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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리와 죄인의 친구(마태복음 11장 12절~19절)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귀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여러분도 잘 아시는 우화입니다. 한 농부가 거위를 키웠는데 어느 날 거위 둥지를 보니 황금알이 하나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무엇인가, 어디서 온 것인가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키우고 있는 거위가 황금알을 매일 하나씩 낳는다는 것을 알고는 썩 즐겁고 기뻤습니다. 이대로 계속된다면 큰 부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탐욕에 취하고 성급해진 그는 '저 거위 뱃속에는 얼마나 많은 금이 들어 있을까?'하고 그 거위를 죽여서 배를 갈라보았습니다. 그러나 뱃속에는 금덩이는커녕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에게는 현대문명이라고 하는 큰 맘몬(mammon)이 있습니다. 생산과 과학과 그리고 늘 사용하는 컴퓨터라는 괴물이 있습니다. 이 현대문명 앞에서 생각해봅니다. 황금알이 아무리 귀하고 놀라워도 그것은 거위 뱃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모든 문명이 굉장한 것 같아도 그것은 결국 인간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 자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간의 소중함을 잊어버리고 화려한 건물과 생산성, 그리고 우리 앞에 있는 이 문명이라고 하는 것에 도취되어 있습니다. 참 마음 아픈 일입니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조셉 레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는 인간성의 모퉁이 돌이다(Jesus is the comer stone of humanity)"--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성의 모퉁이 돌이 되신다, 그를 지워버리면 세상은 그 기초부터 흔들리고 무너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많은 교훈을 듣고 확인하면서 그 속에서 공통적인 얘기를 듣습니다. 10년 사이에 어쩌면 그렇게 큰 차이가 있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결혼'의 문제입니다. 결혼할 때에 보면, 학벌이다, 인물이다, 가정이다, 가문이다, 재산이다…… 왜 그렇게 조건이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볼 때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데 아무튼 결혼조건이 굉장합니다.
그런데 결혼생활 10년이 지나고 나면 생각이 싹 달라집니다. 다른 것들은 다 쓸데없고 인간성만이 남습니다. 사람이 좋아야 했는데, 10년 전, 결혼하기 바로 전에 인간성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어야 하는데, 라고 말입니다. 이상하게도 그 때에는 옆에서 제대로 설명을 해줘도 못 알아듣습니다. 아무리 이것이 중요하다고 얘기해봐도 따르는 사람도 없고, 알아듣는 사람도 없고, 들으려고 하지도 않아요. 그런데 10년만 지나고 나면 달라집니다. 아니다, 남는 것은 인간성뿐이다, 라고 뒤늦게 깨닫고 뉘우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이미 때는 지났습니다.
오늘의 세계가 당면한 문제는 인간 자체의 문제요, 인간성의 문제입니다. 인간의 인간됨이 지식이나, 소유나, 지위나, 힘이나, 권력에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종종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 많은 공부도 인간성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 공부를 많이 했으니까 좋은 사람일 것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그것은 큰 잘못입니다. 흔히 말하는 일류대학 출신이라고 해서 인간성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가끔 이런 얘기까지 듣습니다. "아무개 가문하고 사돈을 맺을까?"하는 소리를 들은 어떤 분이 이렇게 말합니다. "지가 누군데 감히 우리 가문을 넘보나?" 이것, 참 답답한 사람입니다. 지가 뭔데? 인간이지요. 자기는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그렇듯 차등의식을 가지고 거만합니까? 여러분, 사실 이것은 철학의 문제입니다. 인생관의 문제입니다. 그가 어떤 인생관을 가지고 있느냐에 달렸습니다. 극단적인 예로 공산주의는 유물사관(materialism)에 기초합니다. 모든 것은 물질이 그 근본이다, 사람은 포유류에 속하는 동물일 뿐이다, 동물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없어지고 오늘날과 같은 불행을 자초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문제는 곧 그가 지닌 종교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세계여행을 많이 다니시는데 주로 무엇을 봅니까? 여행을 다녀보면 참 이상한 게 있습니다. 종교가 그렇게 중요할 수가 없습니다. 잘못된 종교를 가지고 있는 민족은 형편없어요. 가령 티베트 같은 곳은, 아침에 잠이 깬 사람들이 돼지우리에서 나옵니다. 원숭이, 돼지, 고양이, 개…… 사람과 동물이 함께 자고 부시시 일어나서 같이 나옵니다. 왜요?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사람과 동물은 하나다, 전생에 내가 개일 수고 있고, 또 저 개가 나를 유독히 따르는 것을 보니 우리 어머니가 죽어서 개가 되었나보다--흔히 말하는 '전생'의 개념, 윤회설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종교의 테두리 안에서는 당연히 그러해야 합니다. 요새 우리가 '신토불이(身土不二)'--'사람과 흙은 본디 둘이 아니고 하나다'라는 말을 함부로 쓰고 있습니다. 환경을 보호하겠다는 것은 좋지만 신토불이는 불교 철학입니다.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사람이 흙덩이라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모독하는 일이 될까 걱정입니다. 인도에 외교관으로 가 있던 우리 교회 교인이 겪은 일입니다. 어느 날 저녁, 미리 세워둔 차를 뒤로 후진시켰는데 그 자리에 아이들이 놀고 있는 것을 미처 보지 못했답니다. 그래서 그만 한 아이가 차에 치어 죽었습니다. 이 분이 아이를 들고 그 어머니를 찾아갔습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아이가 차 뒤에서 노는 것을 못보고 차를 후진시키다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아이의 어머니는 태연하게 말합니다.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만, 좀 보상이라도 해드리고 싶습니다." "아니예요, 아이들은 많은데요, 뭐." 또 그것이 아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그렇게 태어났다가 그렇게 죽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고 대답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종교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종교를 가지고 있는 민족마다 지지리 못사는 것입니다. 알거나 모르거나 인생의 문제, 인간의 문제는 종교의 문제입니다. 바른 종교가 있을 때에 인간이 인간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성의 모퉁이 돌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참 인간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의 정체감은 이러합니다. 하나님은 아버지로,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 이웃은 하나님의 자녀된 형제로, 세계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아름다운 세계로, 역사는 하나님의 손에 있는 섭리로, 종말은 하나님의 뜻의 실행으로, 그리고 모든 것은 합동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으로 믿고 그 안에 살아갑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크게 두 가지 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에로스적 인간관입니다. 동물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 인간의 세계에서 신의 세계로, 가장 낮은 처지와 차원에서 높은 세계로 지향하는 그런 의미의 인간, 세계관입니다. 또 하나, 아가페적 인간관입니다. 본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타락했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본래적 의미를 가장 귀중하게 여기고, 다시 그것을 회복해야 한다는 위치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아가페적 인생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 본질은 하나님이시요, 그 근본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몸소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인간성의 신학적 의미입니다. 그 속에 하나님 됨의 계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 지 그것을 우리에게 말씀해주심과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된 인간, 즉 바른 휴머니즘(humanity)를 계시해주십니다. 그래서 참 사람의 본래성이란 뭔가, 참 사람의 정체는 뭔가, 그 사는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참 사람이란 무엇을 즐기며 어떤 행복으로 살아가야 되는가, 또한 삶의 보람과 뜻은 어디에 있는가--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진정한 참 사람의 모습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우리에게 계시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본래적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자녀로 돌아가도록 역사 해주십니다. 구원이란 바로 그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봅시다. 예수님 자신이 친히 사용하신 칭호가 있습니다. 스스로 당신을 가리켜 '인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자(人子), 한자 그대로 번역을 하면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헬라어로는 '호 휘오스 투 안트로푸'라고 하는데 이 또한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말로는 '벤 아담'입니다. 이는 '아담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또 아랍말로는 '바로나샤'라고 합니다.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어쨌든 이 '인자'라는 말이 신약성경에 무려 82번이나 나옵니다. 전부가 예수님 자신이 사용하십니다. '인자가……' 다시 말하면 나는 인자다, 사람의 아들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직 하나의 예외가 있습니다. 그것은 스데반이 순교하기 직전에 한 말입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 7:56)"--하늘을 쳐다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인자라고 부릅니다. 이것 이외에는 전부가 예수님 자신이 쓰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을 쉽게 한번 풀이해봅시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나는 사람이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왜 예수님께서 '나는 사람이다'하고 말씀하셨을까, 이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물론 인자라고 하는 이 말은 종말론에 있어서 역사 끝에 나타나시는 하나님 자신의 계시적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또 이런 재미있는 역설적 해석이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사람들 속에 살면서 나는 사람이다, 하십니다. 생각해보세요. 사람이 자기를 가리켜 굳이 사람이라고 할 것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나는 사람이다, 말씀하십니다. 그런가하면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예수님께 드린 칭호가 있습니다. 당신은 메시야입니다, 당신은 랍비입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렇게 부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반대로 나는 사람이다, 하고 호칭하신 것입니다. 이 호칭의 관계는 묘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 속에 휴머니티가 있습니다.
좀더 나아가서 일반적인 사람들, 혹은 예수님을 비난하고 괴롭히는 원수들은 예수님을 비방하면서 뭐라고 불렀습니까? 오늘의 본문대로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19절)"라고 했습니다. 이 '세리'라는 말은 참 듣기 싫은 말입니다. 이들은 민족 반역자요, 돈만 아는 사람이요, 윤리 도덕도 없는 사람입니다. 좌우간 당대의 사람들이 얼마나 세리를 미워했는지,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거지가 돈을 달라고 구걸할 때에 누군가가 돈을 줍니다. 그래, 거지는 좋아라 하는데 다른 누군가가 그에게 "지금 돈을 준 사람은 세리요"하면 거지는 이 돈을 도로 던져버렸답니다. "죽어도 세리 돈은 안 받아"하고 소리지릅니다. 그만큼 미워하고 멸시했습니다. 그런데 달갑지 않게도 예수님의 별명이 "세리와 죄인의 친구"입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인간성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되시면서 becoming a man, 사람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이해한다는 얘기가 아니요, 사람을 위해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멀리서 사랑한다는 얘기가 아니요, 친히 사람이 되셨습니다.
미국의 청년 정치가였던 존 에프 케네디(Kennedy, John F.)는 참 짧은 인생을 살았습니다마는 그가 미국 역사, 혹은 세계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압니다. 바로 그의 비서로 11년 동안을 일했었던 이블린 링컨은 「여비서가 본 인간 케네디」라는 책을 썼는데 그것이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그 내용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Look at me, I am the great'--'나를 보라, 나는 위대한 사람이다'라며 저마다 자기가 잘났다고 떠듭니다. 그런데 케네디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상원의원이었을 때에도 겸손했고 대통령이 되었을 때에는 더 겸손했습니다. 그와 일을 해본 사람은 다 압니다. 잠깐만 만나보아도 그가 누구라는 것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가 위대한 사람이요, 그가 대통령이요…… 이런 것들을 전혀 생각하지 않게 된다는 말입니다. 오직 인간이었을 뿐입니다. 그에게는 순수한 인간의 아름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위해 11년 동안을 일했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저는 이 나이가 되도록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정치인, 경제인 할 것 없이 많은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보았는데, 세상에 성공이라는 게 뭐 그리 대단하겠습니까마는 그래도 비교적 좀 성공했다는 사람들을 만나보면, 만나기 전에는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의외로 인간적입니다. 그가 누구라는 것을 정말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변변치 못한 사람들이 꼭 특별하게 자기를 내세웁니다. 시원치 않은 사람들이 비인간적이요 초인간적입니다. 오히려 정치에서건, 경제에서건, 사업에서건, 실업에서건 성공한 사람들은 지극히 인간적입니다. 대하기가 그렇게 편할 수 없어요.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되셨습니다. 인간적이십니다. 그리고 사랑을 주셨습니다. 좀더 나아가서는 같이 되셨습니다.
Identify, 동일시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준다'하면 그저 물질을 주고, 시간을 주고, 지식을 주고…… 뭐 이렇게 생각합니다마는 가장 큰 것은 명예를 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더 큰 것은 의를 주는 것입니다. 여기에 신학적인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은 스스로 얻는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를 내가 수용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몇 해 전에 평양에 갔을 때, 그곳 사람들과 이 얘기 저 얘기를 하던 중에 이렇게 한번 권해보았습니다. "우리 쌀이 좀 남아서 그러는데, 남한에서 쌀을 보내면 받으십시오. 당신네들은 식량 문제가 심각하니 그 쌀을 받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그래, 일전에 쌀을 몇 가마 주어서 받아보았는데, 그것 주었다고 세계적으로 떠들어대고, 신문에 내고…… 당신들은 준 사람으로, 우리는 얻어먹는 사람으로만 만들어버리니 이게 되겠습니까?" 그리고 성경말씀까지 인용해서 항변합니다. "성경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한다면서요? 그까짓 쌀 몇 가마 줘놓고 이렇듯 야단스럽게 떠들어대는데 그것을 우리가 왜 받겠습니까?"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더 민감하고, 없는 사람이 의에 대해서 더 신경을 많이 씁니다. 체면을 더 소중히 여깁니다. 돈 많은 사람들은 건방지게 얘기합니다. "굶어 가는 처지에 체면 가리게 됐나?"--그것은 비인간입니다. 죽고 사는 것보다 명예가 더 중요합니다. 차라리 굶어죽으면 죽었지, 얻어먹는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세요. 주려거든 명예까지 주세요. 의까지 버려야 합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마는 제가 중국이나 북한에 선교적 차원에서 무엇을 보내주곤 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분들은 제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목사님께서 주신 것인데 막상 제가 거기에 가보니까 목사님이 주신 게 아니고 딴 사람이 주었다고도 하고, 뭐 복잡하던데요." 누가 주었다 한들 어떻습니까? 무슨 상관이 있어요? 그 사람이 받았다는 게 중요하지요. 어떻게 달리 얘기되어 나한테서 받지 않았다는 것처럼 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좋습니까? 그것을 꼭 누가 주고 아무개가 받았다고 해야 됩니까? 안됩니다. 일전에 어느 교회에서 북한으로 의약품을 보냈는데 되돌아왔습니다. 그 교회의 목사님을 만나서 제가 물어보았습니다. "왜 돌아왔지요? 그 의약품에다 뭐라고 썼습니까?" 그랬더니 아니나다를까 교회 이름을 썼다고 해요. 저는 "나라도 안 받겠다"했습니다. 아무 것도 쓰지 말고 보내야지, 왜 교회 이름을 써 가지고 보냅니까? 그러면 안 받습니다. 죽어도 안 받아요. 명예가 중요하니까요. 여러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 법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명예입니다. 그런데 돈은 주고, 명예는 내가 얻겠다고요? 턱도 없는 얘기입니다. 주려거든 명예까지 주고, 의로움까지 주고, 칭찬까지 다 줘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인간다운 일입니다.
예수님을 보세요. 세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세리의 친구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죄인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죄인의 친구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삭개오라고 하는 세리장 집에 가서 머물렀더니 좋지 않은 말이 들려옵니다. 또 세리 마태를 제자로 삼았더니 사람들이 두고두고 비난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예수님께는 철저하게 불명예스러운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 예수님께서 정성껏 기름을 부은 그 더러운 여자의 사랑을 그대로 받아들이셔서 정말 죄인의 친구가 되십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뿐입니까? 예수님께서는 형편없는 제자를 믿으시고 사랑했습니다. 네가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라고 베드로에게 미리 말씀하시면서도 갈릴리에서 만나자 하셨습니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제자인 줄 아시면서도 네가 나를 위하여 수고해야겠다, 하시며 믿으셨습니다. 끝까지 믿으셨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시원치 않은 제자들 때문에 예수님은 참 불명예스러웠습니다. 왜요? 하필이면 제자에게 팔려서 돌아가시지 않습니까? 수제자라고 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까지의 형편을 생각해보면, 제자들을 잘못 만나서 불명예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니 "먹기를 탐하고(19절)"라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보세요. 먹기를 탐한 게 아니예요. 함께 잡수신 것입니다. 단지 죄인과 함께 잡수심으로 먹기를 탐한다는 말을 들으신 것입니다. 또 죄인을 사랑하셨기에 죄인이라는 말도 들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들린 여자를 향해서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보시고 가장 아름다운 인간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모든 죄인, 모든 병자를 보시면서 은혜 안에서 미래를 보셨습니다. 그래서 죄인의 친구 되시고, 죄인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십니다.
인간을 인간화하는, humanization이 거저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되심으로만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의인이 죄인 되는 순간에라야 죄인이 의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죄인의 친구, 거기에 참 아름다움이 있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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