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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불신앙(민수기 20장 2~13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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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불신앙(민수기 20213)

 

회중이 물이 없으므로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공박하니라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말하여 가로되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면 좋을뻔하였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를 이 광야로 인도하여 올려서 우리와 우리 짐승으로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악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모세와 아론이 총회 앞을 떠나 회막문에 이르러 엎드리매 여호와의 영광이 그들에게 나타나며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으로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울찌니라 모세가 그 명대로 여호와의 앞에서 지팡이를 취하니라 모세와 아론이 총회를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 이를 므리바 물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서 그 거룩함을 나타내셨더라.

 

어느 대학교의 교수 한 분이 일생을 교육가로서 박봉에 시달리며 한 번도 자기의 집에 살아 보지 못한 채 셋방살이로 옮겨 다니며 살아야만 했습니다. 이제 정년 퇴직이 되면서 받은 퇴직금으로 처음으로 자기 집을 한 채 사게 되었습니다. 줄곧 남의 집에만 살면서 때때로 짐을 꾸려야 하는 집 없는 서러움에 지쳐있던 터이라 내 집을 갖게 되는 기쁨에 노교수는 무한히 즐겁기만 하였습니다. 새로 산 집 역시 새 집이 아니고 남이 살던 집이기에 고칠 곳도 많은 수리해야할 것도 많아서 목수 몇을 데리고 집을 수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일하는 것을 옆에서 보고만 있어도 될 것이겠지만 이 노교수는 너무나 기뻤던 나머지 손수 수고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직접 칠을 하기도 하고 뜯고 못질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한편 벽 윗부분에 앞서 살던 사람이 박아놓은 큰못을 발견하고 거기에는 아무래도 불필요한 듯 하여 뽑아버리려고 의자를 놓아 그 위에 서서 못 뽑이로 이것을 뽑는데 잘 나오지 않기도 하였지만 실은 그것이 얼마나 깊이 박혔는지 모르는 터라 힘껏 잡아 당겼는데 그만 이 교수는 뒤로 나가떨어지면서 뇌진탕을 일으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결국 단 하룻밤도 자기 집에서 못 살아 보고 세상을 떠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매우 유감스러운 생의 끝을 맺고 말았습니다.

일이란 그 시작도 중요하지만 끝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종말은 결국 실제적인 목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라를 위하여 죽었을 때 순국이라 하고 교회를 위하여 죽었을 때 순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가 과거에 어떻게 살았던 간에 마지막에 가서 돈을 따라가다 죽었다면 수전노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인생은 그 시작도 중요하지만 그 결말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에 있는 내용을 물론 다 아는 것은 아니지만 알다가도 더욱 알 수 없는 사건이 둘이 있다고 나는 가끔 생각해 봅니다. 그 하나는 아나니야와 삽비라의 사건입니다. 그들의 죽음은 아무리 생각해도 가혹한 것 같습니다. 바치지 않는 사람도 많은데 그래도 절반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도 죽을죄가 되는 것이겠습니까? 설사 죄가 된들 이런 식으로 인생을 형벌 하신다면 어찌 죄인들이 살아 남을 수가 있겠습니까? 물론 초대교회가 시작되는 때에 교회의 거룩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런 일이 있었다고 설명도 합니다. 그러나 본인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형벌이며 또 오늘날처럼 혼탁한 교회라면 모르거니와 은혜가 충만한 초대교회에 옥의 티와 같이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했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또 한가지 큰 유감은 모세의 종말입니다. 모세는 실상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도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된 것이며 어려서 살아남은 일이나 바로의 궁전에서 자란 일, 특히 호렙산 기슭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친 일들은 사실상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영도자를 삼기 위한 특별한 훈련 기간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생은 온전히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생이었다고 볼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40년간 갖은 고생을 다하며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었는데 그 결국에 가서 그는 애타게도 잊지 못하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비스가산 언덕에서 멀리 가나안을 바라보기만 하고 느보산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생각컨대 이스라엘 백성이 다 못 들어간다고 해도 모세만은 들어갔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찌하여 모세가 그의 목적지인 가나안에 못 들어갔단 말입니까? 어찌 이러한 유감된 종말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더욱이 유감된 것은 모세의 죽음이 나이 많아서 죽게 되었거나 혹 병들어서 죽었다는 자연사(自然死)라고 해도 매우 유감스러운 일인데 놀랍게도 성경은 모세의 죽음은 그의 죄로 인한 형벌의 죽음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점이 더욱 알 수 없는 점입니다. 그의 죄목은 "나를 믿지 아니하고……,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즉 불 신앙의 죄였단 말입니다. 모세는 누가 뭐라고 해도 모세는 위대한 신앙의 사람입니다.

그는 10재앙을 신앙으로 내리게 했고 믿음으로 홍해를 건넜으며 믿음으로 이정표 하나 없는 광야 길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였습니다. 어찌 그가 불 신앙의 사람이란 말입니까? 만약 그가 불 신앙의 사람이라면 어느 누가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모세가 불 신앙의 사람이라면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어떤 신앙을 요구하고 계신다는 것입니까? 어떤 종류의 믿음을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까? 깊이 생각할 문제입니다.

또한 2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너는 나를 거역하고"라고 거역함의 죄를 지적하십니다. 모세는 누가 뭐라고 해도 절대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사실상 그는 처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말씀하실 때 자기의 약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못하겠노라고 사양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 큰 일을 이루었습니다.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에도 순종하였고, 불가능한 일을 순종하여 가능케 한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 믿고 순종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역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언제 하나님을 거역한 일이 있었습니까?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을 순종하는 자입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순종이 참 순종이며 하나님은 어떠한 순종을 원하고 계십니까? 이는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육지와 같이 건넜을 때 그들의 감격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감격도 광야의 고생에서 몇 날이 못되어 곧 하나님을 원망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먼저는 빨리 가나안으로 가고 싶었는데 그 못 가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못 가게 하시는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데 이것이 움직이는 방향대로 따라간 것입니다. 이에 지연되는 책임이 오직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또 한 가지는 할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고작 천막을 세웠다 걷었다 하는 일 뿐이었습니다.

언제나 한가할 때에 불평이 나옵니다. 인생이 무엇이냐를 물을 겨를이 없도록 바쁜 사람에게는 원망이나 불평 따위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너무나도 단조로운 생활이었습니다. 만나라는 것은 밀가루와 꿀을 섞은 것 같은 맛있는 음식이었다고 합니다마는 같은 음식을 40년간 먹으라는데 어찌 불평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 뿐입니까? 더욱 큰 불평의 원인은 기약이 없다는 것 때문입니다. 애당초 처음부터 광야에 40년간 있어야 한다고 정해지던가 이렇게 예고되었다면 그런 대로 참고 견딜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라 내일 갈 것인가? 모레 갈 것인가? 하루 하루 기약 없이 기다리기를 40년입니다.

어찌 원망이 없겠으며 불만이 없겠습니까? 이제 마지막 고비에 왔습니다.

신광야 가데스바니야에 왔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은 물이 없음으로 다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심지어는 모세를 죽이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선동하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때 모세는 큰 실수를 하게 됩니다. 그 큰 실수가 본문에 나타난 내용입니다. 이제 모세와 아론은 원망하는 백성으로 인하여 피곤하였고 지쳤으며 마침내 불신앙적인 말과 행동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은혜를 모르는 백성을 향하여 인간적인 감정으로 대하며 격분한 나머지 분노를 터뜨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패역한 너희여!……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랴!"라고 외치면서 반석을 두 번 치게 된 것이었습니다.

먼저 "패역한 너희"란 말은 히브리말로 하모림이란 말인데 이 말은 횡폭 자, 망할 자란 뜻입니다. 전연 소망이 없는 악한 자란 뜻이 되겠습니다. 시편 10633절에서 "이는 저희가 그 심령을 거역함을 인하여 모세가 그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음이로다"라고 기록된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즉 먼저는 모세가 말로써 잘못한 것입니다. 말로 죄를 지은 것입니다. "망령된 말"의 죄를 범한 것입니다. 말은 그 마음의 창문입니다. 그의 말은 곧 그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그 마음의 진실을 엿 볼 수 있는 시금석이 됩니다. 신앙적인 마음이 있었더라면 신앙적인 말이 나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 이 본문에 나타난 사건은 돌연한 사건이며 모세 역시 경황 중에 한 말이라는 데에 더욱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심리학자 후로이드(Freud)는 그 사람의 진실은 그가 급한 일을 당해서 무의식 중에 하는 말을 종합하면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의식이 있어서 앞뒤를 다 생각하면서 하는 말은 오히려 거짓 되기가 쉬우며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의 급한 일을 당했을 때 무의식 갑작스럽게 내 뱉는 말이 그 사람의 진실한 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술 취한 사람이 취중에 한 말과 술깬 뒤에 한 말이 있다면 술취했을 때 한 말이 오히려 참말이란 말입니다.

모세는 번번히 하나님의 은혜를 보답도 기억하지도 못하며 그 날도 하나님께서 주신 만나로써 떡을 만들어 먹고서도 이제 하나님을 거듭 원망하는 백성들을 볼 때 모세는 분노하여 잠깐 이성을 잃어버리고 이처럼 불 신앙적인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불 신앙적인 말은 곧 불 신앙적인 마음의 증거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의 생활이 고달프다고 하여 계속 하나님을 원망하며 때때로 "일찍이 형제들이 죽을 때 같이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민수기 1428절에 "내 귀에 들린 대로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광야에 엎드려질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매우 무서운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은 축복도 말이요, 저주도 말입니다. 말로써 복을 빌고, 말로써 저주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귀에 들린 대로 행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이에 대하여 심판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은 분명히 사람들끼리 하는 것이로되 이것이 모두 하나님께 상달되며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지금 백성들 앞에서 말하고 있으나 그 말은 그대로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책임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이 무의식중에 나온 것이라면 더욱 더 큰 책임을 져야 할 말이 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말이 절망적인 것이었다는데 더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어떤 날 저의 방에서 자다가 나도 모르게 긴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때에 옆방에서 계시던 아버님께서 들으시고 저를 깨우시면서 물으셨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서 한숨을 쉬는 것이냐고, 저는 대답했습니다. "중학생인 내게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라고, 이 말을 들으신 아버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부모 앞에서 한숨을 쉬는 것이 막중한 불효인 줄을 모르냐"……. 어려서는 그 뜻을 잘 몰랐으나 철 들어서 생각하니 참으로 소중한 교훈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사랑하는 자 앞에서 한숨을 쉬는 것이 아니며 눈물을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로 사랑 안에는 한숨이 있을 수 없고 믿음 안에는 절망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능력을 부정하는 죄가 되며 절망은 하나님의 사랑을 부정하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절망과 한숨, 낙심과 실의는 모두 불 신앙의 소치인 것입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으며 믿음 안에 절망이나 낙심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모세는 또한 자기 위치를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은 그들의 도덕적 수준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그리고 그의 구속적인 사랑에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을 때에 그들은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들이 의롭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러내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크셔서 오늘과 같은 구원의 역사가 그들에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 있는 것인데 모세가 어찌하여 절망하는 것입니까? 어떤 일에도 소망이 없다고 말하지 맙시다. 소망은 부족하고 허물 많은 우리의 의에 근거하여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에만 있음을 확실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더욱 문제되는 것은 모세의 자기 위치입니다. 이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셨고 또 인도하실 것이며 설사 심판하시며 벌하신다 하여도 하나님 자신이 행하실 것입니다. 도대체 모세 자신이 무엇인데 그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여 절망하며 소망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것입니까? 모세는 사환이요, 결코 주인은 아닙니다.

어떤 때 저의 집에서 저의 아내가 아이들을 때리는 것을 봅니다. 물론 이것은 미워서도 아니며 또한 괴롭히기 위해서 때리는 것은 더욱 아니지요. 좋은 사람되라고 잘 가르치고자 때리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상한 것은 제가 아이들을 때릴 때는 괜찮은데 저의 아내가 아이들을 때리는 것을 보면 저의 기분이 아주 좋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효자는 그의 부모 앞에서는 잘 잘못을 불구하고 자기 아이들을 절대로 때리던가 꾸짖지 않는 법입니다. 왜냐하면 이 일이 어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가령 다른 집 어린이가 혹 실수를 저질렀다 하여 그 어린이의 부모 앞에서 그 어린이를 꾸짖고 때리며 또 장래가 있느니 없느니 하고 심한 욕설을 한다면 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그 어린이의 부모에게 얼마나 크게 실례되는 일이 되겠습니까? 모세는 사환입니다. 그가 어찌 하나님의 백성을 심판할 것입니까? 그는 다만 충성할 따름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 직무의 분수를 넘어서서 크게 불 신앙적인 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하면 모세는 자신이 은혜를 망각한 언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보세요!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사환으로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순종하였던 것뿐입니다. 언제 저들이 물을 낸 일이 있었습니까? 모든 이적 기사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요, 모세는 이에 순종하였던 것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랴"라고 경거망동한 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가 경건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행하여야 할 일을 어찌 자기의 이름으로 경망하게 행하는 것입니까?

사실상 기적이란 단회적인 것입니다. 반복되는 일은 자연법칙이라고 말합니다. 은혜 역시 단회적인데가 있습니다. 처음 은혜를 입으면 감사 감격하는 것입니다만 은혜를 반복하여 계속 입으면 마치 당연한 현상처럼 혹은 당연한 일처럼 생각하는 것이 간사한 인간의 약점이기도 합니다. 모세 역시 처음에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이적과 기사를 행할 때는 매우 두려워하였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역사를 대행하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하여 존경도 받았고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으며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서 쳐다볼 수 없어서 수건으로 가리운 때도 있었습니다. 또한 그의 손은 이적과 기사의 신비한 손이 되어서 아말렉과 싸울 때에 손을 들면 이기고 내리면 지는 것이기에 마침내 두 사람이 그의 피곤한 손을 바치고 서 있던 때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 받으면서 그 은혜 안에서 젖어서 살다보니 이제 와서는 그의 마음이 매우 교만하여진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종이요 그릇이며 기계에 불과한 사환인데 그 위치를 망각하고 마치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이적을 행한 듯이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랴"고 도저히 할 수 없는 말을 거침없이 하였습니다. 그의 말속에 하나님을 생각하는 신앙이 없었고 자기 위치를 생각하는 겸손이 없었습니다. 그는 마땅히 이렇게 말해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망하는 너희를 다시 불쌍히 여기사 물을 주시느니라, 주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이처럼 하나님이 일을 자기 일처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자기가 하는 일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자기의 이름으로 바꾸는 일을 행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67절에서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 하냐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 하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돌비석을 들고 내려 올 때에도 같은 실수를 하였던 것입니다. 아무리 금우상을 섬기는 백성이 큰 죄를 범한다 하더라도 그 시간 그는 신앙적으로 처리해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돌비석은 내려놓고 다른 돌을 들어서 우상을 쳐 부셨다면 참으로 좋았으련만 모세는 그렇게 하지를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돌비석으로 내리쳐 금송아지를 부셨습니다. 금우상을 깨뜨린 것은 잘한 일이겠으나 동시에 하나님께서 주신 돌비석을 깨뜨린 것은 크게 잘못한 일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 모세의 잘못과 불 신앙이 있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모세는 반석을 두 번 지팡이로 쳤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는 하였습니다마는 그의 마음은 완전히 인간적인 감정과 분노에 사로잡혀서 불 신앙적인 행동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 앞에서 일하여야 하는 것인데 그는 원망하는 백성만 생각하고 백성을 향하여 일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하지 못하고 배역하고 원망하는 인간만 봄으로 그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전혀 기억 못하거나 보지 못하고 경솔하게 불 신앙적으로 일을 하였던 것입니다.

왕왕히 이러한 불 신앙적인 처사를 우리들 주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에게 쫓겨서 피난의 길을 떠날 때 사울 왕의 족속인 시므이가 그를 저주하였으나 이를 죽이려는 장군을 말리면서 하나님께서 저주하라고 하셔서 하는 것이라고 믿음 있는 태도로써 이를 소화했던 것입니다.

사건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된 것이로되 이 모든 일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소화해야 하는 것이 신앙인의 길인 것입니다. 구체적인 사회생활 안에서 그리고 사건 안에서 하나님을 보며 모든 인간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세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모세는 패역한 인간만 보고 그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보지 못한데서 잘못이 비롯된 것입니다.

또한 형식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 것으로 나타나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배역한 것이며 반항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형식을 보시지 않고 그 중심을 언제나 보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생각지 않고 자기의 위신과 체면 그리고, 인간적 감정만 돌아보면서 일하는 그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침해하는 큰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주신 방법과 길로써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Let God be God"라는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게 하라는 말입니다. 루터는 친히 이 말을 해석하기를 하나님을 섬길 때 인간의 방법으로 섬기는 것은 큰 죄가 되는 것이며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그 길로 섬겨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일로써 행하며 그가 보여주신 길로만 향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길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나의 거룩함을 들어 내지 아니하고"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거룩함이란 구별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혼합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순결하며 성결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하나님의 이름과 사람의 이름을 섞는 일을 결코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깨끗한 희생으로써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일답게 거룩하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미국 미시칸주 유니온 베일이란 곳에서 부활절을 지키면서 모래비안 교회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생을 산 한 여인을 보았습니다. 그 교회 파이프 올갠을 49년간 개근으로 반주한 74세의 할머니를 보았습니다. 얼마나 아름답게 보였는지 모릅니다.

믿음으로 시작했으면 믿음으로 끝나야 할 것이 아닙니까? 모세의 종말이 이처럼 유감스럽듯이 오늘도 유감된 심령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믿음으로 시작했다가 불 신앙으로 마치며, 겸손한 마음으로 시작하였다가 교만으로 끝나며, 순종으로 시작하였다가 원망으로 마치며, 드리는 마음으로 시작하였다가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마치며, 사랑으로 시작하였다가 증오로 끝내고, 소망으로 시작하였다가 절망으로 끝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부 폴리갑이 세상을 떠날 때 그를 화형에 처하던 군인이 "이 사람은 참으로 진실한 기독교인"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로마군인 백부장은 "이 사람은 정녕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우리들의 종말이 어찌될 것 같습니까? 끝까지 믿음으로, 끝까지 소망으로, 끝까지 하나님의 일을 거룩하게 행하여 그 끝이 시작보다 더 아름다운 결과가 오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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