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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이기는 비결(베드로전서 2 : 18~25)
무슨 말로 설명을 하더라도 이 세상에 고통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생명이 다할 때까지 계속 많은 고난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고난의 문제에 있어서는 어떠한 사람이든지 차별이 없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지식인이나 무식한 자나 높은 자나 낮은 자 할 것 없이 인간이면 누구든지 이 고난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때로는 고진감래라고 하는 말로 스스로 위로하기도 합니다. 고생의 시간이 다 지나면 즐거운 날이 다가올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마는 그것도 위로가 되지 못하는 것은 고난이 끝이 없기 때문에 즐거움이 다가올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고난은 우리에게 더욱 심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생태학자들이 말하기를 이 세상은 여러 가지 면에서 볼 때 40년 혹은 50년 남았다고 추산하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이 막바지에 다다른 세상의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할수록 더욱 무서운 것입니다.
어떤 때는 밖에서 무심히 뛰어 노는 어린아이들을 볼 때마다 정말 한심스러운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렇게 살다가 가면 되겠지만 저 아이들이 앞으로 당할 고생을 생각하면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어두워만 가는 깊은 밤에 그들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편적인 것이며 불가피한 것이며 실제적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당한 문제는 먼저 이 고난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이며, 둘째 어떻게 감수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칠 수 있는 것이라면 다행한 일이지만 고칠 수 없는 것이라면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제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떤 이는 이 받아들이는 자세가 부족하여 계속 반항, 원망, 저주하면서 일생을 헛되이 보내어 버리는 비참한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좀더 냉정한 태도로 겸손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지혜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는 어떻게 이기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극복할 수 있는 데까지 노력하여 환경이라면 환경도 바꾸고 궤도라면 궤도도 수정하여 모든 능력을 다 동원하여서라도 이 고난을 이기고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어쨌든 고난은 도피할 수 없으며 또 도피적 자세라는 것은 비겁한 것으로서 참된 해결의 방법이 못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에 임하는 자세가 어떠냐 하는 것을 좀더 깊이 생각하여 정리해 보면 세 가지 자세로 나누어 볼 수 있겠습니다.
첫째, 마음과 생각의 문제로서 내가 이 고난을 어떤 마음과 자세로 임하느냐 하는 것이며, 둘째, 어떠한 방법을 택하여 그 과정에 대처하느냐 하는 것이며, 셋째, 어떤 결과를 맺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 많은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하더라도 그 어느 순간에 결정적인 결론만 맺을 수 있다면 지난날의 고통은 꿈에 본 듯이 잊어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요한 복음 9장에 보면 나면서부터 소경 되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소경으로 태어나서 40살이 넘도록 살았으니 거의 일생을 답답한 가운데서 비참하고 불행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뜨게 되었고, 그러므로 복음을 증거 하는 사람이 되었으며, 성경에 기록되어 장차 오는 세대의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귀한 인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훗날 이렇게 생각했을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만일 장님이 아니었더라면 예수님과 개별적인 만남이 없었을 것이며 또한 이렇게 큰 은혜를 받지도 못하고 이런 기쁨도 누리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40년간의 고통이 하루아침에 안개처럼 사라지고 새로운 마음으로 옛날을 이야기하며 현재를 자랑삼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지막 결과가 어떻게 맺어지느냐에 따라서 고통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들의 해산의 고통이 이런 것입니다. 자녀를 낳기 위하여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지마는 자녀가 탄생되어 그 사랑스런 얼굴을 대할 때 지난날의 고통은 순식간에 잊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 고난의 마지막 결과가 어떻게 맺어지느냐 하는 것이 바로 중요한 문제가 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사환으로서 상전에게 어떠한 자세로 임해야 하느냐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의 좋은 상징적 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두 어느 수하에 있기도 하고 혹은 남을 다스리기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남의 수하에 있을 때 정당한 순종을 해야 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아주 부당한 순종을 해야 하는 괴로운 때도 있습니다. 나의 잘못으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은 당연하지만, 애매한 고난을 겪을 때가 있어서 순종이 아니라 굴종을 해야 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의 고통입니다.
이 고난에 대하여 오늘 본문 말씀은 세 가지 성격으로 구분하여 분석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첫째, 죄가 있어서 매를 맞는 사람, 즉 자기 죄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는 사람, 둘째, 왜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알 수 없이 애매하게 고난을 당하는 사람, 셋째, 선을 행함으로 당하는 고난, 이렇게 세 가지의 고난이 있습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죄가 있어서 매를 맞고 당하는 고난, 이것은 억울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해야 할 문제는 고난에 임하는 자세로서 이 고난의 의미가 저주적인 것이 아니라 징계적인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징계와 저주는 다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저주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징계가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매라고도 합니다. 부모된 도리로서 자녀가 잘못하면 매로 때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매가 의미하는 것은 곧 사랑입니다.
히브리서 12:8에 보면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아요 참 아들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잘못했을 때 매가 없는 것은 버려진 자식입니다.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될 것은 매는 구체적인 말씀을 의미합니다. 말씀으로 들려주었고 보여 주었지만, 계속 깨닫지 못하고 그 죄에서 돌이키지 않을 때는 마지막으로 매를 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by seeing, by hearing으로 안 될 때는 by touching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람이 미련하여져서 짐승에 가까워지면 매로써 다스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징계를 받을 때 매를 들고 있는 자의 얼굴을 쳐다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매와 함께 들려오는 음성을 바로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될 것입니다. 우연한 징계는 없습니다. 이것이 사랑이며 말씀인 것을 깨닫고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이사야 1:5에 보면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더욱 패역하느냐. 발바닥에서부터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 뿐이어늘 그것을 싸매지도 못했는데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하느냐고 채찍을 든 하나님께서 오히려 마음 아프게 호소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고난을 축복으로 바꾸어 줍니다. 어떠한 징계를 받았든지 그 징계를 통하여 바로 깨닫게 되어 회개하게 된다면 그 징계는 다시없는 축복인 것입니다. 사실은 많은 일 가운데 내가 잘못한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죄를 남에게 돌려버릴 때가 더 많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삼중죄를 짓게 되는데 첫째는 죄를 짓는 죄요 둘째는 죄를 변명하는 죄요 셋째는 죄를 계속 짓는 죄입니다.
어느 땐가 결혼 주례를 해 준 부부가 있었는데 결혼 7년만에 부인이 찾아와서 울면서 가정 이야기를 하고 이혼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주례를 했기 때문에 인사라도 하고 헤어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까 사정은 참 딱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부인에게 묻기를 연애 결혼한 것 같은데 그 때도 그 남자가 그렇게 나쁜 사람이었느냐고 했더니, 그 때는 좋은 사람이어서 집안에서 반대하는 것을 뿌리치고 결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자신의 운명을 맡길 만큼 믿음직스러웠던 그 사람이 당신과 같이 사는 7년 동안에 그렇게 나쁜 사람으로 변했다면 당신에게는 그 책임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조금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조금이라고 하지 말고 함께 살았으니까 절반은 책임져야 할 것이 아니냐고 했더니 그것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절반은 믿음으로 채워서 살아 보라고 했더니 고개를 떨구고 돌아갔는데 지금까지 그런 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원망과 불평은 내게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 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내게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고통도 더욱 무거워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내게는 잘못이 없다고 더 이상 변명하지 말고 고난의 원인이 나에게 있음을 알아서 이 징계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둘째, 애매히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애매하다라는 말은 헬라원문으로 '아디코스' 라고 하는 말로서 부당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는 이런 부당한 고난이 많이 있습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이 왜 이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뜻을 모르고 당하는 고난입니다. 불합리하고 억울하고 아무 유익이 없는 고난입니다. 다른 사람이 불의 함으로써 함께 사업에 투자했다가 함께 망하게 되고, 이웃 집 사람이 불조심하지 않아서 내 집까지 타 버리게 되고, 운전사의 잘못으로 내가 함께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요나 한 사람의 죄로 인하여 그 배를 같이 탔던 모든 사람들이 고난을 당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런 애매한 고난이 우리에게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부당한 고난에 대하여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아름답다는 말은 헬라 원문으로 '카리스' 즉, 은혜라는 말이며,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하나님께 대한 양심의 연고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한 내 양심 때문에 억울한 고난을 참는다는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내가 왜 이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나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실 것이라고 생각하여 믿음으로 참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만일 이 고난을 부당하게 생각하여 상대방을 미워하게 되면 결국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까지 짓게 되고, 신앙에서 떠나 버리는 어리석은 결과를 가져오는 수가 있게 됩니다.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이 고난을 참고 견디면 언젠가는 하나님의 섭리하신 바요 하나님의 축복임을 믿고 감사할 때가 올 것입니다.
이것이 아름다운 것이며 은혜입니다.
셋째로 선을 행함으로 받는 고난이 있습니다. 모르고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알면서 의식적으로 당하는 것이며 불가피하게 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여 스스로 취하는 고난입니다. 이 고난이야말로 값진 것이며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바로 이 고난이 그리스도적 고난이며 또한 그리스도인적 고난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 고난에 대하여 이기는 방법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이 배워야 할 고난을 이기는 비결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본을 보여 주심으로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습니다. 이제 그 자취를 따라가는 자가 고난을 이기는 자이며, 바로 고난의 의미를 바꾸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받으시되 죄를 범치 않으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않으시고, 위협하지도 않으시며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고난을 이기는 비결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믿음을 인하여 당하는 고난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자취를 따라서 이 고난을 이겨야 할 것입니다. 원망이나 불평이나 욕을 하는 것은 신앙의 자세가 아니며, 또한 이때까지의 모든 수고가 한 마디의 불평으로 인하여 헛되이 무너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음의 고난을 받으셨으나 불평 없이 끝까지 참으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승리입니다. 십자가는 빌라도가 지운 것이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께 복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여기에 오묘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참으면 하나님께서 갚으십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인적 고난으로 고난의 의미를 바꾸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모르고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알고 당하며, 할 수 없이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자원하여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면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며 우리는 승리를 얻을 것입니다.
이 상재 선생님의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밤 원고를 쓰면서 앉아 있는데 도둑이 들어와서 물건을 주섬주섬 챙겨 가지고 나가는 것을 보고 다시 들어오라고 하여 형편이 어려우면 어렵다고 이야기를 하든지 아니면 남의 물건을 가져가면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고 가져가야 할 것 아니냐고 하니까 미안하다고 하면서 나갔는데 밖에서 순경에게 붙들렸던 것입니다. 도둑을 잡아서 물건을 도로 찾아온 순경에게 이 상재 선생님의 하시는 말씀이 내가 주었고 고맙다는 인사까지 하고 가져갔는데 무슨 소리하느냐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어떤 고난을 당하든지 기독교적인 고난(christian suffering)으로 계속 그 의미를 바꾸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있고 부활의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 :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날 우리는 여러 가지 종류의 많은 고난을 당하고 살고 있으며 때로는 그 고난 가운데서 쓰러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게 하여 주시고 그리스도의 자취를 따라 오직 선을 행함으로 자원하는 고난을 받아서 고난의 의미를 바꾸어 나감으로 승리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은혜가 넘치게 하여 주시옵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고난을 이기는 비결(베드로전서 2 : 18~25)
무슨 말로 설명을 하더라도 이 세상에 고통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생명이 다할 때까지 계속 많은 고난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고난의 문제에 있어서는 어떠한 사람이든지 차별이 없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지식인이나 무식한 자나 높은 자나 낮은 자 할 것 없이 인간이면 누구든지 이 고난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때로는 고진감래라고 하는 말로 스스로 위로하기도 합니다. 고생의 시간이 다 지나면 즐거운 날이 다가올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마는 그것도 위로가 되지 못하는 것은 고난이 끝이 없기 때문에 즐거움이 다가올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고난은 우리에게 더욱 심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생태학자들이 말하기를 이 세상은 여러 가지 면에서 볼 때 40년 혹은 50년 남았다고 추산하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이 막바지에 다다른 세상의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할수록 더욱 무서운 것입니다.
어떤 때는 밖에서 무심히 뛰어 노는 어린아이들을 볼 때마다 정말 한심스러운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렇게 살다가 가면 되겠지만 저 아이들이 앞으로 당할 고생을 생각하면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어두워만 가는 깊은 밤에 그들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편적인 것이며 불가피한 것이며 실제적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당한 문제는 먼저 이 고난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이며, 둘째 어떻게 감수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칠 수 있는 것이라면 다행한 일이지만 고칠 수 없는 것이라면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제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떤 이는 이 받아들이는 자세가 부족하여 계속 반항, 원망, 저주하면서 일생을 헛되이 보내어 버리는 비참한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좀더 냉정한 태도로 겸손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지혜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는 어떻게 이기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극복할 수 있는 데까지 노력하여 환경이라면 환경도 바꾸고 궤도라면 궤도도 수정하여 모든 능력을 다 동원하여서라도 이 고난을 이기고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어쨌든 고난은 도피할 수 없으며 또 도피적 자세라는 것은 비겁한 것으로서 참된 해결의 방법이 못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에 임하는 자세가 어떠냐 하는 것을 좀더 깊이 생각하여 정리해 보면 세 가지 자세로 나누어 볼 수 있겠습니다.
첫째, 마음과 생각의 문제로서 내가 이 고난을 어떤 마음과 자세로 임하느냐 하는 것이며, 둘째, 어떠한 방법을 택하여 그 과정에 대처하느냐 하는 것이며, 셋째, 어떤 결과를 맺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 많은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하더라도 그 어느 순간에 결정적인 결론만 맺을 수 있다면 지난날의 고통은 꿈에 본 듯이 잊어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요한 복음 9장에 보면 나면서부터 소경 되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소경으로 태어나서 40살이 넘도록 살았으니 거의 일생을 답답한 가운데서 비참하고 불행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뜨게 되었고, 그러므로 복음을 증거 하는 사람이 되었으며, 성경에 기록되어 장차 오는 세대의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귀한 인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훗날 이렇게 생각했을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만일 장님이 아니었더라면 예수님과 개별적인 만남이 없었을 것이며 또한 이렇게 큰 은혜를 받지도 못하고 이런 기쁨도 누리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40년간의 고통이 하루아침에 안개처럼 사라지고 새로운 마음으로 옛날을 이야기하며 현재를 자랑삼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지막 결과가 어떻게 맺어지느냐에 따라서 고통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들의 해산의 고통이 이런 것입니다. 자녀를 낳기 위하여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지마는 자녀가 탄생되어 그 사랑스런 얼굴을 대할 때 지난날의 고통은 순식간에 잊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 고난의 마지막 결과가 어떻게 맺어지느냐 하는 것이 바로 중요한 문제가 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사환으로서 상전에게 어떠한 자세로 임해야 하느냐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의 좋은 상징적 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두 어느 수하에 있기도 하고 혹은 남을 다스리기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남의 수하에 있을 때 정당한 순종을 해야 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아주 부당한 순종을 해야 하는 괴로운 때도 있습니다. 나의 잘못으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은 당연하지만, 애매한 고난을 겪을 때가 있어서 순종이 아니라 굴종을 해야 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의 고통입니다.
이 고난에 대하여 오늘 본문 말씀은 세 가지 성격으로 구분하여 분석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첫째, 죄가 있어서 매를 맞는 사람, 즉 자기 죄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는 사람, 둘째, 왜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알 수 없이 애매하게 고난을 당하는 사람, 셋째, 선을 행함으로 당하는 고난, 이렇게 세 가지의 고난이 있습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죄가 있어서 매를 맞고 당하는 고난, 이것은 억울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해야 할 문제는 고난에 임하는 자세로서 이 고난의 의미가 저주적인 것이 아니라 징계적인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징계와 저주는 다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저주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징계가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매라고도 합니다. 부모된 도리로서 자녀가 잘못하면 매로 때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매가 의미하는 것은 곧 사랑입니다.
히브리서 12:8에 보면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아요 참 아들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잘못했을 때 매가 없는 것은 버려진 자식입니다.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될 것은 매는 구체적인 말씀을 의미합니다. 말씀으로 들려주었고 보여 주었지만, 계속 깨닫지 못하고 그 죄에서 돌이키지 않을 때는 마지막으로 매를 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by seeing, by hearing으로 안 될 때는 by touching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람이 미련하여져서 짐승에 가까워지면 매로써 다스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징계를 받을 때 매를 들고 있는 자의 얼굴을 쳐다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매와 함께 들려오는 음성을 바로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될 것입니다. 우연한 징계는 없습니다. 이것이 사랑이며 말씀인 것을 깨닫고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이사야 1:5에 보면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더욱 패역하느냐. 발바닥에서부터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 뿐이어늘 그것을 싸매지도 못했는데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하느냐고 채찍을 든 하나님께서 오히려 마음 아프게 호소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고난을 축복으로 바꾸어 줍니다. 어떠한 징계를 받았든지 그 징계를 통하여 바로 깨닫게 되어 회개하게 된다면 그 징계는 다시없는 축복인 것입니다. 사실은 많은 일 가운데 내가 잘못한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죄를 남에게 돌려버릴 때가 더 많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삼중죄를 짓게 되는데 첫째는 죄를 짓는 죄요 둘째는 죄를 변명하는 죄요 셋째는 죄를 계속 짓는 죄입니다.
어느 땐가 결혼 주례를 해 준 부부가 있었는데 결혼 7년만에 부인이 찾아와서 울면서 가정 이야기를 하고 이혼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주례를 했기 때문에 인사라도 하고 헤어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까 사정은 참 딱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부인에게 묻기를 연애 결혼한 것 같은데 그 때도 그 남자가 그렇게 나쁜 사람이었느냐고 했더니, 그 때는 좋은 사람이어서 집안에서 반대하는 것을 뿌리치고 결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자신의 운명을 맡길 만큼 믿음직스러웠던 그 사람이 당신과 같이 사는 7년 동안에 그렇게 나쁜 사람으로 변했다면 당신에게는 그 책임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조금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조금이라고 하지 말고 함께 살았으니까 절반은 책임져야 할 것이 아니냐고 했더니 그것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절반은 믿음으로 채워서 살아 보라고 했더니 고개를 떨구고 돌아갔는데 지금까지 그런 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원망과 불평은 내게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 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내게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고통도 더욱 무거워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내게는 잘못이 없다고 더 이상 변명하지 말고 고난의 원인이 나에게 있음을 알아서 이 징계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둘째, 애매히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애매하다라는 말은 헬라원문으로 '아디코스' 라고 하는 말로서 부당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는 이런 부당한 고난이 많이 있습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이 왜 이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뜻을 모르고 당하는 고난입니다. 불합리하고 억울하고 아무 유익이 없는 고난입니다. 다른 사람이 불의 함으로써 함께 사업에 투자했다가 함께 망하게 되고, 이웃 집 사람이 불조심하지 않아서 내 집까지 타 버리게 되고, 운전사의 잘못으로 내가 함께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요나 한 사람의 죄로 인하여 그 배를 같이 탔던 모든 사람들이 고난을 당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런 애매한 고난이 우리에게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부당한 고난에 대하여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아름답다는 말은 헬라 원문으로 '카리스' 즉, 은혜라는 말이며,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하나님께 대한 양심의 연고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한 내 양심 때문에 억울한 고난을 참는다는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내가 왜 이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나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실 것이라고 생각하여 믿음으로 참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만일 이 고난을 부당하게 생각하여 상대방을 미워하게 되면 결국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까지 짓게 되고, 신앙에서 떠나 버리는 어리석은 결과를 가져오는 수가 있게 됩니다.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이 고난을 참고 견디면 언젠가는 하나님의 섭리하신 바요 하나님의 축복임을 믿고 감사할 때가 올 것입니다.
이것이 아름다운 것이며 은혜입니다.
셋째로 선을 행함으로 받는 고난이 있습니다. 모르고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알면서 의식적으로 당하는 것이며 불가피하게 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여 스스로 취하는 고난입니다. 이 고난이야말로 값진 것이며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바로 이 고난이 그리스도적 고난이며 또한 그리스도인적 고난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 고난에 대하여 이기는 방법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이 배워야 할 고난을 이기는 비결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본을 보여 주심으로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습니다. 이제 그 자취를 따라가는 자가 고난을 이기는 자이며, 바로 고난의 의미를 바꾸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받으시되 죄를 범치 않으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않으시고, 위협하지도 않으시며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고난을 이기는 비결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믿음을 인하여 당하는 고난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자취를 따라서 이 고난을 이겨야 할 것입니다. 원망이나 불평이나 욕을 하는 것은 신앙의 자세가 아니며, 또한 이때까지의 모든 수고가 한 마디의 불평으로 인하여 헛되이 무너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음의 고난을 받으셨으나 불평 없이 끝까지 참으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승리입니다. 십자가는 빌라도가 지운 것이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께 복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여기에 오묘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참으면 하나님께서 갚으십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인적 고난으로 고난의 의미를 바꾸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모르고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알고 당하며, 할 수 없이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자원하여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면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며 우리는 승리를 얻을 것입니다.
이 상재 선생님의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밤 원고를 쓰면서 앉아 있는데 도둑이 들어와서 물건을 주섬주섬 챙겨 가지고 나가는 것을 보고 다시 들어오라고 하여 형편이 어려우면 어렵다고 이야기를 하든지 아니면 남의 물건을 가져가면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고 가져가야 할 것 아니냐고 하니까 미안하다고 하면서 나갔는데 밖에서 순경에게 붙들렸던 것입니다. 도둑을 잡아서 물건을 도로 찾아온 순경에게 이 상재 선생님의 하시는 말씀이 내가 주었고 고맙다는 인사까지 하고 가져갔는데 무슨 소리하느냐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어떤 고난을 당하든지 기독교적인 고난(christian suffering)으로 계속 그 의미를 바꾸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있고 부활의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 :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날 우리는 여러 가지 종류의 많은 고난을 당하고 살고 있으며 때로는 그 고난 가운데서 쓰러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게 하여 주시고 그리스도의 자취를 따라 오직 선을 행함으로 자원하는 고난을 받아서 고난의 의미를 바꾸어 나감으로 승리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은혜가 넘치게 하여 주시옵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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