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불신의 이유(요 5:41-47)

by 【고동엽】 2024. 3. 19.
목차

불신의 이유(5:41-47)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치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지금까지 생각했습니다. 믿으면 평안하고 행복하지만 믿지 못하면 불안하고 긴장하게 되는 것은 누구나 체험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의심받는 자보다 의심하는 자에게 죄가 더 많다고 말합니다. 의심을 하다 보면 의심하지 말아야 할 자까지 의심하는 실수를 하게 되니 말입니다. 꼭 믿었어야 할 사람인데 믿지 못했다는 것은 정말 불행항 일입니다. 가끔 믿지 못할 사람을 믿었다가 후에 낭패보는 일도 있지만, 그러나 믿어야 할 사람을 믿지 않았던 실수보다는 낫다고 생각합니다. 믿어야 할 사람을 믿지 못하는 것은 이중 삼중의 죄를 저지르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속을 때 속더라도 우선 믿어두는 것이 자신에게 좋습니다.

가령, 남편을 믿는 아내는 남편의 귀가 시간이 늦으면 늦을수록 걱정과 함께 남편에 대한 사랑의 농도가 짙어집니다. 혹시 사고는 아닐까 염려 중에 있다가 남편이 들어서면 반갑고 고마울 뿐입니다. 그러나, 남편을 믿지 못하는 아내는 그가 늦으면 늦을수록 부정적인 생각만이 가득차 수상하다는 쪽으로만 신경을 곤두세웁니다. 원망과 분노로 기다리다가 남편이 들어서면 우선 싸움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사건에서도 믿음이 있는 자는 사랑을 더해 주고, 믿음이 없는 자는 싸움과 분쟁을 가져오는 일이 됩니다. 속는 한이 있더라도 의심하는 자는 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에 보면, 차라리 속는 것이 낫고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믿음을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신학적인 차원에서 보더라도 믿음은 대단한 선물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 믿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셔야만 합니다. 증거가 부족해서 믿지 못한다고 이유를 붙이기도 하고, 또 너무 속았기에 믿지 못한다고 변명을 합니다만 백 번을 속았다고 해도 백 한 번째는 믿어야 합니다. 어제 믿지 않았다고 오늘도 믿지 않는다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계속 지금까지 믿지 못했어도 지금 이 순간부터는 믿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증거 부족은 말이 안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때때로 예수님께 와서, 하늘로부터 오는 번쩍번쩍하고 깜짝 놀랄 표적을 구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기적 속에서 살면서도 새로운 표적을 구했습니다. 표적은 한이 없습니다. 아니 이런 사람에게 채워줄 만한 표적은 따로 없습니다. 의심하려면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요, 믿으려고 하면 모두가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증거 부족도 아닙니다. 성경도 믿게 하기 위한 증거로써 언제나 이미 있었던 사건을 말할 뿐, 별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도 누가복음 24장에서는 "성경이 이미 말하지 않았느냐" 하는 말 외에는 다른 설명이 없습니다.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은 다른 것도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말하고 선지자를 말하고 나아가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나타난 역사적 사건을 말하고, 오늘 우리가 당하는 사건과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령을 말합니다. 성령의 증거를 신학적으로 말하면 종말적인 증거라고 합니다. , 최후의 통첩입니다. 처음에는 성경이 왔고 다음 예수님이 오셨고 그리고 성령의 감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도 믿지 않으면 끝난 것입니다. 안 믿는다는 것은 무서운 심판입니다. 안 믿어지는 것 자체가 심판이라는 것은 이미 요한복음 5장에서 보았습니다.

믿지 않았기에 심판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믿지 않는다는 사실이 벌써 심판받은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믿음으로 구원받고 믿음으로써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다는 귀한 진리입니다.

이제 믿지 않는 자에게 예수님께서 내리신 최후 통첩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함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12 : 31-32). 끝까지 믿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인자를 부인하면 사함 받을 길이 있지만 성령을 훼방한 자는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단호하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된 자를 고치시어 많은 사람들이 이를 보고 놀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 사실을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았다고 억지 해석을 내린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미친 사람으로 몰아서 사람들로 하여금 믿지 못하게 하려는 억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서는 정말 참기가 어려우신 것 같았습니다. 그들에게 눈으로 직접 보게 했고 마음의 감동도 있었으며 성령이 역사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를 부정하기 위해 마침내는 예수님을 아주 정신나간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 죄는 결코 사함 받지 못한다고 성령을 부정함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시 정리하면 증거로써 성경이 있고, 역사적 경험도 있고, 또한 예수님 자신이 직접 오셔서 이적을 행하시어 보여 주고, 그리고 성령의 감동이 있음에도 이것을 믿지 않는다면 영원히 사함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죄를 이름지어 "성령을 훼방한 죄"하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믿을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믿고 싶으면서도 믿어지지 않는 이유, 믿음을 부인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다고 말씀하십니다(5:42). 근본적인 이유는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사랑은 있는데 믿음이 없다면 그 사랑은 거짓입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자의 말은 다 믿어집니다. 믿어지지 않는다면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와 허물을 덮는다고 했습니다. 사랑이 불타고 있는 동안은 믿어지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정말 의심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식었음을 회개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의심이란 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유명한 철학자 데카르트는 "내 눈이 나를 속였다"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그는 저녁마다 같은 길을 산책하곤 했었는데, 어느 날 산책 도중에 뱀 한 마리가 길가에 도사리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지팡이로 내려칠까 하고 망설이다가 그냥 다른 길로 돌아서서 갔습니다. 다음날 또 같은 장소에서 그 뱀을 보게 되었고 사흘째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드디어 지팡이로 힘껏 뱀을 내리쳤습니다. 그러나, 꼼짝도 하지 않는 뱀이 이상하게 여겨져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것은 뱀이 아니라 새끼줄이 빙글빙글 말려서 뱀과 같은 모양으로 놓여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데카르트가 생각한 말이 "내 눈이 나를 속였다"는 것입니다. 흔히 내가 직접 눈으로 본 것은 확실하고 분명하다고 믿고 있는데 이제 그 눈도 나를 속였습니다. 더 이상 믿을 것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면, 지금 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그 사실만은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회의 철학자의 흥미 있는 이론입니다.

현대인의 문제 중의 하나가 불신 사조입니다. 이유는 한 마디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필자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그 곳 사람들의 신뢰도가 우리와는 너무나 차이가 많음에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목욕할 때에도 방수된 시계라면 시계를 찬 채로 목욕하는 것입니다. 방수라고 써 놓은 말을 백 퍼센트 믿는다는 행동이었습니다. 우리 상표에 대한 우리들의 신뢰도는 어떠합니까? 방수라고 쓰여 있으면 그저 그렇다는 말이고 실제로 그것을 믿는 사람은 드문 실정입니다. 얼마나 불행합니까? 이 모든 것의 근본 이유는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사랑에 빠져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자기 교만에 빠져서 사랑하지 못하므로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믿을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믿을 수 있느냐"(5:44). 자기 영광을 취함은 자기 스스로를 높이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누구를 사랑할 여유가 없고, 그러므로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초대받기를 좋아했고 초대받아서는 윗자리에 앉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은 길거리에서 인사 받는 것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이렇게 스스로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을 높이기를 좋아했기에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음을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교만한 사람은 남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교만이 깨어지지 않는 한 환경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사랑과는 관계가 없는 사람으로, 사랑을 줄 수도 받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 만족에 빠져있을 때 남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어떤 의미에선 강한 필요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은 받아야 하고 필요하다는 강한 욕구에서 싹 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끔 결혼을 중매하는 사람들은 신랑 신부 후보감이 허물이 없고 완벽한 조건을 갖춘 사람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 말대로 완벽한 사람이면 결혼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완벽주의자는 두 사람이 합쳐서 살 수 없는, 힘든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가 표준화가 되고, 자기가 교리(도그마)가 된 사람은 자연히 교만이 따르게 되며 누구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기에, 사랑도 없고 믿음도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처럼 가난한 마음이 있고서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고 믿을 수 있게 됩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필요한 것이 많은 사람으로 형제도 필요하고 친구도 필요하며 누구나 나를 도와주어야 살아갈 수 있다는 귀한 마음을 가진 자입니다. 세상에 믿을 자가 없고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겠다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스스로 바벨탑을 쌓고 그 위에 올라 앉아서 고생하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라야 사랑할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지식에 만족하고, 재물에 만족하고, 건강에 만족하고, 명예에 만족하는 자는 교회에 나오기가 힘이 듭니다. 만약 나왔다면 죽을병이 들어서 마지못해 나왔을 것입니다. 자기 만족에 빠진 교만한 자의 마음속에는 믿음이나 사랑이 들어갈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같이 사는 사람은 있어도 애인은 없습니다.

셋째로, 믿을 수 없는 이유는 모세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5:46-47). 아주 중요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모세를 바로 알면 예수도 바로 알고, 모세를 믿지 않으면 예수도 믿지 않게 된다는 말입니다.

또한 앞서 공부한 요한복음 5:39에서 "성경이 내게 대해 증거하고 있다고 말씀하셨고, 사도행전 7:37에서는 스데반의 설교 가운데 모세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고로, 유대인들이 모세를 믿었다면 그리스도를 믿어야 했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라는 것을 증거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세를 잘 안다고 하면서 예수는 믿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생깁니다. 그들은 모세를 안다고 생각했고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실은 모세를 몰랐습니다. 알았다면 형식적으로만 알고 내용은 몰랐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의를 내세우는 방편으로 모세를 내세웠을 뿐이었지 모세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모세를 위해서 모세를 안 것이 아니었고, 율법을 안다는 것도 본뜻을 안 것이 아니라 외식주의에 빠져서 자기네 교만의 수단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모세를 알고 믿었다고 자처했지만 실상은 몰랐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예수님을 모르게 된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이미 알고 있는 바에 진실치 못했고, 이미 믿고 있는 바에 충성이 없었으므로 모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미 알고 있는 바를 깊이 알면 다음 것을 알게 되지만, 이미 알고 있는 바에 대해 거짓되고 나면 다음 것을 모르게 됩니다. 공부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영어 공부를 예를 들면, 중학교 기초 과정을 소홀히 했을 경우 고등학교,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어려운 영어는 점점 모르게 됩니다. 비록 대학생이라 해도 중학영어 기초부터 다시 시작하여 문법의 기초를 다져가야 어려운 문장이 해결되는 것입니다. 기초 없이 바로 고급 영어를 좀 해보려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짓입니다. 지식이란 절대 거짓이 없습니다. 수학도 마찬가지로 기초를 소홀히 하여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고 몇 번만 넘어가면 다음은 아주 모르게 됩니다. 오늘 유대인들이 모세에 대해서, 십계명에 대해서, 성경에 대해서, 좀더 진지하게 알았어야 했고 겸손한 마음으로 보았으면 충분히 예수를 받아들일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아는 진리에 소박한 마음과 충실함이 있어야 진리를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세와 율법에 대한 역사성을 믿었고 민족의 지도자로서 그 나라 국법으로서 도덕법으로서의 율법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본래의 의미를 몰랐고 모세의 현재적 의미를 몰랐습니다. 모세가 오늘 그리스도의 그림자요 예표이며, 율법은 그리스도 나라의 법의 서론이요 총론이 되는 것을 몰랐습니다. 모세의 종말론적 의미를 알았더라면 그들은 그리스도를 알았을 것입니다. 사실은 그리스도를 알아야만 모세를 아는 것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알고서야 율법을 바로 안 것이 됩니다. ,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모세도 율법도 이해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만일에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는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동안 지내온 많은 제사법은 무효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구원이 없다면, 율법은 사람을 죽이는 법이 되는 하나의 형법으로 바꾸어지고 맙니다.

율법으로는 누구도 구원하지 못하므로, 결국은 그리스도가 있고 율법이 있어서 비로소 율법이 율법 되고 그리스도가 그리스도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이나 모세의 의미는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에서 예수께서 "너희가 모세를 알았더라면 나를 알았을 것이다. 모세의 글을 믿지 아니하거늘 어찌 나를 믿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율법을 착실히 알았던 바울은 예수를 믿었고, 율법적 관계에서 그리스도를 이해하게 되었으며, 니고데모도 성경을 잘 상고한 결과 예수를 믿었고, 아리마대 요셉도 아볼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방 사람으로는 고넬료가 율법에 충실했으므로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보내어 그가 예수를 알도록 했습니다. 율법을 진실하게 아는 사람은 예수를 그대로 바로 영접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얼마나 알고 있든지, 이미 알고 있는 진리에 충실해야 하고 진실해야 합니다. 그러면, 다음의 단계인 더 귀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를 포기하는 자, 즉 하나님 중심적으로 자기 욕망을 탈피할 수 있는 자는 하나님을 믿게 되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옛날에 역사 하셨던 그리스도만을 생각하지 말고, 오늘 살아서 역사 하시는 그리스도, 현재 나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를 생각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뜻을 알고 동행하며 그 믿음 안에서 사는 성자의 생활이 여러분에게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