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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망대의 교훈 (눅 13:1~5)

by 【고동엽】 2024.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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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망대의 교훈 (눅 13:1~5)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리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러시아 문호 톨스토이의 걸작 "전쟁과 평화"는 너무나 유명한 소설입니다. 그 내용은 독자들마다 자기 나름으로 평하겠지만 공통적으로 갖는 하나님의 질문이 있습니다. 톨스토이는 무엇을 평화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냐 하는 질문입니다. 작가의 의도가 전쟁 없는 평화냐, 전쟁 끝에 있는 평화냐 하는 것을 묻고 싶은 것입니다. 흔히들 전쟁 없는 평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 전의 평화, 이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또한 전쟁 후에 오는 평화도 불안하고 허무한 것입니다. 그러면 톨스토이가 말하는 평화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 소설에서는 전쟁 중에 있는 평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결론에서 "하나님의 품에 있는 자만이 진정한 평화를 경험한다"고 결론짓고 있습니다.

우리는 6․25전쟁을 겪었습니다. 이제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전쟁 전에 있었던 고요함 아주 불안했습니다. 또한 전쟁 후의 평화 얼마나 허무하고 쓰라렸습니까? 오히려 전쟁 중에는 그 난리 속에서도 전우애가 있었고 진실도 있었으며, 평화와 아름다운 사랑이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톨스토이의 결론처럼 우리는 어디든지 어느 시간에서든지 하나님의 품에 있는 자만이 평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전쟁이 왜 있어야 하는지, 아니면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입니다. 싸움의 역사였습니다.

전쟁은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우리 귀에 포성이 들리지 않을 뿐 전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히려 더 치열한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는 물론 심리학적으로까지 전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아마 더 무서운 전쟁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인류 역사를 보면서 헤겔은 변증법적 역사관을 수립했습니다. 그의 이론에서 보면 전쟁은 불가피한 현상으로 필요악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의 변증법적 사관이 둔갑을 해서 후에 변증법적 유물사관이 되고 이것이 공산주의의 철학적 기초가 될 줄은 아마 헤겔도 미처 생각지 못한 것 같습니다. 무서운 철학이 되었습니다.

어쨌든 어떤 이론으로도 전쟁은 정당화되어서는 안 되며 또 정당화 될 수도 없습니다. 또 결과에 의하여 방법이나 과정이 정당화되어서도 안 됩니다. 목적이 좋으면 방법도 선해야 합니다.

결과가 좋았다고 해서 지난날의 잘못이 정당화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바른 목적에 바른 방법이 있고 그리고 바른 결과가 있어야만 선한 일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아는 것은 인류 역사 안에 전쟁은 계속 있어 왔다는 것입니다. 계속 싸우고 있으며 앞으로도 전쟁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예언의 말씀대로 보면 세상 끝나는 바로 그 시간까지 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계속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전쟁 없는 평화는 망상입니다. 그런 유토피아니즘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예수님의 예언으로서는 전쟁은 그치지 않습니다. 역사가 토인비는 우수한 문명이나 문화는 어김없이 고난과 역경의 소산이라고 단정하며 역경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성경은 전쟁과 고통에 대해서 몇 가지 중요한 교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모든 고통과 고난은 죄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죄악이 있는 곳에 전쟁이 있고, 죽음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입니다. 그러므로 정욕과 이기심, 즉 나만 생각하는 그런 죄악과 욕심이 마침내 사건을 만들고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여기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전쟁 속에 불의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느브갓네살 왕을 막대기로 써서 택한 백성 이스라엘 사람들은 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구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셋째는 이 전쟁의 와중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의 초점은 당신의 백성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훈련시키시고, 강하게 하시고, 온전케 하시는 역사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전쟁을 통하여서 당신의 백성에게 계속 귀한 역사를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전쟁과 고통은 약한 자에 의해서 유발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능력과 그 높은 지혜와 엄청난 섭리를 통하여 이것들을 이용하여 즉, 이 사실을 고용해서 당신의 귀한 뜻을 이루어 나아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고난 속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고 하나님의 구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엄연한 율법이 있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함께 역사하고 있습니다. 만일에 하나님께서 죄악을 심판하시는 것뿐이라면 벌써 다 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남겨둘 여지가 없습니다. 소돔 고모라와 같았을 것이고, 홍수를 만난 노아 때의 모습이 되었을 것입니다. 남아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에서 보면 남은 백성 즉, 그루터기로 남겨두는 바의 역사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긍휼이요, 은혜요, 하나님의 초월하신 구원의 역사인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의 사건이 있습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18명이 치어 죽었습니다. 요즘 일어났다면 이런 것은 기사거리입니다. 신문에 대서특필로 망대가 무너져서 18명이 치어 죽었다고 사건화했을 겁니다. 그리고 이 사건 뒤에는 여러 가지로 사건 자체가 분석되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부실 공사다, 누가 또 돈을 떼어먹고 엉터리 공사를 해서 이런 사고가 났다고 사정없이 평을 했을 것이고, 또는 정책적으로 잘못했다, 허물어져 가는 줄 알았다면 사람을 근접하지 못하게 하든지 보수 공사를 제 때에 했어야지 이것은 정책 잘못이다 하며 가혹하게 평가했을 것입니다. 또는 허술하고 위험한 망대 밑에 왜 가서 놀았나? 부주의해서 죽었다. 그러므로 죽은 사람들의 잘못이라고 평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보시지 않으셨습니다. 특수한 관점으로 보셨고, 영적인 눈으로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이 문제를 보셨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해설은 아마도 우리가 당하는 끔찍한 사건들에 대한 해석의 원리가 될 것입니다. 사건마다 우리는 예수께서 보신 눈으로 보고, 신문 기사도 이 안목으로 읽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은 지나가는 사건도 아니고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이것은 미래적인 사건입니다. 먼 강 건너 불이 아니고 바로 우리 자신들을 위한 사건들이란 말입니다. 6․25의 이야기도 지나간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오늘의 사건이라고 이렇게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사건을 말씀으로 보셨습니다. 전쟁은 말씀입니다. 재난도 위대한 말씀입니다. 귀로 듣도록 말해서 못 알아 들으면 눈으로 보게 하고, 눈으로 본 증거를 받아 들이지 않으면 이제는 몸에 손을 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몸으로 부딪쳐서 하나의 엄청난 사건으로서 역사하고 계시며 이것을 또 몸으로 깨닫게 하십니다. 이것이 전쟁이요,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구체적인 사건을 통하여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필연이 있을 뿐입니다. 큰 희생, 엄청난 값을 지불하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바로 지금도 여기에서 주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대표적인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그리고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서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아니다. 저들은 대표적으로 당한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6․25 당시 최일선에서 얼마동안 있었습니다. 최일선에서는 밤에 행군해 갈 때 졸다가 낙오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긴 줄에다 손목을 서로 붙들어 매서 수백 명이 한 줄로 서서 몰래 적진으로 들어갑니다. 밤새껏 걷는데 완전히 눈감고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계속 자면서 걸어갔던 것입니다. 어떻게 얼마를 갔는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따라가는데 갑자기 앞 사람이 지뢰를 밟아 쾅하고 터지면서 몇 사람이 죽습니다. 이 몇 사람이 죽은 덕택으로 뒤에 선 수백 명은 무사합니다. 자, 그러면 앞에 서서 가다가 지뢰를 밟아 죽은 자는 뒤에 살아 남은 사람보다 죄가 더 많습니까? 아닙니다. 대표적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대표적인 하나님의 전주곡이며, 하나님의 시작이며, 마지막 통첩이란 말입니다. 이것을 신앙적인 측면에서 받아들이면 은혜요 은총입니다.

앞사람이 죽어서 뒷 사람이 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인내가 있고, 용서가 있고, 자비한 은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오늘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한다고 말입니다. 죽은 몇 사람은, 모두가 당해야 할 일을 부분적으로 당한 것 뿐입니다. 내가 당해야 할 일을 저 사람이 당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건에 대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여기에 은혜가 있고 은총이 있습니다. 주께서 "회개하라"하신 것은 마지막 통첩입니다. 작은 사고를 보고 회개해야 합니다. 도덕적으로 보고 종교적으로 보고 생각해야 합니다. 무사하다고 계속 무사하면 아마도 버림받은 자가 될지도 모릅니다. 깜짝 놀랄 만한 사건이 계속 유발되고 있습니까?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계속 두드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계속 무엇인가 말씀하고 계신단 말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엄청난 사건은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축복이요, 은혜로 받아 들이게 됩니다.

6․25는 정말 비참하고 고통스러웠습니다.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놀랍게도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인간적인 생각인지 모르지만, 만일에 6․25가 없었다면 한국을 세계에 이렇게 널리 알릴 수가 있었겠습니까? 세계 백과사전에 보면 한국에 대한 기록이 3페이지인데 비해 한국 전쟁에 대한 기록은 5페이지 입니다. 세계 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는 한국은 없습니다. 한국 전쟁으로 말미암아 저들에게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또 만일 6․25가 없이 지금같이 수많은 인구가 태어났다면 다 굶어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6․25없이 오늘에 이르렀다면(극히 인간적인 의견입니다만) 틀림없이 공산화되었을 겁니다. 분명히 6․25는 뼈아픈 것이었습니다만 그러나 이를 통하여 우리 민족에게 향하신, 아니 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이걸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회개해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돌아가서 진실을 찾아야하고 사실을 믿어야 하고 겸손하게 주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지금은 말할 시간도 아니요, 비판할 시간도 아니요, 다만 들어야 할 시간입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어야 하는 시간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어찌하여 땅만 버리느냐" 더 이상 땅을 버릴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옴을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나를 위한 사건이요, 우리 모두를 위한 사건이요, 아니 미래를 위한 말씀이요, 은총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고난과 전쟁과 사건, 그 속에서 은은히 들려오는 주의 음성을 듣고,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를 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 은혜와 사랑 그 앞에 바른 응답을 해야하겠습니다. 라인홀드 니버는 말합니다. "불가능적인 가능성이 곧 사랑이다." "사랑은 정의를 통하여 실현되는 것이다." 즉, 의로운 하나님의 역사 그 사건 안에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이 계시되고 있음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바른 자세를 취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 사랑의 주님, 듣고도 모르고, 보고도 모르고, 깨닫고도 바로 서지 않기에 오늘도 엄청난 사건을 통해서 계속 말씀하고 계시는 그 놀라운 은혜를 감사하옵나이다. 바라오니 우리에게 믿음의 귀를 주시옵고 신앙적인 안목을 주시사 우리에게 향한 이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 속에 있는 주의 음성을 바로 듣게 하여 주옵소서. 지금도 애타게 부르시는 주의 음성을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그리고 마음의 귀를 기울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바로 응답하는 중에 우리 앞에 당한 어려웠던 일들이, 아니 오늘 당하고 있는 어려운 일들이 분명히 은혜 아래 우리에게 향한 축복임을 간증할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무너진 망대의 교훈 (눅 13:1~5)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리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러시아 문호 톨스토이의 걸작 "전쟁과 평화"는 너무나 유명한 소설입니다. 그 내용은 독자들마다 자기 나름으로 평하겠지만 공통적으로 갖는 하나님의 질문이 있습니다. 톨스토이는 무엇을 평화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냐 하는 질문입니다. 작가의 의도가 전쟁 없는 평화냐, 전쟁 끝에 있는 평화냐 하는 것을 묻고 싶은 것입니다. 흔히들 전쟁 없는 평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 전의 평화, 이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또한 전쟁 후에 오는 평화도 불안하고 허무한 것입니다. 그러면 톨스토이가 말하는 평화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 소설에서는 전쟁 중에 있는 평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결론에서 "하나님의 품에 있는 자만이 진정한 평화를 경험한다"고 결론짓고 있습니다.

우리는 6․25전쟁을 겪었습니다. 이제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전쟁 전에 있었던 고요함 아주 불안했습니다. 또한 전쟁 후의 평화 얼마나 허무하고 쓰라렸습니까? 오히려 전쟁 중에는 그 난리 속에서도 전우애가 있었고 진실도 있었으며, 평화와 아름다운 사랑이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톨스토이의 결론처럼 우리는 어디든지 어느 시간에서든지 하나님의 품에 있는 자만이 평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전쟁이 왜 있어야 하는지, 아니면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입니다. 싸움의 역사였습니다.

전쟁은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우리 귀에 포성이 들리지 않을 뿐 전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히려 더 치열한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는 물론 심리학적으로까지 전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아마 더 무서운 전쟁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인류 역사를 보면서 헤겔은 변증법적 역사관을 수립했습니다. 그의 이론에서 보면 전쟁은 불가피한 현상으로 필요악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의 변증법적 사관이 둔갑을 해서 후에 변증법적 유물사관이 되고 이것이 공산주의의 철학적 기초가 될 줄은 아마 헤겔도 미처 생각지 못한 것 같습니다. 무서운 철학이 되었습니다.

어쨌든 어떤 이론으로도 전쟁은 정당화되어서는 안 되며 또 정당화 될 수도 없습니다. 또 결과에 의하여 방법이나 과정이 정당화되어서도 안 됩니다. 목적이 좋으면 방법도 선해야 합니다.

결과가 좋았다고 해서 지난날의 잘못이 정당화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바른 목적에 바른 방법이 있고 그리고 바른 결과가 있어야만 선한 일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아는 것은 인류 역사 안에 전쟁은 계속 있어 왔다는 것입니다. 계속 싸우고 있으며 앞으로도 전쟁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예언의 말씀대로 보면 세상 끝나는 바로 그 시간까지 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계속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전쟁 없는 평화는 망상입니다. 그런 유토피아니즘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예수님의 예언으로서는 전쟁은 그치지 않습니다. 역사가 토인비는 우수한 문명이나 문화는 어김없이 고난과 역경의 소산이라고 단정하며 역경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성경은 전쟁과 고통에 대해서 몇 가지 중요한 교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모든 고통과 고난은 죄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죄악이 있는 곳에 전쟁이 있고, 죽음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입니다. 그러므로 정욕과 이기심, 즉 나만 생각하는 그런 죄악과 욕심이 마침내 사건을 만들고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여기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전쟁 속에 불의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느브갓네살 왕을 막대기로 써서 택한 백성 이스라엘 사람들은 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구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셋째는 이 전쟁의 와중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의 초점은 당신의 백성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훈련시키시고, 강하게 하시고, 온전케 하시는 역사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전쟁을 통하여서 당신의 백성에게 계속 귀한 역사를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전쟁과 고통은 약한 자에 의해서 유발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능력과 그 높은 지혜와 엄청난 섭리를 통하여 이것들을 이용하여 즉, 이 사실을 고용해서 당신의 귀한 뜻을 이루어 나아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고난 속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고 하나님의 구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엄연한 율법이 있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함께 역사하고 있습니다. 만일에 하나님께서 죄악을 심판하시는 것뿐이라면 벌써 다 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남겨둘 여지가 없습니다. 소돔 고모라와 같았을 것이고, 홍수를 만난 노아 때의 모습이 되었을 것입니다. 남아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에서 보면 남은 백성 즉, 그루터기로 남겨두는 바의 역사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긍휼이요, 은혜요, 하나님의 초월하신 구원의 역사인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의 사건이 있습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18명이 치어 죽었습니다. 요즘 일어났다면 이런 것은 기사거리입니다. 신문에 대서특필로 망대가 무너져서 18명이 치어 죽었다고 사건화했을 겁니다. 그리고 이 사건 뒤에는 여러 가지로 사건 자체가 분석되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부실 공사다, 누가 또 돈을 떼어먹고 엉터리 공사를 해서 이런 사고가 났다고 사정없이 평을 했을 것이고, 또는 정책적으로 잘못했다, 허물어져 가는 줄 알았다면 사람을 근접하지 못하게 하든지 보수 공사를 제 때에 했어야지 이것은 정책 잘못이다 하며 가혹하게 평가했을 것입니다. 또는 허술하고 위험한 망대 밑에 왜 가서 놀았나? 부주의해서 죽었다. 그러므로 죽은 사람들의 잘못이라고 평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보시지 않으셨습니다. 특수한 관점으로 보셨고, 영적인 눈으로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이 문제를 보셨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해설은 아마도 우리가 당하는 끔찍한 사건들에 대한 해석의 원리가 될 것입니다. 사건마다 우리는 예수께서 보신 눈으로 보고, 신문 기사도 이 안목으로 읽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은 지나가는 사건도 아니고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이것은 미래적인 사건입니다. 먼 강 건너 불이 아니고 바로 우리 자신들을 위한 사건들이란 말입니다. 6․25의 이야기도 지나간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오늘의 사건이라고 이렇게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사건을 말씀으로 보셨습니다. 전쟁은 말씀입니다. 재난도 위대한 말씀입니다. 귀로 듣도록 말해서 못 알아 들으면 눈으로 보게 하고, 눈으로 본 증거를 받아 들이지 않으면 이제는 몸에 손을 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몸으로 부딪쳐서 하나의 엄청난 사건으로서 역사하고 계시며 이것을 또 몸으로 깨닫게 하십니다. 이것이 전쟁이요,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구체적인 사건을 통하여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필연이 있을 뿐입니다. 큰 희생, 엄청난 값을 지불하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바로 지금도 여기에서 주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대표적인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그리고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서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아니다. 저들은 대표적으로 당한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6․25 당시 최일선에서 얼마동안 있었습니다. 최일선에서는 밤에 행군해 갈 때 졸다가 낙오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긴 줄에다 손목을 서로 붙들어 매서 수백 명이 한 줄로 서서 몰래 적진으로 들어갑니다. 밤새껏 걷는데 완전히 눈감고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계속 자면서 걸어갔던 것입니다. 어떻게 얼마를 갔는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따라가는데 갑자기 앞 사람이 지뢰를 밟아 쾅하고 터지면서 몇 사람이 죽습니다. 이 몇 사람이 죽은 덕택으로 뒤에 선 수백 명은 무사합니다. 자, 그러면 앞에 서서 가다가 지뢰를 밟아 죽은 자는 뒤에 살아 남은 사람보다 죄가 더 많습니까? 아닙니다. 대표적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대표적인 하나님의 전주곡이며, 하나님의 시작이며, 마지막 통첩이란 말입니다. 이것을 신앙적인 측면에서 받아들이면 은혜요 은총입니다.

앞사람이 죽어서 뒷 사람이 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인내가 있고, 용서가 있고, 자비한 은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오늘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한다고 말입니다. 죽은 몇 사람은, 모두가 당해야 할 일을 부분적으로 당한 것 뿐입니다. 내가 당해야 할 일을 저 사람이 당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건에 대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여기에 은혜가 있고 은총이 있습니다. 주께서 "회개하라"하신 것은 마지막 통첩입니다. 작은 사고를 보고 회개해야 합니다. 도덕적으로 보고 종교적으로 보고 생각해야 합니다. 무사하다고 계속 무사하면 아마도 버림받은 자가 될지도 모릅니다. 깜짝 놀랄 만한 사건이 계속 유발되고 있습니까?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계속 두드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계속 무엇인가 말씀하고 계신단 말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엄청난 사건은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축복이요, 은혜로 받아 들이게 됩니다.

6․25는 정말 비참하고 고통스러웠습니다.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놀랍게도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인간적인 생각인지 모르지만, 만일에 6․25가 없었다면 한국을 세계에 이렇게 널리 알릴 수가 있었겠습니까? 세계 백과사전에 보면 한국에 대한 기록이 3페이지인데 비해 한국 전쟁에 대한 기록은 5페이지 입니다. 세계 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는 한국은 없습니다. 한국 전쟁으로 말미암아 저들에게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또 만일 6․25가 없이 지금같이 수많은 인구가 태어났다면 다 굶어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6․25없이 오늘에 이르렀다면(극히 인간적인 의견입니다만) 틀림없이 공산화되었을 겁니다. 분명히 6․25는 뼈아픈 것이었습니다만 그러나 이를 통하여 우리 민족에게 향하신, 아니 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이걸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회개해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돌아가서 진실을 찾아야하고 사실을 믿어야 하고 겸손하게 주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지금은 말할 시간도 아니요, 비판할 시간도 아니요, 다만 들어야 할 시간입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어야 하는 시간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어찌하여 땅만 버리느냐" 더 이상 땅을 버릴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옴을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나를 위한 사건이요, 우리 모두를 위한 사건이요, 아니 미래를 위한 말씀이요, 은총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고난과 전쟁과 사건, 그 속에서 은은히 들려오는 주의 음성을 듣고,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를 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 은혜와 사랑 그 앞에 바른 응답을 해야하겠습니다. 라인홀드 니버는 말합니다. "불가능적인 가능성이 곧 사랑이다." "사랑은 정의를 통하여 실현되는 것이다." 즉, 의로운 하나님의 역사 그 사건 안에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이 계시되고 있음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바른 자세를 취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 사랑의 주님, 듣고도 모르고, 보고도 모르고, 깨닫고도 바로 서지 않기에 오늘도 엄청난 사건을 통해서 계속 말씀하고 계시는 그 놀라운 은혜를 감사하옵나이다. 바라오니 우리에게 믿음의 귀를 주시옵고 신앙적인 안목을 주시사 우리에게 향한 이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 속에 있는 주의 음성을 바로 듣게 하여 주옵소서. 지금도 애타게 부르시는 주의 음성을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그리고 마음의 귀를 기울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바로 응답하는 중에 우리 앞에 당한 어려웠던 일들이, 아니 오늘 당하고 있는 어려운 일들이 분명히 은혜 아래 우리에게 향한 축복임을 간증할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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