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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로 가까이! (시 73:25-28)

by 【고동엽】 2022. 1. 22.

하나님께로 가까이! (시 73:25-28)

 

존 로빈슨이라는 신학자가 '신에게 솔직하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로빈슨은 "하나님을 정직하게 이해하고 우리 모두 하나님께 솔직해 보자"고 했습니다.
세상의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정직하게 이해하고, 그 하나님 앞에 정직해지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도리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른 신앙이고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은총을 입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25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26절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오 영원한 분깃이시라" 또 28덜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하나님을 가까이하게 된 것이 복이라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과 가까워지려면 몇 가지 우선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을 깊이, 그리고 바르게 아는 일입니다.

 

깊이 알아야 힘이 생깁니다. 친구 사이를 가깝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상대방을 깊이 아는 일이 중요합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깊이 알고, 상대방의 개성과 취미와 장점이 무엇인가를 알고 칭찬해 주고 격려해 주면 아주 가까운 친구가 될 수가 있습니다.
이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성끼리 서로 가까워지고, 연인이 되고, 결혼까지 하게 되는 것은 그만큼 서로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상대를 모르고서는 친구도 될 수 없고 연인도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의미"를 다섯 가지로 말했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에게 관심을 갖고, 존중하고, 이해하고, 주고,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다섯 가지를 하나로 종합한다면 그것은 상대방을 "깊이 아는 일"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상대방을 잘 모르면 오해가 생기고 가까워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모르면 하나님을 깊이 이해하고 신뢰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불신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순복한다고 하는 것도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모르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우리 자신도 알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왜 교만해지고 오만해집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니까 자신에 대해서도 무지해서 그렇습니다.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감히 하나님 앞에서도 오만해지는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그의 유명한 기독교 강요(생명의 말씀사 역간)라는 책에서 "나 자신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나 자신도 알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내가 하나님을 알게 될 때 비로소 나의 운명을 알게 되고, 나의 본성을 알게 되고, 나의 존재와 값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해가 왜 생깁니까? 상대방을 잘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해"입니다. 잘못 이해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들이 때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모르니까 원망을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래서 칼빈은 "하나님을 원망하려는 마음이 들거든 하나님의 섭리를 좀더 기다려 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배 한 척이 망망 대해에서 표류하다가 파선을 하였습니다.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저마다 살아 보려고 안간힘을 다 썼습니다. 저마다 뱃조각을 붙잡고 버텨 보았지만 결국 다 죽고 그 중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며칠 동안 바다에 떠다니다가 어느 무인도에 닿았습니다. 이 사람이 육지에 닿자마자 땅바닥에 엎드려 입을 맞추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죽었는데 나만 살려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그런데 그 섬에는 사람이라고는 자기 혼자뿐입니다. 멀리 항로를 따라 지나가는 배가 있을 때에는 흰옷을 장대에 걸고 흔들어 보았지만 누구 하나 구조하려 오는 사람이 없습니다.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습니다. 움막을 짓고 그 속에서 살았습니다.
하루는 밥을 짓기 위해서 불을 피우다 불똥이 움막에 튀어 간신히 지어놓은 움막을 홀딱 태워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사람은 울고 싶었습니다. 속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땅을 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울며 기도했습니다.
그는 "그때 나도 죽도록 내버려두시지 않고 살려 놓고서 이렇게 고생을 하게 하십니까?"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얼마나 서럽게 울었던지 제풀에 지쳐서 쓰러져 잠이 들었습니다.
한참을 자고 있는데 뱃고동 소리가 들려 옵니다. 놀라서 잠에서 깨 보니 커다란 배 한 척이 섬 가까이로 오고 있습니다. 너무나 반가워서 쫓아가서 선장에게 "내가 여기 있는 것을 어떻게 알고 왔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선장이 대답하기를 "내가 당신이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겠소 무인도에서 연기가 나기에 찾아왔지."
그렇습니다. 이런 것을 섭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내 생각과 이성으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향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때로 사람들이 당황하게 될 때, 전혀 예기치도 않던 방향에서 방법이 나오고, 구원의 손길이 나타나게 되는 것을 우리는 종종 보게 됩니다. 이 사람도 그랬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은 할 줄 알았는데 내 집이 불타야 구원받는다는 것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모르니까 불평하고 원망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섭리하시는 방법인데 모르니까 하나님의 깊으신 경륜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답답한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깊이 아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주 왕래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자주 찾아가야 합니다. 먼 친척보다 이웃이 더 가깝다는 것은 자주 왕래를 하기 때문입니다.
친한 친구는 달리 친한 것이 아닙니다. 자주 만나고 자주 오고 가니까 친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자주 찾아가 만나야 합니다. 자주 예배에 참례해야 합니다. 한 달에 한 번쯤 찾아가서는 절대로 가까워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웃 사람을 만날 때는 특별 면담이라는 것이 필요 없습니다. 특별 회담도 필요 없습니다. 그냥 가서 만나면 됩니다. 그런데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을 만나려면 특별 면담이라는 것이 필요합니다. 시간과 체면과 격식이 따라 붙습니다. 왜냐하면 자주 만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데도 그렇습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짐을 들고 산으로 갑니다. 그리고 어떤 이는 며칠씩 금식을 하면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이것이 특별 면담입니다. 평소에 하나님을 자주 만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못 만났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평소 하나님께 자주 왕래하는 사람에게는 특별 기도라는 것이 필요가 없습니다. 특별 기도는 평소에 하나님께 소홀했던 사람이 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자주 왕래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은총을 입고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가 있습니다.

 

세 번째는 대화를 많이 하는 일입니다.

 

사람이 서로 가까워지려면 자주 만나서 깊은 대화를 많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더욱 가깝게 만드는 대화입니다.
마틴 루터는 매일 새벽에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만일 하루라도 새벽에 기도를 하지 않으면 그 날은 사탄이 이기는 날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바빠도 그 시간만은 뺏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바쁠수록 더 많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바쁠 때가 더 많이 실수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화가 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하고 서먹서먹하고 꺼림칙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족도 소중하고 자식도 소중하고 직장도 소중하지만 어느 시점에 가서는 그것들이 그렇게 소중한 것이 아닐 때가 옵니다.
예를 들면 내가 세상을 살아 가다가 생사를 다투는 실존의 자리에 처하게 될 때가 되면 가족도, 자식도, 직장도, 그렇게 큰 힘이 되지 못합니다. 내가 세상을 다 살고 임종을 눈앞에 둔 그 시간에는 그 무엇도 나에게 힘이 되어 주지를 못합니다. 그때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일 뿐입니다. 그때는 오직 하나님만이 내게 힘이 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평소 하나님과 자주 대화하고 자주 왕래하고 하나님과의 사이가 정상화만 이루어졌다면 오늘 종말의 순간이 온다고 할지라도 사실은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가까워지되 관계가 정상화되어야 합니다.

 

네 번째는 생사 고락을 같이하는 일입니다.

 

생사 고락을 같이한다는 말은 '동고 동락' 한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주안에 살고, 주님이 내 안에 와 계시는 동행하는 삶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주안에 거하고 주께서 내 안에 거하실 때, 이때가 주님과 내가 동거 동락하는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이때가 사람이 가장 영적으로 조화가 잘 이루어진 때입니다. 이때가 사람이 가장 강할 때이고, 가장 행복할 때입니다.
여러분, 친구 중에서도 가장 친한 친구는 동창생입니다. 왜냐하면 3,4년씩 함께 생활하면서 같이 컸기 때문입니다. 이보다 더 친한 친구는 전우입니다. 전우는 정말 생사 고락을 같이한 사람입니다. 몇 년씩 함께 먹고, 함께 훈련을 받고, 함께 죽을 고비를 넘김으로써 전우애가 형성되어서 그렇습니다. 전우는 형제보다도 더 가까운 친구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친한 친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부부입니다. 부부처럼 서로를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서로 동거 동락하면서 생사 고락을 같이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로 의지하고 서로가 있음으로 해서 행복해질 수 있는 사이입니다.
여러분, 행복이 무엇입니까? 내가 있고 그가 있으면 행복한 것입니다. 신앙적으로는 내가 주안에 있고 주께서 내 안에 계실 때, 그때가 신앙 인에게 있어서는 가장 능력이 있고 힘이 있을 때입니다. 이때는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는 때입니다.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때입니다. 이때가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이 되는 때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운명은 이렇게 강한 신앙으로 뭉쳐진 사람 앞에서는 맥을 못 추고 그 대신 약한 사람 앞에서는 악착같이 물고 늘어진다."고 했습니다.
내가 주안에 있고 주께서 내 안에 거하시는 신앙 인에게는 운명 따위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는 말입니다. 그 대신 운명론자나 매사에 체념을 잘하는 사람이나 무슨 일을 하려면 안절부절하고 무당을 찾아다니고 귀신 섬기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이 운명은 강하고 끈질기게 덤벼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과 함께 동거 동락하며 살아가게 되면 생각이 바뀌게 됩니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성격이 바뀌고, 성격이 바뀌면 운명이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는 언제나 바뀜이 있고, 변화가 있고,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새해에 우리는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져야 하겠습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을 깊이 알도록 노력하고, 자주 하나님 앞에 나오도록 하여야 하고, 기도로써 깊은 대화를 나누며, 주님과 항상 동행하는 살을 살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그 하나님을 전파하리리이다." 이 같은 신앙 고백으로 한 해를 승리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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