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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선지자의 눈물(렘 4:19~22)

by 【고동엽】 2023.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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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의 눈물(렘 4:19~22)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 네가 나팔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 패망에 패망이 연속하여 온 땅이 탈취를 당하니 나의 천막은 홀연히 파멸되며 나의 휘장은 잠시간에 열파되도다. 내가 저 기호를 보며 나팔소리 듣기를 어느 때까지 할꼬,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우준한 자요 자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사람은 그가 누리고 있는 기쁨과 그가 당하는 고통에 의해서 그 사람됨이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에 기뻐하고 무엇에 슬퍼하느냐에 의해서 그 사람됨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동물적인 기쁨과 동물적인 고통을 겪고 있다 한다면 그는 그 정도의 인간 수준밖에 되지 않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이것은 이방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라" 고 하셨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잘 먹어서 기쁘고, 때로는 헐벗어서 괴롭고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이방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의 수준에서 벗어나서 좀더 높은 수준, 좀더 차원이 다른 고통과 기쁨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기쁨의 근원이요, 때로는 슬픔의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돈을 벌었어도 불의하기에 괴롭고, 아무리 GNP가 올라간다 하더라도 도덕적으로 잘못되었으므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어짐을 괴로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기쁨이나 슬픔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에 기준되어야 한단 말입니다.

인간의 인간됨은 역시 그가 인간된 고통을 지니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아픔이 아니라 슬픔을 지니고 슬픔을 알고 삽니다. 즉, 고통의 기쁨과 긴장 관계에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적인 고통만큼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가실 때 뒤따라오면서 우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너의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다고 감상적인 눈물을 흘릴 것이 아니라 너와 네 후손, 즉 미래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며 슬퍼하고 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눈물을 아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내려다보면서 우셨고 또한 민망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는 심한 고통과 아픔의 순간도 체험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아픔의 극치를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이 차원 높은 그리스도적 고통과 아픔을 생각할 줄 알아야겠습니다.

선지자들은 선지자들이기에 그들만이 느끼는 고통과 슬픔과 눈물이 있었습니다. 지각있는 자의 고통입니다. 생각이 없으면 고통도 없습니다. 생각이 없는 것은 경험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현대 사람들은 맑은 정신마저 흐리게 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술이다, 담배다, 오락이다, 향락이다, 밤새 댄스 홀에서 몸을 흔드는 이런 것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아편이 무엇이며 이 휴가철을 당하여서 갖가지 좋지 않은 일들이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모두가 잠시나마 고통을 잊어 보겠다는 아주 졸렬하고 바보스러운 방법입니다.

잠시나마 슬픔을 어떻게 잊어보겠다는 이야기인데 그렇게 해서 잊어집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그 모진 고통을 당하는 순간에 우슬초와 독주를 예루살렘의 귀부인들로부터 공궤함을 받게 됩니다. 잠시나마 이것을 잡수시고 그리고 아픔을 좀 잊으라는 뜻이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독주와 우슬초를 거절하셨습니다. 맑은 정신으로 십자가의 고통을 다 당하셨습니다.

바로 그 정신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앞에 오는 고통을 기피해도 안 되고 잊으려 해도 안 됩니다. 울어야 할 일은 울어야 합니다. 뼈가 깎아지는 아픔도 당해야 합니다. 결코 이래저래 망각하려 하고 피해 보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현대인은 몽롱하기를 좋아합니다. 환각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망각을 찾아 헤맵니다. 그러나 이것처럼 자살 행위가 없습니다.

호세아 4장 6절에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고 한탄한 말씀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무식해서 망하는 것이며 정치적으로 무식했기에 망하는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도 무지가 죄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몰라서 그랬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이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모르기 때문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죄를 짓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모르기에 멸망으로 치닫는 것입니다. 지식이 없으면 아픔도 없습니다. 의식이 없으면 고통도 없습니다. 태평합니다. 멸망되어가고 죽어가도 지식이 없으면 모르는 것입니다.

시편 49편 20절에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짐승은 고통도 슬픔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깨닫지 못하는 자는 짐승으로 죽어갑니다.

선지자는 선지자이기에 도덕적인 철학적인 그리고 영적인 고통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감각이 예민해서 많은 고통을 당하며 눈물을 흘리고 시달렸습니다. 영적 지각에서 오는 눈물이었습니다.

나아가서 미래 지향적인 지식에서 오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눈물은 절망적인 눈물입니다.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는 음성을 듣습니다. 그러므로 매를 맞아 아픈 것이 아니라 앞에 있는 매를 미리 생각하며 미리 아픈 것입니다.

연세대학교 교수 한 분이 청년들에게 영문학 시간에, 작문으로 6․25에 대한 소감을 쓰라고 했습니다. 그 청년들은 6․25당시에 국민학교 1, 2학년 정도였다 합니다. 그런데 어느 학생이 쓰기를 자기는 트럭을 타고 피난을 갔는데 마치 피크닉 기분이었다고 했답니다. 그 아이는 낭만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눈앞에 있는 전쟁의 고통을 몰랐고 자기 부모들의 고통을 전혀 몰랐습니다. 앞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끔 젊은이들이 할 일없이 놀러 다니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이제 몇 년 못 가서 가슴을 치며 후회할 날이 오겠지요. 왜 젊었을 때 놀았을까 하고 후회하는 그들의 모습을 미리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알아들었을 때는 이미 때가 다 지난 뒤입니다.

선지자는 앞에 있는 고통을 미리 압니다. 미리 알기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죄를 보고 심판을 보고 멸망을 봅니다. 그리고 웁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별명은 눈물의 선지자입니다. 앞에 있는 심판을 그는 미리 보았기 때문에 울었습니다. 너무 많이 울어서 눈병이 났고, 그의 눈은 항상 진물이 돌았습니다. 본문에 보면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내 심령 네가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 즉, 예레미야는 남이 못 듣는 소리를 듣고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기 때문에 그는 이렇게 답답해하고 괴로워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의 멸망을 바라보며 우셨습니다.

선지자의 눈물은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가 당하는 공감적인 아픔입니다. 남의 고통이 내게 전달되는, 즉 같이 느끼고 같이 아픈 그러한 괴로움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신당동 중앙교회에서 목회를 할 때 한 젊은 부부의 가정을 심방 했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이 가정에 첫 아이가 소아마비를 앓았습니다. 매일 물리치료를 하며 병원을 다니는데 제대로 걷기에는 아직 멀었습니다. 제가 심방 했던 날 그 어머니는 우리 아이가 요즘 치료 효과로 제법 지팡이를 의지하고 걷는다고 밝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럼 어디 한 번 봅시다" 하며 어린아이가 지팡이를 짚고 걷는 것을 격려하며 그의 걷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아이는 조금 걷다가 그만 힘에 겨워 '쿵'하고 쓰러졌는데 그 어머니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릅니다. 넘어진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넘어지는 아이를 보고 어머니가 얼마나 가슴 아파하는지 모두가 울적했습니다.

여러분, 이 세대를 보면서 이러한 사랑의 아픔이 있습니까? 혹시 주위에서 굶주리며 죽어가는 데도 아무 감각 없이 멍청하게 살아가지는 않는지요? 나 하나 잘 살겠다고 남의 것을 빼앗으며 백만 명, 십만 명이 죽어도 강 건너 불 구경하듯 무관심하지나 않는지요? 이 세대에는 눈물이 없습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집 나간 탕자 때문에 괴로워하는 아버지의 슬픔이 우리 마음에 전달되어야 합니다. 이웃이 굶고 있는데 나만 좋은 데서 휴가철이라고 놀 수 있느냐 말입니다. 이웃의 아픔과 고통이 나에게 그대로 전달되는 이런 것이 사람다운 고통이 아니겠습니까? 무엇인가 아픔이 전달되어야 합니다. 선지자는 이러한 아픔으로 괴로웠습니다. 로마서 9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믿지 않는 이웃과 동족을 생각해서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었다고 말을 합니다. 그는 멸망으로 죽어 가는 영혼들을 보면서 항상 마음에 괴로움이 그림자처럼 있었습니다. 바로 선지자의 아픔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픔을 받아들이는 믿음의 아픔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보내시며 말씀하십니다. "회개하라, 회개하라" 그리고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회개하지 않을 때에는 오늘 본문 28절에 보면 "다시는 돌이키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망한다고도 예고하셨습니다. 멸망하는데 준비가 필요해서입니까? 그렇게 하면 망할 것이니 회개하라는 예고입니다. 이사야 1장에 보면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내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 1:2~3). 여기에 하나님의 아픔이 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끝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사 1:5~7) 여기에도 하나님의 아픔이 있습니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재물을 다시는 내 앞에 가져오지 말라."(사 1:12~13) 인간들의 미련함에 하나님의 진한 아픔이 나타나 있습니다. 의인 열 명만 있으면 용서하시겠다고 하셨던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또한 예레미야 5장 1절에 보면 "너는 예루살렘 거리를 왕래하며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한 사람만 만나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다시 말하면 의인 한 사람이 없어서 심판을 내려야 하는 하나님의 마음속에 아픔이 있었습니다. 이 아픔을 아는 선지자는 그것이 괴로워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이 아픔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픔이 여러분께 전달되고 있습니까?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패역한 이스라엘을 보고 진노하시기를 "이 백성이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다 진멸해 버리고 너와 네 후손만 다시 살려서 번성케해서 가나안 땅을 건너가게 하리라."(출 32:9~10)고 말씀하셨을 때 보통사람 같으면 "하나님, 감사합니다"하고 응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사하지 아니하시려거든 내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려 주시옵소서."(출 32:32) 모세는 자기 백성이 망하는 것을 보면서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모세의 중보적인 고통이요 아픔이었습니다. 이 세대는 눈물이 없는 세대, 지각이 없는 세대입니다. 혹 웃음이 있습니까? 웃는다는 것마저 하나의 교활한 웃음에 불과합니다. 마치 기생의 웃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헛된 웃음일 뿐입니다. 혹 눈물이 있습니까? 정욕적인 자기 소원을 이루지 못했음에 대한 동물적인 아픔의 눈물일 뿐입니다. 자기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눈물이 아쉽습니다. 정말 신령하고 진정한 선지자의 눈물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혼돈된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공동묘지의 적막과도 같은 이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4절에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저가 위로함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애통하는 자에게는 진정한 위로가 있습니다.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찌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찌어다." 야고보서 4장 9절의 말씀입니다. 저 먼 미래를 바라보면서 오늘을 애통하는 자는 내일 큰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사랑의 슬픔이 있는 자에게 구원의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선지자의 눈물이 있어서 선지자에게 주시는 큰 위로가 우리와 우리 민족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슬픔도 기쁨도 없는 묘지의 적막과도 같은 이 세대를 사는 저희들에게 오늘도 귀한 말씀 주심을 감사합니다. 바라옵나니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는 음성을 듣게 하옵소서.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저 미래에 있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볼 수 있게 하옵소서. 다른 사람이 느끼지 못하는 아픔과 고통을 느끼며 진정 통회할 수 있고 애통하여, 애통한 자에게 주시는 놀라운 위로를 받고 또한 그 위로와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선지자의 눈물(렘 4:19~22)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 네가 나팔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 패망에 패망이 연속하여 온 땅이 탈취를 당하니 나의 천막은 홀연히 파멸되며 나의 휘장은 잠시간에 열파되도다. 내가 저 기호를 보며 나팔소리 듣기를 어느 때까지 할꼬,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우준한 자요 자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사람은 그가 누리고 있는 기쁨과 그가 당하는 고통에 의해서 그 사람됨이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에 기뻐하고 무엇에 슬퍼하느냐에 의해서 그 사람됨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동물적인 기쁨과 동물적인 고통을 겪고 있다 한다면 그는 그 정도의 인간 수준밖에 되지 않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이것은 이방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라" 고 하셨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잘 먹어서 기쁘고, 때로는 헐벗어서 괴롭고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이방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의 수준에서 벗어나서 좀더 높은 수준, 좀더 차원이 다른 고통과 기쁨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기쁨의 근원이요, 때로는 슬픔의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돈을 벌었어도 불의하기에 괴롭고, 아무리 GNP가 올라간다 하더라도 도덕적으로 잘못되었으므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어짐을 괴로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기쁨이나 슬픔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에 기준되어야 한단 말입니다.

인간의 인간됨은 역시 그가 인간된 고통을 지니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아픔이 아니라 슬픔을 지니고 슬픔을 알고 삽니다. 즉, 고통의 기쁨과 긴장 관계에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적인 고통만큼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가실 때 뒤따라오면서 우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너의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다고 감상적인 눈물을 흘릴 것이 아니라 너와 네 후손, 즉 미래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며 슬퍼하고 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눈물을 아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내려다보면서 우셨고 또한 민망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는 심한 고통과 아픔의 순간도 체험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아픔의 극치를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이 차원 높은 그리스도적 고통과 아픔을 생각할 줄 알아야겠습니다.

선지자들은 선지자들이기에 그들만이 느끼는 고통과 슬픔과 눈물이 있었습니다. 지각있는 자의 고통입니다. 생각이 없으면 고통도 없습니다. 생각이 없는 것은 경험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현대 사람들은 맑은 정신마저 흐리게 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술이다, 담배다, 오락이다, 향락이다, 밤새 댄스 홀에서 몸을 흔드는 이런 것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아편이 무엇이며 이 휴가철을 당하여서 갖가지 좋지 않은 일들이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모두가 잠시나마 고통을 잊어 보겠다는 아주 졸렬하고 바보스러운 방법입니다.

잠시나마 슬픔을 어떻게 잊어보겠다는 이야기인데 그렇게 해서 잊어집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그 모진 고통을 당하는 순간에 우슬초와 독주를 예루살렘의 귀부인들로부터 공궤함을 받게 됩니다. 잠시나마 이것을 잡수시고 그리고 아픔을 좀 잊으라는 뜻이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독주와 우슬초를 거절하셨습니다. 맑은 정신으로 십자가의 고통을 다 당하셨습니다.

바로 그 정신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앞에 오는 고통을 기피해도 안 되고 잊으려 해도 안 됩니다. 울어야 할 일은 울어야 합니다. 뼈가 깎아지는 아픔도 당해야 합니다. 결코 이래저래 망각하려 하고 피해 보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현대인은 몽롱하기를 좋아합니다. 환각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망각을 찾아 헤맵니다. 그러나 이것처럼 자살 행위가 없습니다.

호세아 4장 6절에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고 한탄한 말씀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무식해서 망하는 것이며 정치적으로 무식했기에 망하는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도 무지가 죄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몰라서 그랬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이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모르기 때문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죄를 짓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모르기에 멸망으로 치닫는 것입니다. 지식이 없으면 아픔도 없습니다. 의식이 없으면 고통도 없습니다. 태평합니다. 멸망되어가고 죽어가도 지식이 없으면 모르는 것입니다.

시편 49편 20절에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짐승은 고통도 슬픔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깨닫지 못하는 자는 짐승으로 죽어갑니다.

선지자는 선지자이기에 도덕적인 철학적인 그리고 영적인 고통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감각이 예민해서 많은 고통을 당하며 눈물을 흘리고 시달렸습니다. 영적 지각에서 오는 눈물이었습니다.

나아가서 미래 지향적인 지식에서 오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눈물은 절망적인 눈물입니다.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는 음성을 듣습니다. 그러므로 매를 맞아 아픈 것이 아니라 앞에 있는 매를 미리 생각하며 미리 아픈 것입니다.

연세대학교 교수 한 분이 청년들에게 영문학 시간에, 작문으로 6․25에 대한 소감을 쓰라고 했습니다. 그 청년들은 6․25당시에 국민학교 1, 2학년 정도였다 합니다. 그런데 어느 학생이 쓰기를 자기는 트럭을 타고 피난을 갔는데 마치 피크닉 기분이었다고 했답니다. 그 아이는 낭만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눈앞에 있는 전쟁의 고통을 몰랐고 자기 부모들의 고통을 전혀 몰랐습니다. 앞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끔 젊은이들이 할 일없이 놀러 다니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이제 몇 년 못 가서 가슴을 치며 후회할 날이 오겠지요. 왜 젊었을 때 놀았을까 하고 후회하는 그들의 모습을 미리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알아들었을 때는 이미 때가 다 지난 뒤입니다.

선지자는 앞에 있는 고통을 미리 압니다. 미리 알기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죄를 보고 심판을 보고 멸망을 봅니다. 그리고 웁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별명은 눈물의 선지자입니다. 앞에 있는 심판을 그는 미리 보았기 때문에 울었습니다. 너무 많이 울어서 눈병이 났고, 그의 눈은 항상 진물이 돌았습니다. 본문에 보면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내 심령 네가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 즉, 예레미야는 남이 못 듣는 소리를 듣고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기 때문에 그는 이렇게 답답해하고 괴로워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의 멸망을 바라보며 우셨습니다.

선지자의 눈물은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가 당하는 공감적인 아픔입니다. 남의 고통이 내게 전달되는, 즉 같이 느끼고 같이 아픈 그러한 괴로움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신당동 중앙교회에서 목회를 할 때 한 젊은 부부의 가정을 심방 했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이 가정에 첫 아이가 소아마비를 앓았습니다. 매일 물리치료를 하며 병원을 다니는데 제대로 걷기에는 아직 멀었습니다. 제가 심방 했던 날 그 어머니는 우리 아이가 요즘 치료 효과로 제법 지팡이를 의지하고 걷는다고 밝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럼 어디 한 번 봅시다" 하며 어린아이가 지팡이를 짚고 걷는 것을 격려하며 그의 걷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아이는 조금 걷다가 그만 힘에 겨워 '쿵'하고 쓰러졌는데 그 어머니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릅니다. 넘어진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넘어지는 아이를 보고 어머니가 얼마나 가슴 아파하는지 모두가 울적했습니다.

여러분, 이 세대를 보면서 이러한 사랑의 아픔이 있습니까? 혹시 주위에서 굶주리며 죽어가는 데도 아무 감각 없이 멍청하게 살아가지는 않는지요? 나 하나 잘 살겠다고 남의 것을 빼앗으며 백만 명, 십만 명이 죽어도 강 건너 불 구경하듯 무관심하지나 않는지요? 이 세대에는 눈물이 없습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집 나간 탕자 때문에 괴로워하는 아버지의 슬픔이 우리 마음에 전달되어야 합니다. 이웃이 굶고 있는데 나만 좋은 데서 휴가철이라고 놀 수 있느냐 말입니다. 이웃의 아픔과 고통이 나에게 그대로 전달되는 이런 것이 사람다운 고통이 아니겠습니까? 무엇인가 아픔이 전달되어야 합니다. 선지자는 이러한 아픔으로 괴로웠습니다. 로마서 9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믿지 않는 이웃과 동족을 생각해서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었다고 말을 합니다. 그는 멸망으로 죽어 가는 영혼들을 보면서 항상 마음에 괴로움이 그림자처럼 있었습니다. 바로 선지자의 아픔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픔을 받아들이는 믿음의 아픔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보내시며 말씀하십니다. "회개하라, 회개하라" 그리고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회개하지 않을 때에는 오늘 본문 28절에 보면 "다시는 돌이키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망한다고도 예고하셨습니다. 멸망하는데 준비가 필요해서입니까? 그렇게 하면 망할 것이니 회개하라는 예고입니다. 이사야 1장에 보면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내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 1:2~3). 여기에 하나님의 아픔이 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끝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사 1:5~7) 여기에도 하나님의 아픔이 있습니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재물을 다시는 내 앞에 가져오지 말라."(사 1:12~13) 인간들의 미련함에 하나님의 진한 아픔이 나타나 있습니다. 의인 열 명만 있으면 용서하시겠다고 하셨던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또한 예레미야 5장 1절에 보면 "너는 예루살렘 거리를 왕래하며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한 사람만 만나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다시 말하면 의인 한 사람이 없어서 심판을 내려야 하는 하나님의 마음속에 아픔이 있었습니다. 이 아픔을 아는 선지자는 그것이 괴로워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이 아픔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픔이 여러분께 전달되고 있습니까?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패역한 이스라엘을 보고 진노하시기를 "이 백성이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다 진멸해 버리고 너와 네 후손만 다시 살려서 번성케해서 가나안 땅을 건너가게 하리라."(출 32:9~10)고 말씀하셨을 때 보통사람 같으면 "하나님, 감사합니다"하고 응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사하지 아니하시려거든 내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려 주시옵소서."(출 32:32) 모세는 자기 백성이 망하는 것을 보면서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모세의 중보적인 고통이요 아픔이었습니다. 이 세대는 눈물이 없는 세대, 지각이 없는 세대입니다. 혹 웃음이 있습니까? 웃는다는 것마저 하나의 교활한 웃음에 불과합니다. 마치 기생의 웃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헛된 웃음일 뿐입니다. 혹 눈물이 있습니까? 정욕적인 자기 소원을 이루지 못했음에 대한 동물적인 아픔의 눈물일 뿐입니다. 자기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눈물이 아쉽습니다. 정말 신령하고 진정한 선지자의 눈물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혼돈된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공동묘지의 적막과도 같은 이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4절에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저가 위로함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애통하는 자에게는 진정한 위로가 있습니다.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찌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찌어다." 야고보서 4장 9절의 말씀입니다. 저 먼 미래를 바라보면서 오늘을 애통하는 자는 내일 큰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사랑의 슬픔이 있는 자에게 구원의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선지자의 눈물이 있어서 선지자에게 주시는 큰 위로가 우리와 우리 민족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슬픔도 기쁨도 없는 묘지의 적막과도 같은 이 세대를 사는 저희들에게 오늘도 귀한 말씀 주심을 감사합니다. 바라옵나니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는 음성을 듣게 하옵소서.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저 미래에 있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볼 수 있게 하옵소서. 다른 사람이 느끼지 못하는 아픔과 고통을 느끼며 진정 통회할 수 있고 애통하여, 애통한 자에게 주시는 놀라운 위로를 받고 또한 그 위로와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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