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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로마서 10:16-21
제목: 이방인 구원으로 이스라엘을 시기케 하는 하나님
오늘 말씀은 다시 한번 9장의 주제로 돌아갑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 대다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영접하는데 실패했는가? 그리고 왜 이방인들이 저렇게 예수님을 열광적으로 영접하는가? 이것이 오늘 본문의 주제입니다. 그런데 어제 우리가 다뤘던 본문 중에서 요엘서 2장 32절과 이사야 28장 16절을 언급한 부분을 잠깐 보겠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구원이 매우 쉬우면서도 궁극적인 결정의 산문인 것을 말합니다. 왜냐 하면은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어찌 보면 간단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입으로 시인한다는 말이 얼마나 궁극적인 의사 표시인가를 알아야 이 말의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대 사회는 의사소통의 99%가 말로 이루어진 사회입니다. 그러니까 입으로 시인했다는 말은 인감도장을 찍었다는 말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그러니까 고대 사회에서는 말이 인감도장 같은 최후의 궁극적인 자기표현입니다. 오늘날은 말이 타락하고 오염되었습니다. 그래서 말을 해 놓고도 거짓말이라는 말이 생겼기 때문에 말의 엄숙성, 구두로 의사 표현하는 엄숙성이 오늘날은 사라져버렸죠. 그래서 자크 엘룰(Jacques Ellul)이라는 사람이 말의 굴욕이란 책을 썼죠. 말의 굴욕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은 오늘날은 말의 엄숙성, 구두로 자기를 표현하는 구두 의사 표현의 엄숙성이 사라졌기 때문에 입으로 시인한다는 말이 얼마나 궁극적이고 철회할 수 없는 자기 의사 표현인가를 잘 모르는 거죠. 우리가. 그런데 고대 사회에서는 구두로 자기를 표현하는 이것을 인감도장을 찍는 행위보다 더 궁극적인 의사 표현으로 봤습니다. 왜냐하면 이 시인이란 말은 여러 사람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하는 것인데 여러 사람 앞에서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면은 예수님이 정해준 바운더리(boundary) 안에서만 살아야 됩니다. 그러니까 자기 감금입니다. 오늘날 공공연히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면은 그것은 자기를 감금하는 행위입니다. 고위공무원이 내가 예수를 주라고 믿는다고 하면은 그 고위공무원의 영향 아래 있는 많은 사람들은 뇌물로 그를 달래거나 그의 의견을 굽힐 수는 없겠죠.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이 궁극적 의사 표현은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삶의 변경을 엄청나게 축소하고, 사회적 오지랖을 축소하고 그러니까 부당하게 얻을 수 있는 모든 이익으로부터 우리를 끊어내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를 입으로 시인한다는 말은 너무 중요한 커밍아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자기의 정체를 드러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구두로 자기의 정체를 표현하는 것이 마치 재산의 일부를 잃는 것처럼 아주 불편하고 기피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대 사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고대 사회는 예수를 입으로 시인하는 구두 시인 행위를 통하여 세상 사람들 앞에 ‘나는 예수의 길만 따라 가겠소! 나는 예수의 길 안에서 생명을 찾았소!’라는 결단이기 때문에 이것은 너무 중요한 자기 제한행위이었고, 자기 감금행위이었고, 자기 축소행위이었고, 자기 부인행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주라고 믿으면은 자기 부인의 인생이 시작되기 때문에 세상 사람과 너무 달라지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는 순간, 이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과 전혀 다르게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여기가 참 비극적인 결별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예수 믿는 일의 엄숙성,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이 구두 시인 행위의 엄숙성을 전혀 안 가르치고, 바로 교회를 시작하고, 기독교인을 만들어 주기 때문에 제가 아무리 이렇게 가르쳐본들 의미가 별로 없습니다. 왜? 제가 아무리, 아무리 ‘성경은 이렇게 했다’라고 하더라도 세상의 모든 교회가 교인들을 한 명이라도 더 늘리기 위해서 이런 엄숙한 통과의례를 하지 않고, 신자 삼아주고, 직분 주기 때문에 비극적인 거죠. 사실. 그래서 예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은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말, 이 말이 이사야 28장 16절이거든요. 로마서 10장 11절. 이 말뜻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아실려면요, 요것은 이집트와 동맹을 맺는 이사야의 대적자들과 하나님을 의뢰하고 이집트와 군사동맹을 맺지 않으려고 하는 소수파 이사야의 갈등에서 나온 말이거든요. 이사야는 히스기야 왕 때 하나님을 의뢰하면서 이집트와 군사동맹을 맺지 말아야 한다고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히스기야 왕에게요. 그런데 히스기야 왕은 셉나라고 하는 국내 대신을 통하여 이집트와 군사보호 동맹을 맺으면서 앗수르와 전쟁을 불사합니다. 이집트와 군사동맹을 맺고 앗수르와 일전불사하면서 엄청난 무기를 수입하여 드디어 앗수르랑 야외 기동전을 벌입니다. 그런데 앗수르와 야외 기동전을 벌였던 히스기야는 참패를 거듭하고 큰 수치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사야는 이집트와 군사동맹을 맺으면서 앗수르랑 전쟁을 하면서 위기를 모면하려고 하는 히스기아와 그의 궁중 참모들을 책망하면서 말렸습니다. 그런데 여호와를 의뢰하지 않았던 그들은 산산조각 나버렸습니다. 국토의 3/1을 잃었습니다. 이게 바로 뭡니까? 이사야 28장 16절입니다.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이런 맥락입니다. 예수님을 부르고 믿는 사람들은 자기를 구원할 거짓된 구원의 힘, 이집트와 군사동맹을 맺지 많습니다. 즉 돈의 힘을 믿지 않습니다. 철병거의 힘을 믿지 않습니다. 동맹의 힘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외롭고 고독하게 서스펜스 안에, 긴장 안에,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리면서 비동맹 고립주의로 나아갑니다. 이사야가 바로 여호와의 이름을 믿는 자는, 여호와를 믿는 자는 낭패를 당하지 않고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말이 정확하게 히스기야 때 일어났던 무지, 국토의 3/1을 잃은 전쟁, 그 전쟁을 지금 염두에 두는 겁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는다. 요엘서 2장 32절입니다. 이 요엘서 2장 32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벨론에게 투항하여 바벨론의 대세를 받아들이면서 바벨론으로 가서 바벨론의 신을 섬기는 이런 추종자들이 대세를 이룰 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은 궁핍을 감수하는 것이었고, 가난을 감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엘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바벨론의 대세에 편승하는 자들 보다 마지막, 진짜 참 구원을 받을 사람들은 누구냐? 바벨론 대세를 따라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라고 밝히는 그 맥락에서 이 말씀이 나온 겁니다. 그러니까 이사야, 바울은 요 맥락을 다 의지하면서 말합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싶어도 이방인들은 이름을 부르지 못합니다. 그래서 전파하는 이가 필요합니다. 이사야 52장 7절을 인용하면서 바울은 말합니다.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이사야 52장 7절 그다음에 인용하면서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찬스를 주기 위해서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는 이방인들의 선교사, 저 북방 얼음산과 저 남방 산호섬으로 달려가는 선교사들을 격려하는 거죠.
오늘 본문은 성경을 일곱 구절 인용합니다. 여섯 군데에서 일곱 구절을 인용하는데요, 이게 전부 다 내용이 뭐냐 하냐면은 하나님이 당신의 본 백성에게 배척을 당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하나님과 밀착되게 동행하지 않은 이방인들에게 오히려 하나님이 환영받고, 열광적으로 지지를 받고, 예배를 받는 이 역설적인 현상을 설명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사야 53장 1절로 시작합니다.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참된 예언자들은 항상 어느 시대이던 소수의 추종자들에게만 인정받습니다. 소수의 추종자들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참된 예언자, 그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전하는 예언자들은 대다수의 배척, 대다수 회중의 배척과 극소수의 영접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대다수의 배척을 받고 극소수에게 인정을 받은 예언자이기 때문에 이사야가 항상 예수님과 바울과 세례 요한에게 동시에 소환됩니다. 왜? 이사야가 세례 요한과 예수님과 바울에게 동시에 인용되는, 소환되는 이유는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애타게 전했지만 하나님 말씀에 옳게 반응하는 사람이 너무나 적은 것을 보고 경악해마지 않았던 그 원조, 배척받은 예언자의 원조가 이사야이었기 때문에, 배척 받은 원조 예언자가 이사야, 배척받은 원조 예언자 2세대가 예레미야 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바울과 세례 요한은 이사야의 말씀으로 시작하는데 이 이유는 이사야가 하나님 백성의 대다수가 하나님 말씀을 배척하는 것을 보고, 완악한 것을 보고 놀란 첫 세대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의 말이 인용됩니다.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습니까? 참, 놀랍습니다. 저마다 사람들은 기독교인이라고 행세하고, 교회를 다닌다고 행세하고, 직분을 맡았노라고 자랑합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누가복음 18장에서 말씀했습니다. “인자가 올 때 누가 참으로 믿는 사람을 만나겠는가?.” 인자가 올 때 누가 참으로 충성된 사람을 만나겠는가? 예수님도 장터에서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는 세대, 애곡하여도 울지 않는 세대, 피리를 불어도 울지 않는, 노래를 부르지 않는 세대, 예수님과 장단이 전혀 맞지 않는, 예수님 시대의 불화, 예수님 시대의 대다수 군중들에게 배척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 나사렛, 고라신, 벳세다, 가버나움, 예수님이 활동을 제일 많이 했던 곳에서 가장 심한 배척을 받았습니다. 가버나움, 고라신, 벳세다, 나사렛! 그런데 예수님은 어디서 환영을 받았습니까?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 과부, 사렙다 과부에게 환영을 받았고, 저 사마리아 문둥이에게 환영 받았고, 사마리아 수가 성 여인에게 영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배척받고, 저 예루살렘 사람들과 많이 떨어져있는 시돈과 두로 사람들에게 그리고 갈릴리 사람들에게, 저 갈릴리 북쪽에 난민 취급 받았던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이것은 이사야의 말이었고, 예수님 말이었고, 사도 바울의 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바울이 복음을 전했던 이 이스라엘 청중들은 듣지 못했는가? 듣지 못했기 때문에 믿지 못했는가? 왜?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에.., 아니다! 시편 19편을 보면은 여호와의 말씀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참된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았고 배척했습니다. 그래서 교대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본 백성이 듣지 않고 배척하자 하나님 백성 아닌 자들을 하나님은 불러서 하나님 말씀을 듣게 만드는 임무교대를 하십니다. 이것이 신명기 32장 21절입니다.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들로 더불어 내 백성을 시기하게 하고 미련하다고 경멸받던 이방인을 통하여 내 백성 선민 이스라엘을 시기하게 하겠다”는 원칙을 말합니다. 여기서 드디어 신명기 32장 21절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사야 65장 1절과 2절을 통해서 드디어 만민의 시대, 하나님을 믿었던 선민이 하나님 나라의 동역자가 되지 않고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던 자, 내 백성이 아니었던 자, 그들에게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불러내어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의 운동을 같이 엮어 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사야 65장 1절입니다.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들을 불러 내 백성 삼고.” 그러나 내가 진짜 오랫동안 길렀던 내 백성은 하루 종일 손을 펴도, 하루 종일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는다. 하~정말 이 놀라운 배척의 경험, 참된 예언자가 극소수의 남은 자에게만 인정받는 이 세계가, 이 답답한 세계가 초대 교회, 우리 예수님 하나님 나라 운동의 초기 양상이었고, 시종 일관 2000년간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 대다수의 하나님 본 백성은 하나님을 배척합니다. 극소수의 남은 자들만이 세례 요한과 예수님과 바울의 복음을 영접했습니다. 바울의 복음을 영접했습니다. 아~ 이게 참 역설이죠! 너무 역설입니다.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서 다섯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했습니다. 그런데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두 교회만 하나님 말씀을 영접했습니다. 어느 시대이건, 어느 시대이건, 하나님 말씀을 영접하는 사람들은 숫자가 적고, 어느 시대이건 하나님 말씀을 배척하는 사람들은 다수를 이룹니다. 이것이 비극적 역설이고 항상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에게 일어납니다. 여러분들은 제가 감히 말합니다. 우리 가향교회는 세상에서 끌 수 있는 매력, 사람들을 끌어 모을 수 있는 매력이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우리 친교부에서 만든 주소록 한 번 보세요. 친교부에서 만든 주소록을 보면은 이 신길로 42번지 근처에서 사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전부 다 엄청 먼 곳에서 교회를 옵니다. 이 먼 곳에서 교회를 온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은 가향교회는 하나님 말씀 들으러 오는 사람밖에 없다는 말이에요. 사실은. 주차 공간 불편해요! 호들갑을 떨면서 영접하고 환영을 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세상 교회에서 넘치는 호들갑스러운 친절이 하나도 없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아마 남은 자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겉으로 볼 때는 우리 가향교회가 보통 교회보다 훨씬 모자라 보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우리 가향교회는 하나님 말씀만 들으려고 오는 사람들입니다. 그저 가향교회는 제가 볼 때 남은 자 공동체입니다. 제가 볼 때는. 여러분 모두가 세례 요한과 예수님과 바울이 피리를 불 때 춤을 추고, 장례식 노래를 부를 때 애곡하는 하나님과 리듬을 맞추고, 장단을 맞추는 거룩한 남은 자 백성! 그 백성의 복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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