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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신앙의 윤리(마태복음 28 : 1~10)

by 【고동엽】 2024.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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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신앙의 윤리(마태복음 28 : 1~10)

 

예루살렘에서 2마일 가량 떨어진 베다니라고 하는 마을에 나사로와 그의 두 누이동생 마르다와 마리아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 삼 남매는 예수님께 지극히 사랑을 받았으며, 그들 또한 예수님을 사랑했던 것으로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나사로가 병이 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의 두 누이동생들이 예수님께 와서 병든 오빠를 고쳐 달라고 간청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를 찾아가는 일을 지체하셨고, 나사로는 마침내 죽어서 장사를 지냈습니다. 이미 죽은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날 때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집으로 찾아 오셨습니다. 두 누이동생들은 원망 섞인 말을 하며 예수님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리고 슬피 울었습니다.

어느 가정이든지 죽음을 경험하지 아니한 가정은 없습니다. 모든 집이 다 죽음을 경험해 보았습니다. 죽음은 슬픈 것입니다. 그러기에 죽음이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구슬픈 울음소리가 있고 고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죽음일지라도 연세가 많고 오래 앓고 계시던 분이 돌아가시면 흔히 호상이라고 하여 울음소리가 덜 슬픈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정이라면 부모님이 계시고 남편과 아내와 자녀가 모여서 사는 곳인데, 이 나사로의 가정은 그런 행복한 가정이 뭇 되었습니다.

두 누이동생이 한 분 오빠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외로운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둥처럼 믿고 의지하던 오빠가 죽은 것이니만큼 두 자매의 슬픔은 어디에다 비교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들은 슬피 울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또한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고 잘 믿던 사람을 꼽아 본다면 아마 열 사람 안으로 꼽힐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만큼 예수님을 사랑했고 또한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는데 이처럼 엄청난 슬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우리가 왜 이런 슬프고 어려운 일을 당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더욱 안타깝게 울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들은 부활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말씀하실 때에 그들은 마지막 심판 때에 온 인류가 하나님 앞에서 다시 부활하는 종말적 심판과 부활을 믿었으므로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 압니다"라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당한 이 죽음의 사건은 슬픈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울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하는 아픔은 우리에게도 언제나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슬픔을 당한 가정을 향하여 예수님은 이제 결정적인 대답을 해 주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고 죽은 나사로와 살아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죽은 자에게나 산 자에게나 죽음과 부활의 문제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 모두들에게 부활의 신앙을 묻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활은 마르다와 마리아가 믿는 종말론적 부활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현재의 부활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현재의 부활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말씀을 믿지 못하였던고로 슬피 울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도 가슴에 통분히 여기고 민망히 여기사 함께 눈물을 흘리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과 부활 신앙과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하는 그 사건 자체와 그것을 믿는 신앙과의 관계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신학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역사적 사건과 신앙 사건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면, 이쪽에서 분명히 불이 나서 타고 있는 사실을 저쪽 사람에게 알렸더니 그 사람은 그럴리가 없다고 일축해 버리며 전혀 믿으려고 하지 않을 때 이 불이 난 사건은 분명히 현실적 사건이지만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사건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적 사건과 신앙 사건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사건은 양자 택일일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역사적 사건이 있고 그 위에 신앙 사건이 합쳐질 때에 사건이 사건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은 오늘도 우리에게 생생한 역사적 사건으로 다가오며 우리에게 신앙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왜냐 하면, 사건은 단회적이기 때문에 경험할 수 있었던 때는 벌써 지나갔으나 그 사건은 분명한 역사적 사건이었으므로 오늘 우리에게 현재적으로 믿음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처럼 확실한 진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믿지 않는 사람은 죽음이 주는 엄숙한 진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죽는다는 것을 믿을 때만이 이 죽음이 내게 사건이 되고 또 나의 부활을 믿을 수 있는 근본이 될 것입니다.

오순절 사건은 우리에게 귀중한 해답을 주십니다. 부활절과 오순절은 아주 오묘한 관계에 있습니다. 부활절도 역사적 사건이요 오순절은 신앙적 사건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아무도 믿지 않는다면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서 있었던 하나의 사건으로만 지나가 버리고 말 것입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보았고 예수님과 이야기도 했으며, 손과 발과 옆구리의 상처도 만져 보았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자기들의 입으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증거도 했습니다. 또한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발을 보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예수님을 만나보고도 의심하고 만져 보고도 의심하고 같이 식사를 하고도 의심하고 계속 의심했다는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보니 신비스럽기 한이 없지만 그들로서는 더 이상 어떻게 생각해 볼 여지가 없었던 것입니다. 믿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얼마나 인간적이요 당연한 이야기입니까?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듣고도 믿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이 사건이 신앙화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나를 위한 죽음이 되고 그리스도의 부활이 나를 위한 부활이 되어 이것이 나의 신앙 사건화되기 위해서는 성령의 중재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역사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믿게 하는 역사가 바로 오순절의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이 역사적인 사실을 믿음으로써 교회가 이루어졌으니만큼 오순절 성령의 역사도 말할 수 없이 귀중한 사건인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감화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사건이 현재의 나의 사건으로 동시적 경험이 되고,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와 개인적 관계를 맺게 되며, 그리스도의 부활이 내 생명과 절대적 관계에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도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건입니다.

십자가란 죄인을 사형시키는 곳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 모두를 죽이신 것입니다. 믿음으로 십자가를 대할 때 그 앞에서는 살아 남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십자가는 무서운 심판입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아무도 교만할 수 없고 거짓을 말할 수도 없으며 자기의 의를 내세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모든 가치를 완전히 부정해 버리고,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고발하여 완전히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위대한 생명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부활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없이 부활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종말적 육체의 부활만이 아니라 현재적 신앙의 부활도 함께 시키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죽음을 만사의 끝으로 생각하여 흔히 말하기를 죽으면 그만이라고 합니다. 정신없는 사람들의 말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생명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 나 죽으면 그만 아니냐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으로 망녕된 생각입니다. 더욱 무서운 것은 남의 생명까지도 마음대로 죽이는 것입니다. 생명은 스스로 만들어서 가진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마음대로 죽이고 살리고 할 수 있는 권한은 아무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자기 생명이든 남의 생명이든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모두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데에 그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인격에서는 윤리도 도덕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어느 한 순간에 이성을 잃으면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수 있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육체의 죽음이 인생의 끝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무책임한 해답입니다. 영원한 생명, 이 생명의 약속을 믿는 자들은 새로운 의미의 생활을 하게 되며 이 윤리성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 신앙의 윤리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부활은 죄와 사망과 율법의 권세를 이기신 참 자유의 선언이며 완전한 승리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조건 없이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법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의 증표가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우리는 이 구체적인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건을 잊지 말아야 하며 또한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은 "나"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죄의 가책에 매일 필요가 없고 더 이상 죽음의 그늘에서 허덕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약속된 의의 증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있기에 의가 있고 의가 있기에 삶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자유의 윤리가 있고 나 자신의 가치는 바로 이 속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으로써 나 자신을 먼저 용서하며 의롭게 된 나, 구속받은 나에 대한 확증을 지녀야 합니다.

벌벌 떨던 베드로가 부활 신앙을 가지는 순간 생사권을 가진 공회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으냐 너희가 판단하라"고 죽음을 각오하고 담대히 외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몹시도 괴롭히는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그리스도의 날에 너는 나의 자랑이 되고 나는 너의 자랑이 되리라"고 담대하게 부활의 신앙으로 회답할 수 있었습니다.

부활의 신앙은 오해도 박해도 수치도 순교도 문제가 되지 않으며 이기심도 더러운 정욕도 세속적인 탐심도 협소한 민족주의도 모두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부활 신앙입니다.

또한 부활 신앙 속에서 엄청난 자기 가치를 찾았을 때 새로운 이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영원한 약속을 함께 누릴 사람입니다.

오늘 만나면 그만인 사람이 아니며 죽으면 그만인 사람이 아니라 영원한 생을 함께 누릴 사람으로 내 이웃으로 의미가 바꾸어집니다. 순교자의 무리들이 이러한 뜻에서 손목을 잡고 함께 죽어간 것입니다.

로마의 원형극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할 때 한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는데 저쪽에서 사자가 달려오는 것을 보고 이 어린아이가 무서워서 울었습니다. 이때 어머니는 아이를 달래면서 "얘야 잠깐만 참아라. 곧 밝아질 것이다"라고 하며 죽음 뒤에 있는 부활의 아침을 보면서 아이를 위로하며 함께 순교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과거 지향적인 혈육관계에 매인 것이 아닙니다. 같은 집에서 태어났고 같은 피를 받았고 과거 어느 시대에 같이 살았다고 하는 이러한 과거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미래 지향적인 형제 관계로서 앞으로 영원히 함께 살 사람인 것입니다.

바울은 노예도 형제로 대우하라고 했고, 병든 자를 친구로 맞이했던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계급이 있고 부자와 거지가 있으나 하나님 나라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거지였던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고 부자는 불구덩이에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이제 여기서 무슨 말을 더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항상 저 미래를 바라보며 부활의 신앙 속에서 오늘의 가치관을 세우고 형제관을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계급 의식이나 협소한 민족주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가 있을 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고 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형제관을 볼 수 있습니다.

부활의 신앙은 새로운 공동체 의식을 주고 대망 사상에로 우리의 믿음을 승화시켜 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을 때 재림하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바꾸어집니다. 재림하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무리가 모인 것이 초대 교회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서로 유무 상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네 것 내것이 없이 서로 나누어 쓸 수 있는 넓은 마음이 이 부활 신앙에서 유출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종말론적 공동체였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생각할 때 겸손해질 것입니다. 부활을 믿을 때 낙심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믿음은 모든 사건을 소망적으로 해결해 줄 것이며, 내 생명을 새로운 차원으로 바꾸어 놓게 될 것입니다. 그는 모든 일에 승리할 것이며 또한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음으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을 약속 받은 존재임을 확실히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 이웃에 대하여 부활의 증인으로서 살아가야 될 것입니다. 이 부활의 생명이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 사랑하시는 주님, 우리에게 부활의 신앙을 온전케 하여 주셔서 그 부활의 신앙으로 오늘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과거에 매이지 않고 부활을 약속받은 생명으로서 자기와 이웃을 보며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 가는 귀중한 성도의 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부활 신앙의 윤리(마태복음 28 : 1~10)

 

예루살렘에서 2마일 가량 떨어진 베다니라고 하는 마을에 나사로와 그의 두 누이동생 마르다와 마리아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 삼 남매는 예수님께 지극히 사랑을 받았으며, 그들 또한 예수님을 사랑했던 것으로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나사로가 병이 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의 두 누이동생들이 예수님께 와서 병든 오빠를 고쳐 달라고 간청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를 찾아가는 일을 지체하셨고, 나사로는 마침내 죽어서 장사를 지냈습니다. 이미 죽은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날 때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집으로 찾아 오셨습니다. 두 누이동생들은 원망 섞인 말을 하며 예수님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리고 슬피 울었습니다.

어느 가정이든지 죽음을 경험하지 아니한 가정은 없습니다. 모든 집이 다 죽음을 경험해 보았습니다. 죽음은 슬픈 것입니다. 그러기에 죽음이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구슬픈 울음소리가 있고 고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죽음일지라도 연세가 많고 오래 앓고 계시던 분이 돌아가시면 흔히 호상이라고 하여 울음소리가 덜 슬픈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정이라면 부모님이 계시고 남편과 아내와 자녀가 모여서 사는 곳인데, 이 나사로의 가정은 그런 행복한 가정이 뭇 되었습니다.

두 누이동생이 한 분 오빠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외로운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둥처럼 믿고 의지하던 오빠가 죽은 것이니만큼 두 자매의 슬픔은 어디에다 비교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들은 슬피 울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또한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고 잘 믿던 사람을 꼽아 본다면 아마 열 사람 안으로 꼽힐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만큼 예수님을 사랑했고 또한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는데 이처럼 엄청난 슬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우리가 왜 이런 슬프고 어려운 일을 당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더욱 안타깝게 울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들은 부활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말씀하실 때에 그들은 마지막 심판 때에 온 인류가 하나님 앞에서 다시 부활하는 종말적 심판과 부활을 믿었으므로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 압니다"라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당한 이 죽음의 사건은 슬픈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울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하는 아픔은 우리에게도 언제나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슬픔을 당한 가정을 향하여 예수님은 이제 결정적인 대답을 해 주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고 죽은 나사로와 살아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죽은 자에게나 산 자에게나 죽음과 부활의 문제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 모두들에게 부활의 신앙을 묻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활은 마르다와 마리아가 믿는 종말론적 부활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현재의 부활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현재의 부활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말씀을 믿지 못하였던고로 슬피 울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도 가슴에 통분히 여기고 민망히 여기사 함께 눈물을 흘리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과 부활 신앙과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하는 그 사건 자체와 그것을 믿는 신앙과의 관계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신학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역사적 사건과 신앙 사건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면, 이쪽에서 분명히 불이 나서 타고 있는 사실을 저쪽 사람에게 알렸더니 그 사람은 그럴리가 없다고 일축해 버리며 전혀 믿으려고 하지 않을 때 이 불이 난 사건은 분명히 현실적 사건이지만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사건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적 사건과 신앙 사건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사건은 양자 택일일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역사적 사건이 있고 그 위에 신앙 사건이 합쳐질 때에 사건이 사건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은 오늘도 우리에게 생생한 역사적 사건으로 다가오며 우리에게 신앙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왜냐 하면, 사건은 단회적이기 때문에 경험할 수 있었던 때는 벌써 지나갔으나 그 사건은 분명한 역사적 사건이었으므로 오늘 우리에게 현재적으로 믿음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처럼 확실한 진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믿지 않는 사람은 죽음이 주는 엄숙한 진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죽는다는 것을 믿을 때만이 이 죽음이 내게 사건이 되고 또 나의 부활을 믿을 수 있는 근본이 될 것입니다.

오순절 사건은 우리에게 귀중한 해답을 주십니다. 부활절과 오순절은 아주 오묘한 관계에 있습니다. 부활절도 역사적 사건이요 오순절은 신앙적 사건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아무도 믿지 않는다면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서 있었던 하나의 사건으로만 지나가 버리고 말 것입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보았고 예수님과 이야기도 했으며, 손과 발과 옆구리의 상처도 만져 보았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자기들의 입으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증거도 했습니다. 또한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발을 보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예수님을 만나보고도 의심하고 만져 보고도 의심하고 같이 식사를 하고도 의심하고 계속 의심했다는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보니 신비스럽기 한이 없지만 그들로서는 더 이상 어떻게 생각해 볼 여지가 없었던 것입니다. 믿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얼마나 인간적이요 당연한 이야기입니까?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듣고도 믿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이 사건이 신앙화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나를 위한 죽음이 되고 그리스도의 부활이 나를 위한 부활이 되어 이것이 나의 신앙 사건화되기 위해서는 성령의 중재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역사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믿게 하는 역사가 바로 오순절의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이 역사적인 사실을 믿음으로써 교회가 이루어졌으니만큼 오순절 성령의 역사도 말할 수 없이 귀중한 사건인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감화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사건이 현재의 나의 사건으로 동시적 경험이 되고,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와 개인적 관계를 맺게 되며, 그리스도의 부활이 내 생명과 절대적 관계에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도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건입니다.

십자가란 죄인을 사형시키는 곳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 모두를 죽이신 것입니다. 믿음으로 십자가를 대할 때 그 앞에서는 살아 남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십자가는 무서운 심판입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아무도 교만할 수 없고 거짓을 말할 수도 없으며 자기의 의를 내세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모든 가치를 완전히 부정해 버리고,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고발하여 완전히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위대한 생명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부활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없이 부활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종말적 육체의 부활만이 아니라 현재적 신앙의 부활도 함께 시키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죽음을 만사의 끝으로 생각하여 흔히 말하기를 죽으면 그만이라고 합니다. 정신없는 사람들의 말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생명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 나 죽으면 그만 아니냐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으로 망녕된 생각입니다. 더욱 무서운 것은 남의 생명까지도 마음대로 죽이는 것입니다. 생명은 스스로 만들어서 가진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마음대로 죽이고 살리고 할 수 있는 권한은 아무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자기 생명이든 남의 생명이든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모두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데에 그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인격에서는 윤리도 도덕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어느 한 순간에 이성을 잃으면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수 있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육체의 죽음이 인생의 끝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무책임한 해답입니다. 영원한 생명, 이 생명의 약속을 믿는 자들은 새로운 의미의 생활을 하게 되며 이 윤리성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 신앙의 윤리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부활은 죄와 사망과 율법의 권세를 이기신 참 자유의 선언이며 완전한 승리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조건 없이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법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의 증표가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우리는 이 구체적인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건을 잊지 말아야 하며 또한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은 "나"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죄의 가책에 매일 필요가 없고 더 이상 죽음의 그늘에서 허덕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약속된 의의 증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있기에 의가 있고 의가 있기에 삶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자유의 윤리가 있고 나 자신의 가치는 바로 이 속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으로써 나 자신을 먼저 용서하며 의롭게 된 나, 구속받은 나에 대한 확증을 지녀야 합니다.

벌벌 떨던 베드로가 부활 신앙을 가지는 순간 생사권을 가진 공회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으냐 너희가 판단하라"고 죽음을 각오하고 담대히 외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몹시도 괴롭히는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그리스도의 날에 너는 나의 자랑이 되고 나는 너의 자랑이 되리라"고 담대하게 부활의 신앙으로 회답할 수 있었습니다.

부활의 신앙은 오해도 박해도 수치도 순교도 문제가 되지 않으며 이기심도 더러운 정욕도 세속적인 탐심도 협소한 민족주의도 모두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부활 신앙입니다.

또한 부활 신앙 속에서 엄청난 자기 가치를 찾았을 때 새로운 이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영원한 약속을 함께 누릴 사람입니다.

오늘 만나면 그만인 사람이 아니며 죽으면 그만인 사람이 아니라 영원한 생을 함께 누릴 사람으로 내 이웃으로 의미가 바꾸어집니다. 순교자의 무리들이 이러한 뜻에서 손목을 잡고 함께 죽어간 것입니다.

로마의 원형극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할 때 한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는데 저쪽에서 사자가 달려오는 것을 보고 이 어린아이가 무서워서 울었습니다. 이때 어머니는 아이를 달래면서 "얘야 잠깐만 참아라. 곧 밝아질 것이다"라고 하며 죽음 뒤에 있는 부활의 아침을 보면서 아이를 위로하며 함께 순교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과거 지향적인 혈육관계에 매인 것이 아닙니다. 같은 집에서 태어났고 같은 피를 받았고 과거 어느 시대에 같이 살았다고 하는 이러한 과거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미래 지향적인 형제 관계로서 앞으로 영원히 함께 살 사람인 것입니다.

바울은 노예도 형제로 대우하라고 했고, 병든 자를 친구로 맞이했던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계급이 있고 부자와 거지가 있으나 하나님 나라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거지였던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고 부자는 불구덩이에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이제 여기서 무슨 말을 더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항상 저 미래를 바라보며 부활의 신앙 속에서 오늘의 가치관을 세우고 형제관을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계급 의식이나 협소한 민족주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가 있을 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고 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형제관을 볼 수 있습니다.

부활의 신앙은 새로운 공동체 의식을 주고 대망 사상에로 우리의 믿음을 승화시켜 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을 때 재림하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바꾸어집니다. 재림하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무리가 모인 것이 초대 교회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서로 유무 상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네 것 내것이 없이 서로 나누어 쓸 수 있는 넓은 마음이 이 부활 신앙에서 유출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종말론적 공동체였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생각할 때 겸손해질 것입니다. 부활을 믿을 때 낙심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믿음은 모든 사건을 소망적으로 해결해 줄 것이며, 내 생명을 새로운 차원으로 바꾸어 놓게 될 것입니다. 그는 모든 일에 승리할 것이며 또한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음으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을 약속 받은 존재임을 확실히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 이웃에 대하여 부활의 증인으로서 살아가야 될 것입니다. 이 부활의 생명이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 사랑하시는 주님, 우리에게 부활의 신앙을 온전케 하여 주셔서 그 부활의 신앙으로 오늘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과거에 매이지 않고 부활을 약속받은 생명으로서 자기와 이웃을 보며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 가는 귀중한 성도의 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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