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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승리의 비결(수 1:1~9)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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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비결(1:19)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강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 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 종 모세사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강을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느 땅으로 가라.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밝은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이,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 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오직 너 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향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할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우리는 때로 텔레비젼 프로를 통해서 서커스를 볼 때가 있습니다.

저는 맹수를 길들려 가지고 서커스에 나오는 아가씨를 볼 때마다 어딘가 모르게 굉장히 부러운 생각이 듭니다. 무서운 사자, 표범 등의 맹수들을 잘 길들여 가지고 나와서 그들을 껴안고, 쓰다듬고, 심지어는 입맞추고, 타고, 놀고, 마구 뒹굴며 어울려 지내는 것을 볼 때 에덴 동산을 연상하기도 합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삼손이 사자를 찢어 죽였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것과는 얘기가 틀립니다. 총으로 쏘고 몽둥이로 치고 해서 다스리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 연약한 아가씨가 맹수를 다루는 것과 힘으로 다루는 것과는 힘의 차원이 다릅니다. 아나운서들은 반드시 질문을 합니다. 어떻게 해서 맹수들을 이렇게 잘 다스리며 이렇게 사이가 좋으냐고 말입니다. 대체로 대답하는 말이 꼭 한 마디입니다. "믿음과 사랑입니다." 내가 저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저들이 알고, 저들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내가 알고 그 사랑을 서로 믿는 것이라고 답변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관계가 이루어지면 이렇게 서로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였겠습니까만 우리가 결과적으로 볼 때에 정말 믿음과 사랑, 그것은 위대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폭군적이고 파괴적인 능력이라는 것은 위대한 능력이 아닙니다. 사랑과 믿음, 그것으로 다스리고 그것으로 정복하고 그것으로 하나 되고 어울리는 화목한 관계, 거기에 힘의 위대함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힘의 근원에는 몇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가 경제적인 힘입니다. 돈의 위력은 사실 대단합니다. 옛말에장사도 무일푼이면 안색이 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역시 돈은 필요하고 부가 힘의 상징으로 나타나 있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둘째로 이보다 더 큰 힘은 지식의 힘입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이 옳습니다. 현대는 기술 세대로서 아는 자가 결국 모르는 자를 이기는 것입니다. 모르면 무능력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쨌든 알아야 합니다. 세 번째는 경험의 힘입니다. 아무리 지식이 있다해도 처음하는 일은 자신이 없습니다. 익숙하도록 경험한 일은 자신이 있고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힘만으로는 살 수가 없습니다. 한 차원 높은 또다른 힘이 있습니다. 이것은 도덕적인 힘입니다. 사람은 불의할 때 약합니다. 의롭지 못한 일을 할 때에는 겉으로는 목소리가 커지지만 마음은 약합니다. 떳떳하지 못하고 양심이 성원해 주지 않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로울 때, 정결할 때, 양심의 성원을 받을 때 우리는 강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귀한 그릇이라고 더러워진 그릇은 쓸모가 없습니다. 아무리 돈이 있고, 지식이 있고, 경험이 있어도 더러워진 인격은 힘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지혜마저도 빼앗아 어리석고 우둔한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봉사와 희생적인 때에 사람은 힘이 있습니다. 이기심은 생의 원동력을 다 빼앗아 갑니다. 남이야 살든 말든 나 하나만 잘 되자는 이기심은 사람을 약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이기적인 사람은 대체로 비겁합니다. 그러나 남들이 어떻게 평가하든 자신은 남을 위하고, 이웃에 봉사하고, 나라를 위하고, 세계 평화를 위하여 일한다고 스스로 느끼는 확실한 명분이 있으면 힘이 솟아나고 용기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만을 힘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에게는 또다른 힘이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4가지의 힘이 다 중요하지만 이 위에 플라스 알파의 힘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믿음의 힘입니다. 정치적인 여건이나, 경제적인 능력이나, 자기의 긍지, 결백, 도덕적 용기 위에 믿음의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결백의 도덕적 용기란 독선과 고집으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힘은 진실의 힘이요, 겸손의 힘으로 힘의 근본입니다. 이 힘에 바로 승리의 비밀이 깃들여 있습니다. 요한일서 5:4에 보면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본문 가운데 믿음의 대표적인 사람, 승리의 사람 여호수아를 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는 40년 동안 그의 백성을 인도했습니다만 그는 가나안 땅을 멀리 바라보며 죽었습니다. 이제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뒤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게 됩니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암담했습니다. 상대방은 강하고 포악합니다. 그런데다가 이 60만 대중들은 오합지졸(烏合之卒)입니다. 걸핏하면 모세를 죽이겠다고 하던 사람들이며,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불평하던 불신앙의 사람들입니다.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형편이 없습니다. 물론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도 이야기가 안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데리고 요단강을 건너 땅에 들어간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였고 불안했습니다.

또한 두려웠고 고독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요단강을 건너가라" 승리할 수 있는 그 무엇을 별도로 주시지 않은 채 말입니다. 옛날 모세도 백성들이 나를 믿지 않으니 무엇인가 달라고 하나님께 항의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특별히 신기한 어떤 것을 주시지 않고 모세가 늘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가지고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른 막대기였지만 하나님이 동행하실 때 뱀이 되고, 생수가 터지며,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에게는 막대기도 없습니다. "그저 가라." 이런 답답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정치적으로 그 어떤 것도 가진 것이 없고 하나님이 주신 것도 없습니다. 단지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이길 수 있는 힘은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 믿음뿐입니다. 승리의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힘의 원천은 믿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이 나라의 군사력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 나라의 경제도 걱정없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크게 우려하고 있는 것은 불신입니다. 믿음이 없다면 끝입니다. 군사가 백만인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경제가 아무리 부흥한들 무엇합니까? 믿을 수 없다면 다 끝난 것입니다. 믿음이 힘의 원천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신문에 어떤 기사가 실렸을 때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이래 가지고야 나라가 어찌 잘 되기를 바라겠습니까? 장부가 백성을 믿어야 하고, 백성이 정부를 믿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거짓이고 불신 투성이면 망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가장 약한 것은 의심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불신은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맙니다. 힘의 원천이 군사나, 경제나, 지식이 아니란 말입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시고 약속하십니다. 약속 속에 또 명령이 있습니다. 가라, 강하게 하라, 담대하게 하라,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수없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약속을 하십니다. "네 발바닥으로 밟는 땅은 다 네게 주었노라." '주었노라'는 과거입니다. 땅문서나 마패 등은 없습니다.

다만, "그 땅을 내가 네게 주었노라"는 약속이 있습니다. 이 약속 위에 가라고 하십니다. 이제 갈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오직 약속에 대한 믿음입니다. 나 자신을 돌아보면 안 됩니다. 나는 나약하고 허물과 죄로 가득찬 무능력한 존재입니다. 지난날의 실패들을 아무리 들추어 보아도 소망이 없습니다. 아무리 분석해도 조그마한 가능성마저 없습니다. 또한 세상을 보아도 난감합니다. 이 세상 어느 구석에도 소망이 없습니다. 누구나 소망을 말하는 자도 없습니다. 꽉 막혔으며 절망적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먼 미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더 깊은 곳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 저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영적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은 능력입니다.

어떤 지독한 무신론자 이발사가 목사님과 같이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만약 하나님이 계시다면 강도, 죄인, 부조리 등 이런 모순을 왜 그냥 세상에 두느냐고 하나님이 없음을 주장했습니다. 마침 그때 맞은편에서 아주 보기 흉한 장발족의 청년이 오고 있었습니다. 듣고만 있던 목사님이 "여보, 자네 이발사가 아닌가? 저 보기 흉한 장발족들을 왜 그냥 보기만 하는가. 이발 좀 해 주시오. 저건 모두 당신 책임이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 보세요. 목사님, 저들이 나한테 와야 내가 깎아줄 것 아닙니까?" 이 말을 들은 목사님은 "하나님도 같은 마음이십니다. 당신 같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와야지 안 나오니 방법이 없지 않소." , 누구 책임입니까? 정말 답답한 일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보고 믿음으로 행하는 길에만 힘이 있고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은 순종입니다. 감상이나 관념이나 명상이나 이론이 아니며 자기 수양도 아닙니다. 믿음은 곧 행동입니다. 여리고를 함락하라 하시면 가야 합니다. 요단강을 건너가라 하시면 건너가는 겁니다. 가라 하면 갈 수 있음을 의미하고, 점령하라 하시면 점령케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순종이 있을 뿐입니다. 여기에다 율법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능력의 요소와 신비가 깃들여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하시기를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말하는 것 조심해야 합니다. 망한다, 망한다 하면 망합니다. 끝났다, 끝났다 하면 끝이 납니다. 말함으로 생각이 좌우되고, 생각함으로 운명이 좌우됨을 알아야 합니다. 생각에서 말이 되는 것만이 아닙니다. 말에서 생각이 바꾸어집니다. 그러므로 절망적인 말을 하지 맙시다. 입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떠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욕하고, 비난하고, 절망하고, 한숨쉬던 그 입으로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외우고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합시다. 그것이 승리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라." 우리 마음이 허망한 것으로 가득 차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꿈을 꾸어도 예수 꿈을 꾸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에서 저 무의식 상태에까지 말씀만으로 가득 채우자는 것입니다. 여기에 승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좌나 우로 치우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만 굳게 따라가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말씀입니다. 더하지도 말고, 감하지도 말고, 자기 마음대로 풀이하지도 말고, 이성주의로 해석해서 이성주의자가 되지도 말고, 자기 주관에 매여 신비주의자도 되지 말고, 곧게 따라가라,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망조의 길을 가면서 흥하기를 바라고, 심판 받을 일을 행하면서 승리를 바라고, 멸망의 길을 가면서 승리를 꿈꾸고 있습니다. 승리의 길에서야 승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살고, 이렇게 믿고, 이렇게 순종할 때에 하나님께서 승리케 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래서 승리는 선물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으려고 서두르지 맙시다. 좋은 나무가 되면 열매는 맺어지는 것입니다. 말씀 위에 굳게 서고, 약속을 믿으며, 순종할 때 그 말씀의 능력이 나를 승리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사 나로 승리케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승리의 신비로운 비결이 있습니다. 모쪼록 이 승리의 찬송을 계속 부를 수 있는 승리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나 자신만 보면서 절망하고, 세상의 어두운 것을 보면서 답답해하고 낙심하는 미련한 저희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하오니 주님의 약속을 바라볼 수 있고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가운데 능력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로 하여금 승리의 찬송을 부르게 하시고, 그 승리의 생을 살아가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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