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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자화상(민수기 13 : 25~33)
언젠가 한번 비교적 책을 많이 쓰는 한 친구가 자기가 쓴 책에 대하여 후회하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옛날에 자기가 쓴 책을 뒤적여 보니까 이걸 책이라고 썼나 싶어서 다시 열어 보고 싶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어느 후대에 가서 휴지로 돌아갈 걸 생각하니 그 많은 시간을 여기에다 허비한 것이 후회스럽기 짝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스스로 속은 것입니다.
세상에는 속고 속이는 일이 끊임없이 악순환 되고 있습니다. 누구에게 속는다는 것도 유쾌한 일이 못 되지만 더욱 마음 아프게 하는 것은 자기에게 스스로 속는 일입니다. 이것은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 마음의 허전함이란 더욱 클 것입니다.
또 속는 줄 알면서도 계속 속고 있는 일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자기 불신에 빠지게 되고, 살아갈 의욕을 상실하게 되며, 자칫 잘못하면 자살이라는 엄청난 비극을 불러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며 어떤 모습의 자화상을 그리고 있는지 좀더 진지하게 자기의 모습에 대하여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남에게 대하여 신경을 많이 쓰면서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항상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옆집 담장이 우리 집보다 높은 것 같고 남의 가정이 내 가정보다 행복한 것 같고, 다른 사람의 직업이 내 직업보다 나은 것 같고, 남들이 나에게 뭐라고 하는가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업에 실패한 그 자체의 아픔보다 지금까지 자기를 대우하여 주던 사람들이 이제 나를 어떻게 대해 줄까 하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더 비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패로 인한 상처와 함께 낙심하여 초라해진 하나의 피곤한 인간의 모습을 그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세상이 나에게 주는 평판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무관심하였던 자신에게로 관심을 돌려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그 자화상을 그려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오는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로 홍해를 건너고 시내 광야를 거쳐서 요단강 가에 왔을 때 마지막으로 요단강만 건너면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꿈에도 잊지 못하던 땅을 눈앞에 두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열 두 지파의 두령들을 불러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탐지할 내용까지도 자세히 일러주었습니다. 그 땅 거민의 강약과 다소와 그들이 거하는 땅의 호 불 호와 거하는 성읍이 진영인지 산성인지 토지의 후박과 수목의 유무를 탐지해 오라고 일렀습니다.
열 두 명의 정탐군이 40 일간의 정탐을 마치고 돌아와서 보고를 할 때 한결같이 말하기를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었습니다. 그 증거품으로서 포도 한 송이를 두 사람이 막대기에 꿰어서 들고 왔다고 했습니다.
어릴 때 성경을 읽으면서 포도 한 송이가 이렇게 크다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과장되고 거짓말 같다고 생각한 때가 있었는데, 언젠가 미국에서 농산물 박람회가 열려서 가보니 포도 한 송이가 얼마나 큰지 포도알 하나가 큰 주먹만한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이것을 보고 나서 성경 말씀을 믿지 않았던 것을 회개하였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증거를 가지고 와서 비옥한 땅이라고 한 것까지는 모두 의견이 같았는데, 그 다음부터 이들 사이에 의견대립이 생겼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이 말하기를 그 땅의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만 아니라 그 거민들은 키가 장대하여 우리가 그 앞에 서니 메뚜기 같더라고 하며, 그 땅을 치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밤새도록 통곡하며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한 장관을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차지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니 그들은 우리의 밥이며 능히 이길 수 있다고 믿고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 열 두 정탐꾼들의 자화상이 두 가지로 그려졌습니다. 자신을 메뚜기 같다고 한 것은 그들의 눈에 보이는 대로 세상을 먼저 보았기 때문입니다. 키가 크고 성읍이 견고한 보이는 현상만을 생각하여 겁을 먹었던 것입니다.
현대의 큰 맹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업적 위주의 세계관, 물량 중심의 가치 평가,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우리는 돈 많은 사람을 부러워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참 평안이 없습니다. 불의의 길을 통하여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은 편히 잠을 자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업에 성공했다고 하지만 그간의 모든 부조리로 인하여 그 마음은 늘 불안한 것입니다.
강약의 기준이 물량에 있는 것이 아니며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의 기준이 그 물량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도덕적 차원입니다.
죄가 관영 했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가나안 족속을 멸하시려는 것은 그들의 죄가 관영 했기 때문입니다. 좀더 직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기 위하여 그들을 멸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그들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죄가 관영 했다는 것은 이제 멸망밖에 남은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정탐꾼은 그 부조리와 타락과 죄는 보지 못하고 높은 건물과 튼튼한 성곽만 보고, 자기를 작게 평가하여 낙심하고 메뚜기처럼 초라하게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불 신앙적인 눈으로 본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높은 성을 본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죄악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이 성을 보았더니 곧 망하게 되는 성읍이었습니다. 이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하였으며, 크고 강한 것 같지만 그들은 이미 죄로 인하여 썩어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성읍인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난 날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한 역사를 그들은 믿었으며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떤 전쟁에도 패함이 없었던 은총적인 과거에 대하여 확실한 믿음을 가졌으며, 그 눈으로 현재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보는 눈이 달랐습니다. 은총 안에 있는 자기 모습, 그것은 아름답고 화려한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만 있으면 모든 것은 걱정할 문제가 없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족속을 자기들의 밥이라고 하였습니다. 놀라운 신앙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먼저 보고 자기를 보았던 것입니다.
세상을 먼저 보고 자기를 보면 메뚜기 자화상을 그리기가 쉽습니다. 돈이 있으면 행복할 줄 알고, 돈이 없으면 불행한 줄 알며 건강하면 축복 받았다고 생각하고, 건강하지 못하면 저주받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항상 비참한 자화상을 그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물량에다 기준 하여 사람을 평가하는 것보다 불행한 일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쓸모가 있다거나 없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 사회가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의 존재가 그 가치를 상실하는 것이 아니며, 능력이 없고 건강하지 못하며 명예가 없다고 해서 버려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보시는 평가는 이런 것들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중심 깊은 곳을 보십니다. 물량적으로 나타난 통계 숫자와 업적을 보고 사람을 평가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고 하나님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대개 나이가 많아지면 당하는 슬픔이 있습니다. 젊었을 때는 만나자고 하는 사람도 많았고 반가운 사람도 많았는데, 늙어서는 귀찮은 존재로 여김을 받게 되니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게 생각하는 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우리의 생의 가치 기준은 그럴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필요로 하면 가치가 있고 필요로 하지 않으면 가치가 없어지는 것이 인간의 평가 기준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참 인간의 가치는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흔히 죽는다는 소리를 많이 하다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죽는다는 소리를 잘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혼하여 아기가 생기면 더욱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지구상에 50억 인구가 살지만 이 어린아이의 부모가 될 사람은 자기들밖에 없기 때문에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생명이 나를 절대로 필요로 할 때 그만큼 삶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투자한 지난날과 오늘 이 시간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꼭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높은 뜻과 섭리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를 필요로 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나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이 시간 여기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자세히 둘러보면 분명히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내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만일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지경에 있다 할지라도 마지막 해야 할 한 마디의 말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때 임종 직전에 있는 사람이 눈을 못 감다가 멀리서 아들이 돌아오면 그 아들을 만나보고 손을 붙들고 마지막 한 마디 말을 하고 눈을 감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한 마디를 못했기 때문에 눈을 못 감았던 것입니다.
내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은 해야 할 말이 있고 해야 할 일이 하나님 앞에서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자기의 모습을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승리의 자화상을 그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래의 자기 모습에 대해서는 처절하게 말을 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그는 의롭다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니 대적할 자가 없으며 나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긴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달려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켰으니 생명의 면류관이 자기 앞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은총 속에서 본 바울의 자화상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쓸데없이 절망하여 더 이상 값싼 눈물을 흘리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내 편에 계셔서 나를 사랑하시고 계십니다.
다윗이 골리앗 대장 앞에 섰을 때 그는 소년이었습니다. 베틀채 같은 창을 든 골리앗 대장 앞에 소년 다윗은 물멧돌 다섯 개를 주머니에 넣고 마주 서서 전쟁이 사람에게 있지 아니함을 너로 하여금 알게 하리라고 담대히 말했습니다. 다윗은 위대한 신앙의 사람으로서 신앙의 눈으로 사물을 평가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나, 신앙인은 그런 의미에서 자기 모습으로 자기를 보지 않고 이웃이 자기를 평가해 주는 대로 자기를 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보며 십자가를 쳐다볼 때마다 그 십자가 안에 있는 나를 봅니다. 십자가의 피를 흘려 대속하신 소중한 생명입니다.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시고 길이 참으시면서 많은 것을 투자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나를 보며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나라는 자화상을 그려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계속 나를 필요로 하고 계시며, 나는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마치 약혼식을 하고 결혼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우리는 신랑 되신 예수를 바라보며 그 날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소중히 단장해야 하는 하나의 신부입니다.
사랑을 받는 사람은 자기를 소중히 여길 줄 압니다. 사랑 안에서 자기 사랑을 모르는 자는 참 하나님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의 몸도 마음도 생각도 모두 소중한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실 때 특별히 두 가지 단어를 많이 사용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네게 주었다"하는 말이며, 또 하나는 "네 손에 붙였다"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들은 이미 이루어진 약속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저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땅은 모두 네게 주었다고 할 때 여호수아는 그 땅을 이미 받은 것으로 응답하였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나중에 받아질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또한 이 땅을 네게 붙였다고 하셨으면 이 전쟁은 이긴 것으로 생각하여 승전가를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아말렉 군사와 싸울 준비를 하라고 했을 때 1만 2천명이 모였습니다. 아말렉 군사에 비하면 형편없는 숫자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숫자를 줄이고 줄여서 삼백 명만 남겨 놓게 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수십만 되는 아말렉 군사를 기드온의 손에 붙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전쟁은 이미 이긴 것으로 결론이 난 것이었기 때문에 많은 군사가 필요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람의 손에 맡기지 아니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자 함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할 수 있다거나 없다거나 혹은 안다 모른다 등의 여유를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인간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모두 교만에 속하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믿고 행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먼저 보고 십자가를 보고 그리고 나를 보고 그 다음에 세상을 보면 능히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세계, 하나님의 손에 있는 세계, 어떤 형편에 있든지 나는 계속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항상 축제에 살며 이 은혜에 감격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등산을 하는 사람이 중턱에 섰을 때에 너무 산정을 자주 쳐다보지 말며, 또 뒤로 내려다보지도 말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높은 산정을 자주 쳐다보면 올라갈 일이 까마득하여 미리 힘이 빠져 버리고, 또 자주 내려다보면 돌아가야 할 길이 자꾸 멀어져 앞으로 올라가기가 힘들어진다는 것입니다. 다만 내 앞에 있는 언덕 하나에 한 발자국씩 최선을 다해서 올려놓을 것뿐입니다.
우리의 인생길이 얼마나 남았든지 앞날에 대하여 미리 걱정하지 말며, 현재 우리 앞에 주어진 한 사건 한 사건에 대하여 약속을 믿고 최선을 다하여 한 걸음씩 걸어갈 것뿐입니다.
우리는 또 다시 세상을 먼저 보고 이지러지고 병들고 나약한 자화상을 그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약속 받은 자로서 항상 밝고 건강한 믿음의 용사를 그려보십시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며 약속하신 땅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기도 :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주의 약속을 받았으나 그 약속을 믿지 못하여 병든 심령으로 살아가는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어서 십자가로 보증한 사랑과 은총 가운데 있는 저희들의 모습을 다시 찾아서 밝은 미래를 바라보며 약속을 쫓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우리의 믿음에 좌절이 없게 하시고, 은혜 안에 있는 승리의 자화상을 그리며 주의 약속을 따라가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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