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로 돌아가기 |
빛을 모르는 사람들(요 8:12~20)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바리새인들이 가로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하니, 네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도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 이에 저희가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다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연보궤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8장은 7장에 이어서 장막절 기간 동안에 일어나 이야기들을 계속 기록하고 있습니다. 장막절의 의의와 여러 가지 행사에 대해서는 이미 상세하게 말씀드렸습니다. 그 중 장막절의 제일 마지막날에 특히 강조되는 두 가지 행사가 있는데, 하나는 실로암으로부터 물긷는 행사로써 앞에서 다루었습니다. 두 번째 행사는, 오늘 본문의 배경으로 등놀이 행사입니다. 등 행사란, 예루살렘 성전 뜰에다가 커다란 등 4개를 달아놓고 그 밑에서 제사장과 바리새인 그리고 사두개인 등, 종교지도자들이 춤을 추며 일반 백성들은 빙 둘러 앉아서 구경을 하는 것입니다. 이 행사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처음 창조하실 때 빛으로 시작하셨으므로, 빛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한 마음의 빛, 도덕의 빛으로 임하는 율법의 빛을 찬양하며,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온 세상을 향하여 빛되라고 하는 자부심을 갖는 행사입니다. 그 당시는 전기가 전혀 발달되지 앉아 밤이면 깜깜한 세상이므로 커다란 등 4개를 켜면 멀리 예루살렘 마을까지 보였다고 합니다. 성전에서 춤을 춘다고 하면 우리들에게는 대단히 낯설게 들리지만, 시편을 노래하며 추는 거룩한 춤입니다.
필자는 여러 번 이스라엘 사람들이 추는 춤을 구경한 적이 있는데, 우리들이 생각하는 사교 댄스와는 아주 다른 것으로 그들의 춤이 아름답고 좋게 느껴졌습니다. 반주는 주로 아코디언으로 하고 시편을 합창으로 노래하는 데, 할아버지, 할머니, 아들, 손자 등 다같이 손을 잡고 남녀노소 구별 없이 빙글빙글 도는 아름다운 춤입니다. 이 춤은 친교를 겸하면서 하나의 공동체 의식을 갖는 중요한 행사였으며, 특히 몸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뜻이 있었습니다. 그 옛날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등을 환하게 켜놓고 새벽닭이 울 때까지 춤을 추며 밤을 새우는 장막절의 마지막날 행사로써, 아마 절정의 시간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이 행사를 보시면서 그 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앞장에서 실로암으로부터 물긷는 행사를 보시고 "나는 생명수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 와서 마시라"고 생명수에 대해 말씀하셨고, 지금은 등 행사를 보시면서 빛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빛을 기념하는 시간에 옛날의 빛만을 기념할 것이 아니라 현재 살아있는 빛을 말씀하시며 또한 미래의 빛이 더 중요함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말씀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뜻하고 또 하나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빛으로 오시어서 모든 사람들 속에 계시는, 빛의 계시적인 의미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빛의 본체이지만, 우리는 그 빛을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빛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빛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도록 허락되었습니다. 볼 수 있고 감지할 수 있도록 오신, 즉 빛의 근원의 계시로 임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하는 말씀도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은 빛의 본체이신 하나님의 계시자로 오셨습니다. 그 빛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우리들 가정에서 전등을 켜고 전기를 이용하여 여러 가지 기구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전기는 빛이요 힘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전기를 눈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때로는 자력을 통해서 모터라고 하는 힘을 얻을 수도 있고, 또한 전등을 통해서 빛으로 나타나서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와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빛 속에 살면서 그 빛을 모릅니다. 죄와 허물로 가리워져서 빛이 있음에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눈을 열어 주시고 계시해 주시므로, 그리스도가 빛 되심을 볼 수 있고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제 세상은 빛으로 밝아지고 빛으로 보존되어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신령한 빛이시며 도덕적인 빛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으로 보는 빛만이 아니라 생명의 빛, 영적인 빛까지도 바라봅니다. 선과 악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바르게 구별되고, 가치 의식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밝아졌습니다. 인간의 지혜, 이성까지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밝아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며, 하나님을 모르는 자의 지식은 악마의 지혜입니다. 쉬운 예로 동남 아시아나 아프리카, 인도 등 아직도 하나님을 모르는 나라들은 미개한 그대로 깜깜하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도 인도에는 길거리에 소가 많이 다니고 있는데, 굶어 죽으면서도 소가 신이라고 해서 먹지 않습니다.
소는 길거리를 마음대로 쏘다니는데, 죽으면 내다버릴망정 먹지 않습니다. 종교적인 어두움이 이렇게 답답합니다. 다른 나라에 대해 이야기할 것 없이 우리 나라에도 상당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라도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어둡기 짝이 없습니다. 지금도 무슨 일만 있으면 북어나 돼지머리를 찾고 있으니 말입니다.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도 많은데 하필이면 북어요 돼지머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유를 물어보면 그저 한 잔 하는 것이 좋아서 그렇다고 얼버무려 버립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지식적으로나 지혜로나 생각하는 것이 이렇게 어둡습니다. 세계 지도를 펴놓고 보더라도 근대화된 나라를 보면, 전부 복음이 들어간 곳이요, 복음이 없는 나라는 공산당 아니면 깜깜한 나라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결국 예수는 빛이시라는 것을 증명하는 실상이기도 합니다.
빛이란, 본래 본다는 말이며 안다는 말입니다. 빛에는 두 가지 원리가 있는데, 하나는 빛 자체를 본다는 것이요 또 하나는 빛 안에서 다른 것을 본다는 것입니다. 첫째로, 빛 자체를 본다는 것은 식물을 보면 금방 이해가 됩니다. 창가에 조그마한 화초를 키워도 빛으로 향해 굽어지는 것처럼 모든 것이 밝은 곳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즉, 빛은 방향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빛의 원리입니다. 둘째로, 빛이라고 해서 빛만 보는 것이 아니라, 빛 안에서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알게 됩니다. 빛이 있어야 꽃도 보고 사람도 보고 나 자신도 보는 것입니다.
즉, 빛에 비추어서 사물을 보고 자신도 보고 사랑이 무엇인가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빛이 없이 사람을 보면 사람이 동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그것이 바로 공산당입니다. 빛 안에서 사람을 보아야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빛에는 심판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즉, 빛에 가까이 사는 사람은 진실하게 아름답게 거룩하게 살며, 빛 안에서 자랑거리를 얻습니다. 그러므로, 빛 앞에 나타나기를 좋아하게 되고 빛의 방향으로 자꾸만 가게 됩니다. 그러나, 부끄러운 일을 많이 가진 사람은 어두운 사람으로 빛을 싫어합니다. 도둑이 보름달을 싫어하듯이 말입니다. 어두워야만 영업이 되고, 밝으면 그 날 일은 끝난 것이니 빛은 심판적인 것입니다. 빛은 같은 빛이지만 한 사람에겐 두렵고 부끄럽고 싫은 것이며 또 한 사람에겐 반갑고 좋은 것이니, 이것이 바로 심판이 아닙니까? 태양빛을 놓고 잠깐 생각하면, 세상의 모든 생물은 빛을 받아야 살아갑니다. 특히 농사에 있어서 비도 중요하지만 햇빛은 더 중요합니다. 일조 시간에 따라 풍년이냐 흉년이냐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햇빛을 충분히 받아야 성장하고 열매맺는데, 반대로 뿌리가 뽑힌 식물은 햇빛을 받으면 받을수록 빨리 시듭니다. 이것이 심판적 요소입니다. 다시 말하면, 살아 있는 생명은 빛 안에서 성장하지만, 죽은 생명은 빛 안에서 아주 죽어 버립니다. 이것이 심판입니다.
다음,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시므로 그를 따르는 자는 생명의 빛을 얻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 8:12 하반절). 생명의 빛이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빛을 비춰 주므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생명을 말합니다. 빛 자체가 생명의 근원으로써 이 빛을 받음으로 생명이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이 빛 안에서만 생명이 온전해지고 성장한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5:14에 보면 "너희는 세상에 빛이다"라고 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귀한 빛을 얻을 수 있습니까? 본문에서 "나를 따르는 자는 생명의 빛을 얻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른다는 것은 그 말이 쓰여지는 용도에 따라 몇 가지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대장을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군대에서는 상관의 명령을 절대 복종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살아 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따른다는 것은 목숨을 건 절대 위탁, 절대 순종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주님의 십자군이 되어, 군인이 대장을 따르듯 주님을 따르면 생명의 빛을 얻는 것입니다. 둘째, 종이 주인을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종이 주인을 따를 때에도 어떤 이유나 구실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따르는 것입니다. 운명을 같이 하는 따름입니다. 세째는, 지혜로운 자의 충고를 따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선택적인 따름으로써 그것이 옳기 때문에 따르는 것이요, 즐겁게 따르는 것입니다. 넷째는, 제자가 스승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배운다는 뜻으로 스승의 의견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따른다는 의미를 다 종합하면, 믿음과 즐거운 순종과 자원적인 순종의 뜻이 있습니다. 동시에 절대적인 위탁입니다. 이렇게 따름으로써 우리는 생명의 빛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빛을 받고 살아나면 또한 누구에겐가 나도 빛이 됩니다. 예수를 따르는 한 사람 때문에 가정이 밝아지고 직장이 밝아지는 사례는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잠언에 보면,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어리석은 자와 동행하면 욕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빛과 함께 사는 자는 영광과 자랑이 함께 합니다. 여기 요한복음 3:19 -22의 말씀을 옮겨 봅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 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진리를 좇는 자는 언제나 빛을 사랑하고 빛으로 인하여 영광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괴롭힙니다. "바리새인들이 가로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하니 네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도다"(요 8:13). 예수를 믿지 않으려고 다른 증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계속 말씀드리지만 증거가 부족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아니하고 증거만 찾습니다. 믿는다는 문제는 증거에 있는 것이 아님은 앞에서 여러 차례 보았고 우리도 경험하고 있습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처럼, 보느냐 안 보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겸손입니다. 어느 때든지 겸손하고야 믿을 수 있고 믿어야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됩니다. 교만 앞에서는 어떤 증거든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불신앙적인 말에 대답하시기를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므로"(요 8:15) 빛을 모르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육체를 따라 판단하는 자는 땅에 속한 자로서 인간적이요, 자기 중심적이며, 정욕적이며, 인간의 규례를 따르는 율법 중심적이기에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6에 보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는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기에 중생하지 않으면 신령한 진리를 알 길이 없습니다. 이것은 차원의 문제입니다. 육에 발을 붙이고 생각을 하고 있는 한, 성경을 보나 기도를 하나 알아질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에 속했느냐, 영에 속했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육체를 따라 판단하기 때문에 어떻게 빛을 알겠느냐고 심판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빛을 받고, 빛을 믿고, 빛을 따르고, 빛 안에서 살며, 그리고 빛을 증거하는 빛의 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자료 18,185편 ◑ > K자료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스로 버리노라(요한복음 10장 11절~18절) (0) | 2024.03.19 |
---|---|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로마서 8장 26절~30절) (0) | 2024.03.19 |
불신의 이유(요 5:41-47) (0) | 2024.03.19 |
불신앙의 원인(요 10:19~28) (0) | 2024.03.19 |
본 바를 행하라(4장 8절~9절) (0) | 2024.03.1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