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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화평을 누리라! (롬 5:1-5)

by 【고동엽】 2022. 1. 22.

더불어 화평을 누리라! (롬 5:1-5)

 

 

우리 나라는 기독교 국가도 아니면서도 기독교 국가 이상으로 신앙이 왕성한 편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 주신 은혜이고 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우리 민족이 신앙 생활을 뜨겁게 하고는 있는데 이를 면밀히 검토해 보면 그 신앙의 형태가 너무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고는 있는데 그 하나님은 저 높은 곳에 올려놓고는 실생활에서는 하나님과 동떨어져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실생활 속에서는 신앙의 위력이 나타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많은데 그 신앙은 다분히 관념적이고 개념적이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기껏해서 마음의 안정이나 얻으려고 하는 정도의 신앙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다 안되면 쉽게 포기를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엇그제 교계 신문을 보니까 어느 교회 권사님 한 분이 자살을 해서 죽었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그분은평소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도 하고 신앙이 아주 좋아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그런 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새벽 기도회를 마치고 집으로 가던 중 야산에 올라가서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입니다.

자살을 하게 된 동기도 보면 별로 대수롭지도 않습니다. 시집간 딸이 이혼을 했다는 것과 며느리와 자주 불화가 일어났다는 것이외에 별다른 이유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성도들에게 알려지는 것이 창피하고 자존심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창피함과 자존심이 하나님의 딸 됨보다 더 컸던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보다 체면과 자존심이 더 크고, 더 위에 있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보다 체면이 뭐가 그리 대단하고 중요한 것입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이 그의 가정에나, 생활에나, 마음속에서 전혀 위력이 나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같은 신앙을 개념적인 신앙이라고 하고 관념적인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 그분은 믿음이 좋은 것 같았고 그래서 인정받는 신앙이었지만 실상은 힘이 하나도 없는 개념적인 신앙에 불과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신앙 생활은 뭔가 허전하고 아젠 늙었으니 "예수나 믿자" 하면서 믿는 사치나 악세사리가 아닙니다. 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까지도 버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은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하거나 쉽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은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너희는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얻는 선물이 화평입니다. 세상에는 좋은 것이 많지만 화평처럼 좋은 것은 없습니다. 가정이나, 단체나, 개인엑나, 나라에 이르기까지 이것이 필요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 안에 들어와 살면 하나님은 맨 먼저 우리에게 이 화평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래서 본문은 이 화평을 누리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 안에서 화평을 누리려고 하면 먼저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만 바로 되면 그것이 곧 화평입니다. 신앙의 위력은 바로 이 지점에서 나타나게 되고 신앙의 힘도 여기에서 돌출됩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을 하려면 먼저 이 점을 선행해야 합니다.

 

탕자가 아버지 곁을 떠나 집을 나갔습니다. 아버지 곁을 떠난 행위 그것 자체가 화평을 잃은 행위입니다. 그때부터 탕자는 화평을 상실한 갈등의 생활을 합니다. 숱한 외로움과 고독함과 갈등을 겪으면서 무력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탕자는 아버지 곁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그가 돌아오자마자 아버지와의 관계는 다시 회복이 됩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목욕을 시키고, 신을 신기고, 새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는 옛날의 아들로 다시 맞아들입니다. 이것이 회복입니다. 그 회복과 함께 잃었던 화평도 다시 찾게 됩니다. 그때부터 탕자는 더 이상의 탕자가 아닙니다. 완전히 화평을 되찼았습니다. 그래서 관계의 정리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본문에 보면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라"고 했습니다. 여기 화평을 "누리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폴라우시스라는 말입니다. 이 말 속에는 몇 가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즐긴다는 것입니다. 즉, 향락한다는 말입니다.

 

화평은 그냥 품고 있거나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즐기는 것이고 향락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화평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물질이라는 것은 그냥 가지고 있으면 값이 없습니다. 그 물질이 값이 있으려면 즐겨야 합니다. 100억, 200억씩 소유만 하고 있는 것은 소용없는 일입니다. 고리 대금없자가 수십억씩을 움켜 쥐고 사는데 그것은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그런 분은 대부분 음식다운 음식 한번 먹어 보지도 못하고, 옷다운 옷 한 벌을 제대로 못 입고 삽니다. 그것을 그냥 움켜 쥐고 있다가 어느 날 초라하게 죽고 맙니다. 그렇다면 그 물질을 즐기기는커녕 물질은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가끔 신문을 보면 50억씩, 100억씩 대학에 희사를 하고, 어느 연구 단체에 기금으로 기증을 했다는 기사가 나곤 하는데 이것이 즐기는 것입니다. 물질을 대학 발전을 위해서 기증함으로써 마음으로 즐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향락하는 것입니다. 두고 두고 기뻐하고 보람을 느끼며 즐기는 것입니다.

집도 그렇습니다. 양지 바른 언덕 위에 좋은 집을 지어서 남에서 전세를 주고는 주인은 빛 때문에 사글세를 살면 그것은 행복도 아니고 기쁨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좋은 집을 지었으면 내가 들어가 살아야 하고 내가 그곳에서 쉬고, 자고, 내가 가꾸고 해야 그것이 향락이고 즐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그것만으로는 완전한 행복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내가 그 하나님으로 더불어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을 높은 선반 위에 올려놓고는 쳐다만 보고 있으면 그것은 신앙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내 집에 와 계시고, 내 일터에 와 계시고, 내 인생에 와 계시고, 내 중심에 오셔서 역사하실 때 비로소 나는 그 하나님으로 더불어 향락하게 되고, 즐기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은 즐기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신앙이 개념적이거나 습관적이거나 관념적인 신앙이면 그 신앙은 힘이 없기 때문에 즐기고 싶으나 그럴 만한 동기가 작용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체면 때문에, 자존심 때문에, 자살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라." 이 말은 화평을 즐기라는 말입니다.

 

두 번째는 아는 것입니다.

 

화평을 누리려면 알아야 합니다. 아폴라우시스라는 말에는 "알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즐기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느냐 하면 뭔가를 알게 될 때 주어집니다. 그래서 아는 것이 힘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1절에 보면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라."고 했습니다. 여기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고 즐기려면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왜 죽으셨습니까? 우리와 하나님의 사이에 막힌 담을 헐어 버리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주님이 죽으심으로써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알고 보니까 이보다 더 귀한 일도 없고, 이보다 더 큰 복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같은 신비스러운 도리를 알고 난 후에 고백하기를 "나는 이제부터 예수만을 알기로 작정하였다."고 했습니다. 이 같은 도리를 몰랐을 때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기 위해서 열심이었는데 알고 보니까 그럴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를 바로 알고 난 이후에는 자신이 박해하던 그 예수를 자신이 박해를 당하면서 전하고 다니다가 그 자신이 그 예수 때문에 마지막에는 순교를 하게 됩니다. 이게 어찌 사도 바울만의 일이겠습니까?

예수 때문에 순교를 한 사람이 어디 한두 사람입니까? 이 도리를 알고 나니까 죽을 용기까지도 생겨난 것입니다. 이것이 깨달음이 주는 축복입니다. 그래서 즐거움의 힘은 깨닫고, 알고, 이해할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깨달아 값을 알고 존재를 알게 될 때 거기서 비로소 기쁨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고난이 주어져도 기뻐하고 환난 속에서도 오히려 즐거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4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앎이로다" 이것 때문입니다. 알기 때문에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 사이에는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아무리 쓰라린 환난이 주어져도 그 환난의 의미를 미리 알고 있으면 그 환난이 오히려 즐거울 수가 있습니다. 매를 맞아도 저분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때리는 매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으면 오히려 그 매는 고맙고 즐거울 수가 있습니다. 모르니까 기분이 나쁘고, 원망스럽고, 불쾌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하면 매는 똑같은 매지만 화평 중에 맞는 매는 아프지가 않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화평을 즐기라"고 했습니다. 화평을 즐길줄 아는 사람은 환난 속에 들어 있는 사랑의 의미를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의미는 이런 것입니다.

봄이 되면 과원지기가 나무의 가지 치기를 합니다. 보면 농부는 날카로운 전지 가위를 가지고 돌아다니며 과일 나무의 가지들을 사정없이 잘라냅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아깝게 왜 가지를 잘라내느냐고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잘라내야 나무가 건전하게 자라고 열매를 더 많이 맺는다는 것을 농부는 잘 알기 때문에 미련없이 잘라냅니다.

여러분, 과수원에 한번 가 보십시오. 탐스러운 열매나 굵직한 열매가 맺혀 있는 나무는 다른 나무보다 가지가 적습니다. 그것은 잘라내어 양분이 다른 데로 가는 것을 방지시켜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열매가 큽니다. 그렇지만 산 속에 심겨져서 마구 자란 사과 나무를 보십시오. 보면 가지도 많고 열매도 계란만하게 달려 있습니다. 손질이 안 되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열매는 그런 열매가 아닙니다. 맛이 있고, 크고, 탐스러운 열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우리들의 삶 속에서 때로 가지 치기를 하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지를 치실 때는 사정없이 내리치십니다. 그때는 우리들이 모두 아파합니다. 그것을 환난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농부가 과일 나무를 사랑하기 때문에 가지 치기를 하듯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가지 치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아픔 때문에 불평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모르면 더 아픈 법입니다. 그렇지만 그 이유를 알고 있으면 그것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는 일입니다.

성경은 "화평을 누리라"고 했습니다. 누가 화평을 누리느냐 하면 이 의미를 아는 사람만이 누리게 되고, 그런 사람만이 화평을 누릴 수 있는 지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평은 아는 사람이 누리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보는 것입니다.

 

아폴라우시스라는 말 속에는 "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화평을 누리고 즐기려면 볼 줄 알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2절에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화평은 현재적인 것만이 아니고 극히 미래적입니다. 스데반 같은 이는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웃으며 죽어갔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 아폴라우시스 때문입니다. "본"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미래적이고 내세적인 화평을 보았기 때문에 지금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그 화평을 즐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이 화평의 눈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 세상이 모두 소망적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화평의 마음과 눈을 가지고 세상을 보고, 나를 보고, 이웃을 보는 것, 그것이 즐기는 생활입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이 무엇입니까? 고작해서 마음의 평안이나 누리고, 정신적인 안정이나 누린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신앙 생활이 아닙니다. 적어도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보다 값이 있고, 보다 높고, 보다 위대한 하늘 나라의 약속된 축복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아야 합니다. 보고 알아야 즐길 수 있고, 향락할 수 있고,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멀리 올려다놓고 바라만 보는 신앙이어서는 안됩니다. 그런 신앙은 힘이 없습니다.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체면 때문에 하나님을 떠날 수도 있고, 자존심 때문에 하나님을 버릴 수도 있게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더불어 즐기는 생활을 하십시오. 이것이 능력을 주고 힘을 공급해 주는 신앙입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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