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로 돌아가기 |
자유에의 순례(신 8:1~6)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찌니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곳은 골짜기에든지 산지에서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들의 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저는 두 주일 전에 태평양 한가운데에 있는 괌도에 부흥 집회가 있어서 다녀왔습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섬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 중에 조그만 굴 하나를 소개받고 구경을 했습니다. 이 굴은 별로 높은 산에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대단한 굴도 아닌데 그 속에서 27년 동안을 혼자 산 사람이 있었던 굴입니다.
태평양 전쟁은 1945년 8월 15일에 끝났습니다만은 이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자기 혼자만 산 줄로 알고 그 굴 속에 들어가서 27년 동안을 홀로 살아온 요코라는 일본 군인이 있었습니다. 오래 전에 신문을 통해서 여러분도 이 이야기를 들으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정말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다. 나무 열매를 따먹고 뿌리를 캐어 먹으면서 낡아빠진 총 한 자루를 의지하고 27년을 살고 나왔는데 지금 박물관에 그의 옷과 총이 다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 분은 나만이 자유하다고 무엇인가 커다란 착각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동물처럼 사는 것 보다는 차라리 다른 동지들과 함께 죽는 것이 났다라는 생각을 왜 못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쨌든 산 속에서 2년도 아닌 27년을 혼자 살았다는 굴을 한참 들여다보면서 느끼는 바가 많았습니다.
자유의 뜻을 모르는 자는 자유할 자격이 없습니다. 자유의 값을 모르는 자는 그 뜻을 알지 못합니다. 자유를 위하여 그 고귀한 값을 지불한 바가 없는 자는 자유를 지키지 못합니다. 자유가 거저 주어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거저 지켜지지는 않습니다.
자유가 공짜로 얻어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공짜로 얻은 자유는 공짜로 보전되지는 않습니다. 자유는 아주 비싼 것입니다. 그러기에 상당한 값을 지불하여야 합니다. 그러고야 자유의 뜻을 알게 되고 이 뜻을 알 때에 자유가 지켜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유는 인간 존재의 본성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고 할 때에 인간은 자유할 수 있고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소유를 지배하는 자유, 소유하는 자유, 깨닫는 자유, 아는 자유, 지식의 자유, 나아가서 생명의 자유까지 부여받았습니다. 이렇게 사람은 엄청난 자유를 가지고 삽니다. 그러므로 그가 누리는 자유에 의해 그의 인간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자유의 영역, 자유의 깊이, 자유의 의미가 그 사람의 가치를 정해 주는 것입니다. 문제는 자유함을 아는 데에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무엇이나 다 하는 것이 자유가 아님은 분명합니다.
제가 60년대에 프린스톤 대학에서 공부를 할 때 본 일이 기억납니다. 가끔 저녁을 먹은 후 학교 주변을 산책하는데 그 곳에는 넓은 골프장이 있었습니다. 그 골프장에는 종종 20대의 어여쁜 백인 아가씨가 골프를 치러 나왔습니다. 그런데 항상 그 아가씨 뒤에는 70세에 가까운 흑인 할아버지가 골프채를 메고서 따라다니며 아주 정성껏 시중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 할아버지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파서 한 번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흑인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은 당연하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조금도 불편치 않고 좋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을 통하여 미국에서 흑인이 해방된 지가 100년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노예가 있었고 즐겁게 그 일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노예 상태에 있는 그는 노예 됨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부자유에 익숙해진 노예, 아주 잘 길들여진 노예, 그래서 그는 불평이 없습니다. 완전히 자유를 빼앗겼는데도 그것조차 모르는 이 흑인 노예를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몸의 자유만을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정치적 자유입니다. 아니 그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경제적인 자유도 아주 중요합니다. 가난한 자도 자유인이 아닙니다. 그런가하면 사상의 자유, 감정의 자유, 신앙의 자유, 이 모든 것들이 더 중요한 자유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순교해야 할 순간에 하나님을 배반하고 생명을 배반한 사람이 살아 있다고 해서 자유인이라 할 수 있습니까? 목숨을 부지했다 하더라도 그의 남은 생애는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이름을 높이고 순교한 사람은 생명을 잃었어도 그는 진정한 자유인입니다.
그렇다면 참 자유란 어떤 것입니까? "옥중에 있는 성도는 양심의 자유 얻었네"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옥에 있으면서도 무한한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 있고 부자집에 살지마는 감옥에 있는 것과 같은 고통을 지니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자유인입니까? 참 자유의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복음은 자유의 복음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자유의 도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십자가로 자유의 의미를 말해 주셨고 우리를 자유케 하셨고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의 자유를 지켜 주십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참 자유의 뜻을 알고 내게 주신 자유를 지켜나가야 하겠습니다. 기독교에서는 구원을 자유 또는 해방이라고 풀이합니다. 무엇이 자유이고 무엇으로부터 자유합니까? 종합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죄와 사망과 율법과 진노와 사탄의 권세로부터의 자유,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의미이며 구원의 의미입니다.
자유는 승화나 발전이나 혹은 길들여지는 것이나 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환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자유는 진실하며, 구체적이며, 근본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 그 본래의 인간으로 돌아가는 존재의 의미이며 본질적인 것입니다.
결코 새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구약에서 출애굽기는 애굽에서 나왔다고 해서 출애굽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오는 것을 해방이라 생각했고 그렇게 믿었습니다. 유월절을 지키므로 해방을 생각했고, 홍해를 건너므로 노예 생활이 끝났다고 기뻐했습니다. 이것이면 해방이요, 이것이면 구원이요, 이것이면 자유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리적이고 지정학적이고 정치적인 출애굽은 이루어졌으나, 광야에 나와서 보니 벌써 경제적인 문제에 부딪칩니다. 경제적인 노예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뿐 아니라, 사회적인, 문화적인, 습관적인, 종교적인 노예로서 옛 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새로운 노예 상태와 새로운 감옥이 눈앞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출애굽은 결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어떤 환경의 변화, 상태의 변화로 설명될 수가 없습니다. 사실상 출애굽은 계속적인 것이요, 연속적인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상태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로 해결을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에서 나오고 홍해를 건넘으로써 이제는 완성된 것으로 알았습니다만 어림없는 이야기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출애굽은 완성됩니다. 아니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문제는 있었습니다. 장소나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가 될 때에 출애굽은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 귀중한 사실을 저들은 미처 모르고 있었습니다. 공간적인 문제도 시간적인 문제도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긴 훈련 코스를 주셨습니다. 40년의 역사가 모두 출애굽이라 하여도 좋을 것입니다. 그들은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인 출애굽을 이루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물이 없다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뿐입니까? 고기 먹고 싶다고 원망을 했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옛날 생각을 하면서 애굽 생활을 그리워했습니다. 고기가마 옆에서 고기를 훔쳐먹는 노예 생활이었지만 그래도 그 생활이 배부르고 좋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걸핏하면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철저하게 노예로 길들여져 있었습니다. 정신적 출애굽은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모세야, 신을 벗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때묻은 신발을 벗었습니다만 이것은 형식적인 의미이고, 사실상 모세가 그 신발을 벗는 데는 40년이란 긴 세월이 걸렸습니다.
예수를 잘 믿는 좋은 사람도 가끔 화를 버럭 내며 악마 같을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흔히들 깜짝 놀라서 이 사람이 왜 이런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지만 놀랄 것 없습니다. 체질화된 나의 옛 것이 나온 것뿐입니다. 조금은 봐 줘야 하고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었다고 해서 그렇게 쉽게 종이 뒤집듯이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거룩함을 찾아 나설 때 내가 마술적으로나 기계론적으로 변하기를 바랍니다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지난날의 세계관을 떨쳐버리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가운데서 40년 생활을 하면서 애굽의 생활, 애굽의 습관, 애굽의 세계관 등 그 때묻은 과거의 모든 것을 벗어나게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가나안 땅에서의 새 질서 십계명을 가지고 새롭게 훈련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출애굽이며 광야 교회입니다.
새로운 세계를 익히며 하나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 됨을 훈련한 것입니다.
저는 얼마 전에 달나라에 다녀온 어윙 대령을 만나보았습니다.
미국에서 그의 고공 비행 시간이 7천 시간으로 그 당시 고공 비행 세계 기록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런데도 달나라에 가기 위해서 그는 다시 5년 동안 훈련을 해야 했다고 합니다. 먹는 것부터 훈련을 하여 5년 동안 채소만 먹고 마음과 정신을 단련하여 달나라에 다녀온 시간은 29시간이라 합니다. 달나라에 잠깐 다녀오기 위해서 세계 최고의 비행사가 다시 5년 간을 훈련받았다는 것은 간단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출애굽은 하나의 순례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 다할 때까지 출애굽 역사를 반복해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출애굽 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훈련과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을 알게 하려 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한 생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풍요로운 가나안에 바로 들어가면 그들은 미쳐버립니다. 젖과 꿀속에서 하나님을 저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님을 미리 훈련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주변에서 가끔 볼 수 있는 일인데, 아주 가난하게 어렵게 살던 사람이 어쩌다가 돈을 좀 만지게 되면 그만 돌아버립니다. 불쌍할 정도로 미쳐버립니다. 돈을 갖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돈을 지배할 줄 아는 인격이 먼저 있어야, 돈이 돈 되는 것입니다. 부자라고 자유인입니까? 돈의 노예는 정말 비참합니다.
예수님께서 40일 금식기도 하신 후에 몹시 주렸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40일을 굶은 절박한 상황인데도 아직도 말씀이 먼저요 우선이요 근본이었습니다. 이것을 가르치기 위해 이스라엘 사람들께 광야에서 40일을 주리게 하고 그리고 만나를 내렸습니다. 말씀을 주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둘째로 겸손을 가르치셨습니다. 낮고 낮추어서 40년 동안 계속 낮추었습니다. 발바닥이 땅에 닿을 때까지 낮추었습니다. 자기로부터 해방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가만히 보면 좀 배웠다고, 좀 가졌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교만합니다. 체면이다, 위신이다 하며 야단들 하는데 무엇이 그리 대단합니까? 체면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며, 가지 말아야 할 곳을 가고 있는 지성인들이 많습니다. 걷어치우며 차라리 편할 터인데 감투 쓰고 위신을 부리느라고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자기 교만을 극복해야 합니다. 겸손만이 자유할 수 있는 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가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 40년 동안을 훈련시키셨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자녀됨에 바른 인식을 주시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징계함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렇게 저렇게 징계하셨는데 이 모든 사건들을 아버지가 자녀에게 주는 사랑처럼 받아들일 수 있게 하기 위하여 훈련을 주신 것입니다. 내가 어떤 상황에 있던지 간에 이 모든 것 이대로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랑이라고 믿을 수 없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된 확증이 있어야 합니다. 오직 사랑만이 자유케 하며, 진리만이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간 광야에서 살면서 자유를 배웠습니다.
우리는 일본에서 해방되었을 때 이제는 다 된 것처럼 기뻐했습니다. 만세를 부르며 며칠 동안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습니다.
그렇게 소란했고 감격했습니다. 그런데 이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정치적인 문제, 경제적인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문화의 침략, 양심의 침략, 신앙적인 타락의 침략이 지나간 자국이 너무 컸습니다. 우리는 이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하여 오늘날까지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사상적 부자유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았습니다. 일본이 우리를 침략했을 때 첫 번째로 만들었던 것이 유각입니다. 이렇게 술집을 차려놓고 나라 잃은 슬픔에 허덕이는 젊은 사람들을 모두 타락시켰습니다.
쓸데없이 노래나 부르며 술을 마셨습니다. 지금까지 이 잔재가 남아서 좋아도 술집, 슬퍼도 술집입니다. 이것이 일본 사람들이 뿌려놓은 문화적 침략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르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이 뿌려놓은 관료주의가 아직도 그대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뿌리 깊이 남아 있습니다. 신사참배의 미신도 한쪽으로 남아 있습니다. 모든 면으로 36년 동안 얼마나 깊이 빠졌던가를 알아야 합니다. 정치적인 자유만이 자유가 아닙니다.
말씀만이 자유케 하고, 오직 겸손과 신앙만이 자유케 하며, 하나님의 자녀 됨이 우리를 참으로 자유케 합니다. 자유인은 곧 그리스도인이요 그리스도인만이 신앙 안에서 자유를 영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기도 자비로우신 주님, 자유를 모르는 자에게 자유를 주시고, 자유를 지키지 못하는 자들에게 계속 자유케 하심을 감사합니다. 간구하오니 우리에게 겸손함을 주시고 하나님을 알게 하시며, 그 진리를 알게 하여 자유케 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이 자유를 지킬 수 있게 하시며 길이길이 보존하여 자유케 하는 복음을 전하고 주의 크신 자유를 확장하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자유에의 순례(신 8:1~6)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찌니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곳은 골짜기에든지 산지에서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들의 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저는 두 주일 전에 태평양 한가운데에 있는 괌도에 부흥 집회가 있어서 다녀왔습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섬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 중에 조그만 굴 하나를 소개받고 구경을 했습니다. 이 굴은 별로 높은 산에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대단한 굴도 아닌데 그 속에서 27년 동안을 혼자 산 사람이 있었던 굴입니다.
태평양 전쟁은 1945년 8월 15일에 끝났습니다만은 이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자기 혼자만 산 줄로 알고 그 굴 속에 들어가서 27년 동안을 홀로 살아온 요코라는 일본 군인이 있었습니다. 오래 전에 신문을 통해서 여러분도 이 이야기를 들으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정말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다. 나무 열매를 따먹고 뿌리를 캐어 먹으면서 낡아빠진 총 한 자루를 의지하고 27년을 살고 나왔는데 지금 박물관에 그의 옷과 총이 다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 분은 나만이 자유하다고 무엇인가 커다란 착각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동물처럼 사는 것 보다는 차라리 다른 동지들과 함께 죽는 것이 났다라는 생각을 왜 못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쨌든 산 속에서 2년도 아닌 27년을 혼자 살았다는 굴을 한참 들여다보면서 느끼는 바가 많았습니다.
자유의 뜻을 모르는 자는 자유할 자격이 없습니다. 자유의 값을 모르는 자는 그 뜻을 알지 못합니다. 자유를 위하여 그 고귀한 값을 지불한 바가 없는 자는 자유를 지키지 못합니다. 자유가 거저 주어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거저 지켜지지는 않습니다.
자유가 공짜로 얻어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공짜로 얻은 자유는 공짜로 보전되지는 않습니다. 자유는 아주 비싼 것입니다. 그러기에 상당한 값을 지불하여야 합니다. 그러고야 자유의 뜻을 알게 되고 이 뜻을 알 때에 자유가 지켜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유는 인간 존재의 본성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고 할 때에 인간은 자유할 수 있고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소유를 지배하는 자유, 소유하는 자유, 깨닫는 자유, 아는 자유, 지식의 자유, 나아가서 생명의 자유까지 부여받았습니다. 이렇게 사람은 엄청난 자유를 가지고 삽니다. 그러므로 그가 누리는 자유에 의해 그의 인간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자유의 영역, 자유의 깊이, 자유의 의미가 그 사람의 가치를 정해 주는 것입니다. 문제는 자유함을 아는 데에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무엇이나 다 하는 것이 자유가 아님은 분명합니다.
제가 60년대에 프린스톤 대학에서 공부를 할 때 본 일이 기억납니다. 가끔 저녁을 먹은 후 학교 주변을 산책하는데 그 곳에는 넓은 골프장이 있었습니다. 그 골프장에는 종종 20대의 어여쁜 백인 아가씨가 골프를 치러 나왔습니다. 그런데 항상 그 아가씨 뒤에는 70세에 가까운 흑인 할아버지가 골프채를 메고서 따라다니며 아주 정성껏 시중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 할아버지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파서 한 번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흑인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은 당연하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조금도 불편치 않고 좋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을 통하여 미국에서 흑인이 해방된 지가 100년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노예가 있었고 즐겁게 그 일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노예 상태에 있는 그는 노예 됨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부자유에 익숙해진 노예, 아주 잘 길들여진 노예, 그래서 그는 불평이 없습니다. 완전히 자유를 빼앗겼는데도 그것조차 모르는 이 흑인 노예를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몸의 자유만을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정치적 자유입니다. 아니 그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경제적인 자유도 아주 중요합니다. 가난한 자도 자유인이 아닙니다. 그런가하면 사상의 자유, 감정의 자유, 신앙의 자유, 이 모든 것들이 더 중요한 자유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순교해야 할 순간에 하나님을 배반하고 생명을 배반한 사람이 살아 있다고 해서 자유인이라 할 수 있습니까? 목숨을 부지했다 하더라도 그의 남은 생애는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이름을 높이고 순교한 사람은 생명을 잃었어도 그는 진정한 자유인입니다.
그렇다면 참 자유란 어떤 것입니까? "옥중에 있는 성도는 양심의 자유 얻었네"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옥에 있으면서도 무한한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 있고 부자집에 살지마는 감옥에 있는 것과 같은 고통을 지니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자유인입니까? 참 자유의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복음은 자유의 복음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자유의 도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십자가로 자유의 의미를 말해 주셨고 우리를 자유케 하셨고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의 자유를 지켜 주십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참 자유의 뜻을 알고 내게 주신 자유를 지켜나가야 하겠습니다. 기독교에서는 구원을 자유 또는 해방이라고 풀이합니다. 무엇이 자유이고 무엇으로부터 자유합니까? 종합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죄와 사망과 율법과 진노와 사탄의 권세로부터의 자유,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의미이며 구원의 의미입니다.
자유는 승화나 발전이나 혹은 길들여지는 것이나 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환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자유는 진실하며, 구체적이며, 근본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 그 본래의 인간으로 돌아가는 존재의 의미이며 본질적인 것입니다.
결코 새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구약에서 출애굽기는 애굽에서 나왔다고 해서 출애굽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오는 것을 해방이라 생각했고 그렇게 믿었습니다. 유월절을 지키므로 해방을 생각했고, 홍해를 건너므로 노예 생활이 끝났다고 기뻐했습니다. 이것이면 해방이요, 이것이면 구원이요, 이것이면 자유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리적이고 지정학적이고 정치적인 출애굽은 이루어졌으나, 광야에 나와서 보니 벌써 경제적인 문제에 부딪칩니다. 경제적인 노예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뿐 아니라, 사회적인, 문화적인, 습관적인, 종교적인 노예로서 옛 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새로운 노예 상태와 새로운 감옥이 눈앞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출애굽은 결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어떤 환경의 변화, 상태의 변화로 설명될 수가 없습니다. 사실상 출애굽은 계속적인 것이요, 연속적인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상태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로 해결을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에서 나오고 홍해를 건넘으로써 이제는 완성된 것으로 알았습니다만 어림없는 이야기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출애굽은 완성됩니다. 아니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문제는 있었습니다. 장소나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가 될 때에 출애굽은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 귀중한 사실을 저들은 미처 모르고 있었습니다. 공간적인 문제도 시간적인 문제도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긴 훈련 코스를 주셨습니다. 40년의 역사가 모두 출애굽이라 하여도 좋을 것입니다. 그들은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인 출애굽을 이루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물이 없다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뿐입니까? 고기 먹고 싶다고 원망을 했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옛날 생각을 하면서 애굽 생활을 그리워했습니다. 고기가마 옆에서 고기를 훔쳐먹는 노예 생활이었지만 그래도 그 생활이 배부르고 좋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걸핏하면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철저하게 노예로 길들여져 있었습니다. 정신적 출애굽은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모세야, 신을 벗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때묻은 신발을 벗었습니다만 이것은 형식적인 의미이고, 사실상 모세가 그 신발을 벗는 데는 40년이란 긴 세월이 걸렸습니다.
예수를 잘 믿는 좋은 사람도 가끔 화를 버럭 내며 악마 같을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흔히들 깜짝 놀라서 이 사람이 왜 이런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지만 놀랄 것 없습니다. 체질화된 나의 옛 것이 나온 것뿐입니다. 조금은 봐 줘야 하고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었다고 해서 그렇게 쉽게 종이 뒤집듯이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거룩함을 찾아 나설 때 내가 마술적으로나 기계론적으로 변하기를 바랍니다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지난날의 세계관을 떨쳐버리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가운데서 40년 생활을 하면서 애굽의 생활, 애굽의 습관, 애굽의 세계관 등 그 때묻은 과거의 모든 것을 벗어나게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가나안 땅에서의 새 질서 십계명을 가지고 새롭게 훈련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출애굽이며 광야 교회입니다.
새로운 세계를 익히며 하나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 됨을 훈련한 것입니다.
저는 얼마 전에 달나라에 다녀온 어윙 대령을 만나보았습니다.
미국에서 그의 고공 비행 시간이 7천 시간으로 그 당시 고공 비행 세계 기록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런데도 달나라에 가기 위해서 그는 다시 5년 동안 훈련을 해야 했다고 합니다. 먹는 것부터 훈련을 하여 5년 동안 채소만 먹고 마음과 정신을 단련하여 달나라에 다녀온 시간은 29시간이라 합니다. 달나라에 잠깐 다녀오기 위해서 세계 최고의 비행사가 다시 5년 간을 훈련받았다는 것은 간단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출애굽은 하나의 순례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 다할 때까지 출애굽 역사를 반복해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출애굽 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훈련과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을 알게 하려 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한 생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풍요로운 가나안에 바로 들어가면 그들은 미쳐버립니다. 젖과 꿀속에서 하나님을 저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님을 미리 훈련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주변에서 가끔 볼 수 있는 일인데, 아주 가난하게 어렵게 살던 사람이 어쩌다가 돈을 좀 만지게 되면 그만 돌아버립니다. 불쌍할 정도로 미쳐버립니다. 돈을 갖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돈을 지배할 줄 아는 인격이 먼저 있어야, 돈이 돈 되는 것입니다. 부자라고 자유인입니까? 돈의 노예는 정말 비참합니다.
예수님께서 40일 금식기도 하신 후에 몹시 주렸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40일을 굶은 절박한 상황인데도 아직도 말씀이 먼저요 우선이요 근본이었습니다. 이것을 가르치기 위해 이스라엘 사람들께 광야에서 40일을 주리게 하고 그리고 만나를 내렸습니다. 말씀을 주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둘째로 겸손을 가르치셨습니다. 낮고 낮추어서 40년 동안 계속 낮추었습니다. 발바닥이 땅에 닿을 때까지 낮추었습니다. 자기로부터 해방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가만히 보면 좀 배웠다고, 좀 가졌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교만합니다. 체면이다, 위신이다 하며 야단들 하는데 무엇이 그리 대단합니까? 체면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며, 가지 말아야 할 곳을 가고 있는 지성인들이 많습니다. 걷어치우며 차라리 편할 터인데 감투 쓰고 위신을 부리느라고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자기 교만을 극복해야 합니다. 겸손만이 자유할 수 있는 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가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 40년 동안을 훈련시키셨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자녀됨에 바른 인식을 주시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징계함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렇게 저렇게 징계하셨는데 이 모든 사건들을 아버지가 자녀에게 주는 사랑처럼 받아들일 수 있게 하기 위하여 훈련을 주신 것입니다. 내가 어떤 상황에 있던지 간에 이 모든 것 이대로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랑이라고 믿을 수 없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된 확증이 있어야 합니다. 오직 사랑만이 자유케 하며, 진리만이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간 광야에서 살면서 자유를 배웠습니다.
우리는 일본에서 해방되었을 때 이제는 다 된 것처럼 기뻐했습니다. 만세를 부르며 며칠 동안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습니다.
그렇게 소란했고 감격했습니다. 그런데 이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정치적인 문제, 경제적인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문화의 침략, 양심의 침략, 신앙적인 타락의 침략이 지나간 자국이 너무 컸습니다. 우리는 이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하여 오늘날까지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사상적 부자유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았습니다. 일본이 우리를 침략했을 때 첫 번째로 만들었던 것이 유각입니다. 이렇게 술집을 차려놓고 나라 잃은 슬픔에 허덕이는 젊은 사람들을 모두 타락시켰습니다.
쓸데없이 노래나 부르며 술을 마셨습니다. 지금까지 이 잔재가 남아서 좋아도 술집, 슬퍼도 술집입니다. 이것이 일본 사람들이 뿌려놓은 문화적 침략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르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이 뿌려놓은 관료주의가 아직도 그대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뿌리 깊이 남아 있습니다. 신사참배의 미신도 한쪽으로 남아 있습니다. 모든 면으로 36년 동안 얼마나 깊이 빠졌던가를 알아야 합니다. 정치적인 자유만이 자유가 아닙니다.
말씀만이 자유케 하고, 오직 겸손과 신앙만이 자유케 하며, 하나님의 자녀 됨이 우리를 참으로 자유케 합니다. 자유인은 곧 그리스도인이요 그리스도인만이 신앙 안에서 자유를 영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기도 자비로우신 주님, 자유를 모르는 자에게 자유를 주시고, 자유를 지키지 못하는 자들에게 계속 자유케 하심을 감사합니다. 간구하오니 우리에게 겸손함을 주시고 하나님을 알게 하시며, 그 진리를 알게 하여 자유케 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이 자유를 지킬 수 있게 하시며 길이길이 보존하여 자유케 하는 복음을 전하고 주의 크신 자유를 확장하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क्वाक पास्टर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너진 망대의 교훈 (눅 13:1~5) (0) | 2024.08.01 |
---|---|
부활의 권능(빌 3:7~12) (0) | 2024.08.01 |
성령의 능력 (행 4:5~12) (0) | 2024.08.01 |
이 후에는 알리라(요 13:1~11) (0) | 2024.08.01 |
주의 법을 사랑합니다 (시 119:97~104) (0) | 2024.08.0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