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본질! (2) (요 9:24-25)
믿음의 본질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믿음은 빛이고, 질이고 소망이고 미래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시간에는 두 번째로 지난번과는 좀 다른 각도에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믿음은 "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봄으로써 확실해집니다.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 배를 타고 갑니다. 그런데 갑자기 풍랑이 일어 배가 뒤집힐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깨웁니다. "주여,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이 얼어나시며 제자들을 꾸짖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왜 두려워하느냐?" 그러십니다.
이 말을 직역하면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하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눈 뒀다 보지 않고 뭣하느냐?"는 뜻입니다. 이 말은 방금 전 우리가 배를 타기 전에 온갖 병자들을 기적같이 고쳤는데 그 고치는 모습을 보고서도 지금 의심하느냐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제자들에게 "들의 백합하를 보라 공중의 새를 보라"고 하십니다. "새가 농사를 짓더냐, 백합이 길쌈을 하더냐, 그런데도 굶주리지 않고, 헐벗지 않는 것은 모두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하시기 때문이니, 그것을 보고서 믿으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보지 않고 눈 뒀다 뭣하느냐 그 말입니다.
신앙 생활은 보는 생활입니다.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보고, 꽃과 새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보고, 이웃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을 보고,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을 보고 하나님의 섭리를 보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한번도 눈을 떠 본 일이 없는 소경을 눈을 뜨게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장님이 눈을 뜨게 해 주는 사람을 선지자로 여겼습니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님만은 선지자가 아니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눈뜬 소경을 불러 놓고 심문합니다. "저가 네 눈을 뜨게 해주었느냐?" 이 눈뜬 소경이 생각하니까 그렇다고 하면 예수님도 잡혀 가고, 자기도 벌받을 것 같아서 말하기를 "나는 그가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옛날에는 내가 소경이었는데 지금 보이는 것만은 사실입니다."고 대답했습니다.
신앙이 바로 이것입니다. 전에는 우리 눈에 하나님이 안 보였습니다. 예수님도 안 보였고, 십자가도, 죄도, 구원도, 천국도, 지옥도, 믿어지지 않았고, 보이지도 아니했습니다. 그래서 못 믿었었습니다. 믿기는커녕 생각조차도 하지 못했던 것들입니다. 그래서 전에는 눈은 떴으나 모두 소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들의 눈에 이것들이 다 보입니다. 구원도 보이고, 천국도 보이고, 지옥도 보이고, 심판도 확실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우리는 죽습니다. 이것은 생각만 해도 두렵고 떨립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런 마음을 가지고 계시면 여러분은 모두 믿음이 있는 분들이고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마름이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어떤 분들은 내가 지금 구원을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모르겠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도중에 믿으신 분들은 그래도 신앙이 분명해서 확신을 갖고 있는데 모태 신앙을 가지고 있는 분들은 대부분이 긴가민가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구원을 받은 것도 같고 또 곰곰히 생각해 보면 한 받은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자신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염려하지 마십시오. 한 번 이렇게 측정을 해 보십시오.
주일 날 한번 예배드리지 말고 놀러 가 보십시오. 그랬는데도 하루 종일 마음이 편안했다. 즐겁기만 했다면 그것은 큰일입니다. 하루 종일 마음이 불편하고 두려워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죄송하고 한 번만 할 일이지 두 번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철저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죄를 지으면 가슴이 덜컹해야 합니다. 죄를 지었는데도 편안하게 잠을 잘 정도라면 그것도 큰 일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죄를 지으면 두려운 마음이 생깁니다. 지금 하나님과 영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보고, 천국을 보고, 심판을 보고, 내일을 보고, 우리의 미래의 운명을 보는 ㄱ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의 눈으로 앞을 보는 신앙인은 미래에 약속된 축복을 믿고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절대로 이 길에서 떨어져 나가라 해도 나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보는 것입니다.
둘째로 믿음은 "눈을 뜨는 것"입니다.
믿음은 "눈을 뜨는 것"입니다. 눈을 떠서 지금까지 보지 못하던 것들을 보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머리로만 믿고, 지성으로만 믿던 신앙은 눈을 떠서 보아야 합니다. 여기 눈을 뜬다는 말은 철이 든다는 말입니다. 철이 들면 지금까지 꽉 막혔던 마음이 열립니다. 눈일 열립니다. 생각이 열립니다. 그러면 아이가 의젓해집니다. 이것이 성숙해져 가는 과정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여호수아는 지금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만이 목적입니다. 오로지 그 일에만 골몰해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일만 계속합니다. 그런데 가다 보니까 완전 무장한 장군 하나가 칼을 빼들고 서 있습니다. 깜짝 놀란 여호수아가 "너는 누구냐?"하고 물으니, 그가 "나는 하나님의 군대 장관이다"라고 합니다.
그가 바로 천사장 미카엘입니다. 그가 여호수아에게 명령합니다. "이곳은 거룩한 곳이니 신을 벗으라." 그때 여호수아가 비로소 신령한 눈을 뜨게 됩니다. 이때 여호수아가 눈을 뜨고 보면서 발견한 것이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여기가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까 가나안, 그곳이 천국이었습니다. 그곳이 바로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마구 밟고 지나갈 그런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신을 벗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여호수아가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발겨난 것은 하나님이 이미 그들이 앞에 있는 적들과 싸워 이기게 하기 위해서 군대 장관인 미카엘을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여호수아는 그때부터 마음 놓고, 안심하고 싸웁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눈을 뜨고 보니까 나 혼자가 아닌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나 혼자인 줄 알고 두려워도 했고, 무서워도 했는데, 눈을 뜨고 보니까 내 곁에 하나님이 계셨고, 내 앞에 주님이 계시고, 내 속에 하나님의 영이 내주해 계신 것이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뭘 주저할 것입니까?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용기를 주고, 힘을 주고, 담대함을 주는 것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우리 동네에서는 거칠 것이 없었지만 남의 동네를 통과해서 길을 가게 될 때는 겁이 나곤 했었습니다. 힘센 아이들이 몰려와서 귀찮게 굽니다. 그래서 부득이 남의 동네를 지나가게 될 때는 제발 아이들을 만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형들과 함께 친구들과 함께 지나가게 될 때는 오히려 이놈들이 좀 나와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옆에 힘이 센 보호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보호자가 있기 때문에 나에게 힘이 솟아났던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눈을 뜨고 보니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서 군대 장관을 이미 파견하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는 그렇지 않아도 모세가 죽은 후에 겁도 나고, 두렵기도 하고, 책임도 막중하고 해서 내심 걱정이 많았던 중인데, 그때 얼마나 힘이 되었겠습니까?
여러분,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눈을 떠서 지금 여러분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이 세상을 힘있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눈을 뜨는 일입니다.
셋째로 믿음은 "싸우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싸우는 것이고, 전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제일 먼저 찾아오는 것은 기쁨이 아닙니다. 행복도 아닙니다. 그것은 전쟁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를 모르고 살아갈 때는 아무것도 아니고 거릴낄 것 하난 없던 것들이 예수를 믿고 보니까 모두가 양심에 걸리고, 죄책감이 생기고, 마음이 편치가 않습니다.
옛날에는 적당히 살았고, 적당히 먹었고, 적당히 눈도 감았었는데, 그래서 마음에 거리끼는 것도 별로 없었고, 사탄과 싸울 일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사탄과 한통속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죄를 지으면 사탄이 와서 위로까지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갈등도 없었고 고민도 없었고 그런 대로 살 만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알고 아니까 모두와 싸워야 합니다. 모두가 부딪칩니다. 유대인들이 애굽에서 살 때는 육신의 고통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때가 되면 밥을 주었고, 밤이 되면 잠을 자면 되었습니다. 싸울 일도 없었고, 고민해야 할 일도 없었고, 근심해야 할 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약속하셨다는 가나안을 가려고 출애굽을 해서 가다 보니 앞길에 아말렉 군대가 떡 버티고 서있습니다.
애굽에서 나오지 아니했더라면 싸울 일도 없었을텐데 출애굽을 함으로써 불가불 싸워야 하게 생겼습니다. 애굽에서 그냥 살면 좀 고되기는 하고 남의 나라에서 종살이는 하겠지만 고민을 하거나 싸울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들은 출애굽을 함으로써 수많은 싸움을 싸우게 되었고, 40년 동안이나 온갖 고생을 다 하다가 마침내 천신 만고 끝에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어두운 세상에 깊이 묻혀 살면 양심의 갈등이나 고민 따위는 하나도 없이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다 그런거지, 뭐 그런거야" 하고 자위하고 살면 이 세상은 그런 대로 살만한 곳입니다. 고민도 없고, 주일 날 아침만 되면 "갈까 말까"하는 망설임도 필요없고, 유쾌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이 별것입니까? 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고민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세상에 묻혀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세상이 보기 싫다고 해서 소경으로야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오늘 편하자고 애굽에서 자자 손손이 종살이를 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살아갈 수야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러자니까 우리들이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과 싸우고, 세상과 전쟁하고, 사탄과 격전을 벌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또 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기로 했으면 하나님은 나의 마음을 세탁을 하듯이 한꺼번에 깨끗하게 씻어서 다시는 구정물이 내 속에서 나오지 않도록 해 주시면 좋겠는데, 내가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았다 하는 확신도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 마음속에는 여전히 죄성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투기가 일어나고, 음란이 솟아나고, 욕심이 터져 나오고, 시기와 부패한 마음이 자꾸만 솟아나옵니다.
그때마다 마음에 의심이 생깁니다. 자신에 대해 "내가 왜 이러나, 내가 아직도 가짜가 아닌가?" 하고 의구심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사도 바울도 그래서 탄식을 했습니다. "내 속에서 내가 원하는 선을 행치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롬 7:19)하고 탄식을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경건을 연습하라고 했습니다. 죄는 습관입니다. 거짓말을 쓰기 시작하면 습관이 되고 나중에는 양심이 무뎌지고 끝내는 죄를 지을 용기까지도 생깁니다. 그런데 경건을 연습하면 경건 생활이 내적으로 습관화됩니다. 그래서 주일 날 교회에 가는 것도 생각해 보고 가는 것이 아니라 습관화되어서 주일 날이면 저절로 발걸음이 교회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이때 "나는 습관 신앙이다. 나는 너무 의무적으로 신앙 생활하고 십일조도 의무적으로 하고, 기도도 밥상이 오면 저절로 눈이 감아진다. 이것은 형식 신앙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되기까지는 하루 이틀이 걸렸겠습니까? 그만큼 수고가 있었고, 내적인 경건이 바탕이 되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 신앙 위에 조금만 더 뜻을 부여하고, 조금만 더 의미를 부여하면 그 신앙이 얼마나 훌륭한 신앙이 되겠습니까?
사람은 너무 완벽하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떤 분은 그럽니다. "나는 아직 교회에 못 나갑니다. 나갔다 하면 철저하게 나가야지요." 이게 병입니다.
오늘 뜨문뜨문 신앙 생활을 할지라도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이 다음 다 늙어서, 할 일이 없어서 시간이 많을 때, 철저하게 신앙 생활하겠다는 사람보다 훨씬 낫습니다. 차가 언덕 길을 내려갈 때 신나게 내려가다가 갑자기 정차하는 것보다 처음부터 뜨문뜨문 브레이크를 밟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고 좋습니다.
신앙 생활은 용기입니다. 용기 없는 사람은 이 핑계 저 핑계해서 회피하지만, 용기 있는 사람은 싸울 각오를 가지고 출애굽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보는 것이고, 눈을 뜨는 것이고, 싸우는 것입니다. 이렇게 싸워서 이기는 사람만이 천국을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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