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본질!(3) (히 11:1-3)
믿음에 대해서 계속해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믿음이란 보는 것이고, 눈을 뜨는 것이고, 싸우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시간에는 이 믿음을 보다 사실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이라는 말이 굉장히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성경 전체에 "믿음으로"라는 말이 232번이나 나오고 있고 히브리서 11장에서만도 25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을 믿음장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믿음은 무엇을 가리킵니다. 로마서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고 했습니다. 히브리서에서도 "(히10:38)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 속에 들어 있는 핵심은 모두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계명이 10가지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10계명이라고 합니다. 이 열 가지를 이사야 선지자는 여섯 가지로 요약을 했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이것을 세 가지로 요약했고, 하박국 선지자는 이것을 한마디로 요약을 했습니다. 그 한마디가 하박국 2:4에 나와 있는 말인데 그것이 "믿음으로 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산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이 믿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믿음으로 살다가 죽은 많은 사람들을 11장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졌던 신앙의 형태를 히브리서는 11장 서두에서 세 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믿음은 감히 인간으로서는 바라볼 수 없는 것을 바라보게 하는 능력이라는 말입니다. 여기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실상"이라는 말은 기초, 근거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때로 소망을 갖게 되는데, 그 소망을 갖게 되는 데는 어떤 기초가 있어야 하고,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무턱대고 소망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어떤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이때 그 근거를 믿음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라는 지방에서 살았습니다. 부잣집에서 태어나서 곱게 자랐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안정되고, 평안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명령이 그에게 주어집니다. "너는 고향을 떠나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이때 아브라함은 망설입니다. 가야할지, 말아야 할지, 가는 곳이 좋은 곳인지, 고난의 길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망설이다가 마침내 아브라함이 집을 떠납니다.
이 같은 아브라함의 행동은 이치로 따진다면 무모한 것입니다. 확실한 보장이 없습니다. 계약서도 없습니다. 구체적인 내용도 없습니다. 우리들 같았으면 말할 것도 없이 한마디로 거절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떠나라는 말씀 한마디를 믿고 고향을 떠납니다. 어떻게 보면 무모하리만큼 당돌한 아브라함의 행동의 근거가 무엇이냐 하면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행동에 옮긴 것입니다. 이때 이 말씀이 곧 "실상"입니다. 이를테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그 말씀이 곧 실상으로 나타날 것을 믿고 고향을 떠난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곧 실상이라는 말씀입니다.
또 모세를 보십시오. 모세가 백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넙니다. 얼핏 생각하면 사람이 바다를 건넌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한두 사람도 아닙니다. 배가 있어도 그 많은 사람을 실어 나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비행기도 없지만 있어도 불가능합니다. 헤엄을 쳐서 건넌다는 것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그들은 건넜습니다. 어떻게 건넜느냐 하면 믿음으로 건넜습니다.
성경에 소개는 되지 않았지만 전설에 의하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홍해를 건널 때 물을 밟고 건너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모세가 바닷가에 서서 망설입니다. 밟으면 갈라진다고 했지만 밟아서 갈라질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여러분, 한강에 가서 한번 서 보십시오. 그때 모세가 가졌던 생각 그대로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모세가 망설이고 서 있을 때 뒤에서 그 모습을 보고 서 있던 여호수아가 모세를 바다로 떼밀었다는 것입니다. 엉겁결에 모세가 앞으로 넘어지면서 첫발이 바닷물에 닿게 되자 바다가 순식간에 쫙 갈라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면 된다고 약속하신 것을 믿고, 그렇게 하면 그것이 실상으로 나타날 것을 믿고 밟은 것입니다. 그랬더니 바다가 갈라졌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또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일곱 바퀴 돕니다. 하나님이 일곱 바퀴를 돌면 성이 무너질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백성들을 이끌고 그 무더운 날에 열심히 성을 돌았습니다. 개중에는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불평도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돕니다. 그랬더니 마침내 그 성이 믿은 그대로 산산이 무너져 내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실상으로 나타났습니다.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감히 바랄 수 없는 것을, 이치로 따지면 불가능한 것을, 믿음으로 그것을 바라볼 때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현실적이거나 너무 타산적인 사람은 이 같은 믿음 속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골라 쓰실 때 그 기준이 바로 이 같은 점을 보십니다. 그래서 믿음은 사람의 생각 그 이상을 바라보게 하고, 믿음의 힘은 새세계를 보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결혼하는 두 젊은이를 보십시오. 믿음이 아주 좋습니다. 두 사람이 결혼을 하면 잘살 줄을 믿고 결혼을 합니다. 조금도 의심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굉장한 모험입니다. 그들이 잘살 것인지 못살 것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사랑의 힘으로 잘살 것이라는 것을 굳게 믿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그들로 하여금 미래를 밝게 내다보게 해줍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이 같은 믿음이 있기를 빕니다.
둘째 믿음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해 주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증거"라는 말은 "확신"이라는 뜻입니다. 이를 테면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는 내적인 확신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노아에게 앞으로 이 세상을 홍수로써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큰 배를 만들되 산 위에서 만들라고 하십니다. 이때 노아가 하늘을 쳐다봅니다. 홍수는커녕 이슬비도 오지 않게 생겼습니다.
그 땅은 원래 비가 오지 않는 땅입니다. 홍수가 쏟아질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지금까지 홍수가 온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홍수가 올 것이니 산 위에서 배를 만들라고 하십니다. 웃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런 신탁을 받았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들도 분명히 웃었을 것입니다. 비가 온 일이 없는 땅에서, 그것도 산 위에서 배를 만들라 하십니다.
그런데 노아는 보았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이 땅에 홍수의 물결이 넘쳐서 온 세상을 쓸어가는 것을 영적인 안목으로 봅니다. 그래서 그는 산 위에서 그 무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방주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비웃습니다. 조롱합니다. 그들의 비웃음은 믿음의 눈이 없으니 당연한 것입니다. 얼마나 차원이 다른 두 시야입니까? 이렇게 믿음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해 주는 힘입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고향을 떠날 때 친척들이 와서 못 가게 만류합니다. 친구들과 이웃들이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붙잡습니다. 인간적인 견해로 보면 그것은 무모한 짓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보았습니다. 넓게 펼쳐진 가나안의 땅이 보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 위에 바다의 모래, 하늘의 별처럼 많은 자손들이 살아가고 있는 그 모습을 아브라함은 믿음의 눈으로 내다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그것도 보지 않고 그런 무모한 짓을 했겠습니까? 이 눈이 없는 사람은 못 가게 만류를 했고, 이 눈이 있는 아브라함은 만류를 뿌리치고 떠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여호수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리고 성을 일곱 바퀴 돌면 무너질 것이니 돌라고 하십니다. 이것도 무모한 이야기입니다. 그 금성 철벽 여리고 성이 크레인으로, 중장비, 기중기를 동원해서 무너뜨려야 그 성이 저절로 무너지겠습니까? 그러나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앞을 보았습니다.
그의 눈에 이 성이 무참하게 무너지는 모습이 보입니다. 뒤따르는 사람들은 불평을 하면서 뒤를 따랐지만 여호수아는 확신을 가지고 돌았습니다. 그런데 그 성은 여호수아가 본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믿음을 가진 사람과 믿음이 없는 사람과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보고 나서 믿으려고 합니다. 전도를 하다보면 자꾸만 보여달라고 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병도 고쳐 보라 하고, 잘살게도 해 보라 하고, 신통력을 한번 보여 보라고 합니다. 그런데 신앙은 보고 믿은 것이 아닙니다. 보고 믿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은 먼저 믿고, 후에 일어날 실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보아도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노아가 청명한 날씨만 보았더라면 산꼭대기에서 배를 만들 수 있었겠습니까? 아브라함이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허허 벌판만을 보았더라면 어찌 가나안까지 갔겠습니까?
여호수아가 그 금성 철벽으로 둘러 쌓은 것만을 눈으로 보았더라면 어찌 그 성을 돌았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것들은 때로 우리들을 실망시킵니다. 그래서 믿음의 눈을 떠야 합니다. 그래야 이 같은 안목을 가지고 앞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해 주는 능력입니다.
셋째, 믿음은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11장 2절에 보면 "증거"라는 말이 나옵니다. 증거라는 말은 영어로 굿 리포트(good report)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할 수 없는 것을 했더니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노아가 비도 없는 땅에서, 그것도 산꼭대기에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모두가 비웃었고 조롱했습니다.
그런데도 노아는 묵묵히 그 조롱을 다 감수하면서 그 일을 다 해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정말 홍수 심판이 이 세상에 사실로 나타났습니다. 온 땅을 이 홍수가 휩쓸어 갔고 그 속에서 노아의 가족만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증거입니다. 그렇게 했더니 결과가 좋았습니다. 이것이 증거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증거입니다.
여호수아도 믿음으로 여리고 성을 일곱 바퀴 돌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헛수고한다고 투덜댑니다. 생각하면 헛수고하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렇지만 끝까지 돌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결과는 좋았습니다. 결국 그 철벽이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창 한번 쓰지 않고 여리고 성을 점령하게 됩니다.
이것이 증거입니다. 믿었더니 이 같은 증거를 얻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줍니다. 또 좋은 증거를 가져다 줍니다.
이렇게 본다면 믿음을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은 바라볼 수 없는 것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지면 소망을 갖게 되고, 천국을 소유하게 되고, 내세를 갖게 됩니다.
둘째는 믿음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합니다. 믿음의 눈은 천국을 보게 하고 영적인 안목을 갖게 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합니다.
셋째는 믿음은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믿음은 불가능 속에서 가능을 찾게 해 줍니다. 죽을 자리에서 살아나게 합니다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나게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이 같은 믿음이 여러분들에게 확고하게 자리 잡히는 축복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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