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본질(1) (요 1:1-5)
우리들이 신앙 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믿음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찬송을 불러도, 기도를 해도, 대화를 해도, 가장 많이 사용되는 말이 이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을 설명하려고 하면 마땅히 설명하기가 곤란할 때가 많습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알기는 알 것 같은데 이것을 요령있게 정리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 믿음의 본질에 대해서 쉽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첫째 믿음은 빛입니다.
4절에 보면 "(요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 안에 생명이 있고 이 생명은 사람들속에 빛으로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가 곧 빛이라는 말입니다. 이 빛 되신 예수가 이 땅에 왔는데 어떤 사람은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받아들이지 아니했다는 말입니다. 믿음은 이 빛 되신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빛은 생명이고, 사랑이고, 길이고, 진리입니다. 요한복음에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이 생명, 빛, 사랑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주제입니다.
이 빛을 받아들여서 빛을 품고 살아가면 그가 신앙인이고, 그가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 빛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영의 양식을 주고, 은혜를 주고, 믿음을 더해 줍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빛을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들이 이 빛을 품고 살아갈 때 불의를 멀리하게 되고, 죄를 멀리하게 되고, 멸망에서 멀어지고, 심판에서 구원을 받게 됩니다. 이 상태를 "믿음이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이 빛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면하고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사람이 이 빛을 외면하고 살아가면 그의 생활속에 어두움이 찾아오게 됩니다. 이 어두움이 사람을 덮게 되면 그에게서는 빛된 생활을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불신자를 "어두움의 자식"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벼농사를 지으면 가장 골치 아픈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도열병과 벼멸구입니다. 이 도열병과 벼멸구가 언제 생겨납니까? 햇빛이 없을 때 생깁니다. 장마가 계속되어서 일조량이 적으면 도열병이 생기고 벼멸구가 생깁니다. 햇빛이 내리쬐면 도열병도 없고 벼멸구도 없어집니다. 빛이 없고 습한 곳에 벌레들이 들끓게 되어 있습니다. 원래 햇빛이 많이 내리쬐고 그늘이 없는 곳에는 벌레들이 생기지 않습니다. 빛은 이런 역할을 합니다.
세계적으로 맛 좋고 무공해로 이름난 사과는 미국 캘리포니아산 사과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1년 내내 비가 오질 않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따가운 햇빛만 내리쬡니다. 일조량이 아주 풍성합니다. 그러니까 벌레들이나 해충이 생기지를 않습니다. 농약을 뿌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켈리포니아산이라는 상표만 붙어 있으면 빛깔 좋고 맛이 있어서 마음 놓고 껍질째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곡식도, 식물들도, 햇빛이 필요합니다.
마참가지 이유로 우리 그리스도인도 예수께로부터 퍼져 나오는 이 빛을 머금어야 살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빛을 충만히 간직한 채 살아가는 사람을 성숙한 신앙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빛이라는 말입니다.
둘째 믿음은 질입니다.
4절에 보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라고 했습니다. 생명이라고 모두 똑같지 않습니다. 어두움에 묻혀서 살아가는 생명은 기실 살아 있으나 죽은 생명이고 무의미한 생명입니다. 사람도 보면 변화받은 사람이 있고 변화를 받지 못한 옛사람 그대로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 생명은 같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멸망받아 마땅한 옛날의 나와 빛 되시는 예수를 만나 과거를 십자가에 완전히 못박고 변화받은 오늘의 나와는 같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우선 질이 다릅니다. 모양이 다릅니다. 내용이 다릅니다. 색깔이 다릅니다. 품위가 다릅니다.
어느 대학교 총장님이 뒤늦게 신앙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분은 나이가 들어서 처음으로 신앙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뒤늦게 신앙의 내용을 알게 되었고, 신앙의 맛을 알게 되었고, 비로소 신앙이 무엇인가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독학생회로부터 초청을 받고 가서 어린 대학생들에게 "여러분은 일찍이 예수를 알게 되어서 얼마나 행복하십니까? 나는 이제 겨우 네 살입니다. 예수를 모르고 먹은 나이도 나이입니까? 아는 지금까지 헛살았습니다. 나는 이제 여러분의 제자입니다."라고 고백햇다고 합니다.
예수를 알고 보니까 예수를 알지 못했던 그 옛날의 나와, 예수를 알고 변화를 받는 오늘의 나를 비교해 볼 때 그 질이 같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질입니다. 내용입니다. 모양입니다. 가치입니다.
여러분, 질이 무엇입니까? 사람은 질이 좋아야 합니다. 물건도 질이 좋아야 합니다. 그래야 값이 있습니다. 우리가 질을 따질 때는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는 품질입니다. 이것을 아가도스라고 합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신앙이든, 사랑이든, 불문하고 품질이 좋아야 합니다. 사람이 약하다고 하는 말은 이 아가도스가 좋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꾸만 거짓말을 하고 속이고, 사기 치고 그럽니다.
품질이 좋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국산품이 자꾸만 외면을 받는 것도 이 품질이 좋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물건을 사서 며칠 쓰다 보면 고장나 버립니다. 견고하지가 않습니다. 이것은 품질이 안 좋다는 말입니다.
사랑이 결국 비극으로 끝나는 것도 그 사랑의 품질이 좋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 사랑의 품질이 좋았다면 그 사랑 속에는 비애의 요소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고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 어디에 비애가 자리를 잡을 틈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품질이 좋다면 도중에 떨어져 나가거나, 갈등을 느끼거나, 신앙을 이용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신비주의에 빠지거나 그러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자꾸만 위태위태한 것은 믿음의 품질이 나빠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믿음 생활을 하면서도 변화를 받지 못하고 그냥 구태 의연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도 믿음의 품질이 좋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믿음이든, 사람이든, 물건이든, 품질이 좋아야 합니다.
다음은 모양입니다. 이것을 칼로스라고 합니다. 질을 말할 때는 품질만 좋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 모양도 좋아야 합니다. 사람이 마음씨가 곱고 품질만 좋다고 모두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요새 젊은이들은 마음씨만 좋다고 결혼하지 않습니다. 품질도 좋고 모양새도 아름다워야 그게 고루 갖춘 미인이 되는 것입니다.
또 물건이 품질이 좋다고 다 잘 팔리는 것은 아닙니다. 품질도 좋아야 하지만 모양 또한 좋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미제 물건보다 일제 물건을 선호하는 것은 질도 좋지만 우선 모양이 좋기 때문입니다. 미제 물건은 튼튼하고 품질은 아주 뛰어나는데 모양새가 미국사람을 닮아서 크고 멋이 없습니다. 그래서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잃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신앙도 "질"입니다. 여기서 질이 좋다는 말은 품질과 모양이 다같이 좋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알고 변화를 받게 되면 먼저 질적인 면에서 변화를 받게 됩니다. 그러고 나면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이 변화를 받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생활에 질서가 생기고, 내용이 주어지고, 기쁨이 있고, 베푸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모양입니다. 이것이 믿음을 가진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질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셋째, 믿음은 소망입니다.
5절을 보면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어두운 곳에서는 앞을 볼 수가 없습니다. 앞이 보이질 않습니다. 깜깜한 밤에 보이지 않는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참으로 답답한 일입니다. 한발짝 앞에 무엇이 있는지, 웅덩이가 있는지, 갈길이 얼마나 남았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저하고, 넘어지고, 더듬고, 그 밤을 헤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어두운 곳에 빛이 비추이면 어두움은 순식간에 물러가고 대신 감추어져 있던 길이 환하게 나타납니다. 그 환하게 나타난 길을 따라 걷는 걸음은 확신이 있고 주저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넘어질 염려 없이 자신 있게 걸어가게 됩니다.
본문에 보면 빛이 어두움을 비추었다고 했습니다. 깜깜하던 곳에 빛이 비추었습니다. 순식간에 어두움은 물러가고 감추어져 있던 길이 선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얼마나 시원했겠습니까? 미래가 훤히 내다보입니다. 나의 운명도 훤하게 내다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의 장래가 시원스럽게 내다보입니다.
빛이 있는 생활은 미래를 내다보고, 미래에 약속된 생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내세를 내다보고, 천국을 소망하며,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알고 살아간다는 것은 굉장한 축복입니다. 그래서 미래를 훤히 내다보고 사는 생과, 내다보지 못하고 사는 생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분, 기차를 타기 위해서 서울역에 가시거든 1등 대합실과 3등 대합실을 유심히 한번 보십시오. 보시면 흥미 있는 광경을 보실 것입니다. 개찰이 시작되면 1등 대합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여유 있게 천천히 걸어 나갑니다. 그런데 3등 대합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서로 먼저 타려고 뛰고 밀치고 야단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1등 대합실의 손님은 고급 인생이고 3등 대합실의 손님들은 하급 인생이라서가 아닙니다. 단지 1등 대합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자기 표에 좌석 번호가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천천히 가도 내 자리는 있습니다. 구태여 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3등 손님은 뛰지 않으면 내 자리가 없습니다.
늦게 타면 서서 가야 합니다. 그래서 뛰는 것입니다. 이 말은 미래가 보장되지 아니했다는 말입니다. 미래가 보장되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그렇게 뛰고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미래를 훤히 내다보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자신의 운명까지도 샅샅이 알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끝까지 자신의 믿음을 지키고 갈 길을 다 가면 면류관이 주어질 것이라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이 세상에서 주저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고백하기를 "나는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미래를 알고 믿음을 가진 사람의 자신 있는 모습입니다.
스데반이 돌더미 속에서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하늘을 보았을 때 그를 기다리며 두팔 벌려 영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스데반이 왜 슬퍼하고 누구를 원망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미래를 보고, 앞을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소망이고, 미래입니다. 이 미래가 있는 사람은 결코 인생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어떤 부인이 남편에게 10년 동안 전도를 했습니다. 그런데도 남편이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어느 날 남편은 밤늦게 술에 취해서 들어오면서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또 술상을 차리라고 합니다. 얼마나 밉겠습니까? 부인들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이 꼴입니다. 그런데도 이 부인은 아무 소리하지 않고 술상을 차렸습니다.
그랬더니 남편의 친구들이 의아해합니다. 자기의 부인들은 그 정도면 난리가 날 일인데 아무 소리하지 않고 순순히 대접을 잘 해주니 궁금해서 물었답니다. 이 믿음 좋은 부인이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제 남편에게 10년을 전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이제 포기하고 보니 나는 천당에 갈 것이고 저 사람은 지옥으로 갈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살 동안만이라도 편안하게 대접을 잘 해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미래가 확실한 사람은 살아가는 모습이 다르고, 길도 다를 뿐 아니라 생각하는 것도 다릅니다. 약속된 미래를 보고, 믿고 살기에 오늘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약속된 미래가 있는 사람은 오늘 조금 어렵고, 고되고, 가난하고, 병들고, 실패한 것이 별로 문제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문제가 있다면 미래가 없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단지 오늘만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까? 그래서 믿음은 소망이고 미래입니다.
본문에 보면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한집에서 살고 있지만, 한 사람은 영에 속한 사람이고, 한 사람은 육에 속한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두사람의 생의 질이 같을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믿음은 빛이고, 질이고 소망이고 미래입니다. 이같이 내용 있는 믿음이 여러분들에게 주어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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