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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복음에 합당한 생활(1장 27절~30절)

by 【고동엽】 2024. 3. 19.
목차

 

복음에 합당한 생활(1273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복음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요즘도 선교신학적으로 이것은 계속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복음이 무엇입니까? 먼저, 자기 주관적 의미에서의 정의가 있습니다. 내가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내가 평안해지는 것이다, 내가 잘살게 되는 것이다, 내가 소원을 이루는 것이라고 자기를 기준으로 복음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중심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역사가 바로 복음이라고 정의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은 곧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입니다. 복음은 능력입니다. 복음은 지식도 아니요, 철학도 아니요, 단순한 진리가 아닙니다. 특별히 고린도서에서 그는 '복음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좀더 좁은 의미로 바울에게 복음이란 곧 십자가 사건이요 예수님의 재림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 바로 이 사건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 그 자체가 복음입니다. 다음으로 이것에대한 고백, 전해지는 선교 내용, 복된 소식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런데이 소식이 전해지는 곳에서는 지식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고 능력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복음은능력'이라고 정의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까? 복음을 받은 자입니다. 복음 안에서 구원받은 자를 곧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혹은 약속의 선민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고 이로 인하여 권능을 얻은 사람들은 이제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27절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폴리튜에스데 행하라'는 말입니다. 그 어원은 폴리테 이고, 폴리테스는 '정치'라는 의미인데, 이 말은 헬라어로 '시민'이라는 뜻입니다. 그런고로 '폴리튜에스데'는 시민으로서 행할 바를 행하라는 그런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나라의 시민이 되면 그 나라 시민으로서의 특권을 누림과 동시에 의무와 책임도 져야 합니다.

이것을 좀더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이 빌립보라는 도시는 당시 로마의 속국이었습니다.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던 때인지라 로마 시민은 당시 큰 특권을 가졌습니다. 역사가들의 말로는 로마 시민권하나만 가지고 있으면 아무 일 안 하고도 먹고 살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로마는 각 나라를 점령해서 많은 노획물을 실어 왔기 때문에 그만큼 나라가 부유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선거를 치러 보니까 국회의원 입후보한 사람들이 몇 억씩 또는 수십 억씩 썼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다 요즘 처음 있는 새삼스러운 일들이 아닙니다. 옛날 로마 시민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호민관에 당선되기 위해 유권자들에게 뇌물을 나눠주었는데 가장 좋은 뇌물은 노예 하나씩을 배급해 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노예 하나만 데리고 있으면 그가 다 수고하고 주인은 그저 편안히 놀고먹으면서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로마 시민권 하나만 있으면 아무 걱정 없이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특권을 누리면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로마 시민들이 식민지에 가서 살 때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식민지에 들어가 살게 되면 로마 시민으로서의 우월감이 더욱 대단했습니다. 어디 가나 로마 시민의 특권을 누릴 뿐만 아니라 자기나라 풍습과 체통을 지키며 살아야 했습니다. 로마 시민은 배가 고파도 결코 구걸해서는 안 된다는 묵계까지 있었습니다. 상대방이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꼭 라틴말만 썼습니다. 로마 사람의 옷을 입고 로마 사람의 이름을 가졌습니다.

이름이라니까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미국서 공부할 때에 보니까 그 곳 사람들이 우리 이름 발음하기를 매우 어려워합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공부하던 어느 목사님을 그 곳 사람들이 목사님의 한국 이름을 발음하기 힘들어하니까 부르기 좋게 David Kim이라고 이름은 바꾸었습니다. 공부를 끝내고 귀국해서는 다시 자기 이름으로 대학 교수도 하고 교회 일도 했습니다. 그런데 10년 후, 유학시절의 미국 친구가 한국에 와서 David Kim을 찾으니 누가 그를 알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서 그를 찾아내어 만나게 해 준 일이 있습니다. 이처럼 다른 나라에 가서 자기 이름을 그대로 부르자니 불편하고, 그렇다고 해서 바꾸면 나중에 또 못 알아보는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로마 사람들은 불편하든 말든 항상 로마식 이름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말, 자기 옷, 자기 풍속, 자기 이름을 지키면서 로마인답게 살았습니다. 여담입니다만 이스라엘 사람도 이런 면에서는 대단합니다.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일부 보수적인 유대인들은 어디서 살든 꼭 자기들의 풍속, 언어, 의상을 고수하면서 삽니다. 추우나 더우나 항상 목까지 올라오는 까만 옷, 까만 모자를 쓰고, 아이들은 머리를 길게 땋고 다닙니다. 이러한 복장으로 회당에도 가고 일도 합니다.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므로 직장에서 이를 허락하지 않으면 아예 직장을 그만두어 버립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답게, 로마인은 로마인답게 사는 것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말씀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복음으로 인하여,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제자요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은 어디에서 살더라도 천국 시민으로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의 행위언어풍속을 가지고, 자기 주체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럭저럭 타협하고 사는 것은 그리스도인다운 삶이 아닙니다. 오리는 물에 떠 있으나 물에 젖지 않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도 세속에 살지만 거기에 물들어서는 안 됩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어떻게 사는 것이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것입니까? 바울이 몇 가지로 설명하고있습니다.

첫째,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해야 합니다. 먼저 이 신앙에 자신을 헌신하고 기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어떤 이는 친구를 만나면 점심 사 먹이고 전도하고, 저녁 사 먹이고 전도하며 기회만 있으면 밥 먹여 주면서 전도하니 친구들이 저 사람 밥은 먹으면 안 된다고 농담을 합니다. 본문에서는 특별히 이 복음의 협력자가 되는 길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복음을 전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전하는 일에도 협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넓은 의미에서 전도자이나 좁은 의미에서는 전도자가 아니요 협력자입니다. 좁은 의미로는 선교사나 목사가 모든 나라 모든 지방으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이고, 우리는 이 분들에게 협력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직접 선교지에 못 가도 그들을 위해 선교비를 보내고 책을 보내고 시간마다 기도하면 이것이 바로 협력자가 되는 길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이 '협력'이라는 것이 더욱 큰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 당시 선교 상황 때문입니다. 지금도 선교는 문제입니다.우리 교회 주보에 두 선교사의 이름을 쓰고 '그 외 6'이라고 썼을 뿐 이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 선교지와 선교사의 이름이 발표된다면 그들은 곧장 그 나라로부터 쫓겨나게 될 것입니다. 진짜 선교사는 스파이와 같습니다. 현재 중공으로 많은 선교사가 들어가고 있으나 선교사의 이름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장사하는 사람으로 들어갑니다. 최근 중공에서 제게 선교하는 분을 보내 달라는 부탁의 편지가 왔습니다. 그 마을에 공장을 지어 놓고 사업을 하면서 간접적으로 전도를 하라고 합니다. , 이런 선교지에 가게 될 경우 선교사 파송 예배를 볼 수 있겠습니까? 파송 예배 드린다고 모이느니 어쩌느니 하다가는 이 일이 저들 귀에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중공 선교의 꿈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됩니다. 그런고로 부득불 몇 사람만 모여서 조용히 기도하고 보내는 것입니다. 떠날 때는 어디까지나 장사하는 사람으로, 의사, 선생, 기술자로 갑니다. 당당하게 선교사의 이름을 대고 선교할 수 있는 나라가 그리 흔치 않습니다. 더구나 사우디 같은 곳은 선교사를 보내면 국교가 단절됩니다. 그래서 선교사가 들어갈 때에는 루디아같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같은 협력자가 필요합니다. 누군가가 선교사를 자기 집에 모셔 놓고 기도하면서 생명을 걸고 그 길을 열어 주고 안내해 주어야 합니다.

"이리로 가면 어디가 나오고, 저리로 가면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저 공화당에 가면 사람이 많고 이곳은 위험합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길잡이를 해주어야 선교를 원활하게 할 수 있습니다. 방글라데시에 갔던 정성균 선교사는 그곳에서 언어를 배워 10년간 선교했습니다. 그 곳은 가난한 나라라서 구제금을 받기 위해 일단 선교사를 받아들이되 세례 주는 것은 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곳의 한 주민이 하도 세례를 받겠다고 졸라대는 바람에 몰래 세례를 주었는데 그만 이것이 발각되어 쫓겨났습니다. 10년간 모든 기반을 닦아 놓고 쫓겨난 것입니다. 그 후 정 선교사는 파키스탄에 와서 언어 공부를 하며 열심히 선교하다가 그만 병을 얻어 주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기에 선교사는 꼭 협력자가 필요합니다.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장로, 권사가 협력자요 구역장, 교사가 다 협력자가 되어야지 목사 혼자서는 결코 해낼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선교사로서 아주 귀중한 말씀을 합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것은 바로 복음 사업에 협력하라는 뜻입니다.

당시 상황으로서는 선교가 더욱 어려웠습니다. 복음이 전혀 전해지지 않아 예수님이 누군지도 모르는 위험한 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협력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협력자를 잘 만나면 성공하고, 그렇지 못하면 도중에 쫓겨나거나 매맞고 감옥에 갇힙니다. 때로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비밀한 심부름을 해 줄 많은 협력자를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의 사업을 위하여 우리는 어느 모로든지 협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만일 반대로 방해자가 된다면 그는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모양으로든지 중요한 협력자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구체적 내용입니다.

둘째,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두려워한다는 것은 겁먹은 말처럼, 놀란 새처럼, 조마조마해하면서 비겁하게 사는 것이요, 일종의 패배를 뜻합니다. 그런고로 복음에 합당한 생활은 신앙적 담력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살면 대적하는 자들에게 담대합니다. 그것은 복음 자체가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삶의 모습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10:28).' 핍박하는 자들이 네 몸은 죽일 수 있을지 몰라도 영혼은 죽이지 못한다, 또 이렇게 죽으면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되니 상급이 있을 것이다, 두려워 말라 이것이 예수님이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적어도 복음의 협력자로 사는 사람은 죽음과 실패에 대한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가 돈을 벌면서 실패할까봐 두려워하고 학들은 입시에 떨어질까 봐 걱정을 합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는 선교의 역사에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나 좌절이 없습니다. 나머지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니까 담력이 생깁니다. 우리가 똑같은 고난을 당해도 선교를 위해서 당하는 고난에는 자부심이 생깁니다. 그러나 죄를 지으면서 누리는 안락에는 진정한 평화가 없고 두려움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선교를 위한 일이라면 마지막은 승리로 끝날 것입니다. 본문 26절에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라는 특별히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달관된 역사 의식을 가지고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나에게 괴로움을 끼치고, 핍박하는 자가 있습니까? 우리는 그 다음의 일을 내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좀 언짢은 일이 있습니까? 곧 사과 받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이렇게 흥분하고 있어도 시간이 지나면 저 사람이 내게 얼마나 미안한 생각이 들까, 저 사람이 나를 이처럼 오해하고있지만 그것이 사라진 다음에 내게 사과하려면 얼마나 곤란할까?' 왜 이런 생각을 못해 보십니까? 그렇게까지 되어야 도사가 되는 것입니다. 오해받았다고 속상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오해니까 며칠 있으면 다 판가름날 것이고 언젠가 진실이 밝혀진 뒤에 저가 내게 와서 사과하려면 어지간히 힘들고 쑥스럽겠다고 생각하면서 웃어버려야 합니다. 뭐 무고한 고난을 당한다고 원망하지만 내가 참으로 떳떳하고 진실하다면 걱정할 것 없습니다. 길어야 4개월입니다. 느긋하게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빌립보로 돌아가 봅시다. 사도 바울이 귀신들린 아이 고쳐 준 것 때문에 문제가 되어 애매하게 감옥에 갇혀 매를 맞았습니다. 죽도록 매를 맞고도 하나님께 찬송하고 기도했습니다. 당할 때는 억울했으나 감사 찬송을 하자 옥문이 열렸고 옥사쟁이가 회개하였습니다. 옥사쟁이한테서 극진한 대접을 받을 때에는 비록 매는 좀 맞았지만 기분은 괜찮았을 것입니다. 그 순간을 생각해 봅시다. 바울에게는 되어지는 모든 일들이 전부 이렇게 역전승이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본 편지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빌립보에서 당한 것을 너희는 보지 않았느냐, 대적이 있으면 오히려 잘되는 것이다. 복음 사업은 성공할 것이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요 저들에게는 멸망의 빙거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적어도 이만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입니다.

로마서 13장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역사관의 기초가 되는 본문이 있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12)." 밤이 깊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낮이 가까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여름이 가까워서 더워지고 있는데 이것은 결국 겨울이 가까이 오는 것을 뜻합니다. 밤이 깊었으니 왜 아침이 오지 않겠습니까? 죄악의 밤이 깊었고 도덕의 밤이 깊었다는 것은 주의재림이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역사를 달관해서 저만큼 앞을 내다보는 바울의 신앙을 우리는 그의 서신 곳곳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셋째,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란 은혜 중심의 생활입니다. 복음대로 사는 자는 모든 것을 은혜로 소화합니다. 그렇다면 그 은혜는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29절에서 두 가지로 말해 첫째가 은혜로 믿음을 주심이요 둘째는 고난을 받게 하심이라고 하는데 이 고난이 바로 은혜입니다. 즉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는데 이것은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 그를 위하여 고난을 받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당하는 고난을 특권으로 받아들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위해 얼마나 손해를 보셨습니까? 얼마나 희생을 했다고 느껴집니까? 바로 그만큼의 영광이 있고 그만큼의 기쁨이 있습니다. 이것이 특권입니다. 로마서 817절을 봅시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우리가 영광만 받으려 하고 고난을 받지 않으려 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고난이 먼저요, 고난 당하지 않은 자는 영광도 받을 수 없습니다. 제가 미국서 공부할 때 박사 학위를 받게 된 한 친구가 그 집에서 축하 파티를 열었습니다. 그 때 그의 부인이 남편 학위 받은 것을 굉장히 기뻐하면서 하는 말이 "오늘부터 나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부인은 5년 동안 남편 박사 학위 뒷바라지를 위해 낮에는 직장에 나가고 또 밤에는 박사 과정에 있는 사람들의 학위 논문을 타이핑해서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남편은 그 동안 오로지 공부만 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나자 그 부인은 아내와 어머니의 일로 돌아가 직장에 안 나가도 되고 밤새워 타자기를 두드리지 않아도 된다고 기뻐합니다. 남편과 함께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남편이 박사 학위를 받는 순간에 그 기쁨이 내 기쁨이 된 것이지, 남편 공부할 때 TV나 보고있었다면 무슨 기쁨이 있었겠습니까? 함께 고난을 겪었기에 영광도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당하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는 영광의 기쁨을 모릅니다. 이 예배당을 지을 때에 수고를 많이 했다면 예배당에 들어설 때마다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척 들어설 때마다 그저 가슴이 뭉클하고 기쁘고 감사합니다.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사람은 아무런 감격도 없습니다. 고난이란 이렇게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위한 고난에 자원(自願)하고 이것을 특권으로 알고 영광으로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에 합당한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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