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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불신앙의 원인(요 10:19~28)

by 【고동엽】 2024. 3. 19.
목차

불신앙의 원인(10:1928)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혹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시니,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성경이 기록된 목적이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역사 하신 목적이 우리들로 하여금 믿어서 영생얻게 하려 함은 잘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왜 그들이 믿지 않았을까를 이 본문에서 보다 깊이 생각해 보려 합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예수님의 말씀은 심판적인 요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똑같은 말씀을 듣고도 듣는 이의 반응은 둘로 나누어졌습니다. 한쪽에서는 믿고 기뻐하고 또 한쪽에서는 믿지 않고 완악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죤 칼빈 같은 사람은 심지어 다름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구원받을 사람이 있고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있다", 즉 예정된 자가 있고 버림받은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똑같은 말을 들었는데, 믿을 자는 믿고 안 믿을 자는 안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전도하는 이유를 "믿을 사람에게 전도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받을 사람을 모으기 위해서 전도하는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실제적으로 우리가 전도해 보아도 이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믿을 수밖에 없도록 조건이 구비되어 있어도 믿지 않는 사람은 안 믿기 때문입니다.

가끔 필자에게 결혼을 앞둔 아가씨들이 찾아와서 믿지 않는 남자와 결혼해도 되느냐고 묻습니다. 제게 올 때는 벌써 그 남자와 깊이 사랑하여 이제 결혼식만 남았을 때 물어오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결혼해서 믿게 하면 된다"는 스스로의 해답을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결혼해서 믿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만일에 끝까지 안 믿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믿지 않을 사람은 죽을 때까지 믿지 않습니다. 아무리 전도하고 수고하고 봉사해도 성경 말씀에 의하면, 분명히 버림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앞에서도 여러번 보았지만, 예수님께서 죽은 자도 살리시고 갖가지 이적을 다 행하셨지만 그것을 보고도 안 믿을 사람은 안 믿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교역자들의 설교를 듣고도 믿는 사람은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전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역시 믿을 사람만 믿기 때문입니다.

이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다" 하시는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분쟁이 일어나 서로 나누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혹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10:19-21).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으로 완전히 갈라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심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불만이 생긴 사람들은 점점 더 반항심이 늘어, 이제 예수님을 귀신들렸다고 말합니다. 한 마디로 미쳤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다시 깨닫게 됩니다. 증거가 부족함도 아니요 설명이 부족함도 아닌데, 끝까지 믿지 않을 뿐 아니라 미쳤다고까지 말하는 것을 보면, 정말 버림받은 사람들로 생각됩니다.

우리들도 전도를 해 보면 믿지 않는 사람에게 믿음을 준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게 됩니다. 가끔 믿지 않는 남편을 전도하기 위해서 저에게 심방을 요구하는 부인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답답하면 "목사님, 제 남편을 한번만 만나 주세요. 제 힘으로는 잘 안 됩니다"라고 부탁하지만 저는 잘 안 갑니다. 왜냐하면, 목사님이 오시면 좋겠다고 하는 희망이라도 가지고 있을 때가 좋은 것이지, 제가 갔다 온 다음에도 그 남편이 믿지 않으면 곤란하잖습니까? 그래서, 시간을 좀 벌었다가 한 50%쯤 돌아간 다음 심방을 하면 훨씬 부드럽게 서로가 마음 문을 열게 됩니다. 얼마전에도 이와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아내가 계속 전도해도 남편이 믿지 않자, 안타까워서 저에게 여러번 심방을 요청했습니다. 한참 뜸을 들이다가 심방을 했는데, 가서 보니 남편만 제외하고는 온 친척들이 다 믿는 집안이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나니 부인의 눈치는 빨리 자기 남편에게 "예수 믿으세요, 교회 나오세요"라고 말해 주기를 바라시는데, 저는 모르는 척하고 이 이야기 저 이야기로 서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일어서면서 한 마디 했습니다. "이제 교회에서 만납시다." 그랬더니, 부인이 너무 좋아 "여보, 교회에서 만나시재요" 하고 혹시나 남편이 알아듣지 못했을까봐 다시 되풀이하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그 다음 주일부터 남편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두 주일 연달아 나왔습니다.

부인은 좋아서 제게 말하기를 "목사님, 한번도 안 빠지고 나왔어요." 그러지 않겠습니까? 이제 두 번 나왔는데, 안 빠지고 나왔다니 말이 됩니까? 그러나, 얼마나 감격하고 신통했으면 그렇게 말하겠습니까? 제일 가까운 남편에게도 이렇게 전도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상대성 원리를 발견한 아인슈타인 박사가 이 원리를 깨닫고 나서, 세계적인 물리학자 11명을 모아놓고 두 시간을 설명했다고 합니다. 지금이야 고등학생 정도면 상대성 원리를 이해하지만, 그 때는 같은 계통의 박사들을 모아서 그렇게 설명을 했는데도 그 중 두 사람만 알아듣고 나머지는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같은 분야이지만 이토록 이해하기가 힘든데, 하물며 전혀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 믿게 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의 그 놀라운 설교, 기적을 다 듣고 보면서도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더우기 미친 사람으로까지 몰아세우고 있으니 말입니다. 옛말에 "적선을 못할지언정 표주박은 깨뜨리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믿어지지 않으면 안 믿어지는구나 하고 생각하면 될 것인데, 믿는 사람을 틀렸다고 까지 말할 것은 없습니다. 물론, 신사적인 사람은 자기가 믿지 않아도 믿는 사람을 좋아하고 때로는 존경도 합니다만 못된 사람은, 믿는 사람을 모두 정신병자로 몰아세웁니다. 내가 안 믿어진다고 해서 진리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실증주의자의 대표인 어거스트 꽁트는 "실증되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다", 즉 내가 직접 눈으로 보지 않는 것은 실증할 수 없는 것이다라는 이론을 내놓았습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후에 제자들에 의해서 이 이론은 "실증되지 않는 것은 실증되지 않는 것뿐이지 없는 것이 아니다"라고 수정되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실증할 수 없는 존재일 따름이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내가 보지 못했다고 없는 것입니까? 그러면, 내가 가보지 않은 나라는 없는 나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예수님을 미쳤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래도 되는 것입니까? 이런 극악한 마음이야말로 심판 받은 심령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믿을 수 있는 길은 본문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의 말씀과 그 행함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혹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10:21). 어느 정도 믿는 자의 이야기입니다. 첫째,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합리적으로 생각하니 이치에 맞는 말이므로 그 말씀이 옳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님의 말씀이 귀신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일찍이 예언자들이 예언한 그 말씀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둘째는,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없으므로 행하는 일을 보니 미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은 모두가 선하고 아름다운 일이었으므로 행위에 의해서 그들은 판단한 것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첫째, 말씀을 깊이 음미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말씀이 합리적이고, 말씀이 성서적이고, 말씀 자체가 사실이라는 것을 알아야 믿음이 가는 것입니다. 둘째는 나타난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 사건의 상징적 의미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령, 병을 고쳤다, 장님이 눈을 떴다 하면, 그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깊은 상징적 의미를 깨달아야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혹시 사업에 실패하셨습니까?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하는지, 그 의미를 하나님 앞에서 깨달아야 믿음이 생깁니다. 병들었습니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혹은 성공했습니까, 무엇이든지 그 사건에 깊은 상징적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건을 피상적으로 보고 자기 중심적으로 보고, 물량적으로 본다면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습니다. 옛날에 칼바르트 같은 사람은 말하기를, 신문 기사에서도 말씀을 듣는다고 했습니다. 신문도 신앙적으로 보면, 기사 하나 하나가 무엇인가 말씀해 주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통해서 믿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9:25에서도 이미 보았습니다만, 눈 뜬 장님은 말하기를 "그 분이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분명히 아는 것은 내가 장님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것이다"라고 자기에게 일어난 경험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의 사건을 말한 것입니다.

이 사건을 보니 나를 눈뜨게 한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을 보는 것입니다. 33절에서도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다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으리라." ,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니까 굉장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뜻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왜 사건을 보고도 모르느냐는 것입니다.

이 말은 중요한 뜻으로, 사건을 보고 사건의 뜻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음 22절 이하의 본문은 예루살렘의 수전절에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수전절에 대해 잠깐 설명하고자 합니다. 수전절은 성경에 기록은 되어 있지만, 그것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수전절은 유월절이나 장막절 같이 출애굽기나 민수기에 있는 이야기가 아니고, 이것은 주전 170년대에 있었던 이야기로써 말라기 이후이므로 설명은 마카베오상이라는 외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전 170년경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라는 왕이 예루살렘으로 쳐들어가서 잔악하게 약 8만 명을 죽였다고 합니다. 그당시 인구도 많지 않은데, 그렇게 죽였다는 것은 대단한 학살이었습니다. 특히, 그들이 노린 것은 이스라엘의 재산뿐만 아니라 종교를 말살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선 율법을 복사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 때는 율법책을 일일이 손으로 베꼈는데, 그것을 기록하지 못하도록 율법책을 모두 불태웠습니다. 또는 할례를 받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할례를 받음으로써 이스라엘인이 되는데, 이것을 일체 금지시켰습니다. 자기 아이에게 할례를 받게 한 어머니는 법령에 따라서 사형에 처하고 그 젖먹이들도 목을 매달아 죽였습니다. 그렇게까지 잔인하게 할례법을 없애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공경하는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갖다 놓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돼지를 잡아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에 대한 최고의 모독이었습니다.

주전 164년에 유다 마카비와 그 형제들이 이 이상 더 참을 수가 없어서 혁명을 일으켜 군사들을 쳐부수고 온 이스라엘의 청년들의 도움을 받아 혁명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더러워진 성전을 깨끗이 청소했습니다. 이 청소한 날을 기념하여 수전절이라고 하며 히브리말로는 '하누카아'라고 합니다. 하누카아는 깨끗하게 했다는 뜻입니다.

수전절의 날짜는 유대 사람들의 월력으로 25일인데, 우리가 지키는 월력으로는 12월에 해당됩니다. 그러니까, 크리스마스와 거의 비슷한 시기입니다. 수전절을 일명 "빛의 절기"라고는 부릅니다. 왜냐하면, 그 어려운 학정에서 벗어나 성전을 되찾은 것이 너무 감사해서 창문에다 등을 다는 예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등을 다는 의미는, 첫째, 이스라엘이 속박으로부터 자유했다는 자유의 의미요, 둘째는, 성전을 깨끗이 했다는 정결의 의미로 등불을 달았던 것입니다.

이 수전절에 지금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솔로몬 행각을 거닐고 계셨습니다(10:23). 그 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10:24). 이 질문은 질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내용으로 보아, 이미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했으므로 이제 더 설명하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 하는 것이어늘"(10:25). 증거를 보고 들어도 믿지 아니하면서 무엇을 또 보자는 것이냐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데, 우선 겸손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열고 나를 부정해서 빈 마음으로 임해야 말씀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어떤 말씀이나 표적을 보아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계속 다른 표적, 또 다른 것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왜 믿지 않는가에 대해서 심판하는 내용을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10:26-27). 내 양이 아니라는 말을 달리 표현하면 주인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주인이 예수님이라면 그 말씀을 알아듣고 믿었을 터인데, 주인을 따로 두고 여기와 있으니 믿어질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주인을 섬기고 있으면, 이 말이 들리겠습니까? 오늘 우리들도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고 하나님이 주인이 되어야 하는데, 만일에 돈이나 내가 주인이라면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들려지지 않고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이 분명해야 됩니다.

또한 주인이 바뀔 때에 과거의 주인에게서 얻은 경험이 문제입니다.

소위, 의식 구조나 방법론이 바뀌므로 새 주인을 맞이하려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무당을 섬기던 사람은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고, 방법론이 주로 감정적이며 비논리적입니다. 또한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주게 하고 기복 사상이며 윤리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무당은 사랑하라, 용서하라, 구제하라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오면 밤낮 원수를 사랑하라, 봉사하라고 말하니 쉽게 이해될 수 있습니까? 서로 주인이 다르므로 이해된다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본문에서 너희는 내 양이 아니다, 주인이 따로 있다고 소속이 다름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둘째는, 따른다는 문제입니다. 유대인들은 따르지는 않고 알아지고 믿어지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믿기 위해서는 따라야 합니다.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네 멍에를 메고 내게 와서 배워라. 그러면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멍에를 메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믿음이 생기기를 바란다면 되겠습니까? 사랑이 생긴 다음 사랑하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의 수고를 먼저 하면 사랑이 생기고, 전도부터 하면 마음에 확신이 생깁니다. 완전히 믿어진 다음에 전도하겠다면, 어느 세월에 하겠습니까? 먼저 구제하고 먼저 봉사해서 희생하면 놀라운 사랑과 믿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요한일서에 보면,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안다"고 했습니다. 사랑해서 그 사랑을 통하여야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모릅니다. 오늘 유대인들은 가만히 있으면서 안 보인다, 믿어지지 않는다고 계속 질문을 합니다. 이런 자세로는 죽을 때까지 질문해도 문제 해결이 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행동과 함께 믿음을 찾아야 합니다. 교회에 잘 나가는 것도 행동입니다. 가끔 성미 급한 사람들은 몇 번 교회에 출석하고서는 어떻게 하면 믿어지느냐고 조급해 합니다. 급히 서두른다고 믿어집니까? 열심히 다니노라면 차차로 믿음을 얻게 됩니다. 열심히 따르는 가운데 믿음을 얻게 됩니다.

이 본문 마지막에서는 영생을 주시겠다고 생명을 보장해 주십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10:28-29). 내게 오는 자에게는, 첫째, 영생을 약속하시고, 둘째는, 빼앗기지 않으리라, 즉 보호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주 강하신 손으로 선한 목자께서 영생을 주시고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케 하셔서 보호해 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약속입니까? 이제 빼앗을 자가 없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바로, 믿음을 말하고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약속을 믿고 우리는 주님 앞에 나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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