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정직한 영을! (시 51:10-12)
신앙 생활의 목적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기 위해서입니다. 왜 은혜를 입어야 하느냐 하면 우리가 무능하고 부족해서입니다.
우리에게는 스스로 구원받을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지혜가 부족해서 내일을 알 수가 없고, 더군다나 우리의 종말도, 운명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내일 우리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도 모르고 살아갈 뿐입니다.
무능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입고 지혜를 얻고 은총을 입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이렇게 은혜를 입으려면 몇 자기 할 일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성경을 읽는 일입니다.
성경을 읽고 깊이 아는 일이 중요합니다. 읽되 많이 읽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길이 있고, 해답이 있고, 종말이 있고,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위인들을 보면 대부분 성경을 통해서 변화를 받았습니다. 위인들의 정신 속에는 성경이 주는 감화가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는 데는 하나의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말씀을 읽되 그냥 죽 읽어 가는 것이 나리라 반드시 이 말씀이 지금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있느냐를 생각하며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지금 나에게, 나의 환경에, 이 사회에, 오늘의 정치 상황에,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느냐를 생각하면서 읽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냥 생각 없이 많이 읽으려고 읽어 가면 이 성경은 삼국지나 역사책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많이 읽었어도 변화를 받지 못하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는 반드시 이것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이 말씀이 오늘 나에게, 오늘 내가 처한 환경에, 어떤 의미와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는가를 생각하며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을 때는 소리를 내어 읽는 것이 좋습니다. 글방에서 글을 읽을 때 소리내어 읽는 이치와 같습니다. 그렇게 하면 주의가 집중이 되고 스스로 암시를 받게 되어서 암기하기에 좋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독을 해야 합니다. 많이 읽는 것보다 한 구정, 한 구절의 뜻을 새겨가며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 속에서 뜻을 발견해 내고, 교훈을 찾아내고, 이 말씀이 내 처지에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는가를 알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처음부터 차례대로 읽어 가는 것이 좋습니다. 성경은 순서대로 엮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연대적으로, 같은 종류의 책끼리, 엮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읽어 가는 것이 순리입니다. 이를테면 여기 읽다가 재미가 없다고 다른 데를 읽고 하면 좋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이런 결과가 옵니다.
어떤 사람이 모처럼 성경을 읽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읽기 쉬운 신약성경부터 읽으려고 마태복음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의 서두 일장은 읽기가 어렵고 재미가 없습니다. 사람 낳은 이야기와 읽기에 까다로운 족보를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재미가 없다고 다른 곳을 펼쳤더니 마태복음 18:6절에 눈길이 갔습니다. 그 말씀은 "목에 맷돌을 메고 바다에 가서 빠져 죽으라"는 말씀입니다.
기분이 나빠서 다른 곳을 펼치니까 야고보서 4:17절에 눈이 갔습니다. 그 말씀은 "알았으면 실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신약성경이라서 그런가 하고 구약성경을 펼쳐 보니 이번에는 시편 119:60절에 눈길이 멈춥니다. 거기에는 "마음에 한번 작정한 일이 있으면 빨리 실행할수록 좋다."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읽되 변변치 못하게 읽거나 뜻 없이 읽으면 이런 우스운 결과도 나올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은총을 입어야 합니다. 어항 속의 금붕어가 산소를 공급받아야 살 수 있듯이, 새장 속의 새가 먹이를 공급받아야 살아갈 수 있듯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어야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은혜를 입으려면 성경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말씀 속에서 능력을 공급받게 됩니다. 지혜를 공급받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운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됩니다.
두 번째는 순수함을 지니는 일입니다.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이 말씀의 정한 마음은 순결한 마음, 깨끗한 영을 지닌 마음을 말합니다. 사람이 가장 인간다울 때가 언제냐 하면 순결한 마음을 지니고 있을 때입니다. 옛 성현들은 이것을 최고의 이상으로 여겼습니다. 옛 신앙 인들도 이런 생활을 최고의 가치로 인식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면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은총을 입으려면 이렇게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깨끗한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는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을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이렇게 깨끗하면 내 마음은 하나님이 주관하시게 됩니다. 그러면 내 생각, 내 판단, 내 생활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지배를 받게 됩니다. 이 상태를 가리켜서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은혜가 충만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신앙의 순수성을 상실하게 되면 내 마음속에서는 빛이 없어집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 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내 속은 "나"라고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본능적인 나"만 득실거릴 뿐입니다.
그때는 나의 본성이 나를 지배하게 되고, 욕망에 사로잡힌 욕망의 내가, 나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의 어두움과 결탁하게 되고, 세상의 불의와 결탁하게 되고, 욕망에 사로잡힌 나의 모습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이 악하게 되고, 포악해지고, 사람이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짓을 서슴지 않고 행하는 단계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얼마나 사악해졌습니까?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잠자는 남편을 아내가 목을 졸라 죽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모두 순수한 마음을 상실해서 그렇습니다.
이제는 농촌의 농부들까지 순수성을 상실해 가고 있습니다. 채소를 심어서 도시인들에게 비싸게 팔기 위해서 운반해 가는 채소에 농약을 살짝 살포합니다. 그러면 채소는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싱싱한 채 그대로 있습니다. 그 채소를 먹고 탈이 날 것쯤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돈만 많이 받으면 됩니다.
그래서 도시인들은 아예 농약을 치지 않은 벌레 먹은 채소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이번에는 사람들이 채소 벌레만을 일부러 키워서 채소 위에 뿌려 놓습니다. 그러고는 그것이 무공해 채소라고 속여 팔아먹습니다.
이 사람들이 원래는 안 그랬습니다. 원래 농심은 욕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인심도 좋았고 순수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순수한 마음들이 병이 들기 시작했고 마음이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마음의 길이 막히게 되었고 서로가 대화를 해도 진정한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정상적인 신뢰 관계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마음의 길이 막혔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마음의 길이 막히게 되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나 관계도 막히게 되는데 하물며 하나님과의 대화나 관계가 정상화가 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은총을 입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본문에서 간구하기를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하고 기도했습니다. 이 마음이 없이는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세 번째는 꾸준한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은총을 입으려면 꾸준한 신앙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12절에서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소서."하고 탄원했습니다. 이 말은 내게서 구원의 즐거움이 끊어졌다는 말입니다.
왜 끊어졌느냐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이탈을 해서 그렇습니다. 그 이탈이 자의든 타의든 한번 이탈을 하게 되면 구원의 즐거움은 단절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 안에 살게 될 때에는 즐거움이 유지되고, 영적인 조화가 이루어지고, 평안이 지속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살게 되면 태에서 떨어진 아이처럼 실존의 아픔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고독이 오고 영적인 고뇌함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없이 죽어 가는 사람의 모습을 보십시오. 얼마나 두려움 속에서 종말을 맞습니까? 마지막 순간까지 죽지 않으려고, 한 순간이라도 더 살아 보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품을 떠난 사람이 겪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품을 떠나면 두려워하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났으면서도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무뎌서 그렇고 마비가 되어서 그렇습니다.
"나는 하나님 없이도 혼자 살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만용이고 객기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느 날 병원 침대에 강제로 눕혀지는 날, 그날 비로소 그런 만용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사람은 솔직해야 합니다. 그리고 은혜를 입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은혜는 어느 날 한꺼번에 다 받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받기 위해서 조바심을 내고 은혜를 달라고 떼를 쓸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주안에서 꾸준하게 신앙 생활을 하게 되면 매일 매일 꾸준하게 은혜를 입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마치 이슬비와도 같습니다.
소낙비는 한꺼번에 쏟아지고 또 순식간에 흘러가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농작물에 해를 많이 줍니다. 그러므로 농작물에 진짜 좋은 비는 이슬비입니다. 이슬비는 내리는 것 같지도 않은데 보면 옷을 적셔 놓습니다. 이것이 좋은 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헐몬산의 이슬"이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헐몬산에는 일년 12달 비가 오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식물들이 잘 자랍니다. 왜냐하면 밤 사이에 내린 이슬 때문입니다. 여기 이 헐몬산의 이슬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꾸준히 나와 앉아 예배를 드리는 시간마다 소리 없이 내려 우리의 심령을 적셔 주는 하나님의 은혜의 이슬비, 이 이슬비는 내리는 것 같지도 않은데 옷을 적시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도 내리는 것 같지도 않은데 이 시간에도 소리 없이 내려서 우리의 심령을 적셔 주시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같은 이슬비를 가득 머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교회, 그 교회가 은혜 충만한 교회입니다. 이 같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그 사회, 그 사회가 건전한 사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지하고 무능하고 유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책임지거나, 내일을 책임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를 힘입어야 합니다. 우
리가 은혜를 입으려면 말씀을 가까이해야 하고, 깨끗한 마음과 영을 지녀야 하고, 꾸준하게 하나님 앞에 나가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를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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