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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이루시는 하나님(로마서 8장 26절~30절)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역사는 과연 누구의 손으로 이루어지는가?'---우리의 마음에 종종 번민을 일으키는 문제입니다. 때로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수가 있습니다. 걸출한 소수의 인재가 역사를 주도해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선한 사람이 통치하면 평안을 얻고 덕을 입으나, 악한 사람이 통치하게 되면 온세계가 그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게 되는 까닭입니다.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사람이 통치할 때마다 역사와 세계는 사람의 손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또한, 때로는 이 세계가 악령(惡靈)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악한 사람이 기승을 부리고 악한 정권이 흥하는 것 같은 때에, 선한 사람은 모두 숨어버리고 없는 것 같은 때에 우리는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마치 악령에 붙들린 것 같은 사람들이 활개를 치는 세상에서 절망하는 마음이 생길 때입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손으로 운행됩니다. 얼핏보기에는 마치 다른 힘으로 진행되는 것 같지만, 역사는 오로지 하나님이 운행하심을 성경은 특별히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으로부터 요한계시록 22장에 이르기까지, 성경이 말씀하는 주제는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입니다. 잠시잠깐 악인이 세력을 얻으며, 잠시동안 불의한 일이 벌어지며, 잠시동안 끔찍한 악이 난무한다 하여도, 역사는 누가 뭐라 해도 하나님께서 지배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마지막을 붙들고 계십니다. 역사의 깊은 곳에 면면히 흐르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주제입니다.
본문 28절은 우리가 익히 알고 암송하는 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언제 어느 때에 들어도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어느 때에 읽어도 우리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는 귀한 신앙간증입니다. 귀한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합동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의 번역에는 주어가 빠져 있습니다마는, 원문에는 '하나님이 선을 이루시느니라'고 명백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 기자들은 시편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은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고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선하시다고 보십니까 폭군으로 보십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을 도우시는 분입니까 괴롭히시는 분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 내 마음이 위로를 얻습니까 불안합니까? 어느 편입니까? '하나님은 선하시다. 적어도 내게는 선하신 하나님이시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풍랑이 심하게 몰아치는데도 예수님은 그 조그마한 배의 고물에서 평안히 주무십니다. 제자들은 참지 못하여 예수님을 흔들어 깨웁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이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 8:22-27)."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믿음이란 무엇이겠습니까? '풍랑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이 배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온세계가 하나님의 손안에 놓여 있다. 왜들 두려워하느냐'하심입니다. 이 고요의 마음, 평안의 마음이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선하실 뿐 아니라, 오늘의 본문에 보면 선을 이루십니다. 강한 표현입니다. 이것은 정적(靜的)인 선이 아니라, 동적(動的)인 선입니다. 행동적인 것입니다. 기다리시는 선이 아닙니다. 찾아 이루시는 행동의 선입니다. 어떤 번역본은 본문을 '최선을 이루신다'고도 번역하고 있습니다. 최선을 만드시는 하나님, 최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것이 구원받은 자가 가질 역사관입니다. 믿음으로 구원 얻은 자의 영원한 찬송이요, 계속적인 간증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바라볼 때에는 자신의 모습도 선하게 비쳐집니다. 이웃을 보아도 선하게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느낄 수 있으며, 온 세계에 아름다움과 선을 주시는 하나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하시지만 나는 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복을 베푸시나 나는 그 복을 받을만한 사람이 못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나는 그 사랑을 받아들일 그릇이 못된다, 하나님은 선하시나 나는 하나님의 선을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이다.' 이처럼 자기부족을 느끼는 데에 우리의 고민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엄청난 복음의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은 창조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창조적입니다. 사랑할 대상을 찾아 헤매는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자로 만드시는 사랑입니다. 팔짱을 끼고 앉아 기다리는 선(善)이 아닙니다. 선한 자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작동하는 것입니다. 나는 선하지 못하나 그는 선하십니다. 나는 그를 떠났으나 그는 나를 기다리십니다. 나는 그를 부인했으나 그는 나를 끝까지 붙들고 계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이시기에, 나 자신은 믿을 수 없어도 하나님은 믿을 수 있습니다. 세상은 악하지만 하나님은 선을 이루십니다. 로마서 8장 22절이 증거하는대로, 현재는 모든 피조물이 다 탄식하며 고통하고 있습니다. 만물이 탄식합니다. 그러나 주의 아들은 나타나실 것이요, 장차 하나님의 뜻하신 선을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믿는 바 복음입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귀한 은총을 입으며 이것을 간증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본문은 두 가지로 그 조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참으로 오묘한 것입니다. 사랑을 이야기할 때에 흔히 드는 일화가 있지요. 사랑하는 두 남녀가 결혼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사랑하는 마음이 서로 극진합니다. 아내가 밥짓는 게 서툴러서 쌀이라도 잘못 일었다고 합시다. 밥을 먹다가 와지끈, 돌을 씹었습니다. 민망한 아내가 쩔쩔맬라치면 남편이 여유있게 위로합니다. "돌보다 쌀이 더 많은데 뭐." 이것이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사랑할 때에는 모든 것을 좋게만 받아들입니다. 잘한 것은 잘한 대로 예쁘고, 못한 것은 못한 것대로 애교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귀하고 아름답게만 보이는 것입니다. 사랑에 미친 자에게는 모든 것이 푸르게만 보입니다. 소망적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간증은 이러합니다---'하나님은 선하시다.' 또한,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의 뜻에 부르심을 입었다는 확신이 있는 사람입니다. 교통사고로 두 다리가 부러져 입원한 환자가 있었습니다. 수술을 받고 오랫동안 입원해 있는 중에, 병원에서 사역하시는 목사님의 전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세계관을 가집니다. 퇴원하게 되자 그 사람은 목사님께 간증하였습니다. "목사님,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람을 인도하시는 방법도 여러 가지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워낙 교만해서, 이렇게 다리를 꺾어놓아야 교회에 나갈 생각을 합니다. 이 정도의 상황이나 되어야 비로소 제가 하나님을 부르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설명해도 통할 수 없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이 말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강하게 붙들고 계시는가? 다리를 꺾어서라도 회개시킬 사람은 회개케 하십니다. 거짓을 버리고 진실하게 만드십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선하신 역사(役事)를, 창조적인 선을 길이 간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십니다.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역사 하십니다. 능동적으로, 창조적으로 역사 하십니다. 요한일서 4장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선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의 차원에서 새롭게 세계를 보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의 지식과 간증은 오로지 '하나님은 선하시다, 하나님이 선을 이루신다'라는 것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분석해보면, 네 가지의 핵심적인 가르침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선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장하십니다. 그가 십자가로 사랑을 보증하시고, 죄인을 구원하사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시는 능력으로 선을 이루십니다. 선을 시작하신 이가 선을 완성하십니다. 죄 가운데에서 붙드신 이가 의인으로 만드십니다. 사도 바울도 종종 나약해질 때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생각합니다. '다메섹 도상(道上)에서 나를 부르신 하나님, 내가 죄인이었을 때에,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내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할 때에 나를 부르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나를 놓지 않으실 것이다!'라고. 그는 그의 서신에서 이러한 신앙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하노라(빌 1:6)." 두 번째로, '모든 것이' 선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 즉 구체적인 현실을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우연이 없습니다. 성공과 실패, 건강과 질병, 명예와 굴욕, 평화와 전쟁---이 모든 것이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의 높은 섭리와 뜻 가운데 놓여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든 알지 못하든, 납득하든 그렇지 못하든,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입니다. 우리는 뒤늦게야 이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내가 왜 어려움을 당해야 했는지, 왜 내게 실패가 있고 질병에 시달리며 이렇게 절박한 고독으로 고통 해야 하는지 지금 당장은 알지 못합니다. 욥은 이러한 진리를 깨닫고 고백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연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모든 깃을 아시고 인도하시는 주님을 따르는 신앙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요즈음은 날씨가 매우 덥습니다. 너무 더우니까 '아휴, 좀 시원했으면 좋겠는데……' 하고 바랍니다. 그러나 여름이 시원하면 식량 문제가 발생합니다. 농학자(農學者)들의 말을 빌리면, 이 더운 날이 얼마나 지속되느냐에 따라서 즉 일조량(日照量)에 따라서 농작물의 풍흉(豊凶)이 좌우된다고 합니다. 하루 이틀, 심지어 몇 시간의 차이에도 작황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선선한 기운이 돌기 시작하면 성장은 끝이 나고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이 더위와 추위에는 모든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형편과 환경의 모든 것이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씀합니다. 매우 뜻깊은 말씀입니다. 합동하여 역사합니다. 함께하여 역사합니다. 선과 악이 합력하여 역사합니다. 의인과 악인, 순경(順境)과 역경, 성공과 실패가 함께 역사한다는 말씀입니다. 격랑이 이는 바다를 보신 적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바다야 고요할 때 좋은 것 아닙니까? 바다 밑까지 전부다 뒤집어놓을 듯한 극심한 풍랑이 일 때마다, 도대체 이것이 왜 일어나야 하는 것일까가 저에게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풍랑이 없으면 물고기가 살 수 없다고 합니다. 바닷속에는 많은 생물이 있습니다. 이것들이 살아가자면 다량의 산소가 필요합니다. 이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서는 바닷물이 가끔 뒤엎어져야 한답니다. 오묘한 신비 아닙니까? 고요한 바다는 죽은 바다입니다. 생명이 그 안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일(海溢)이 일어야 하고 거센 파도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언제나 편안하기만을 바라지 않습니까? 특히나 자식을 위한 어머니의 소원은 더 그렇습니다. 무사하게 해주십시오, 편안하게 해주십시오, 시험에 붙게 해주십시오, 칭찬만을 듣게 해주십시오, 성공하게 해주십시오---매사가 다 잘되게 해달라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소원대로 다 된다면 그 자녀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귀하게 기른 외아들이 입대(入隊)를 했습니다. 군대야 너나할것없이 똑같이 대우하는 사회 아닙니까? 단 한번의 기합으로 이 아들이 자살을 했다고 합니다. '이래서는 못살겠다, 이런 세상을 도무지 살아갈 자신이 없다'고 탄식했다고 합니다. 나약하게 자란 탓이 아닙니까? 어차피 험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면 강하게 키워야 합니다. 신앙의 사람 맥아더 장군의 아들을 위한 기도를 되새겨보십시다. "하나님이여, 내게 이러한 아들을 주시옵소서…… 아들에게 평탄한 길을 주지 마옵시고 쉬운 길을 걷도록 하지 마옵소서. 역경과 환난을 주옵소서. 그리고 그것을 이길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지 않습니까? 과연 장군다운 기백의 기도입니다. 구체적이요 현실적인 기도입니다. 평탄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역경과 순경, 폭풍과 고요함, 밤과 낮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고 하나님의 손에 주어질 때에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마지막으로, '영화롭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예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역사를 통하여 영화롭게 하십니다. 예정은 하나님의 신비한 역사입니다. 우리는 예정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환난 속에서 나를 부르신 그 부르심은 분명합니다. 의롭다 하심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제 또한 우리가 알든 모르든, 하나님은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시편 91편 15절을 읽어봅니다.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런 말씀입니다. '내가 너를 환난 중에 영화롭게 하리라.' 그렇습니다. 영광은 환난 중에 얻어지는 것입니다. 환난 속에 영광이 있습니다. 엄청난 고난 속에서 영화롭게 하시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예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리라---이것이 주님의 약속입니다.
세태가 몹시도 어수선합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을 분명히 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 믿음의 근거는 오직 하나님이요, 그의 사랑이시요, 그의 십자가로 보증하신 분명한 사랑의 계시입니다. 그 안에서 또한번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고백하십시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신다고!---"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오늘도 내일도 이것이 우리의 간증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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