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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태복음 27장 32절~44절)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사람을 만나매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더라.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 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뽑아 나누고 거기 앉아 지키더라.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罪牌)를 붙였더라.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이요 표지입니다. 십자가는 교회를, 그리스도를, 예수님의 복음을 의미합니다.
옛날 페르시아나 로마에서는 십자가형이 죄인에게 행하던 가장 극악한 처형방법의 하나였습니다. 하도 처참하여 이를 본 사람은 일생을 두고 악몽에 시달렸다 합니다. 심지어 로마 황제 가운데도 십자가 처형을 본 뒤로 식사 중에 십자가 소리만 나와도 상을 물리고 노발대발 한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끔찍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십자가 형틀이 기독교에서는 영광의 상징으로 의미가 바뀝니다. 여기에 기독교의 역설적인 일면이 있습니다.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라도 서양을 가게 되거나 그들 나라의 영화를 보게 되면 무덤 앞에 꽂혀 있는 십자가를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곳은 무덤입니다'라는 뜻으로 묘비 대신 나무 막대기로라도 만들어 꽂아놓은 십자가입니다. 이렇듯 십자가는 무덤의 상징이요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영광된 것으로 그 의미가 바뀌면서 장식품이 되었습니다. 여인들의 목에 걸리는 아름다운 장식품에도 십자가가 있습니다. 황금십자가, 보석으로 장식된 십자가 --- 요즘은 이 십자가를 반지에까지 새겨서 끼고 다니는 것을 봅니다. 십자가의 의미나 바로 알고 그리하는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문제는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십자가를 하나님의 진노와 사랑의 계시라고 보았습니다. 오래오래 쌓여온 하나님의 진노가 드디어 십자가에 떨어진 것이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율법이 완성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에서 결정적으로 계시된 것이다 --- 이렇게 주장하며 십자가의 복음을 외치게 됩니다. 또한 칼 바르트는 십자가에서 더블 이미지(double image)를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하나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내 죄의 무게를 생각합니다. 십자가의 값을 치르지 않고는 전혀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 내가 그토록 큰 죄인임을 보여주는 증거로 십자가를 말합니다. 또하나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안에 내 생의 가치가 있습니다. 십자가의 값을 지불해서라도 구원해 낼만한 가치 있는 존재, 그 엄청난 값이 십자가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이 둘을 동시에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십자가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십자가와 나와의 관계가 문제입니다. 내가 십자가와 어떤 관계를 맺고 사느냐에 따라 내가 기독교인이냐 비기독교인이냐가 가름됩니다. 신앙의 성장은 바로 십자가의 바른 의미를 깊이 깨닫는 데에 있습니다. 십자가와 내가 얼마만큼 개인적인 관계를 맺어나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제, 보십시오. 십자가가 승리입니까, 패배입니까? 믿음 없는 눈으로 본다면 완전한 실패입니다. 서른세 살의 아까운 나이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골고다 언덕에서 죽어 가신 예수님, 활력적으로 일할 수 있는 그 나이에 비참하게 생을 마치셔야 하다니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남긴 것 하나 없이 그대로 죽어 가십니다. 한 개인의 생으로 말하자면 완전 실패입니다. 정치․경제․문화․교육의 어느 면으로 보든지 실패이기는 같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의 눈으로 보아 봅시다. 엄청난 승리입니다. 죄와 사망과 율법을 이기는 승리요 믿음의 승리, 진리의 승리, 소망의 승리, 사랑의 승리, 하나님의 의의 승리, 생명의 승리입니다. 십자가는 승리입니다. 십자가가 죽음입니까, 생명입니까? 죽음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믿음으로 십자가를 이해하고 바라봅니다. 또한 굴욕으로 보입니다마는 으뜸의 영광입니다.
여러분, 사랑을 해보았습니까? 굴욕을 영광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사랑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굴욕도 영광으로 여깁니다.
십자가 --- 그리스도인에게는 더할 수 없는 으뜸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요 십자가를 지는 모두에게 가장 높은 영광이 됩니다.
다시 한번 십자가의 의미를 생각해봅니다. 십자가는 사람을 죽이는 형틀입니다. 흔히 죄수를 사형에 처하는 방법에는 목을 옭아매어 죽이는 교수형(絞首刑), 목을 잘라 죽이는 단두형(斷頭形), 총을 쏴서 죽이는 총살형(銃殺形), 때려죽이는 타살형(打殺形), 불에 태워 죽이는 화형(火形) 등이 있습니다. 요사이는 고압전기를 넣어서 사람의 심장을 멎게 하는 방법도 쓴다고 합니다. 여하튼 예나 오늘이나 사형수에게 내려지는 처형방법은 여러 가지였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십자가형입니다. 이는 사형수에게 고통을 최대한으로 가중시키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오래오래 죽어 가도록 합니다. 십자가에 매달아놓고 서서히 굶어죽게 합니다. 나중에는 까마귀가 모여들어 살을 쪼아먹습니다. 때로는 매달아 놓고 창으로 찌르고 매를 때려서 죽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잔인한 방법은 손발에 못을 박아서 매달아놓는 것입니다. 못을 박았다고 하여 쉽게 죽지는 않습니다. 못 박힌 곳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못 박힌 곳으로 몸의 피가 빠져나가 마침내 죽고야 맙니다. 무려 일주일이나 목숨이 끊어지지 않아서 꿈틀거린다고 합니다. 단번에 죽는 것도 힘든데, 의식이 생겼다 죽었다 하면서 일주일이나 죽음의 고통을 겪게 하다니 참으로 잔인한 방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십자가형입니다. 생명을 죽이고 고통을 가합니다. 죽음의 고통을 계속 가합니다. 이렇게 하여 끝나게 하는 것이 십자가형입니다.
십자가가 생명을 빼앗는다는 데에 앞서 명예와 의를 빼앗는다는 사실에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굴욕입니다. 부끄러움을 줍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도 있습니다마는 제자들은 다 도망가고 구레네사람 시몬이 대신 십자가를 집니다. 제자들에게 배신당하는 고통이 여기에 있습니다. 또한 옷을 모두 벗깁니다. 화가들은 십자가 그림을 그릴 때마다 너무나 민망스러워 옷자락으로 치부(恥部)를 가립니다마는 실제로는 발가벗겨서 길거리에 매달아 놓는 것입니다. 가는 사람 오는 사람 모두가 그 수치를 봅니다. 부끄러움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명예를 빼앗고 욕을 보입니다. '배고픈 것도 아픈 것도 참을 수 있지만 기분 나쁜 것은 못 참는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문제는 그것입니다. 돈을 줄 수도 있고 생명을 줄 수도 있습니다. 자식을 위하여 몸을 내던지는 어머니도 있습니다. 목숨까지 줍니다. 그러나, 기분 나쁜 것은 참지 못합니다. 보십시오. 나라를 위해서는 죽지 못하는데 기분을 위해서는 죽습니다. 여러분, 참지 못한 일이 있었다면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돈 때문입니까, 지위 때문입니까? 가만히 보면 기분 때문입니다. 이 기분이 나쁜 십자가 도저히 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끄러움과 치욕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십자가의 의미가 있습니다. 생명만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명예를 죽이고 의를 죽입니다. 그렇게 몹쓸 죄인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예수님과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힙니다. 예수님을 가운데 두고 하나는 왼편에 하나는 오른편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들과 같은 죄인으로 만들겠다는 의도입니다.
예수님 혼자서 십자가를 지셨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강도와 함께 못박아서 욕을 보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세 부류의 사람들이 조롱을 합니다. 먼저, 지나가는 자들이 조롱을 합니다.
지나가면서 머리를 흔들면서 예수님을 모욕합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40절)" ---- 갖은 조롱과 욕을 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만일 길을 지나가다가 십자가에 달려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 동정하면 그 동정한 사람도 십자가에서 죽어 가는 사람과 같은 자가 됩니다. 아마도 구레네사람 시몬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갑니다. 십자가 가까이 지나가지 않으면 모르거니와, 지나갈 때에는 누구나 침을 뱉고 능욕하고 당연히 십자가에 달려 죽을 사람이라고 한마디씩 욕을 하는 것이 당시의 상리(常理)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는 사람, 결코 동정해서는 안됩니다. 십자가를 지우는 사람을 정 죄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두들 비난하고 조롱하고 희롱하고 저주해야만 했다는 말입니다. 둘째로,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합니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42절)."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욕을 합니다.
심지어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마저 예수님을 비난하고 욕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왜 욕합니까? 무슨 이해관계가 있기에 욕을 합니까?
또한 예수님을 무능한 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 못 내려올 예수님이 아니십니다.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이요, 친히 하신 말씀대로 열두 영(靈)도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어 진멸해 버릴 수 있는 예수님이십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불로 진멸하신 하나님의 그 권능을 가지셨지만 그들을 내려다보시면서 그 욕을 고스란히 당하십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면 믿겠노라 합니다. 그 말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가셨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믿기는 고사하고 저들이 살아남기나 했겠습니까? 예수님은 아무 능력도 없는 분이 되시어 갖은 조소를 다 들으십니다.
변명 한마디 없이 죄인의 누명을 쓰고 약한 자가 되어 십자가에 돌아가십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다보면 '하다못해 말씀이라도 몇 마디 하실 일이지'하고 안타까워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변명 없이 깨끗하게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의미의 십자가를 생각해왔습니까? 예수님은 그 모독을 다 참으셨습니다. 오늘도 보면 능력을 보이라는 사람이 많습니다. 내 병이 나으면 믿겠노라, 내 사업이 잘되면 믿겠노라, 내 자식이 대학에 합격하면 믿겠노라 ---- 서로들 자기 뜻대로 이루어지면 믿겠노라고 합니다. 어서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소리지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이 없으십니다. 그 옛날,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받으실 때를 생각해봅시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 4:3)." 또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마 4:5)" 합니다. 예수님은 뛰어내리지도 않으셨고 돌로 떡을 만들어 배를 불리지도 않으셨습니다. 오늘의 우리도 그렇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저도 구원하고 우리도 구원하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 됨을 믿겠노라, 네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구원하실 것이 아니냐, 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자가 죽어 가느냐 ---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하면서 갖은 비난과 조소를 끊임없이 퍼붓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여가면서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난과 조소를 그대로 다 당하십니다.
십자가는 분명 구약에서의 오랜 예언이 오늘에 성취된 것입니다. 그동안 상징적으로 벌어졌던 많은 제사, 그 예표가 오늘에 와서 실제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러 곳에서 수없이 증거합니다. 사도 바울도 베드로도 요한도, 그리고 마태, 마가, 누구 할것없이 모두가 힘있게 반복적으로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여' ----- 말씀이 성취되어서 오늘 이 사건이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54절)" ----- 예언의 말씀을 상기하면서 십자가를 지십니다. 자원적입니다. 도망가시다가 잡힌 것이 아닙니다. 사실 예루살렘만 피하면 얼마든지 살아남을 수도 있습니다마는 예수님은 당신의 발로 예루살렘에 올라가 박해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십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 10 : 18)." 자원적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쓸개 탄 포도주도 거절하십니다. 독한 술 ----- 십자가를 지는 사람에게 베푸는 마지막 자비입니다.
술기운으로 잠깐이나마 고통을 덜 느끼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도 예수님은 거절하십니다. 맑은 정신으로 십자가의 고통을 받아들이시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고통을 피하려들지 마십시오.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 지는 십자가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원망과 불평을 가지고 지는 십자가도 십자가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깨끗하고 맑은 정신으로 자원적으로 선택적으로 십자가를 지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온전히 위탁하셨습니다. 이 사건 저 사건 가릴 것이 없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 겟세마네동산에서 하신 이 기도대로 하나님의 뜻만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모든 생명 모든 사건을 온전히 위탁하셨습니다. 또한 사랑의 계시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된 것입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요 철학이 아니요 관념이 아닙니다. 사랑은 행동입니다. 특별히 자기희생이라고 하는 사건입니다. 자기희생이 없는 사랑은 부도난 사랑입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자기희생, 여기에 사랑의 참계시가 있습니다. 그리고 대속적인 죽음이었습니다. 대신 죽으셨습니다. 죄인이 죽어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마는 의인이 죄인의 모습으로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신실한 기독교인 베노즈델 부부가 살고 있습니다. 나이 육십이 넘은 분들로 그 부인은 매우 특이한 혈액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천 명에 한 사람 있을까말까한 특이한 혈액형이기에 병원에 특별히 등록해놓고 있었습니다. 어느 토요일 오후, 병원에서 전화가 옵니다. 큰 사고를 당한 사람이 있는데 피를 많이 흘려서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침 부인이 같은 혈액형이니 와서 수혈 좀 해달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육십 나이의 노인이지만 사람이 죽어간다고 하니 그냥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불편한 몸으로 남편과 함께 병원에 갑니다. 누워서 피를 뽑습니다.
피가 사고 당한 사람에게로 건너가고 있습니다. 수혈을 하는 동안 남편이 옆에서 지켜보다 묻습니다. "수혈 받는 저 사람이 누구요? 무슨 사고였습니까, 차사고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무슨 병이었습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어머니날에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려고 형제들이 모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산 문제로 시비가 붙어 다툼이 벌어지고 마침내 칼부림까지 나서 그 사람이 칼에 찔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베노즈델씨는 기분이 매우 나빴습니다. '저따위 인간을 살리자고 피를 뽑아주어야만 하나!' 그러나 기왕에 좋은 일 하는데 끝까지 선한 마음으로 봉사하자고 참았습니다.
수혈이 끝났습니다. 나이가 많아서 충분히 휴식을 취해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마는 때마침 그날 저녁과 다음날인 주일에 교회에서 맡은 행사가 있어 몸을 무리하게 쓰고 말았습니다. 완전히 지치게 되어 그만 다음날 병원에 입원하고 맙니다. 앓아 누워 있는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 남편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습니다. '좋은 사람이었다면 모르지만 어머니날에 모여서 형제간에 재산 놓고 다투다가 칼에 찔린 사람, 그런 쓰레기만도 못한 인간을 살리자고 내 아내가 피를 뽑고 대신 죽어야 하는가?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 하나님 앞에 원망 어린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이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감화하시어 "로마서 5장 8절을 읽으라" 하십니다. 로마서 5장 8절의 말씀을 읽어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는 다시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내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내가 사랑을 받을만한 가치도 없는 쓰레기 같은 인간이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유명한 설교가 스펄전은 생전에 많은 저서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신학을 네 단어로 제자들에게 설명합니다. 'Jesus died for me.' ---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 함입니다. 그는 '이것이 나의 신학의 전부이다'라고 한마디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대신 죽으신 십자가 ---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내려 오라, 지금 이 시간에 내려 오라'하고 팔을 뻗고 고함을 지릅니다. 예수님은 이토록 갖은 능욕을 받으시지만 침묵하십니다. 그 침묵 속에 엄청난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만을, 성경의 예언만을 생각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생명을 위탁하셨습니다. '내려 오라, 내려 오라' 소리지르는 바로 그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이것이 십자가에 보여준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에 대하여 어떻게 응답하여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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