즉시 회개한 사람이라는데 있습니다. /아멘!/
사울은 다윗과 같은 큰 죄를 짓지 않았으나 그는 회개할 줄을 몰랐고, 가롯유다의 실수는 회개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보다도 더 죄를 미워하시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지 회개를 요청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오십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를 더 사랑하시고 접근하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날을 일컬어 기계화 시대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생활방법 뿐 아니라 사회도 기계화되어가고 있습니다. 기계는 잘못되거나 고장이 나면 제품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고치거나 새것으로 교체하면 그만입니다. 사회도 기계처럼 책임감이 없어져 가고 있습니다. 기계처럼 괴로움이 없어져가고 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제도만 고치고, 사람만 바꾸면 되는 것으로 생각들을 하는 것이 그 단적인 증거입니다.
책임질 줄 모르는 사회, 오늘날 우리나라 정치사도 그렇습니다. 수많은 사건, 사고 앞에 책임지고, 국민 앞에 솔직히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중심에 통회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 들어있는 산상보훈에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들도 죄를 바라보고 애통하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다윗은 죄를 지었지만 그 죄를 애통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애통하는 자를 위로해 주십니다. /할/
▶하나님은 자기 죄악을 솔직히 고백하는 자의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악을 솔직히 고백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죄를 범한 후 잘못되었다는 느낌이나 고민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자기의 죄에 대한 솔직한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5절을 보세요!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
회개는 먼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실 준비가 다 되어 있습니다. 범죄한 아담은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을 죄에 대한 아담의 변명을 들으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의 죄의 고백을 듣고 죄의 불안과 공포에서 떨고 있는 그를 용서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사1:18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아멘!/
여러분!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의 죄를 범함에 대하여 복수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채찍에 맞고 가시에 찔리고 대못을 받으면서도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하신 주님의 모습이 죄인들의 회개를 요청하시는 하나님의 참모습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세상의 물질, 권력, 명예'는 다 버리고 갑니다. 그뿐 아니라 부모, 형제, 자식까지 다 버리고 갑니다 만은 믿음만은 하늘나라까지 가지고 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값진 보내는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들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할/
'여호와께 자복하리라'고 말한 것은 자기의 죄에 대하여 인정한다는 것이며 더 이상 하나님 앞에 죄를 숨기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 의지의 표현은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가?
①생활방식이 달라져야 합니다. 이제까지는 죄를 숨기는 삶이었으나 이제부터는 하나님께 숨김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숨기면 하나님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자로 끝나버립니다. 똑같은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자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는 자입니다. /아멘!/
②완전한 용서를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순간적인 죄에 대해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나약함까지도 용서하십니다. 과거의 죄는 물론 미래의 죄까지도 다 용서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생활 속에 용서받은 삶을 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은 잘못이 지적되었을 때 임금으로서의 체면과 위신을 다 제쳐놓고 솔직히 자신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습니다. 내 허물을 하나님께 자복하리라' 헤롯왕은 자기의 죄를 지적하는 세례요한의 목을 잘랐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 죄를 지적하는 나단 선지자 앞에서 회개했습니다. 보통 회개가 아닙니다. 펑펑 흘리는 눈물은 침상을 적시고 남을 정도의 눈물이었습니다. 다윗의 회개 시51:11절에 보면 그의 간절한 기도가 나옵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 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다윗은 '성령만은 거두지 말아달라'고 회개했습니다.
▶그 결과 다윗은 일생동안 다시는 간음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죽을 때까지 간음죄를 짓지 않았다는 말이 성경에 있을까요?
왕상1:1-4절에 보면 '다윗 왕이 나이 많아 늙으니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아니 한 지라. 그 신복들이 왕께 고하되 우리 주왕을 위하여 젊은 처녀 하나를 구하여 저로 왕을 모셔 봉양하고 왕의 품에 누워 우리 주왕으로 따뜻하게 하리이다 하고 이스라엘 사방 경내에 아리따운 동녀를 구하다가 수넴 여자 아비삭을 얻어 왕께 데려 왔으니 이 동녀는 심히 아리따운 자라. 저가 왕을 모셔 봉양하며 수종하였으나 왕이 더불어 동침하지 아니 하였더라'
신하들은 다윗을 위하여 장례식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에 결혼식을 준비했습니다. 벌써 다윗 왕 시대에 미스 이스라엘 선발대회가 있었습니다. 미스 이스라엘 진(眞)으로 선발된 아비삭과 다윗은 같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죽기까지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다윗 왕은 하루에 7번씩 찬양하며 하루에 3번씩 기도하며 살았습니다. 왕이 하루에 3번씩 기도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했습니다.
시55:17절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또 다윗은 하루에 7번씩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시119:164절 "주의 의로운 규례를 인하여 내가 하루 일곱 번 씩 주를 찬양하나이다." /할/ 이렇게 다윗은 회개하고 난 뒤에 위대한 신앙의 승리자로 살았습니다. /아멘!/
삼하23:5절에 보면 회개한 다윗은 그의 말년에 이런 고백을 남깁니다.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케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 이 말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책망하고 징계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맺어진 영원한 언약은 하나님이 이루어 주실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할/
그렇습니다. 솔직히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자복한 다윗은 '용서받은 확신 속에 더 큰 기쁨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아멘!/
'주께서 내 죄를 사하셨나이다.' /할/ 우리의 죄도 사해주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용서와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참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절대로 정죄함이 없다고 바울은 강조했습니다.
다윗은 용서받은 자는 참으로 복되다고 1절에서 고백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아버지께 돌아온 탕자는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아버지는 탕자가 돌아온 기쁨을 혼자 누리길 원치 아니하고 이웃과 함께 누렸습니다. 주님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았을 때 천하를 얻은 것보다 귀하다고 하셨습니다. 사함 받은 성도는 귀한 존재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
▶이제 본문 10-11절에서는 악인에게 대하여, 의인들에 할 일에 대하여 가르칩니다.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 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①성경에서 말하는 악인은 육에 속한 자를 말합니다. 이 육에 속한 자는 언제나 당 짓기를 즐겨하며 악을 행하기를 기뻐한다고 잠2:14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불의와 추악 그리고 악의가 가득하여 많은 사람에게 해를 입히며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또한 악인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자들입니다.
많은 사람 가운데 우리가 예수 믿게 된 것 감사하기 바랍니다. 부자와 나사로에서 우리는 천국과 지옥을 잘 보았습니다. 부자는 이생에서는 가진 자 같았으나 인생 칠십 끝나면서 그는 많은 고통과 슬픔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여러분! 이 슬픔은 현재 우리가 당하는 일반적인 슬픔이 아닌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지옥의 형벌임을 알아야 합니다.
②오늘 의인들인 저와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즐겁게 해 드리라'는 권면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은 믿음 안에서 열심히 하늘나라를 섬기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행복한 교회 성도들의 헌신을 보시고 우리 주님은 기쁨을 받으십니다. 이 헌신 속에 2009년이 깜짝 놀랄 은혜의 해가 될 줄 믿습니다. /아멘!/
모이기에 힘써서 주님을 예배하고 흩어지면 주의 복음을 전하는 것, 이것을 우리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면 오늘 본문의 주인공 다윗처럼 큰복을 받을 줄 믿습니다. 다윗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큰 축복을 받은 자입니다. 즉 양치는 목동에서 왕으로까지 성공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을 구한 용장이었고, 아울러 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든 위대한 성군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시와 찬미가를 쓴 경건한 신앙인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자리에 모인 성도들 다 다윗과 같은 믿음의 축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
▶우리들도 회개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①회개하지 않는 신앙생활을 회개해야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회개의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죄의 지적보다는 듣기 좋은 말만 들으려고 합니다. 남의 잘못은 잘 지적해도 자신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회개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사실 다윗도 나단 선지자가 올 때까지 죄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나단 선지자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그의 죄를 깨우쳐줄 때, 그때서야 다윗은 회개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매일 회개의 자리에 나아가야 할 이유입니다. 우리의 무뎌진 마음은 죄를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의 어두운 눈은 죄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는 쉴 새 없이 죄의 담을 높여갑니다. 알고 범죄하고, 모르고도 범죄를 합니다. 생각으로, 눈으로, 입으로, 귀로도 죄를 짓습니다. 손과 발로도 범죄 합니다. 이렇게 죄의 늪에 빠져들면서도 안전하다고 착각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회개 없는 신앙, 회개 없는 기도, 회개 없는 삶은 가짜이고, 죽은 신앙입니다. /할/
②용서하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온 인류를 용서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어떠한 사람이라도 용납하셨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용서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용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주님은 주기도문으로 가르쳐주십니다(마6:12). 만약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마6:15). 우리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입니다.
③희생봉사 안 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봉사는 사랑의 표현이고, 행위입니다. 봉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희생봉사가 행복입니다. 사랑하는 연인들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시간을 뺏기는 데도 좋아합니다. 물질을 사용하는 것도 기뻐합니다. '어떻게 하면 더 해줄까'를 고민합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라헬을 아내로 삼기 위해서 7년을 하루같이 봉사했습니다. /믿/
④무관심한 것도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무관심 한 것도, 교회 앞에 무관심 한 것도, 부모에 대하여, 형제에 대하여 무관심 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내 이웃의 영혼에 대하여 무관심 한 것을 우리는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무관심은 상대방을 아프게 하는 가장 예의 바르고도 잔인한 방법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관심은 영혼의 에이즈이고, 사회의 암입니다. 이 사회가 병들어 가는 것은 무관심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요13:34). 벧전4:8절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할/
철학자인 파스칼은 그가 쓴 '팡세'에서 '인간은 천사도 아니거니와 짐승도 아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인간들은 천사처럼 살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짐승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짐승처럼, 그것도 가장 사악하고 더러운 짐승처럼 살아가고 있다. 여기에 문제가 있고 고민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요 며칠 전에 의정부의 한 여인이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자식들을 목 졸라 죽인 사건을 기억합니다. 짐승도 자기 새끼는 죽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유대교에서는 사함 받을 수 없는 죄가 있다고 합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 두 가지만 말씀드리면 하나가 '회개하지 않는 것'이고, 또 하나는 '회개하고 같은 죄를 계속 반복하는 것' 그러니까 회개하고 또 죄짓고 또 죄짓고. 개가 토했던 것을 다시 먹는 것처럼 늘 회개하며 늘 같은 죄를 반복하는 이러한 죄는 영영 사함 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왜? 열매 없는 회개는 회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⑤우리가 살길은 오늘 다윗처럼 '내가 죄인입니다' 하고 무조건 회개하면 우리가 살 길이 열립니다.
기독교는 회개를 중요하게 여기는 종교입니다. '회개하라'는 말은 세례 요한의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마3:2). 또 예수님의 첫 번째 메시지이기도 합니다(마4:17). /할/
회개 없이는 죄를 사함 받지 못하고 죄를 사함 받지 못하면 구원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회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회개의 의미는 히브리어로 '슈브' 인데 '돌아가다. 돌이키다'이며 헬라어로는 '메타노에오'인데 이 말의 뜻은 '마음을 고치다. 방향을 전환하다'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란 말은 '마음을 고쳐먹고 고쳐먹은 마음을 행동에 옮겨 죄의 자리에서 방향을 전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해가 되시면 아멘!/할/
시1:1절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여기서 진정한 회개는 악인의 자리와 죄인의 길과 오만한 자의 자리에서 방향을 전환하여 의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믿/
▶하나님은 심판하시기 전 충분히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조급하지 않으시고 충분히 기다려 주십니다. 창7-8장에 보면,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물로 심판하셨는데 심판하시기 전 120년이라는 긴 세월의 회개의 유예기회를 주셨습니다. 노아의 온 가족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를 만들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끝까지 하나님께 돌아와서 회개를 하지 않았으므로 온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선민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연구하여 보면 북 왕국에게 회개를 할 기회를 주셨지만 끝까지 회개를 하지 않자 앗수르를 들어 기원전 722년에 전쟁으로 심판을 하셨고, 남 왕국에게도 수 없이 회개할 기회를 주셨지만 끝까지 회개를 하지 않자 기원전 586년에 바벨론을 들어 전쟁으로 징계를 하셨습니다.
인간은 다 죄인인데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고 구원을 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만 오면, 모든 죄를 사함 받아 구원을 받으며 성령을 선물로 받으며 하나님과의 막힌 담이 허물어집니다.
행2:38절에 보면, 회개를 하면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잠28:13절에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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