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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깎인 삼손! (삿 16:19-22)

by 【고동엽】 2022. 1. 22.

머리 깎인 삼손! (삿 16:19-22)


기원 전 1070년경 이스라엘은 블레셋에게 40년 동안 속박을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자유를 빼앗기고 미래가 어두운 상태에서 이스라엘은 착취를 당하고 압박을 당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때 백성들은 압박에서 해방시켜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마침내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한 사람의 지도자를 보내셨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우리들이 잘 아는 삼손이라는 힘이 센 장수입니다.
단 지파 가운데 마노라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마노아라는 사람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아들을 낳을 것인데 장차 이 아들은 고통받고 있는 민족을 구원할 사명이 있으니 아들을 낳거든 나실인으로 양육하라"고 이르셨습니다.

"나실"이라는 말은 나지르라는 헬라어 명사로서 "구별되어 하나님께 바쳐진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나실인이 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교육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내용이 사사기 13:7에 나와 있습니다.

 

첫째, 독주나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

 

술은 사람으로 하여금 이성을 흐리게 합니다. 분별력도 흐리게 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18을 보면 술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술에 취하면 술이 나를 장악해 버립니다. 술이 나를 지배하고 나를 움직입니다. 그래서 소심한 사람은 사랑을 고백할 때 술을 마시고 가서 고백을 한다고 합니다. 나는 용기가 없는데 술이 용기를 더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술에 취하면 평소에는 째째하던 사람도 갑자기 인심이 후해져서 팁도 많이 준다고 합니다. 술에 마취당해서 내가 없어져서 그렇습니다.
나실인이 술을 마시면 안 된다는 것은 "너는 이미 주인이 있다"는 뜻입니다. "너희 주인은 하나님이니 술을 마셔서 정신을 혼미케해서 네 주인인 하나님을 경시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술에 취하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술은 신앙인들에게는 금기입니다

 

둘째, 부정한 것을 보지도 말고, 먹지도 말라.

 

하나님은 부정한 것의 반대입니다. 또 하나님은 죽음의 반대입니다. 그래서 나실인은 부정한 음식을 먹지도 말고 또 죽은 시체에 가까이 가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나실인은 부모가 죽어도 가서 볼 수가 없습니다.

 

셋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는 말은 머리털에 칼을 대지 말라는 말입니다. 옛날에는 머리털을 모두 칼로 면도하듯이 밀어서 탁발을 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머리털을 깎지 말고 길게 기르라는 말입니다.

나실인이 머리를 길게 길러야 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옛부터 남자는 머리를 짧게 자르고 여자는 머리를 길게 길러 왔습니다. 이것이 원칙입니다. 그 이유는 남자이기 때문에 짧게 자르고 여자이기 때문에 길게 길러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새는 남자들이 머리를 길게 하고 여자들이 짧게 하는데 이것은 큰 잘못입니다.

남자가 머리를 짧게 해야 하는 이유는 "내가 우리 집에서 어른이고, 주인이라는 표"입니다. 남자들이 머리를 길게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사람들은 뭘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여자는 머리를 길게 길러야 합니다. 여자이기 때문에 길러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자가 머리를 길게 기르는 것은 내 머리 위에 누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게 내 주인입니다 나는 섬기는 사람이 있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자는 머리를 길게 길러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서양 사람들의 에티켓을 보십시오. 실내에 들어가게 되면 여자는 쓰고 있던 모자를 그냥 쓰고 있는 것이 예의입니다. 그러나 남자는 실내에 들어 가게 되면 쓰고 있던 모자를 벗는 것이 예의입니다. 이것은 예의이기 이전에 성경적입니다. 여자가 모자를 쓰고 앉아 있는 이유는 나는 섬기는 사람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아주 당연한 것입니다. 그 뜻은 내 위에 누가 있다는 표시입니다.
그러나 남자는 실내에 들어가면 모자를 벗는 것이 예의입니다. 이것은 남자의 위치가 위라는 표시고, 주인이라는 표시고, 내 머리 위에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대머리는 남자에게만 있습니다. 남자가 머리 벗겨지는 것은 그래서 위엄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실인에게 주어진 의무요, 삶의 원리요, 정신입니다. 삼손은 그렇게 자라야 합니다. 이것은 또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요구이기도 합니다.

오늘같이 분주 다망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생활의 분별력과 경건함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다름 아닌 오늘의 나실인들이고 신앙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삼손은 이를 망각했습니다. 삼손을 보십시오. 삼손은 막중한 사명과 목적과 뜻을 지니고 태어났습니다. 술을 마시지 말고, 부정한 것을 먹어서도 안 되고, 머리를 길러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구별된 사람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민족을 위해서 특별히 해야 할 일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든 것을 망각하고, 모든 금기 사항을 일시에 깨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우선 자신을 구별할 줄을 몰랐습니다. 시체를 보지 말라 했는데 배가 고프다고 죽은 사자의 몸에 야생벌들이 물어다 놓은 꿀송이를 따서 먹고는 즐거워했습니다. 그리고 무찔러야 될 블레셋 사람들과 어울려 놀고 다녔습니다. 또 독주를 입에 대지 말라고 했는데 기생 집에 드나들면서 환락을 즐겼습니다. 그리고 블레셋 여인과 연애하느라고 정신을 모두 빼앗기고, 마음도 송두리째 뺏기고, 분별력을 상실한 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습니다.
망각의 인생은 불쌍한 것입니다. 목적을 잃은 사람도 불쌍합니다. 왜 내가 지금 머리를 길러야 되는 줄을 모릅니다. 왜 술을 입에 대면 안 되는 줄을 모릅니다. 왜 지금 내가 여인을 가까이해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되는가 하는 중요한 이유를 모릅니다. 모르니까 목적을 잃고, 본분을 잃고, 날마다 미쳐서 놀아났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삼손에게 모든 것을 뺏으십니다. 뺏으시되 아주 철저하게 모든 것을 박탈하십니다. 술집에서 술에 취해 여인의 무릎을 베고 잠들어 있던 삼손은 블레셋 군대에게 붙잡혀서그 소중한 머리를 깎이고 말았습니다. 이제 나실인의 자격이 박탈된 것입니다.

삼손은 이제 더 이상 나실인이 아닙니다. 이것은 중대한 일입니다. 그가 머리를 깎였다는 그 자체가 중대한 일이 아닙니다. 그가 머리를 깎임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서 떠났다는 것이 슬픈 일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그에게서 떠나시고 그를 버리셨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또 눈도 빠졌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붙잡아 머리만 깎은 것이 아니고 그의 눈까지 뺏습니다. 당장 앞을 볼 수가 없습니다. 미래는 고사하고 지금 당장 한 발도 내다볼 수가 없습니다. 사사는 그 시대를 예리하게 내다보고 분별하고 판단해서 고통받고 있는 민족의 앞날을 보고 나아갈 길을 인도하는 것이 사사요 지도자인데 사사가 눈을 상실했고 하나님의 능력까지 떠나버리고 말았으니 이제 그가 더 이상 어떻게 사사입니까?

그뿐이 아닙니다. 옥에 갇혀서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사는 한 나라의 지도자입니다. 지도자는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백성을 지도하고 인도할 수가 있는데, 삼손은 권위는 고사하고 옥에 앉아서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압박을 받고 있는 백성들은 모두 삼손만을 바라보고 있는데 삼손은 백성을 구원하기는커녕 이 모양이 되었으니 이게 뭡니까?
여러분, 사람이 본분을 잊어버리고, 목적을 잃어버리고, 뜻을 상실하고 살면 이렇게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람답게 살라고 자유를 주셨는데 그 자유를 사람답지 못하게 사용하고 하나님과 전혀 무관하게 방종하는 데 사용하면 하나님은 그 자유를 박탈하십니다. 자유를 거두어 가십니다. 그래서 때로 감옥에 처넣기도 하고, 병원 침대에 눕혀 놓0기도 하시고, 안방에서 꼼짝 못하고 앉아 있게 하시기도 합니다.
성도가 주일 하루를 성수하지 못하고 즐기느라고 세상 일에 너무 바쁘게 쏘다니면 시간도 거두어 가십니다. 나중에는 주일을 성수하고 싶어도 할 수 없도록 만드십니다. 제물도 주셨는데 인색해서 주님을 위해서 쓰지 못하면서도 자신들을 위해서는 분에 넘치게 흥청망청 분별없이 쓰면 재물도 거두어 가십니다. 거두어 가실 때는 참으로 철저하게 거두어 가십니다.
삼손을 보십시오. 그에게 능력도 주셨고, 남다른 힘도 주셨고, 무거운 사명도 주셨습니다. 고통받고 있는 백성들을 구하라고 그에게 모든 것을 부여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백성들이 삼손의 손만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무슨 희망이 있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그것을 본분대로 사용하지를 못했습니다. 여자에게 미치고, 향락에 빠지고, 기생집에 드나들면서 분별없이 살아갔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지를 철저하게 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날 하나님도 그에게 주셨던 모든 것을 거두어 가시는데 철저하게 거두어 가셨습니다.

주셨던 힘도 뺏고, 눈도 뺏고, 자유도 뺏고, 명예도 뺏고 그러고는 삼손을 구렁텅이로 내던지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루 아침에 삼손은 옥에 갇혀서 맷돌을 돌리는 신세로 변해버리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진노하십니까? 왜 하나님은 이렇게까지 흥분하십니까? 그것은 그가 삼손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다름 아닌 나실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목족과 기대와 뜻이 부여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책망도 그렇게 큰 것입니다.
우리들이 모두 멸망받을 인생이라면 하나님은 우리를 아무렇게나 살아가도록 그냥 내버려 두십니다. 뺏고, 박탈하고, 때리고, 그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가만 내버려 둬도 머지 않아 모두 철저하게 멸망당하고 말 인생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버림받은 인생일수록 세상을 살아가는 데 시험도 적고, 고난도 적고, 편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형당해 죽을 날만을 기다리며 그날 그날을 살아가는 사형수가 감옥 안에서 물구나무르 서서 밥을 먹든지, 거꾸로 서서 잠을 자든지 누가 말리겠습니까? 간수들도 상관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버려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죽을 사람들이고 희망을 포기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포기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간섭도 하시고, 매도 들으시고, 혼내기도 하시고, 노해서 채찍을 들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매를 맞고 나서 기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사랑하는 자에게느 매를 드신다고 하더니 과연 매를 맞고 보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하고 그 사랑을 확인하고서는 아파하기는켜녕 오히려 기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삼손에게서 모든 것을 다 빼앗았습니다. 빼앗되 아주 철저하게 박탈하고, 빼앗으셨습니다.

그런데 읽은 본문 22절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 보면 "그의 머리털이 밀리운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고 했습니다. 이한 구절 속에 신학이 다 들어 있고 복음과 섭리와 하나님의 심정이 들어 있습니다.
"머리털이 다시 자라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자라나는 머리털" 이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인생을 향한 메시지가 이 한 구절 속에 모두 함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삼손을 버리셨는데 아주 버리시지 않고 다시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것이 은총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삼손을 나실인으로 성별해서 고통받고 있는 민족을 구원하라고 기껏 일할 만큼 키워놓았는데, 성장한 삼손은 그만 여자에게 미쳐서 마침내는 눈 빠지고, 머리를 흉하게 깎이고, 사람들 앞에서 맷돌이나 돌리면서 온갖 조롱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손심이 이만저만 만신 창이가 된 것이 아닙니다.

삼손이 받는 수난은 곧 하나님이 받는 수난입니다. 삼손이 당하는 수모와 짓밟힘은 곧 하나님이 받는 수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삼손을 그냥 걷어차버렸으면 좋을 심정인데도 삼손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러고는 다시 한번 삼손에게 기회를 주시고 계십니다. "머리털이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총이고, 은혜입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인내이고, 사랑이고, 은초이고 헤아릴 수 없는 축복입니다.
삼손이 그 지경이 되었는데도 정신을 못 차리겠습니까? 그는 감옥에 앉아서 비탄한 자리에서 누눌로 회개를 했을 것입니다. 아마 후회하고, 또 후회하고, 탄식하고, 애원하고, 탄원하고 그랬을 것입니다. "한 번만 더 나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그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주셨습니다. "그의 머리털이 다시 자라기 시작하더라."

여러분, 어떤 생각을 갖게 됩니까? 여러분은 지금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소중히 사용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축복의 삶입니다. 소중한 것을 소중한 줄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축복입니다. 더욱 소중한 오늘의 나실인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기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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