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고백의 내용! (마 16:13-17)
오늘 우리는 복잡하기도 하고 다양하기도 한 복합적인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을 다양화의 시대라고 하고 복합적인 사회라고도 합니다. 이것은 세상뿐이 아닙니다. 세상이 이렇게 복잡하게 되니까 신앙의 세계도 덩달아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이 땅에는 교회도 많고, 교파도 많고, 교리도 많고, 신자도 많고, 이단도 많습니다. 따라서 분쟁도 많고, 신앙의 형태도 가지각색입니다. 누가 옳은지, 어떤 신앙이 옳은지 분간하기가 아주 여럽습니다.
이런 때 우리가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세련된 신앙의 분별력이 요구되는 때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올바른 신앙 고백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과연 어떻게 하여야 올바른 신앙 고백을 할 수가 있는가?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을 여행하실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궁금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보더냐?"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세례 요한 같다고도 하고, 엘리야 같다고도 하고,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한 사람 같다고 하나이다."
그 대답을 들으시고 주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본다면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보느냐?" 이 물음에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이 대답을 들으시고는 아주 만족해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대답이 예수님의 마음에 쏙 드는 정확한 대답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신앙 고백을 하는 데는 몇 가지의 원칙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원칙에는 적어도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지나치게 자기 중심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짖금 많은 사람들이 신앙 고백을 하는데 보면 자기 중심적으로 하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자기 이해의 범주 안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이런 사람일 것이다" 생각하고는 자기 생각에 따라서 고백을 합니다.
여러분, 이단이 왜 생겨납니까? 그것은 자기 중심에서 "예수는 이런 사람일 것이다" 생각하고 자기 생각대로 신앙을 고백하고 주장하다가 보니까 이단이 생기는 것입니다.
유명한 신학자 가운데 볼트만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신학자였지만 사도신경을 믿지 못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적도, 신비적인 사건도, 모두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도신경을 이렇게 고쳐 놓았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며, 그는 하나님의 외아들은 아니지만 주로 믿사오며,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지 않으시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지 아니하시고" 이런 식으로 고백을 했습니다. 그는 신성도, 기적도, 모두 믿지를 못했습니다. 자기 생각으로는 그것을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신앙 고백이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중심적인 신앙 고백입니다.
지금 이런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신학자 가운데도 많이 있고, 젊은 신앙인들 가운데도 많이 있고, 심지어는 목회자 가운데도 많이 있습니다. 어떤 목사 지망생은 면접 때 사도신경을 믿느냐고 물으니까 끝까지 대답을 하지 아니했습니다.
어떤 목회자는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하지 않고 "민중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하고 기도합니다. 어떤 장로님은 기도할 때 "노동자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하고 기도합니다. 이것이 모두 자기 생각대로 하는 신앙 고백입니다. 이것은 신앙도 아니고 기도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보더냐?" 사람들은 예수를 예수로 보지 않고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와 같다고 보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예수를 어떻게 보느냐가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예수를 어떻게 보느냐" 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그러면 너는 나를 누구라고 보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던 고백을 들으신 주님은 그렇게 기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신앙 고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 고백은 지나치게 자기 중심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신앙 고백은 성령에 의한 고백이어야 합니다.
신앙 생활은 지적인 생활이 아니고 영적인 생활입니다. 물론 신앙에는 지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하지만 영적인 감화가 없이는 신앙 생활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앙 고백은 머리로만 되는 것이 아니고, 머리로 알고 있다고 해서 다 믿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신학자 볼트만은 머리로는 성경을 꿰뚫어 보앗지만 그것을 가슴으로 믿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감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령에 의한 신앙 고백은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보느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하고 고백을 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대답을 하십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알게 한 이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이말은 성령께서 알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신앙 생활은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은 성령의 감화를 받아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것이 신앙 생활이고, 그것이 고백이고, 그래야 기쁨이 있고 힘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신앙 고백은 성령에 의한 고백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역사성이 있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보다 훨씬 전부터 신앙 생활을 한 분들이 많습니다. 또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보다 월등하게 경건하게 살았고 훌륭했던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그분들이 한결같이 성령에 감동되고 성경의 감화를 받아서 여러 세기 동안 고백해 온 신앙 고백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도신경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주일 날마다 암송하고 있는 사도신경은 지금부터 1,500년 전인 기원 500년경에 만들어지 신앙 고백입니다. 이 사도신경은 적어도 1,500여 년 동안 신교와 구교와 희랍 교회를 막론하고 신앙적인 면에서, 신학적인 면에서, 성경적인 면에서, 가장 잘조화된, 가장 권위 있는, 전승적인 신앙 고백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렇게 전승된 역사성 있는 신앙 고백서를 통해서 우리들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래서 신앙고백서는 함부로 만들 수가 없고, 만들어서도 안되고, 고쳐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 고백은 역사성이 있어야 합니다.
넷째로 신앙 고백은 삶이 뒤따라야 합니다.
이것이 참 어려운 대목입니다. 신앙 생활이 어려운 것은 생활이 뒤따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신앙 생활을 할 때 글자로만 신앙 생활을 하고, 머리로만 신앙을 고백하고, 생활이 수반되지 않으면 그 신앙은 염불에 불과합니다. 베드로가 실수한 원인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서 보기 좋게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칭찬까지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천국의 열쇠까지 받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 가서 베드로는 사탄으로 몰립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 가라"고 꾸짖으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누구입니까? 베드로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이 왜 이 땅에 왔습니까? 대속물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죽으셔야 합니다. 죽지 않으면 예수님의 가치는 없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6:22에서 베드로가 죽으시면 안 된다고 극구 말립니다. 그때 예수님이 뭐라 하십니까? 주님은 "사탄아 물러가라" 하고 호통을 치십니다.
여러분, 사탄이 무엇입니까? 훼방자가 사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는 것이 사탄입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깊이 알았다면 이제 때가 왔나 보다 하고 "주여, 우리에게 이 엄청난 수난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옵소서" 하고 기도를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절대로 죽어서는 안 된다고 만류를 했으니 사탄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 고백은 입만 가지고는 안 되고 머리만 가지고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고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아무렇게나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는 하나의 원칙이 있는 것을 발견학데 됩니다.
그것은 신앙 고백은 자기 생각의 고백이어서는 안 되고, 성령에 의한 고백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성이 있는 고백으로 권위가 있고 생활이 뒷받침되는 고백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그 신앙의 고백이 비로소 참다운 고백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이 같은 고백으로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믿음의 본질(1) (요 1:1-5) (0) | 2022.01.22 |
---|---|
성령을 따르는 생활! (갈 5:16-18) (0) | 2022.01.22 |
사도 바울의 긍정직인 삶! (고전 9:1-2) (0) | 2022.01.22 |
더불어 화평을 누리라! (롬 5:1-5) (0) | 2022.01.22 |
속지 말라! (창 3:4-5) (0) | 2022.01.2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