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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좇아 행하라(갈 5:16~24)

by 【고동엽】 2024.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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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좇아 행하라(갈 5:16~24)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받았느니라.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어느 날 깊은 사색에 잠긴 채 골똘히 생각하면서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깊이 생각하면서 길을 걷노라고 맞은 편에서 오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길 한 가운데에서 두 사람은 충돌을 했습니다. 맞은 편에서 오던 사람은 벌컥 화를 내면서 "당신은 누구인데 앞도 보지 못하고 다니는 거요"하고 책망을 하더랍니다. 그때야 정신이 들어 멋쩍은 표정을 하면서 쇼펜하우어는 대답하기를 "글쎄 올시다. 내가 누구이냐고요? 나도 방금 그것을 생각하고 있는 중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내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습니다. 또한 남들이 나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하느냐에 대해서도 신경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알아야 할 자기 자신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생각을 돌려서 내가 누구이냐 하는 것을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서, 혹은 자신 앞에서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가장 어려운 과제입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은 쉽게 판단이 되나 내 허물은 알기가 어려우며 남의 자식에 대해서는 쉽게 판단이 되나 내 자식에 대해서는 어렵습니다. 언제나 내 쪽이 어둡고 미상이 있고 불투명합니다. 거짓과 불의를 보더라도 밖에 있는 것보다는 안에 있는 것이 더 크고, 더 고질적이고 본질적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알기도 어렵지만 자기를 다스린다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나아가서 자기를 믿는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실망 중에 가장 큰 실망은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입니다. 그래도 무엇을 좀 할 수 있는「나」인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다소라도 의지가 있고, 선이 있고, 진실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아닙니다. 형편없는 나의 모습을 봅니다. 다른 사람에게 속았으면 원망할 말이라도 있지만 나에게 속았으니 할 말이 없습니다. 정말 비참한 나의 모습입니다.

인도 사람들의 격언에 의하면 사람의 마음에는 두 개의 마음이 있다고 합니다. 비유하기를 사람의 마음속에는 흰 개와 검은 개가 있어서 늘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은 검은 개가 이겨서 육체가 좋아하고, 어느 날은 흰 개가 이겨서 영혼이 좋아한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속에서는 누가 싸우고 있습니까? 개가 있습니까? 늑대가 있습니까? 아니면 여우가 있습니까? 이 그치지 않는 싸움과 갈등과 모순 때문에 기형아적인 비참한 나의 모습을 인정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두 얼굴을 그대로 인정했습니다. 원하는 선을 행할 수가 없고 원치 않는 죄만 짓는 자기 모습을 보았습니다.(로마서 7장)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자기의 실존 그대로를 고백했습니다. 그것도 자기 혼자서 인정한 것이 아니라 로마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다 자기 모습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인정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했습니다. 또 고린도전서 9장에서는 "나를 쳐서 복종케 한다." 고전 15장에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모습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까? 그는 자기 자신의 가능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구제불능으로 보았습니다. 조금만 고삐를 늦추어주면 딴 짓을 합니다.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간사해집니다. 조금만 더 나은 것이 있으면 교만해집니다. 아주 몹쓸 자기 존재이기에 자신을 용납치를 않았습니다. 쳐서 복종케할 뿐만 아니라 날마다 죽으며, 나아가서는 십자가에 못 박는다고 자기 존재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몇 퍼센트나 믿고 있습니까? 믿을 만합니까? 쓸만한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바울은 실패의 원인이 어디있나를 생각해 봅니다. 사랑을 생각하면서 미워하고, 화평을 원하면서 분쟁하고, 의를 소원하면서 불의에 살고, 진리를 그렇게도 사모하면서 거짓으로 살아가는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말입니다. 바울은 자기를 잘못 보았다고 했습니다. 자기를 믿었던 것이 잘못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믿지 말아야 할 존재였으며, 인정하지 않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에게 기대를 걸었다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진실을 몰랐다는 것이 바울의 소신입니다. 인간 실존이 아니라 자기 실존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미련 없이 자기를 비워 버리고 미련 없이 자기를 부정하는 그러한 용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아닌 다른 자기가 뿌리박고 있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는 것입니다. "내가한 법을 깨달았노니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롬 7:21).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다는 것은 저 깊은 곳에 또 하나의 내가 있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진실입니다. 빠지지 않는 악이 깊이 뿌리박고 있다가 이것이 틈만 나면 들먹거린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현대에 알려진 병의 종류가 3만 5천 가지나 된다고 합니다. 물론 모르는 병명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5천 종류는 현대 의학으로 치료가 가능하지만 아직도 3만 종류가 속수무책이라고 합니다. 고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원인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원인을 모르는 병은 고칠 수가 없으므로 죽을병입니다. 우연을 기다리거나 요행을 바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치료는 뒤에 두고 우선 병의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이러한 병리적인 생을 살아가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다시 생각합니다. 나를 십자가에 못 박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 죽은 줄 알았는데 아직도 살아있어요.

다 깨진 줄 알았는데 깨어지지 않고 아직도 꿈틀거립니다. 다 불타 없어진 줄 알았는데 아직도 그 속 깊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사건은 계속 터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지간히 매도 맞았고, 어지간히 고난도 당했고, 그만하면 이제는 겸손할 때가 되었는데 아직도 교만합니다. 아직도 진실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모습을 정직하게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하여 직업을 버렸습니다. 가정도 버렸습니다. 그리고 온 생을 걸고 예수를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을 자기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다가올 때 그는 예수를 부인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할 수 없었기에 예수를 부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나를 부정하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긍정할 겨를이 없습니다. 이제 내가 내 자신을 지배하지 못하는 것을 알았으면 나를 그리스도에게 맡깁시다. 나에게는 더 이상 기대를 걸지 맙시다. 하나님 앞에 한 번 진실해 봅시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를 대조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울을 보듯이 비쳐보시기 바랍니다.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 맺음과, 분쟁과, 시비와, 분냄과, 당 짓는 것, 분리함, 이단, 투기, 술취함, 방탕, 이런 것들이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이것은 육체가 그 인격을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방탕하지 않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이 없습니다. 벌써 뒤에 육체가 조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화평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 충성, 온유, 절제, 화평이 9가지입니다. 무의식중에, 생각지 않는 중에 성령의 열매가 맺혀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방탕의 열매가 맺혀지고 있습니까? 육체 주도적인 인간에게는 방탕과, 시기와, 이 더러운 열매들이 맺혀지는 것이고, 성령 주도적인 인격은 알게 모르게 벌써 사랑과, 희락과, 아름다운 열매들이 맺혀지는 것입니다. 요새는 원격 조종이라는 말을 합니다. 육체가 조종하는 인간이 가는 길은 뻔합니다. 성령이 조종할 때 그 인격에는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가 맺혀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라 해서 사랑하게 되었습니까?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데 말입니다. 온유를 내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까? 겸손을 내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까? 성령의 역사가 없이 어찌 성령의 열매를 맺겠습니까? 육체에 이끌리어 가는 사람에게 성령의 열매를 기대한다면 이것처럼 모순된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8절에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죽는 자는 육체적으로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죽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누구에게 끌려가고 있는 것입니까, 내가 이대로 발전하고, 좀 개선하고, 좀 결심하고, 좀더 다듬으면 무엇인가 될 것 같습니까? 속이나, 속으나 마찬가지입니다. 허황된 생각 없이 속는 사람도 없고 교만 없이 속이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 '나'라고 하는 것에서는 어떤 개선이나 최선이 있다해도 아름다운 열매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곧 썩어질 것 외에 아무 것도 맺혀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령에 이끌리어 주도될 때에 그에게서 참된 열매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내 소속은 무엇입니까? 하늘에 속하고 땅에 사는 것입니까, 아니면 땅에 속한 자로서 하늘을 쳐다보며 사는 것입니까.

악한 것과, 약한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약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령에 이끌리어 살지마는 간간히 실수할 때가 있고 약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근본적으로 아직도 빠지지 아니한 악이 있어서 그것이 불쑥불쑥 솟아나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 깊은 곳을 살펴야 하겠습니다. 프로이드는 말합니다. 심리학자인 그는 말하기를 사람이 무의식 중에 하는 말을 종합하면 그 사람의 사람됨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보통 때는 점잖고 의젓한 인간이지마는 어떤 급박한 상황에 들어간다던가 어떤 참을 수 없는 사건에 부딪치면 그저 어디서나 욕이 나오고 화가 발칵 나오고, 이상한 증세가 나옵니다. 어느 쪽이 '나'입니까? 내가 잠깐 실수한 것입니까? 아니면 이미 내 속에 있던 것이 오늘 나온 것뿐입니까?

얼마 전에 어느 집사님 한 분이 수술을 받게 되어 문병을 갔습니다. 몹시 불안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걱정하지 마세요.

기도하고 수술 받읍시다" 하며 기도를 끝내고 나올 때에 저는 한 마디 더 보탰습니다. "수술 잘 받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하지마는 마취에서 깨어날 때 헛소리 안 하기 위해서도 기도하는 것이 좋겠소"라고 했습니다. 사실입니다. 이 때의 헛소리가 진짜입니다.

술 취한 자와 술이 깬 자를 놓고 보면 술 취했을 때 한 소리가 전부 진짜입니다. 술 깬 다음에 앞 뒤 가리고 체면 차리고 점잖게 하는 말은 전부 거짓이며 위선입니다. 자, 어느 쪽이 '나' 입니까? 여러분은 어느 쪽이 '나'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한 번 더 진실해 버립시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 이제 우리는 소극적인 일은 버립시다. 부정적인 일, 의지, 결단, 결심, 맹세 그 만큼 속았으면 되었지 더 얼마만큼 속았다는 것입니까? 믿을 것이 못됩니다. 이제는 판단도, 의지도, 다 버립시다. 잠재하고 묵묵히 순종합시다. 내가 이렇게 해서 앞으로 어떻게 되느냐고 묻지 맙시다. 오늘 내가 성령에 순종하면 그만입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정욕을 이길 것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아이들이 공부를 하다가 잠자리에 들 때 시계를 맞춰놓고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니 깨워 달라고 엄마께 부탁을 합니다. 자기가 시계를 맞춰놓고도 자신이 깨어날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미지수입니다. 나를 믿을 수 없단 말입니다. 내가 나를 믿지 못하면 남의 말이라도 믿읍시다. 이제 더 이상 구구한 비판을 하지 맙시다. 불평이나 비평이나 장담도 하지 맙시다. 그대로 한 사건 한 사건, 시간 시간에 성령을 좇아 행할 뿐입니다. 경과를 어떻게 되겠냐고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해 타산, 구구한 질문, 다 잠재합시다. 그리고 그대로 따라가 봅시다. 거기에 성령의 열매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 어거스틴이 젊었을 때는 어지간히 타락했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재주가 비상하여 천재적인 문학가였고 명성도 몹시 높았으나 마니교에 취해 가지고 몹시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바로 살아보려고 결심도 했습니다. 예수를 믿고 살아 보려고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불가능했습니다. 이 허황되고 방탕한 생활에서 헤어날 길이 없었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로마로 갑니다. 타락한 생활 중 어느 날 그는 황혼에 동산을 거니는데 귀에 쟁쟁하게 옆에서 누가 말하듯이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펴서 읽으라, 펴서 읽으라"하는 분명한 음성이 귀에 똑똑히 들여왔습니다. 자기 앞에는 성경책이 있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폈는데 로마서 13장입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 말씀을 보고 이 말씀 앞에 무릎을 끓었습니다.

이제는 내 의지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지시대로 순종하며 살기로 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성 어거스틴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믿지 못할 것을 믿는 자처럼 불행한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깨끗이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오직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 말미암아 육체의 욕심을 제어하고 승리의 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기도 자비로운 주님, 도저히 믿을 것이 못되는 것을 믿고 살며, 거짓과 위선에 살면서도 가장 진실한 것처럼 표방하고 사는 미련하고 더욱 어리석은 저희들을 이제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기도하옵나이다. 주여, 하나님 앞에서 내 일그러진 모습을 바로 볼 수 있게 하옵소서. 그리고 자신을 온전히 주께 위탁하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는 그런 생활을 하게 하사 성령을 좇아 살고 그리고 우리 인격 안에서 성령의 열매만이 충만하게 맺어질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성령을 좇아 행하라(갈 5:16~24)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받았느니라.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어느 날 깊은 사색에 잠긴 채 골똘히 생각하면서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깊이 생각하면서 길을 걷노라고 맞은 편에서 오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길 한 가운데에서 두 사람은 충돌을 했습니다. 맞은 편에서 오던 사람은 벌컥 화를 내면서 "당신은 누구인데 앞도 보지 못하고 다니는 거요"하고 책망을 하더랍니다. 그때야 정신이 들어 멋쩍은 표정을 하면서 쇼펜하우어는 대답하기를 "글쎄 올시다. 내가 누구이냐고요? 나도 방금 그것을 생각하고 있는 중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내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습니다. 또한 남들이 나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하느냐에 대해서도 신경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알아야 할 자기 자신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생각을 돌려서 내가 누구이냐 하는 것을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서, 혹은 자신 앞에서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가장 어려운 과제입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은 쉽게 판단이 되나 내 허물은 알기가 어려우며 남의 자식에 대해서는 쉽게 판단이 되나 내 자식에 대해서는 어렵습니다. 언제나 내 쪽이 어둡고 미상이 있고 불투명합니다. 거짓과 불의를 보더라도 밖에 있는 것보다는 안에 있는 것이 더 크고, 더 고질적이고 본질적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알기도 어렵지만 자기를 다스린다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나아가서 자기를 믿는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실망 중에 가장 큰 실망은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입니다. 그래도 무엇을 좀 할 수 있는「나」인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다소라도 의지가 있고, 선이 있고, 진실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아닙니다. 형편없는 나의 모습을 봅니다. 다른 사람에게 속았으면 원망할 말이라도 있지만 나에게 속았으니 할 말이 없습니다. 정말 비참한 나의 모습입니다.

인도 사람들의 격언에 의하면 사람의 마음에는 두 개의 마음이 있다고 합니다. 비유하기를 사람의 마음속에는 흰 개와 검은 개가 있어서 늘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은 검은 개가 이겨서 육체가 좋아하고, 어느 날은 흰 개가 이겨서 영혼이 좋아한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속에서는 누가 싸우고 있습니까? 개가 있습니까? 늑대가 있습니까? 아니면 여우가 있습니까? 이 그치지 않는 싸움과 갈등과 모순 때문에 기형아적인 비참한 나의 모습을 인정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두 얼굴을 그대로 인정했습니다. 원하는 선을 행할 수가 없고 원치 않는 죄만 짓는 자기 모습을 보았습니다.(로마서 7장)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자기의 실존 그대로를 고백했습니다. 그것도 자기 혼자서 인정한 것이 아니라 로마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다 자기 모습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인정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했습니다. 또 고린도전서 9장에서는 "나를 쳐서 복종케 한다." 고전 15장에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모습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까? 그는 자기 자신의 가능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구제불능으로 보았습니다. 조금만 고삐를 늦추어주면 딴 짓을 합니다.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간사해집니다. 조금만 더 나은 것이 있으면 교만해집니다. 아주 몹쓸 자기 존재이기에 자신을 용납치를 않았습니다. 쳐서 복종케할 뿐만 아니라 날마다 죽으며, 나아가서는 십자가에 못 박는다고 자기 존재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몇 퍼센트나 믿고 있습니까? 믿을 만합니까? 쓸만한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바울은 실패의 원인이 어디있나를 생각해 봅니다. 사랑을 생각하면서 미워하고, 화평을 원하면서 분쟁하고, 의를 소원하면서 불의에 살고, 진리를 그렇게도 사모하면서 거짓으로 살아가는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말입니다. 바울은 자기를 잘못 보았다고 했습니다. 자기를 믿었던 것이 잘못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믿지 말아야 할 존재였으며, 인정하지 않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에게 기대를 걸었다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진실을 몰랐다는 것이 바울의 소신입니다. 인간 실존이 아니라 자기 실존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미련 없이 자기를 비워 버리고 미련 없이 자기를 부정하는 그러한 용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아닌 다른 자기가 뿌리박고 있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는 것입니다. "내가한 법을 깨달았노니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롬 7:21).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다는 것은 저 깊은 곳에 또 하나의 내가 있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진실입니다. 빠지지 않는 악이 깊이 뿌리박고 있다가 이것이 틈만 나면 들먹거린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현대에 알려진 병의 종류가 3만 5천 가지나 된다고 합니다. 물론 모르는 병명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5천 종류는 현대 의학으로 치료가 가능하지만 아직도 3만 종류가 속수무책이라고 합니다. 고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원인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원인을 모르는 병은 고칠 수가 없으므로 죽을병입니다. 우연을 기다리거나 요행을 바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치료는 뒤에 두고 우선 병의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이러한 병리적인 생을 살아가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다시 생각합니다. 나를 십자가에 못 박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 죽은 줄 알았는데 아직도 살아있어요.

다 깨진 줄 알았는데 깨어지지 않고 아직도 꿈틀거립니다. 다 불타 없어진 줄 알았는데 아직도 그 속 깊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사건은 계속 터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지간히 매도 맞았고, 어지간히 고난도 당했고, 그만하면 이제는 겸손할 때가 되었는데 아직도 교만합니다. 아직도 진실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모습을 정직하게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하여 직업을 버렸습니다. 가정도 버렸습니다. 그리고 온 생을 걸고 예수를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을 자기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다가올 때 그는 예수를 부인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할 수 없었기에 예수를 부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나를 부정하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긍정할 겨를이 없습니다. 이제 내가 내 자신을 지배하지 못하는 것을 알았으면 나를 그리스도에게 맡깁시다. 나에게는 더 이상 기대를 걸지 맙시다. 하나님 앞에 한 번 진실해 봅시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를 대조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울을 보듯이 비쳐보시기 바랍니다.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 맺음과, 분쟁과, 시비와, 분냄과, 당 짓는 것, 분리함, 이단, 투기, 술취함, 방탕, 이런 것들이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이것은 육체가 그 인격을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방탕하지 않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이 없습니다. 벌써 뒤에 육체가 조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화평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 충성, 온유, 절제, 화평이 9가지입니다. 무의식중에, 생각지 않는 중에 성령의 열매가 맺혀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방탕의 열매가 맺혀지고 있습니까? 육체 주도적인 인간에게는 방탕과, 시기와, 이 더러운 열매들이 맺혀지는 것이고, 성령 주도적인 인격은 알게 모르게 벌써 사랑과, 희락과, 아름다운 열매들이 맺혀지는 것입니다. 요새는 원격 조종이라는 말을 합니다. 육체가 조종하는 인간이 가는 길은 뻔합니다. 성령이 조종할 때 그 인격에는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가 맺혀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라 해서 사랑하게 되었습니까?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데 말입니다. 온유를 내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까? 겸손을 내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까? 성령의 역사가 없이 어찌 성령의 열매를 맺겠습니까? 육체에 이끌리어 가는 사람에게 성령의 열매를 기대한다면 이것처럼 모순된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8절에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죽는 자는 육체적으로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죽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누구에게 끌려가고 있는 것입니까, 내가 이대로 발전하고, 좀 개선하고, 좀 결심하고, 좀더 다듬으면 무엇인가 될 것 같습니까? 속이나, 속으나 마찬가지입니다. 허황된 생각 없이 속는 사람도 없고 교만 없이 속이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 '나'라고 하는 것에서는 어떤 개선이나 최선이 있다해도 아름다운 열매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곧 썩어질 것 외에 아무 것도 맺혀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령에 이끌리어 주도될 때에 그에게서 참된 열매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내 소속은 무엇입니까? 하늘에 속하고 땅에 사는 것입니까, 아니면 땅에 속한 자로서 하늘을 쳐다보며 사는 것입니까.

악한 것과, 약한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약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령에 이끌리어 살지마는 간간히 실수할 때가 있고 약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근본적으로 아직도 빠지지 아니한 악이 있어서 그것이 불쑥불쑥 솟아나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 깊은 곳을 살펴야 하겠습니다. 프로이드는 말합니다. 심리학자인 그는 말하기를 사람이 무의식 중에 하는 말을 종합하면 그 사람의 사람됨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보통 때는 점잖고 의젓한 인간이지마는 어떤 급박한 상황에 들어간다던가 어떤 참을 수 없는 사건에 부딪치면 그저 어디서나 욕이 나오고 화가 발칵 나오고, 이상한 증세가 나옵니다. 어느 쪽이 '나'입니까? 내가 잠깐 실수한 것입니까? 아니면 이미 내 속에 있던 것이 오늘 나온 것뿐입니까?

얼마 전에 어느 집사님 한 분이 수술을 받게 되어 문병을 갔습니다. 몹시 불안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걱정하지 마세요.

기도하고 수술 받읍시다" 하며 기도를 끝내고 나올 때에 저는 한 마디 더 보탰습니다. "수술 잘 받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하지마는 마취에서 깨어날 때 헛소리 안 하기 위해서도 기도하는 것이 좋겠소"라고 했습니다. 사실입니다. 이 때의 헛소리가 진짜입니다.

술 취한 자와 술이 깬 자를 놓고 보면 술 취했을 때 한 소리가 전부 진짜입니다. 술 깬 다음에 앞 뒤 가리고 체면 차리고 점잖게 하는 말은 전부 거짓이며 위선입니다. 자, 어느 쪽이 '나' 입니까? 여러분은 어느 쪽이 '나'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한 번 더 진실해 버립시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 이제 우리는 소극적인 일은 버립시다. 부정적인 일, 의지, 결단, 결심, 맹세 그 만큼 속았으면 되었지 더 얼마만큼 속았다는 것입니까? 믿을 것이 못됩니다. 이제는 판단도, 의지도, 다 버립시다. 잠재하고 묵묵히 순종합시다. 내가 이렇게 해서 앞으로 어떻게 되느냐고 묻지 맙시다. 오늘 내가 성령에 순종하면 그만입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정욕을 이길 것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아이들이 공부를 하다가 잠자리에 들 때 시계를 맞춰놓고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니 깨워 달라고 엄마께 부탁을 합니다. 자기가 시계를 맞춰놓고도 자신이 깨어날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미지수입니다. 나를 믿을 수 없단 말입니다. 내가 나를 믿지 못하면 남의 말이라도 믿읍시다. 이제 더 이상 구구한 비판을 하지 맙시다. 불평이나 비평이나 장담도 하지 맙시다. 그대로 한 사건 한 사건, 시간 시간에 성령을 좇아 행할 뿐입니다. 경과를 어떻게 되겠냐고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해 타산, 구구한 질문, 다 잠재합시다. 그리고 그대로 따라가 봅시다. 거기에 성령의 열매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 어거스틴이 젊었을 때는 어지간히 타락했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재주가 비상하여 천재적인 문학가였고 명성도 몹시 높았으나 마니교에 취해 가지고 몹시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바로 살아보려고 결심도 했습니다. 예수를 믿고 살아 보려고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불가능했습니다. 이 허황되고 방탕한 생활에서 헤어날 길이 없었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로마로 갑니다. 타락한 생활 중 어느 날 그는 황혼에 동산을 거니는데 귀에 쟁쟁하게 옆에서 누가 말하듯이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펴서 읽으라, 펴서 읽으라"하는 분명한 음성이 귀에 똑똑히 들여왔습니다. 자기 앞에는 성경책이 있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폈는데 로마서 13장입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 말씀을 보고 이 말씀 앞에 무릎을 끓었습니다.

이제는 내 의지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지시대로 순종하며 살기로 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성 어거스틴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믿지 못할 것을 믿는 자처럼 불행한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깨끗이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오직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 말미암아 육체의 욕심을 제어하고 승리의 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기도 자비로운 주님, 도저히 믿을 것이 못되는 것을 믿고 살며, 거짓과 위선에 살면서도 가장 진실한 것처럼 표방하고 사는 미련하고 더욱 어리석은 저희들을 이제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기도하옵나이다. 주여, 하나님 앞에서 내 일그러진 모습을 바로 볼 수 있게 하옵소서. 그리고 자신을 온전히 주께 위탁하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는 그런 생활을 하게 하사 성령을 좇아 살고 그리고 우리 인격 안에서 성령의 열매만이 충만하게 맺어질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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