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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능력 (행 4:5~12)
이튿날의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예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셨더라.
과격한 성격이 이유가 되어 10년간의 결혼 생활을 뒤에 두고 별거 생활을 해야 했던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 별거 생활 중에 남편이 예수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중생을 하여 새 마음으로 아내를 찾아가 다시 시작하자고 간청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10년을 속고 또 속았기에 이제 믿지 않았습니다. 답답한 남편이 저에게 와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부인을 만나 10년을 속았지만 이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속아보라고 사정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전과는 달리 예수를 믿고 세 사람이 되었으니 한 번만 더 시도해 보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그 부인은 완강했습니다. 자기가 그동안 온갖 방법과 정성을 다 들였어도 못 고쳤는데, 예수가 어떤 분인지 모르지만 그 분을 믿는다고 달라질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옆에서 거들기를, 이왕 속았으니 또 속는 셈치고 한 달만 계약 조건으로 살아보는 게 어떠냐고 해서 다시 만나 재결합하여 이제 잘 살고 있습니다. 그 분이 바로 우리 교회 집사님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변화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흔히 어머니들이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자식은 내가 겉을 낳았지 속까지 낳았겠느냐고요. 어머니는 겉모양은 단장시켜 줄 수가 있고 심지어는 높은 학력까지 공부를 시킬 수도 있지만 그러나 사람이 되고 안 되고는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내가 정성을 들이고 사랑한다고 남편이 바꾸어질 것 같습니까? 사람되기는 힘든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때려부수는 재주와 파괴하는 굉장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살리고 변화시키는 데는 재주가 없는 것 같습니다. 요새 심리학 박사도 많고, 교육학 박사도 많아서 열심히, 바로 가르치고 많이 배우느라고 야단인데 세상은 어찌된 셈인지 점점 더 어려워만 갑니다. 교육으로 안 되는 모양입니다. 요새 'Complain Form Personality'라는 책을 보았습니다. 이 책은 불평형의 인간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불평형은 자기가 100만원 있었으면 하고 불평을 했는데 막상 100 만원이 채워지면 또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더 큰 불평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결국 불평하는 사람은 어디 갔다 놓아도 불평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불평형의 성격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환경이 그 사람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믿지 않습니다. 물질적 환경이 사람의 중심과 인격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착각입니다. 그것은 유물사관입니다. 어떤 환경에서든지 변화될 사람은 변화되고 안 될 사람은 안 됩니다. 가난할 때 악한 사람이, 부하다고 선해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오히려 더 악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무식할 때 인간성이 잘못 된 사람이 지식이 많아졌다고 해서 사람이 다시 될 것 같습니까? 박사 학위를 열 개 가졌어도 사람이 되는 것과 지식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어느 환경이라도 안 될 사람은 안 됩니다. 속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이지, 사람들의 어떤 재주로는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는 우리가 다 경험하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남의 이야기 할 것 없습니다. 나 자신도 변화하기가 이렇게 힘드니 말입니다. 내 의지로, 내 능력으로, 내 지혜로 불가능한 것임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라는 사람은 본래 갈릴리 어부입니다. 그가 얼마나 비겁한 자였으면 예수님의 제자이면서도 그를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면서 물러서고 있습니까? 그런데 성령으로 변화되자 자기가 예수를 부인했던 바로 그 법정에 서서 담대하게 말하기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으냐, 너희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 너희가 판단하라"고 놀라울 정도로 기탄 없이 용기 있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한마디로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모습, 새로운 인격, 새로운 성격의 새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능력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서는 새 세계에 살고, 새 능력으로 살아갔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를 변화케한 요인들을 성경에서 종합해 보면 몇 가지가 있습니다. 객관적인 이유입니다. 첫째 본문 13절에 보면 "저들이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들이다."라고 했는데 이 말은 예수를 사귀고 예수를 따라 다닌 사실이 오늘 이와같은 변화를 가져왔다는 의미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부활사건입니다. 죽으셨던 예수가 부활하셨다는 이 사건이 마침내는 베드로로 하여금 놀랍게 변화된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즉 부활이 변화의 능력으로 역사하셨습니다. 셋째는 성령의 강림입니다. 성령이 충만해짐으로 그가 구체적으로 그의 삶에 변화가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넷째는 현재에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멀리 계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재하신 그리스도, 현재 여기 나와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를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임재의식과 내재의식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것은 신비로운 체험입니다. 마지막으로 종말론적인 신앙이 확고해졌습니다. 주께서 부활 승천하신 것을 보았는데 "본대로 오리라"하는 말씀을 저들은 마음에 새기고 있습니다. 본대로 다시 올 것이다.
즉, 재림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을 때에 저들의 생활에 엄청난 변화가 왔습니다. 이것은 신비로운 것입니다.
여기서 베드로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는 원래 갈릴리 어부로서 제자로 발탁되어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기거하고, 말씀을 들으며, 모름지기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들을 샅샅이 다 보았습니다.
바다를 고요하게 하신 일, 귀신을 내어쫓는 일, 병자를 고치는 일, 5천명을 먹이신 일, 죽은 자를 살리신 것등 3년 동안 그저 감탄할 일 뿐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아마 베드로는 시간시간 깜짝 놀라며 감격하여 발이 땅에 닿는지 뜨는지도 모르게 신이 나서 예수님 뒤를 따라 다녔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베드로를 위시해서 그 제자들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하는 초라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변화된 것이 없었습니다. 그 다음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습니다. 같이 기뻐하고 같이 식사를 했습니다. 희한하고 굉장한 사건을 만났는데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모름지기 이러한 생각을 하였으리라 짐작을 해 봅니다. "예수님, 저를 이제 찾지 마세요, 저 같은 인간을 제자로 삼았다가는 예수님 망신입니다. 저는 이제 사양하고 갈릴리 바다로 갑니다." 그리고 옛 직업으로 돌아갔던 베드로입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의 변화, 예수의 부활 사건도 베드로와는 무관했습니다. 배워도 소용이 없고, 알아도 소용이 없고, 깨달아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여전히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므로 말미암아 이제 비로소 새 사람이 되고 부활 사건의 의미가 달라지고 예수님의 교훈과 말씀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기억되며 새로운 의미로 저 깊은 곳에서 권능으로 역사 하게 됩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새 베드로가 되고 복음을 위해 일생을 바치게 됩니다. 결정적인 것은 성령의 강림이었습니다. 이 귀중한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부활절이 없는 오순절은 추상적인 감격에 끝납니다. 오순절이 없는 부활절은 역사적 사실과 객관적 진리로 남을 뿐입니다. 이것으로 변화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평생 예수를 따르고 성경 66권을 몽땅 외운다고 해도 그것으로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말씀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그리스도의 사건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이 역사적인 사건이 내게 다가와서 신앙 사건으로 바꾸어지기 전에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역사를 배웁니다. 그 역사와 오늘 나의 삶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심지어 잘 알고 잘 가르칩니다. 그러나 나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미 주께서 하신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이제 내게 주신 말씀으로 부딪치고, 그 사건이 내 사건으로, 부활 사건이 내 생명의 사건으로 살아나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고백합니다. 그것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오늘 여기서 나의 주로 고백하게 될 때에 그 속에 말씀의 능력이 능력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흔히 중생이라고 합니다. 위로부터 나는 역사요, 새롭게 출생하는 신기원적인 역사요, 의식 이전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성화의 역사입니다. 의롭다 하시는 사랑을 받아들이게 되고 받아들일 때에 기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을 받아 들일 때 믿음이 동반되지 아니한 사랑은 무효입니다. 유산하고 맙니다. 아무리 부모가 사랑하고, 아내가 사랑하고, 남편이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이 사랑을 내가 믿을 때에만 사랑이 사랑됨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엄청난 것이요, 부활의 사건은 우주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나를 위한 것으로 믿을 때 비로소 놀라운 생명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래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고 하나님의 자녀의 자아 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로마서 8:16에 보면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느니라." 성령은 계속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정상화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될 때에는 세계관이 바뀌어집니다. 나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뿐만 아니라 세계를 보는 눈도 달라집니다.
전에는 이 세계가 마귀의 손에 있고 죄악이 있고 그리고 사람의 손에 의해서 움직이는 세계인 줄 알았는데 성령을 받고 보니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리스도가 주인이요, 하나님이 섭리하시고 진리가 다스리게 되는 세계라는 것을 알게 되고 마침내는 이 우주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함을 알게 됩니다. 신천신지를 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제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요, 이웃은 내 형제요, 모든 세계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세계로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옛날 베드로는 법정을 무서워했고, 매 맞는 것을 무서워했고, 관원들을 무서워했고, 죽음과 십자가를 두려워했으나 성령을 받은 베드로는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했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두려워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묻는 그 말씀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43절에 보면 "사람마다 두려워했다"고 했는데 이것은 죄와 형벌과 진노의 저주를 두려워하는 두려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현재성 즉, 그리스도가 현존하신다고 하는 그 영적 분위기에 감격하여 신 임재의식으로 꽉 차 있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성령이 불과 같이 혀와 같은 불로 임했고 그리고 방안에 가득 하더라"고 했습니다. 가득하다란 무슨 뜻입니까? 쉽게 설명하면, 사랑하는 자가 옆에 있으면 마음도 든든하고 빈집도 가득하게 느껴집니다. 집안에 사람이 많아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면 텅 빈집같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처럼 성령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 충만한 은혜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입니다. 그래서 이기심과 정욕은 사라졌습니다. 사도행전 4:32에 보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물건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고 하는 자가 하나도 없더라"고 했습니다. 물건이 내 것이 아니며 같이 쓰고, 이웃도 내 형제요, 전부가 서로서로 나누어 쓰고 유무 상통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 의견을 고집치도 않고, 저 사람에게 내가 필요한 것을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새로운 형제관, 새로운 물질관, 새로운 세계관을 가지고 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으로 살기에 늘 감격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성남에 제 친구가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아주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며 어려운 지역의 교회입니다. 언젠가 한 번 눈물을 흘리며 어느 여집사님의 간증을 제게 들려주었습니다. 그 여집사님은 혼자서 아이들을 데리고 어렵게 살아가는 분인데 직업은 목욕탕에서 때를 밀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려운 환경인데도 매일 얼마나 기쁨과 은혜로 살아가는지 그 분을 보면 곧 감동이 될 정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1년에 수십 명씩 그 집사님에게 감동되어 교회로 오는 분이 늘어난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당신 같은 환경에서 그렇게 기쁨과 감사로 살 수 있느냐고 감동하여 교회로 인도되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예배당을 건축하느라고 애를 쓰는데 여집사님이 400만원을 헌금했습니다. 목욕탕에서 번 돈으로 말입니다. 자, 이 분의 기쁨은 아무도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남편이 토닥거려주는 사랑도 아니요, 물질로 채워지는 기쁨도 아니며, 오직 성령이 주는 기쁨입니다.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 그로서 그는 이 같은 기쁨과 간증과 찬송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주는 능력이요, 성령이 주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능력을 주시며 부활의 증인으로 살게 하십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예수를 못박은 사람들을 앞에 놓고,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살렸다고 본문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을 정면으로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죄하고도 살아남기를 바라겠습니까? 변화된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 신앙도 중요하지만 예수의 부활을 믿을 뿐더러 이제는 나의 부활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내 부활을 보고 성령이 오늘 내게 능력을 주시니 베드로는 이제 죽는 일이 두렵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목숨을 걸고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체험이 있어야 하고 둘째는 사랑이 있어야 하고 셋째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이 체험을 주었습니다. 성령이 극진한 사랑의 마음을 주었습니다. 성령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와 운명을 같이 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습니다. 드디어 증인이 됩니다. 성령이 증거 하게 하십니다.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얻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증인이 "되라"가 아니고 "되리라"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권능을 얻습니다. 증인이 되는 권능, 그리스도와 운명을 같이 하는 권능, 부활의 증인으로 죽음을 넘어서는 권능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남은 생애를 증인으로 살아가고 증인으로 순교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와 함께 사십시다. 그 예수는 오늘의 예수요, 바로 현존하시는 예수입니다. 살아계신 그리스도요, 성령이 나를 그에게로 인도하시고 그가 내 안에 살고 내가 그 안에 삽니다.
사도 바울은 주 안에, 그리스도 안에, 예수 안에 라는 말을 150회나 하고 있습니다. "안에"는 곧 성령 안에를 말하는 것입니다.
신비로운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세상을 이기고 나를 이기고 죄악을 이깁니다. 이 승리를 빼앗을 자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승리케 하시는 놀라운 능력이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의로운 아버지시여, 알고도 행하지 못하며 감격하고도 그 은혜에 살아가지 못하는 미련한 사람들 오늘도 성령으로 일깨워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간구하오니 이미 들은 말씀이 내게 주신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하오며 이미 믿은 그리스도가 이제 내 안에 살아 역사하게 하옵소서. 내 안에 보좌를 마련하고 내 마음과, 내 뜻과, 내 운명을 다 다스릴 수 있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기쁨과 충만하여 변화된 사람으로, 변화된 세상에서 오직 복음증거 만을 목적으로 그리스도만으로 승리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성령의 능력 (행 4:5~12)
이튿날의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예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셨더라.
과격한 성격이 이유가 되어 10년간의 결혼 생활을 뒤에 두고 별거 생활을 해야 했던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 별거 생활 중에 남편이 예수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중생을 하여 새 마음으로 아내를 찾아가 다시 시작하자고 간청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10년을 속고 또 속았기에 이제 믿지 않았습니다. 답답한 남편이 저에게 와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부인을 만나 10년을 속았지만 이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속아보라고 사정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전과는 달리 예수를 믿고 세 사람이 되었으니 한 번만 더 시도해 보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그 부인은 완강했습니다. 자기가 그동안 온갖 방법과 정성을 다 들였어도 못 고쳤는데, 예수가 어떤 분인지 모르지만 그 분을 믿는다고 달라질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옆에서 거들기를, 이왕 속았으니 또 속는 셈치고 한 달만 계약 조건으로 살아보는 게 어떠냐고 해서 다시 만나 재결합하여 이제 잘 살고 있습니다. 그 분이 바로 우리 교회 집사님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변화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흔히 어머니들이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자식은 내가 겉을 낳았지 속까지 낳았겠느냐고요. 어머니는 겉모양은 단장시켜 줄 수가 있고 심지어는 높은 학력까지 공부를 시킬 수도 있지만 그러나 사람이 되고 안 되고는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내가 정성을 들이고 사랑한다고 남편이 바꾸어질 것 같습니까? 사람되기는 힘든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때려부수는 재주와 파괴하는 굉장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살리고 변화시키는 데는 재주가 없는 것 같습니다. 요새 심리학 박사도 많고, 교육학 박사도 많아서 열심히, 바로 가르치고 많이 배우느라고 야단인데 세상은 어찌된 셈인지 점점 더 어려워만 갑니다. 교육으로 안 되는 모양입니다. 요새 'Complain Form Personality'라는 책을 보았습니다. 이 책은 불평형의 인간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불평형은 자기가 100만원 있었으면 하고 불평을 했는데 막상 100 만원이 채워지면 또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더 큰 불평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결국 불평하는 사람은 어디 갔다 놓아도 불평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불평형의 성격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환경이 그 사람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믿지 않습니다. 물질적 환경이 사람의 중심과 인격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착각입니다. 그것은 유물사관입니다. 어떤 환경에서든지 변화될 사람은 변화되고 안 될 사람은 안 됩니다. 가난할 때 악한 사람이, 부하다고 선해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오히려 더 악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무식할 때 인간성이 잘못 된 사람이 지식이 많아졌다고 해서 사람이 다시 될 것 같습니까? 박사 학위를 열 개 가졌어도 사람이 되는 것과 지식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어느 환경이라도 안 될 사람은 안 됩니다. 속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이지, 사람들의 어떤 재주로는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는 우리가 다 경험하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남의 이야기 할 것 없습니다. 나 자신도 변화하기가 이렇게 힘드니 말입니다. 내 의지로, 내 능력으로, 내 지혜로 불가능한 것임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라는 사람은 본래 갈릴리 어부입니다. 그가 얼마나 비겁한 자였으면 예수님의 제자이면서도 그를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면서 물러서고 있습니까? 그런데 성령으로 변화되자 자기가 예수를 부인했던 바로 그 법정에 서서 담대하게 말하기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으냐, 너희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 너희가 판단하라"고 놀라울 정도로 기탄 없이 용기 있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한마디로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모습, 새로운 인격, 새로운 성격의 새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능력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서는 새 세계에 살고, 새 능력으로 살아갔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를 변화케한 요인들을 성경에서 종합해 보면 몇 가지가 있습니다. 객관적인 이유입니다. 첫째 본문 13절에 보면 "저들이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들이다."라고 했는데 이 말은 예수를 사귀고 예수를 따라 다닌 사실이 오늘 이와같은 변화를 가져왔다는 의미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부활사건입니다. 죽으셨던 예수가 부활하셨다는 이 사건이 마침내는 베드로로 하여금 놀랍게 변화된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즉 부활이 변화의 능력으로 역사하셨습니다. 셋째는 성령의 강림입니다. 성령이 충만해짐으로 그가 구체적으로 그의 삶에 변화가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넷째는 현재에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멀리 계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재하신 그리스도, 현재 여기 나와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를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임재의식과 내재의식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것은 신비로운 체험입니다. 마지막으로 종말론적인 신앙이 확고해졌습니다. 주께서 부활 승천하신 것을 보았는데 "본대로 오리라"하는 말씀을 저들은 마음에 새기고 있습니다. 본대로 다시 올 것이다.
즉, 재림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을 때에 저들의 생활에 엄청난 변화가 왔습니다. 이것은 신비로운 것입니다.
여기서 베드로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는 원래 갈릴리 어부로서 제자로 발탁되어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기거하고, 말씀을 들으며, 모름지기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들을 샅샅이 다 보았습니다.
바다를 고요하게 하신 일, 귀신을 내어쫓는 일, 병자를 고치는 일, 5천명을 먹이신 일, 죽은 자를 살리신 것등 3년 동안 그저 감탄할 일 뿐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아마 베드로는 시간시간 깜짝 놀라며 감격하여 발이 땅에 닿는지 뜨는지도 모르게 신이 나서 예수님 뒤를 따라 다녔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베드로를 위시해서 그 제자들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하는 초라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변화된 것이 없었습니다. 그 다음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습니다. 같이 기뻐하고 같이 식사를 했습니다. 희한하고 굉장한 사건을 만났는데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모름지기 이러한 생각을 하였으리라 짐작을 해 봅니다. "예수님, 저를 이제 찾지 마세요, 저 같은 인간을 제자로 삼았다가는 예수님 망신입니다. 저는 이제 사양하고 갈릴리 바다로 갑니다." 그리고 옛 직업으로 돌아갔던 베드로입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의 변화, 예수의 부활 사건도 베드로와는 무관했습니다. 배워도 소용이 없고, 알아도 소용이 없고, 깨달아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여전히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므로 말미암아 이제 비로소 새 사람이 되고 부활 사건의 의미가 달라지고 예수님의 교훈과 말씀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기억되며 새로운 의미로 저 깊은 곳에서 권능으로 역사 하게 됩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새 베드로가 되고 복음을 위해 일생을 바치게 됩니다. 결정적인 것은 성령의 강림이었습니다. 이 귀중한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부활절이 없는 오순절은 추상적인 감격에 끝납니다. 오순절이 없는 부활절은 역사적 사실과 객관적 진리로 남을 뿐입니다. 이것으로 변화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평생 예수를 따르고 성경 66권을 몽땅 외운다고 해도 그것으로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말씀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그리스도의 사건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이 역사적인 사건이 내게 다가와서 신앙 사건으로 바꾸어지기 전에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역사를 배웁니다. 그 역사와 오늘 나의 삶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심지어 잘 알고 잘 가르칩니다. 그러나 나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미 주께서 하신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이제 내게 주신 말씀으로 부딪치고, 그 사건이 내 사건으로, 부활 사건이 내 생명의 사건으로 살아나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고백합니다. 그것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오늘 여기서 나의 주로 고백하게 될 때에 그 속에 말씀의 능력이 능력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흔히 중생이라고 합니다. 위로부터 나는 역사요, 새롭게 출생하는 신기원적인 역사요, 의식 이전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성화의 역사입니다. 의롭다 하시는 사랑을 받아들이게 되고 받아들일 때에 기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을 받아 들일 때 믿음이 동반되지 아니한 사랑은 무효입니다. 유산하고 맙니다. 아무리 부모가 사랑하고, 아내가 사랑하고, 남편이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이 사랑을 내가 믿을 때에만 사랑이 사랑됨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엄청난 것이요, 부활의 사건은 우주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나를 위한 것으로 믿을 때 비로소 놀라운 생명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래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고 하나님의 자녀의 자아 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로마서 8:16에 보면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느니라." 성령은 계속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정상화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될 때에는 세계관이 바뀌어집니다. 나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뿐만 아니라 세계를 보는 눈도 달라집니다.
전에는 이 세계가 마귀의 손에 있고 죄악이 있고 그리고 사람의 손에 의해서 움직이는 세계인 줄 알았는데 성령을 받고 보니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리스도가 주인이요, 하나님이 섭리하시고 진리가 다스리게 되는 세계라는 것을 알게 되고 마침내는 이 우주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함을 알게 됩니다. 신천신지를 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제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요, 이웃은 내 형제요, 모든 세계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세계로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옛날 베드로는 법정을 무서워했고, 매 맞는 것을 무서워했고, 관원들을 무서워했고, 죽음과 십자가를 두려워했으나 성령을 받은 베드로는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했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두려워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묻는 그 말씀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43절에 보면 "사람마다 두려워했다"고 했는데 이것은 죄와 형벌과 진노의 저주를 두려워하는 두려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현재성 즉, 그리스도가 현존하신다고 하는 그 영적 분위기에 감격하여 신 임재의식으로 꽉 차 있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성령이 불과 같이 혀와 같은 불로 임했고 그리고 방안에 가득 하더라"고 했습니다. 가득하다란 무슨 뜻입니까? 쉽게 설명하면, 사랑하는 자가 옆에 있으면 마음도 든든하고 빈집도 가득하게 느껴집니다. 집안에 사람이 많아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면 텅 빈집같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처럼 성령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 충만한 은혜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입니다. 그래서 이기심과 정욕은 사라졌습니다. 사도행전 4:32에 보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물건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고 하는 자가 하나도 없더라"고 했습니다. 물건이 내 것이 아니며 같이 쓰고, 이웃도 내 형제요, 전부가 서로서로 나누어 쓰고 유무 상통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 의견을 고집치도 않고, 저 사람에게 내가 필요한 것을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새로운 형제관, 새로운 물질관, 새로운 세계관을 가지고 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으로 살기에 늘 감격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성남에 제 친구가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아주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며 어려운 지역의 교회입니다. 언젠가 한 번 눈물을 흘리며 어느 여집사님의 간증을 제게 들려주었습니다. 그 여집사님은 혼자서 아이들을 데리고 어렵게 살아가는 분인데 직업은 목욕탕에서 때를 밀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려운 환경인데도 매일 얼마나 기쁨과 은혜로 살아가는지 그 분을 보면 곧 감동이 될 정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1년에 수십 명씩 그 집사님에게 감동되어 교회로 오는 분이 늘어난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당신 같은 환경에서 그렇게 기쁨과 감사로 살 수 있느냐고 감동하여 교회로 인도되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예배당을 건축하느라고 애를 쓰는데 여집사님이 400만원을 헌금했습니다. 목욕탕에서 번 돈으로 말입니다. 자, 이 분의 기쁨은 아무도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남편이 토닥거려주는 사랑도 아니요, 물질로 채워지는 기쁨도 아니며, 오직 성령이 주는 기쁨입니다.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 그로서 그는 이 같은 기쁨과 간증과 찬송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주는 능력이요, 성령이 주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능력을 주시며 부활의 증인으로 살게 하십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예수를 못박은 사람들을 앞에 놓고,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살렸다고 본문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을 정면으로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죄하고도 살아남기를 바라겠습니까? 변화된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 신앙도 중요하지만 예수의 부활을 믿을 뿐더러 이제는 나의 부활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내 부활을 보고 성령이 오늘 내게 능력을 주시니 베드로는 이제 죽는 일이 두렵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목숨을 걸고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체험이 있어야 하고 둘째는 사랑이 있어야 하고 셋째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이 체험을 주었습니다. 성령이 극진한 사랑의 마음을 주었습니다. 성령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와 운명을 같이 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습니다. 드디어 증인이 됩니다. 성령이 증거 하게 하십니다.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얻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증인이 "되라"가 아니고 "되리라"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권능을 얻습니다. 증인이 되는 권능, 그리스도와 운명을 같이 하는 권능, 부활의 증인으로 죽음을 넘어서는 권능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남은 생애를 증인으로 살아가고 증인으로 순교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와 함께 사십시다. 그 예수는 오늘의 예수요, 바로 현존하시는 예수입니다. 살아계신 그리스도요, 성령이 나를 그에게로 인도하시고 그가 내 안에 살고 내가 그 안에 삽니다.
사도 바울은 주 안에, 그리스도 안에, 예수 안에 라는 말을 150회나 하고 있습니다. "안에"는 곧 성령 안에를 말하는 것입니다.
신비로운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세상을 이기고 나를 이기고 죄악을 이깁니다. 이 승리를 빼앗을 자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승리케 하시는 놀라운 능력이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의로운 아버지시여, 알고도 행하지 못하며 감격하고도 그 은혜에 살아가지 못하는 미련한 사람들 오늘도 성령으로 일깨워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간구하오니 이미 들은 말씀이 내게 주신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하오며 이미 믿은 그리스도가 이제 내 안에 살아 역사하게 하옵소서. 내 안에 보좌를 마련하고 내 마음과, 내 뜻과, 내 운명을 다 다스릴 수 있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기쁨과 충만하여 변화된 사람으로, 변화된 세상에서 오직 복음증거 만을 목적으로 그리스도만으로 승리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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