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지 말라! (창 3:4-5)
어린 아이가 태어나서 제일 먼저 배우는 말은 '엄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말을 배워서 제일 먼저 사용하는 말도 이 엄마라는 말입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모두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제일 먼저 대화를 나누는 상대는 어머니가 된다는 말입니다. 어린 아이는 엄마와 눈을 마주하고 엄마라는 말을 되풀이 하면서 품에 안겨 있는 그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일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에게 이 어머니라는 존재는 엄청나게 큰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해 놓으신 후에 이 인류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가장 먼저 대화를 나눈 상대가 누구였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그때 나눈 대화의 내용은 무엇이었고 그 대화의 결과는 무엇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하나님이 심혈을 기울여 창조해 놓으신 인간이 인류 최초로 대화를 나눈 상대가 불행하게도 사탄인 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에덴 동산에서 사람과 뱀이 처음으로 선악과 나무 밑에서 만났습니다. 사람과 뱀이 처음으로 만나서 나눈 최초의 대화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불행하게도 상대방을 속이는 내용의 대화였습니다. 참 서로를 위해서 불행스러운 일입니다.
그 날 그 만남은 차라리 없었더라면 좋았을 그런 만남이었습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굉장히 아쉬운 만남입니다. 그 결과로 오늘 뱀의 운명이나 인간의 운명이 모두다 함께 불행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때 서로 만나서 나눈 최초 대화가 건설적인 내용이었더라면 오늘 인류의 문명은 굉장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때부터 시작된 이 참과 거짓의 대립은 수천년을 거쳐오는 동안에도 없어지지 않고 오늘까지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이 세상에는 온통 이 참과 거짓으로 말미암아 얼룩진 관계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곳곳에서 속고 속이는 대화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수천년 전 그 날에 그랬듯이 지금도 여전히 속여서 타락시키고, 속고 나서 탄식하는 일들이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참과 거짓이 싸우면 언제나 참과 진실이 이겨야 하는데 보면 거짓이 더 많이 이기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짓을 이겼다는 사람보다 거짓에게 속았다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신문을 보십시오. 맨 속았다는 기사뿐입니다. 속아도 그냥 아쉬울 정도의 속임이 아닙니다.
사기 사건이 생겼다하면 수십억 아니면 수백억씩이나 되는 대형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이상한 것은 한번 속았으면 다시는 안 속을텐데도 보면 매일같이 자꾸만 똑같은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같은 속임수의 역사는 오늘뿐이 아닙니다. 그 역사가 아담 때부터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확신입니다.
거짓에는 확신이 들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왜 자꾸만 거짓에게 속아 넘어가느냐 하면 거짓에는 사람을 감쪽같이 속일 만한 확신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1절을 보십시오. "(창3:1)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 그렇게 묻고는 4절에 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창3:4절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확신을 줍니다.
여기 나오는 '결코'라는 부사는 "결단코"라는 확신의 의지를 나타내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선악과를 따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했지만 아니야, 먹어도 결단코 죽지 않아, 그러니 마음 놓고 따 먹어." 뱀이 이렇게 자신 있게 믿음을 줍니다. 그 소리를 듣고 나서 선악과를 쳐다보니까 지금까지 두렵게만 보이던 열매가 갑자기 따 먹어도 괜찮겠다는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용기도 생겼고 배짱도 생겼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겁없이 열매를 따 먹은 것입니다. 이것이 거짓이 지닌 힘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속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단을 보십시오. 1992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10월에 예수 재림이 있다고 얼마나 실감 나게 확신을 주었으면, 그 많은 사람들이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학업을 포기하고, 가정을 버리고, 부모도 버리고, 집을 팔고 천만원, 1억원까지 아낌없이 갖다 바쳤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10개월까지만 먹을 것을 남겨 놓고는 몽땅 갖다 바쳤다고 하니까 이게 신비한 힘 아닙니까? 어떤 집사님은 그들에게 넘어가게 된 동기를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물건을 사려고 슈퍼마켓에 들어갔는데 어떤 점잖게 생긴 부인이 다가오더니 "예수 믿으십니가?" 하고 묻더랍니다. 그래서 "믿는다"고 했더니 가까이 다가와서는 귀에다 대고 하는 말이 "1992년 10월에 휴거 있는 것 아십니까?" 하더랍니다. 그런데 그 말이 얼마나 진지하게 들렸던지 그만 넘어가고 말았다고 합니다.
왜 이런 일들이 오늘 같은 세상에서, 그것도 배운 사람들에게서 일어나고 있습니까? 거기에 거짓이 갖고 있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거짓의 힘이고, 거짓의 마력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도 뱀에게 속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뱀이 주는 말이 더 확신이 있어 보였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속이고 속는 일들이 자꾸만 일어나는 것입니다.
둘째는 거짓이 더 진짜같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거짓을 보십시오. 거짓은 진짜보다도 더 진짜같이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속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것은 뱀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권위가 있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뱀의 말이 조금의 의심도 없이 들렸습니다.
뱀이 하는 말을 듣고 나서 선악과를 쳐다보니까 이제까지는 그 열매가 흉칙하게 보였고, 두렵게도 보였는게 갑자가 그 열매가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게도 보이고, 냉큼 따먹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습니다. 왜냐하면 뱀의 말이 더 진짜같이 들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거짓이 지닌 힘입니다.
여려분, 조화를 보십시오. 어지간히 가까이에서 보지 않으면 진짜보다 더 진짜같이 보입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실감 나게 만들어 내는지 모릅니다. 거기에 향기만 뿜으면 나비나 벌들도 속고 날아들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민족은 모두 다 가짜에 대해서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물건을 살 때 믿고 살 수가 없습니다. 시장 물건, 백화점 물건, 이웃집에서 파는 물건, 유명 회사 제품 할 것 없이 도무지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불신하는 의식이 깔려 있습니다.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독일 사람들은 물건을 살 때 "이 물건이 최신형입니까?" 하고 묻고 산다고 합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이 물건이 지금 한창 유행하고 있는 물건입니까?" 하고 묻고 산다고 합니다. 미국 사람들은 "이 물건이 실용적입니까?" 하고 묻고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은 물건을 살 때 예외없이 묻는 말이 있는데 "이거 진짜입니까?"하고 묻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장사도 예외없이 말하기를 "이 물건은 진짜입니다."하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진짜라고 하는 그 물건들은 틀림없이 가짜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금도 이렇게 속고 있습니다. 아담도 그렇게 속았습니다. 뱀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진짜같이 들렸습니다. 요새 신자들 가운데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담임 목사가 "거기 가지말라" 했는데도 갑니다. 왜 가느냐 하면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뱀의 말에 더 매력을 느꼈듯이 이단의 말에 더 매력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더 탐스럽게 여깁니다. 그리고 후에 가서는 속고 나서 후회를 합니다. 모두 아담의 피를 이어 받아서 그렇습니다.
셋째는 거짓에는 반드시 과장딘 현혹이 들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왜 자꾸만 거짓인데도 불구하고 속아 넘어가느냐 하면 거짓에는 과장된 현혹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속아 넘어가는 결정적인 요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뱀이 아담을 현혹하는데 그냥 유혹한 것이 아닙니다.
아마 뱀이 아담에게 말하기를 "이 열매를 따먹어도 결코 죽지 않는다"는 말만 했다면 아담은 약간의 유혹은 받기는 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따먹기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 금단의 열매를 따먹기까지는 한 결정적인 요인은 거기에 과장된 현혹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사탄이 아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된다." 이것이 사람이 속는 핵심입니다. 사람들이 이것 때문에 자꾸만 걸려듭니다. "먹기만 해봐라. 하나님같이 된다." 이것이 아담을 넘어뜨렸습니다. 거짓에는 이 같은 과장된 현혹이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 TV에 나오는 약 광고를 보십시오. 그 광고를 보면 세상에 못 고칠 병이 없습니다. 그 약만 먹으면 병만 고쳐지는 것이 아니고 천년을 살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과장된 선전에 넘어가서 믿음을 가지고 약을 사다가 먹습니다. 그래서 사다가 먹으면 낫습니다. 오히려 부작용만 더 합니다.
화장품 광고를 보십시오. 예쁜 여자를 더 예쁘게 화장을 밝은 빛 아래서 사진을 찍어서 TV에 내보냅니다. 그러면 뭇 여성들이 모두 현혹됩니다. 나도 저렇게 예뻐질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저마다 아낌없이 돈을 주고 사다가 바릅니다. 그러면 그 사람처럼 예뻐집니까?
광고의 효과는 이렇게 착각을 을으키게 해서 다 비싼 제품을 아낌없이 사 가게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과장이 있는 곳에는 헛점이 있는 것입니다. 뱀이 아담을 속이는 데 바로 이 방법을 썼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을 속이는 사람들은 이 방법을 사용합니다.
얼마 전에 어떤 분을 만났는데 크게 실망해 있었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돈을 많이 때었다고 합니다. 이분이 왜 그렇게 많은 돈을 빌려 주었느냐 하면 3부씩 이자를 준다는 바람에 돈을 빌려주었다는 것입니다. 아마 그분이 자신에게 돌아올 이득이 많은 것만을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것만 생각하고는 많은 돈을 빌려 주었습니다.
여러분, 많은 이자를 준다는 사람을 믿지 마십시오. 그런 경우는 대부분 얼마 동안은 이자를 잘 주다가 신임을 얻은 후에 더 많은 돈을 빌립니다. 그리고 나서는 때어 먹습니다. 이게 수법입니다. 그것이 미끼입니다. 이것이 뱀이 아담을 유혹할 때 사용한 수법입니다.
"눈이 밝아진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같이 된다" 여기에 속은 것입니다. 아담이 그래서 속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속고, 실패하고, 넘어지고, 불행한 일들을 당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보면 대부분 이렇게 해서 속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렇게 해서 속은 일 없습니까? 지금 이 시간에도 이렇게 속고, 속이는 사람들이 한두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이것이 거짓의 모양입니다.
넷째는 죄는 절대로 혼자서 짓지 않습니다.
이것이 죄의 속성입니다. 죄는 언제나 공범을 끌어들입니다. 프랑스 속담에 보면 "죄 있는 곳에 반드시 여자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다리 표현하면 "여자는 어디에 있느냐?"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18세기 프랑스 파리의 경찰 총감 알틴느씨가 처음으로 한 말이라고 합니다. 죄의 근원을 캐려면 여자를 먼저 찾으라고 했습니다.
성경 창세기 3장 6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 지라." 하와가 열매를 따먹고 나서야 겁이 났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남편을 끌어들입니다. 그리고 남편으로 하여금 먹게 합니다.
그래도 남자는 여자보다 양심이 조금은 더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니까 먹다가 양심에 질려서 삼킬까 말까 고민을 많이 하다가 결국 아내를 생각해서 죽어도 같이 죽자 하고 삼킨다는 것이 그만 목에 걸려서 지금까지도 이렇게 못 넘어 가고 붙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속임은 먼저 내 마음속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유혹할 수 있습니다. 또 누가 우리를 별 방법을 동원해서 거짓으로 현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속임을 당하는 것은 내 자신, 내 마음속에 먼저 시작됩니다. 내 마음속에 이미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탄이 그것을 알고 와서 유혹을 합니다.
내 마음속에 이미 횡재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탄이 그런 조건을 가지고 찾아옵니다. 내 마음속에 이미 음란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탄이 여색의 모습을 하고 다가옵니다.
속임을 당하거나 실수를 하게 되는 것은 누가 와서 나로 실수를 하게 하고, 나를 속게 한 것이 아니라 이미 실수와 속임은 내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이 "나"가 문제입니다.
그래서 9절에 보면 속임을 당하고 나서 두려워서 숨어 있는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십니다.
여기 네가 어디 있느냐는 물음은 "네가 지금 어디에 숨어 있느냐"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아예 카" 즉 "네 중심이 어디 있느냐"는 뜻입니다. 아담이 중심을 잃을 때 실수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중심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이것이 본문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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