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의 긍정직인 삶! (고전 9:1-2)
우리는 본문에 한 사람의 성숙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식물이든 사라이든 성숙한 모습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식물이 성숙한 열매를 맺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보기에 좋을 수가 없습니다. 열매가 익어 빛이 나고 익은 냄새를 풍기는 그 탐스러운 모습은 보는 이들을 즐겁게 해줍니다.
이 점에 있어서 사람은 더욱 그렇습니다. 사람의 인생이 성숙한 지경에 이르게 되면 그에게서 인간의 참모습을 보게 됩니다. 거기서 인생의 맛과 깊이를 보게 되고 "아 저것이 인생이로구나"하는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본문에 나와 있는 사도 바울은 그런 경지에 와 있다고 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면에서 성숙해 있습니다.
첫째로 그는 참 자유인입니다.
고전9:1절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그는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서 "참자유인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유입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를 보면 이 자유를 위해서 피를 흘리고 싸운 흔적이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만큼 소중하가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것은 자유를 잃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에게서 자유를 박탈합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귀한 자유를 빼앗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유를 알고 그것을 소중히 느끼고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성숙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자유자다."하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육신의 석박에서 자유함을 얻는 그런 자유가 아닙니다. 그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자유, "엘류데로스"라고 하는 자유입니다. 이를테면 율법에서부터 심지어는 죽음의 문제까지를 초월하는 그런 자유를 말합니다.
바울은 먼저 율법으로부터 자유했습니다. 그는 유대교로부터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입니다. 유대교의 특징은 계율이 많다는 것입니다. 유대의 생활 지침서인 탈무드를 보면 모두 613가자의 계율이 6장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하라"는 계율이 248가지고 "하지 말라"는 계율이 모두 365가지나 됩니다. 이 수많은 계율들이 일상의 생활에서 자유를 속박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꼼짝을 못 하도록 묶어 놓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기독교로 개종을 하면서 이 모든 계율로부터 해방을 받습니다. 모두 집어 던지고 "나는 자유자다"라고 외칩니다. 이를테면 613가지의 율법의 옷을 모두 던지고 예수의 옷한 벌만을 입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자유입니다.
우리들이 신앙 생활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자유하기 위해서입니다. 정신으로부터 자유하고, 육신으로부터 자유하고, 세상으로부터 자유하고 심지어는 죽음의 문제로부터도 자유하려고 신앙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자유해야 합니다. 얽매이지 않고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는 죄로부커 자유해야 합니다. 죄는 모든 것으로부터 불화를 일으키게 합니다. 또 죽음의 문제로부터도 자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위대성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예수만을 위해서 살겠다"고 고백했습니다. 또 물질로부터도 자유해야 합니다. 물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물론 물질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러나 탐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으로부터도 자유해야 합니다. 살다 보면 취미 생할도 해야 하고, 친구도 많이 사귀어야 하고, 모임이나 직함도 가져야 하지만 그러나 이런 것들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나중에는 혼자 있는 시간을 빼앗기고, 기도할 수 있는 시간조차도 빼앗기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절제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할 수 있으면 많은 시간을 신앙하는 시간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원 400년 경에 키니크학파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일명 개처럼 자유롭게 살아간다고 해서 견유학파라고도 불렀습니다. 이들이 내걸은 자유 얻는 방법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아르케이야"입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욕망을 적게 가지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실패를 하는 데 그 원인들을 보면 모두 지나친 욕망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아루타르케이아"입니다.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족하지 않는 한 욕망을 채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말을 타면 종을 부리고 싶어집니다. 100명을 거느리면 1,000명을 거느리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1억을 가지면 10억을 갖고 싶은 욕망으로 발전됩니다. 그래서 사람은 먹어도, 먹어도 갈증에 시달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아나이데이아"입니다. 이것은 "무취"입니다. 체면을 버리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정말 자유하려고 하면 체면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여기서 외친 "자유"는 키니크학파가 외친 그런 자유보다도 한 단계 더 높은 자유입니다. 그 자유는 죄로부터의 자유이고, 심지어 죽는 문제로부터도 자유한 그런 자유인 엘류레로스한 자유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얼마나 자유했던 사람입니까? 그래서 그를 성숙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는 예수의 참제자였습니다.
"내가 사도가 아니냐" 그랬습니다. 이 말은 소속이 분명하다는 말입니다. 나는 예수의 사라이라는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절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는 자신의 가치를 예수를 위해서 사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본재 가치를 아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정말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누군가에게 기쁨으로 매일 때인 것입니다. 한 여인의 행복은 사랑하는 한 사람에게 매일 때 주어집니다. 한 남자의 행복도 사랑하는 한 여인에게 구속될 때 얻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여 본 사람만이 아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을 때 무한한 자유가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자유가 아니고 방종입니다. 사람이 자유를 누리고 안정을 누릴 수 있는 것은 가정이라고 하는 테두리 안에 기꺼이 매일 때입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서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 매임으로, 그리고 그에게 완전히 속박되어 사도가 됨으로써 그는 행복을 느끼고 기쁨을 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백하기를 "나는 살든지 죽든지 예수님을 위하여 산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시원한 인생입니까? 이런 사람은 세상이 두렵지 않습니다. 분명하고, 뜨겁고, 확실하고, 언제나 앞서가는 삶을 살아갈 뿐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불행한 사람은 자기의 위치를 모르는 사람이고 자기의 값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모르니까 허무에 빠지고 방종에 빠지고 무질서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셋째로 그는 완전히 예수께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그는 "내가 예수를 만난 사람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신앙인은 신앙의 대상를 만나고 사로잡혀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도 바울을 가리켜서 사도가 아니라고 시비했습니다. 당시 사도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사후에 개종해서 온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사도성에 대한 시비가 늘 있었습니다. 그때 바울이 한 말이 바로 이 말입니다.
"내가 예수를 만난 사람이 아니냐."
신앙의 내용은 "만나는 것"입니다. 그에게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이때 확신과 자신감과 분명한 자세가 주어지게 됩니다. 어떤 목사님이 부흥회를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맨 앞 자리에 처녀 한 사람이 앉아서 은혜를 받고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합니다. 보니까 그는 소경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진지했고 기쁨이 넘쳤고 눈물을 흘리면서 찬송을 합니다. 그래서 속으로 생각하기를 "처녀가 눈먼 주제에 무엇이 저렇게 감사할까?"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목사님의 오해였습니다.
여러분은 눈을 떴으니 행복하십니까? 지금 감격해서 살고 있으십니까? 감격은커녕 불만이 가득하고 불평 속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소경이 비관해서 자살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모두 몸이 성한 사람들이 자살을 했습니다. 그래서 행복의 조건은 외적인 것이 아닙니다. 행복을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고 존재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을 볼 때 "저 사람은 가난해서 불행하겠구나"하고 생각하지만 그것도 오해입니다. 여러분은 부자니까 행복하십니까? 그대 광실 높은 집에는 모두 행복이 가득하다는 말입니까? 초막에서도 얼마든지 감사하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앙드레 지드의 전원 교향악을 보면 눈먼 소경 하나가 목사님의 도움으로 개안 수술을 받고 광명을 찾게 됩니다. 이 여인이 처음으로 눈을 뜬 후에 세상을 보는 순간 감탄을 했습니다. 세상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찬란한 햇빛, 넓은 하늘, 초록빛 자연, 그래서 그는 감탄하고 또 감탄을 했습니다.
그런데 꼭 한 가지를 보고는 실망을 했습니다. 그것이 사람들의 얼굴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얼굴에 그렇게 근심이 가득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눈을 뜬 것을 후회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들이 얼마나 오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까?
부흥회에 참석한 이 소경 처녀가 마지막 날 이렇게 간증을 합니다. "나는 비록 육신의 눈은 멀어서 세상을 볼 수는 없지만 나는 이미 마음의 눈으로 우리 주님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소경 된 내가 오히려 감사할 뿐입니다." 이 소경 처녀가 그렇게 감사할 수 있었고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찬송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똑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그는 자신있게 "내가 예수를 만난 사람이 아니냐"하고 반문합니다. 그러니까 그는 어디가서나 당당했습니다. 자신감에 꽉 차 있었습니다. 소신 있게 살았습니다. 죽고 사는 문제 정도는 이미 초월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이 얼마나 자유한 사람입니까? 얼마나 세상을 자신 있게 살았다는 이야기입니까? 누가 이런 사람의 앞을 가로막을 수가 있습니까?
성숙한 신앙, 참신앙은 먼저 자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것은 자유할 때입니다. 육신으로부터 자유하고, 정신으로부터 자유하고, 욕망으로부터도 자유하고, 심지어는 죽음의 문제로부터도 자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마음으로 만나고, 지성으로 만나고, 생활로도 만나고, 영으로도 만나야 합니다. 그때 우리도 이 같은 고백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령을 따르는 생활! (갈 5:16-18) (0) | 2022.01.22 |
---|---|
신앙 고백의 내용! (마 16:13-17) (0) | 2022.01.22 |
더불어 화평을 누리라! (롬 5:1-5) (0) | 2022.01.22 |
속지 말라! (창 3:4-5) (0) | 2022.01.22 |
머리 깎인 삼손! (삿 16:19-22) (0) | 2022.01.2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