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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비밀히 자라는 씨앗(마가복음 4:26-29)

by 【고동엽】 2024. 3. 19.
목차

비밀히 자라는 씨앗(마가복음 4:26-29)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대체로 마가복음에는 비유가 적은 것이 그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4 복음서는 그 유사성이 현저하게 나타나있는 반면에 그 차이점도 분명합니다. 언뜻 보기에는 마찬가지로 보이는 예수님의 생애와 교훈을 굳이 반복하면서 4권으로 나누어 복잡하게 엮을 필요가 있을까하는 의문을 낳게도 합니다만 그러나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2천여 년의 역사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4 복음서를 하나로 합쳐보려는 노력을 시도해 왔으나 그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것은 또한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4 복음서는 각각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특성이 곧 그리스도의 일면이 되어 예수님을 입체적으로 알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운전 면허증에는 한 장의 사진이 붙어있습니다. 그런데 서양 사람들의 면허증 가운데는 사진이 두 장 붙은 것이 있습니다. 너무도 비슷한 사람들이 많아서 한 면만 보아서는 분간하기 어렵기 때문에 앞에서 찍은 사진과 옆에서 찍은 두 장을 붙여놓았습니다. 같은 사람이라도 보는 각도에 따라서 다르기 때문에 되도록 여러 측면에서 보는 것이 그를 정확하게 보는 데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그 한 분을 놓고 여러 사람들이 각각 다른 경험과 모습을 증거해 준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다양한 증거를 종합함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입체적이고 전면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게되는 것입니다.

이제 간단한 한 측면에서 비교해보면 마가복음에는 이적이 많이 나타나있고, 누가복음에는 행적이 기록되었으며, 마태복음에는 비교적 비유가 많습니다. 그리고 요한 복음에는 설명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이 비유는 마가복음에만 기록된 유일한 비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비록 짧게 기록된 것이지만 특별한 비유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 내용을 아무렇게나 생각 없이 보게되면 겨자씨나 누룩 비유 같은 인상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마는, 이 비유는 그 성격상 완전히 다른 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본 비유의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본 비유의 특이한 점은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는 그 강조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씨뿌리는 비유에 있어서는 네 가지의 마음 밭이 있습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 돌밭과 같은 마음, 가시덤불과 같은 마음, 그리고 옥토와 같은 마음, 이들 모두도 복음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씨뿌리는 비유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자세에 중점을 둔 말씀입니다. 그런가하면 가라지 비유나 겨자씨 비유는 씨앗이라고 하는 그것 자체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작은 씨앗이 점점 자라 크게된다는 것에 역점을 두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주신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는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이겠습니까? 그 의도는 씨앗은 씨앗 자체로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자라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람이란 신비롭고, 생명은 스스로 그 자람을 준비하고 이끌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궁금해하거나 낙심할 것 없이 열심히 씨앗을 뿌리라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이 말씀은 전도자를 향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씨앗을 뿌리기만 해 두면 그 씨앗 자체에 생명력이 있어서 알지 못하는 사이에 싹을 내고 어떤 모양으로든지 자라갈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를 위해 본문 27절에서는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잠깐 본문 해석상의 주의를 요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씨 뿌리는 자를 앞서 씨 뿌리는 비유에서와 같이 예수님을 포함시켜서 생각하지 말라는 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께서도 복음을 뿌렸는 데 그 자라는 것을 모르시느냐?는 의문을 낳게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 있어서 씨 뿌리는 자는 예수보다도 전도자들에게 초점을 맞춘 것임을 기억할 것입니다. 전도자들의 감각에는 아무런 생명의 움직임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지만 그러는 사이에 씨앗 자체의 생명력으로 자라갈 것이니 염려하지 말고 부지런히 뿌리라는, 생명의 신비에 대한 우리의 수고를 재촉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제 본문은 천국을 씨앗에 비교하고 있습니다. 씨앗은 생명입니다. 생명이 생명을 생산합니다. 죽은 것은 또 다른 죽음을 만들고, 썩은 것은 또 다시 계속 썩게 할 뿐입니다. 생명만이 생명을 생산한다는 이 진리의 말씀은 밭이 아무리 좋더라도 밭이라는 사실만으로는 열매를 맺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날아가던 새의 부리에서 떨어진 것이라도 생명인 씨앗이 뿌려지고야 싹도 나고 자람도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객관적 계시가 없이는 생명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 진리를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러기에 복음은 전하여 듣게 하여야 합니다.

로마서 10장에 기록하기를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은 반드시 전하는 자가 있어야합니다. 전한다는 것은 곧 복음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생명 역사는 복음의 생명 씨앗을 받아들임으로써만 새로운 생명의 신비를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단순히 자연인으로 성장해 가는 일에 있어서도 인간은 객관적인 외부 제시에 응하며 자라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은 본 대로 들은 대로 성장해간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두 발로 걸어다니는 것도 배웠기 때문입니다. 갓 태어난 어린애를 계속 혼자만 두어버리거나 동물 세계에 갖다두면 네 발로 기고 만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어이 오른손으로 활동하는 것도 배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살아가는 모든 행사가 배움에서 온 것입니다. 엄격히 말하여 객관적 진리에 준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은 우연도 자연도 아닌 다듬어진 존재요, 길들여진 존재입니다. 비록 인간으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자연으로 방치해두면 그는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 되고 맙니다. 이와 같이 인간이 인간으로 되는 작업에는 객관적인 힘이 절대 필요합니다. 하물며 인간의 구원을 이루는 일이라면 이는 전적으로 인간 스스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오직 객관적 계시, 객관적으로 주어지는 말씀의 힘으로만 가능합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의를 생각하여도 불의요, 선을 생각한다는 것이 악이며, 진리를 생각했어도 거짓이요, 어쩌다 하는 선행도 위선이 되고, 모처럼 하나님을 찾는다고 찾았더니 우상 숭배입니다. 참으로 인간은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의 지식, 우리의 의, 우리의 생각과 잠재의식, 습관, 심지어는 사랑까지도 철저히 타락되었습니다. 그 사랑 자체도 구원받아야 할 사랑입니다. 사랑이라는 미명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괴롭히며 죽이고있는지 사랑도 중생 해야 합니다. 양심도, 진실도 중생 해야지 그 상태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이 생명의 말씀의 씨앗이 뿌려지고 성령이 감화해서 그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새로운 생명적 역사가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구원의 역사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 이 씨앗의 비유가 주고자 하는 근본 뜻에 속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성장케 하시는 이는 하나님 자신이라는 점입니다.

씨를 뿌린 자는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는데, 그러나 자라고 있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뿌리고 가꾸며, 여러 모양으로 수고를 하지만,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씨앗을 가져다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 씨앗을 자라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다 자란 씨앗을 거두어들일 분도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 보면 씨를 뿌린 자도 있고 물을 주는 자도 있지만 자라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성장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어떠한 방법으로도 사람이 자라게 할 수는 없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전도하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시키셔서 전도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전도한다고 다 믿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일생 동안 예수 믿으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믿지 않습니다. 그런가하면 어쩌다가 한 마디 딱 듣고도 결심하고 예수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새벽 종 소리를 듣고 스스로 교회를 찾기도 합니다. 보세요!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가끔 결혼 전의 청년들과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안 믿는 사람과 결혼하여 믿게 하면 좋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듣게됩니다. 말이야 옳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수고하고 헌신하며 사랑을 바쳐도 안 믿을 사람은 끝까지 안 믿는다는 것입니다. 어쩌다가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이라도 만나게 되면 무슨 도리가 있겠습니까? 그게 바로 걱정이란 말입니다. 전도는 고사하고 한 사람 믿게 하기 위해 일생을 다 바치고도 실패한다는 말입니다. 전도는 하나 전하는 대로 다 믿는 것은 아닙니다.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먼저는 복음을 받게 하고 복음 안에서 성장하게 합니다. 식물이 자라는 자연법칙에 있어서 햇빛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자라는 식물에 있어서는 절대적입니다. 하지만 햇빛을 받고 시들어 버리는 것이 있는가하면 햇빛을 받아 싱싱하게 자라는 것이 있습니다. 물을 주는 작업에 있어서도 파랗게 살아나는 것이 있고, 물을 주면 오히려 썩어 버리는 것이 있습니다. 시련 속에서 자라고 환난 속에서 자랍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환난 속에서 배교해 버리고, 시련이 오면 넘어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생명됨과 생명의 성장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한다고 생각하면 그야말로 방자한 착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할 일은 열심히 뿌리고 열심히 가꾸는 것뿐입니다. 싹을 내고 자라는 것은 하나님이 아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실 것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한 번쯤은 저 유명한 죤 칼빈(John Calvin) 의 예정론을 들먹이게 됩니다. 예정론은 결국은 천당 가고 지옥갈 사람은 예정되었던 것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칼빈의 제자들이 그의 선생에게 질문하기를 그렇다면 다 예정된 것을 특별히 전도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칼빈 선생의 대답인 즉, 전도하도록 예정되었다고 하더랍니다. 그리고 전도해야 될 더 중요한 이유는 누가 예정된 사람인 줄 모르기 때문에 그 예정된 사람을 위해서 전도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역설적이기도 하고 종잡을 수 없는 우스운 이야기로 들려지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되는 것은 복음을 전하되 다 믿으리라고는 기대하지 말 것입니다. 그저 겸손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여 수고할 것입니다.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까요! 생명 문제는 언제나 그렇습니다. 우리가 내 자식들을 위하여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고 다하지만 그러나 자라게하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있는데 까지만 하고 그 다음은 하나님께 맡길 것입니다. 처음부터 내 영역이 아니었던 것을 붙들고 앉아서 그것까지 내가 다 하는 줄 알다가 잘못되면 낙심하고 불안해합니다. 그것은 애당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 맡길 것입니다. 오직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께 말입니다.

이제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성장의 신비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가운데 자라는 그 신비함 말입니다. 생명에는 세 가지의 신비가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 발생의 신비, 생명 자람의 신비, 그리고 생명 사망의 신비입니다.

이 모두는 생각할수록 놀랍고 신비로운 것들입니다. 이러한 신비에 의해서 생명의 말씀인 복음은 생명이 생명을 생산하는 과정을 통하여 점점 확장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자라서 말씀으로 인한 생명의 역사는 점점 그 영역을 넓혀갑니다. 철부지 꼬마였을 때 장난치면서 들은 그 한 마디의 말씀이 가슴 깊이 심겨져 그의 일생을 주장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지만 어렸을 때 마땅한 길을 가르쳐놓으면 그것이 일생 가는 길이 됩니다. 아는 듯 모르는 듯 복음의 씨앗이 마음에 떨어졌는데 이것이 성장해서 전 인생, 온 생명을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생은 의식 이전의 일입니다. 성장은 의식 밖의 일입니다. 스스로 자라나려고 일부러 노력할 것이 없습니다. 그저 부지런히 교회에 나와 열심히 말씀만 들으십시오. 그러노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한 가지씩, 한 가지씩 고쳐질 것입니다. 제대로 살아보겠다고 서둘러 맹세를 하며 자신을 구속하여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자신의 의지일 뿐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다만 있는 그대로를 가지고 말씀을 가까이 하고 성령의 감화를 기다리면 나도 모르게 생각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지며, 얼굴 표정에서 걸음걸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다면 그 얼굴빛까지도 변하게되어 있습니다.

한번은 어느 가정의 두 부부가 예수를 믿게된 동기를 이렇게 들려주었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가 계속 좋지를 않아서 아무래도 이혼을 하기로 일단 합의를 보았는데 그 때 마침 남편이 국외에 출장을 가게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절차는 출장을 다녀와서 처리하기로 하고 우선 떠나게된 것입니다. 비록 결심은 하였지만 집에 남아있는 부인의 마음은 답답하고 초조한 나머지 교회를 찾게된 것입니다. 얼마 동안 교회의 출석이 계속되고 있는 중에 남편의 귀국일이 되어 그래도 비행장에 마중을 나갔다는 것입니다. 이 때에 부인을 본 남편의 말이 "당신의 얼굴이 달라졌다"고 하더랍니다. 그러길래 부인은 내가 달라진 것은 없고 하도 속이 상하길래 교회에 좀 나갔다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남편은 분명 당신의 얼굴이 달라졌다고 하면서, 교회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나도 좀 나가보고 이혼하자고 해서 다니다가 두 분이 함께 세례를 받게되었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특별히 배운 것도 없고 깨달은 것도 없습니다. 그저 얼마간 교회를 왔다 갔다 했을 뿐인데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마음 속에 씨앗이 자라고 있습니다. 어디를 가나 생명은 반드시 생명을 생산합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조급해하거나 서둘러 답답해할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가운데 이미 자라고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서는 기록하기를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않는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벧전 1:2325) 하였습니다. 말씀! 그것이 생명이 되어 그 말씀 안에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장은 오직 은혜로 가능해집니다.

오늘 본문은 또한 생명의 한 과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하나의 작은 생명에도 반드시 그 과정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니 너무 서두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기르는 것도 그렇습니다. 낳자마자 유능한 인간을 기대하거나 효자 되기를 요청할 것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신앙 인격에 대해서도 서둘러 변화를 기대하거나 안타까워할 것이 아닙니다. 이미 중심부에는 변화가 이루어졌고 붙들린 바가 되어있음을 알아야합니다. 그러면서도 오직 입버릇을 못 고쳤고, 마음 씀이나 행동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튼튼한 씨앗이라도 처음부터 곡식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연약한 싹이 나고 그 연약한 싹이 조금씩, 조금씩 푸르게 자라갑니다. 그렇게 자라 꽃을 피웁니다. 그러나 결코 열매는 아닙니다. 이제 심판 때가 이르고 가을이 무르익으면 그때 가서 본래 기대했던 열매를 보게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는 작업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로 들어도 애굽을 나와 가나안에 도착하는데 40년이 걸렸습니다. 우리도 계속 성장합니다. 엎치락뒤치락 서성이며 성장합니다.

그러므로 너무 서둘러 초조해하며 일찍 절망할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구제 불능의 존재로 자신을 규탄하지도 말며, 타인의 불가능을 선포해서도 안됩니다. 때가 되면 반드시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얼마 전에도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여 3년만에 등록하는 이를 보았습니다. 그런가하면 스물 두 교회를 돌아다녔다는 이를 보기도 하였습니다. 정말 한 사람이 온전한 신앙에 들어가기란 그렇게 빨리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가운데 자라는 것이 있으니 곧 싹이 나는 것입니다.

이제는 눈에 띄게, 그리고 모양을 갖추며 자라갑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엔 기대했던 모양으로 끝을 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도 먼저는 무의식 속에서 전개됩니다. 이 기간이 얼마나 걸릴 것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음 단계는 의식의 단계로 알아보게 되고 꽃을 피울 것이며, 결국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누구나 처음 교회에 나오게된 동기가 그렇게 거창하거나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옆에서 교회에 가자고 계속 조르는 바람에 나왔고, 심지어 어떤 이는 친구가 교회에 가면 냉면 사주겠다고 해서 따라왔다가 계속 다니게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처음 믿을 때는 교회에 나오기는 하지만 그 동기가 변변치를 못합니다. 그래서는 무당끼도 덜 빠지고 보살끼도 있습니다. 교만, 욕심, 시기 등 부러지고 벗겨져야 할 것이 그대로 있습니다. 이를 위해 참으로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열매를 맺습니다. 자기 중심적으로 시작했다가 하나님 중심적으로 끝을 내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억할 중요한 진리는 씨앗과 열매는 같은 하나라는 점입니다. 처음에 뿌린 씨앗이 밀인가 하면 마지막에 거두는 것도 밀입니다. 이는 생명을 심어 생명을 거두고, 복음을 심어 복음을 거둔다는 말씀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를 심어서 그리스도와 같은 인격을 맺어야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권고하기를 "그에게까지 자랄지라"(4:15). 곧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그리스도처럼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야말로 작은 예수, 작은 그리스도로 자라나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감히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한다면 과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매를 맞아야하고,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으며, 얼마나 많은 깨달음을 당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사는 모든 생활은 하나같이 그리로 향하는 한 과정인 것입니다. 적어도 그리스도 닮은 사람으로 성장케 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성장이 있고야 그 성장 끝에 결실이 있다는 점입니다. 이제 성장은 정지되고 열매를 맺혀 익었으면 거두어들입니다. 이 순간을 위해 참으로 긴 세월을 애써서 기다려온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듣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저 자신 목회 경험 속에서 느끼는 것은 필경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 앞에 불려갈 때는 그 직전에 한 번 열심을 내고 마지막을 끝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우리의 입장에서 설명을 한다면 미달된 점수를 채우기 위해 과외 공부라도 하여 완전한 성숙을 갖추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 배려 같은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잘 모르고있지만 하나님께는 필요한 완전한 계획이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을 불러 가시는데 쭉정이같이 미미한 사람을 불러다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완전한 성장 끝에 열매가 맺혀 충실히 익었을 때에 추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는 그 근본 의도를 생각해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상을 가리지 않고 갖가지의 모습으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세리와 창기, 부정한 질병을 가진 자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먹이시고 고치시며 살리셨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언제나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았으며, 예수님 주위에는 가룟 유다를 포함한 겨우 열두 제자가 있었을 뿐입니다. 이들 열두 제자도 결국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도망가고 말았으니 일이 잘못되어도 보통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한심스로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영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미래를 다 내어다 보셨습니다.

이미 씨앗은 뿌려놓았으니 언젠가는 싹이 나고 열매가 거두어질 것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때에 가서 추수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자의 마음도 이러해야 합니다. 그가 복음을 받았다고 당장 내 앞에서 성자가 되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는 부지런히 씨앗을 뿌릴 것입니다. 열심히 전도하고 가꾸노라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 말씀 자체의 생명력으로 훌륭하게 자라서 추수 때를 기다리는 충실한 알곡이 될 것입니다. 이 말씀 앞에 선 전도자는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더욱 열심히 전도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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