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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다스리는 자(잠 16:24~33)

by 【고동엽】 2024.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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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다스리는 자(잠 16:24~33)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노력하는 자는 식욕을 인하여 애쓰나니 이는 그 입이 자기를 독촉함이니라. 불량한 자는 악을 꾀하나니 그 입술에는 맹렬한 불 같은 것이 있느니라. 패려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말장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느니라. 강포한 사람은 그 이웃을 꾀어 불선한 길로 인도하느니라. 눈을 감는 자는 패역한 일을 도모하며 입술을 닫는 자는 악한 일을 이루느니라.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서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현대인의 결정적인 약점은 자기 자신을 잘 모른다고 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척이나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이렇게 많은 것을 아는 동안에 자기 자신을 아는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를 배우면서, 또 하나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연을 다스리기도 하고 자동차를 운전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마음은 자기가 운전하지 못하는 그러한 방임된 인격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특별히 인간에게만은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 의미는 거룩한 속성을 지녔다는 뜻이요, 지혜와 능력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또는 사랑하는 자로, 사랑을 아는 자로서의 사랑의 속성을 지니고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것은 다스림의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모든 생명은 본능을 지녔고 그 본능에 의해서 살아가며, 본능에 의해서 질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먹고 싶은 본능이 있기에 굶어 죽지 않습니다. 서식 본능이 있고, 귀소 본능이 있기에 나름대로 자기들 생활을 유지하며 살아갑니다. 그러고 보면, 모든 행복은 본능과 관계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능 자체를 속된 것으로 여기는 것은 헬라 철학이며 이원론적인 사상이며, 이방 사상입니다. 기독교는 본능을 소중히 여깁니다. 어떤 본능이든 근본은 하나님께로 온 것이며 본능을 통해서 행복하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본능은 아름다운 것이요,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본능을 인간 스스로 다스리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본능은 넓게 주시고 우리가 소유하는 것은 선택해서 좁은 길로 내 본능을 다스려 나가도록 했습니다. 예를 들면, 가질 수 있는 마음을 주셨지만 무엇이든 다 가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가능한 것을 많이, 넓게, 생활의 영역으로 우리에게 주었지만 그러나 먹을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은 구분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넓은 본능에 대한 좁은 제재요 제한입니다. 그러므로 이성으로 본능을 다스려야 하고 양심에 의해서 다스려야 하고, 지성과 의지에 의해 본능을 다스리도록 특권을 주셨습니다. 좀더 나아가면 믿음으로, 성령의 감화로 우리의 본능을 다스려야 합니다. 본능을 잘 다스리고 바로 다스리면 그 다스리는 것만큼의 그만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먹고 싶은 마음, 가지고 싶은 마음, 되고 싶은 마음, 보이고 싶은 마음, 사랑하고 싶은 마음, 이것들은 다 귀한 본능입니다. 생존 본능이든 생식 본능이든 본능은 원래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 중에서 다스린다는 본능을 심리학자들은 정치적 본능이라고 합니다. 이 본능은 특히 남자에게 강한 것 같습니다. 가정도 다스리고, 직장도 다스리고, 무엇인가를 지배하면서 느끼는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주가 우리 인간에게 주신 아름다운 최고의 선물입니다. "만물을 다스리라"고 태초에 인간에게 권한을 주신 것은 잘 간수하고, 잘 보존하고, 잘 주관하라는 뜻이지 파괴하고 마음대로 잡아 먹으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을 잘 다스릴 때만이 선물일 수 있고, 복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다스리라는 말씀 속에는 자유와 자율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상당한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 자유는 인간에게 주어진 큰 주권이며, 자유가 있는 만큼 책임성이 있는 것입니다. "네가 자유한 만큼 네가 책임을 져라." 즉, 이 만큼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의 한계입니다. 책임을 질 줄 모르는 정치는 허세입니다. 그것은 폭력입니다. 권리만 행사하고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것은 권리를 가질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남을 다스린다고 하는 것은, 그의 책임까지 다스리는 자가 맡아야 합니다. 책임지는 것만큼 자유의 영역도 넓어지는 것입니다.

윗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그만큼 책임을 크게 많이 져야 합니다.

자기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사람은 항상 남의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책임지는 만큼 자유의 영역은 넓어지며 그만큼 큰 정치적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제 나의 마음을 다스리는 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내 뜻으로 내가 다스렸다면 내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것이 다스림의 뜻입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잊어버린 나 자신에 대해 의식을 돌려 무의식화된 자기 자신의 의식에 대해서, 혹은 자기 다스림에 대해 생각을 돌려보아야 합니다. 다스린다고 하는 말은 바로 자유한다는 뜻입니다. 왕은 언제나 자유합니다. 다스리는 자는 자유합니다. 아무에게도 어떤 일에도 매이지 않는 사람은 바로 왕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를 다스리는 자입니다. 특별히 증오의 노예가 된 사람은 아주 불행합니다. 미워하는 감정 때문에 잠을 못 이루고, 자기 몸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고생하고 있습니다.

증오의 노예가 되었기에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심지어는 빼앗긴 것도 모르고 살아가는 형편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나친 욕심의 노예, 지나친 명예욕의 노예, 지나친 질투심의 노예가 된 사람은 정말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욕망과 희망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사랑과 욕정도 다릅니다.

사랑은 무한히 자유롭습니다만 욕정은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누구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계속 그로 말미암아 괴로움을 당한다면 그는 사랑을 모르는 자입니다. 그것은 욕정에 매인 것으로 결코 사랑이 아니란 말입니다. 사랑은 자유롭고 욕정은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내 마음이 얼마나 자유로우냐 하는 만큼 인간은 자기 특권을 향유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에 억지로 끌려가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저는 특히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을 아주 불쌍한 사람으로 봅니다. 자기 마음을 또는 자기 감정을 마음대로 다스리지 못해서 술의 힘을 빌려 좀 이겨보겠다고 하는데 정말 한심한 것입니다. 술이 깨어날 때 더 처참해지는 자기 모습 즉, 자기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한 자책이 더 비참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로마서 7장에 보면 자유 없는 자기 자신을 개탄하는 바울의 고백이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저내랴. 원하는 선은 행할 수 없고 원치 않는 죄만 짓는 자기 모습, 즉 무엇인가에 끌려가는 처참한 자기모습을 객관시하며 슬퍼하고 있는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어떤 상황 아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다스림이란 또한 굴복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린도전서 9: 27에 보면 사도 바울은 "나를 쳐서 복종케 하라." 즉 나 자신을 때려서 굴복시킨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길들인다는 뜻입니다. 자기를 놓치게 되면 실패합니다.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으면 무엇을 얻었다 하겠습니까? 자기 스스로를 아는 자는 자신에게 자유를 주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아는 자는 자기를 믿지 않습니다.

내가 나됨을 알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습니다. 자기는 죄인의 괴수로서 언덕 위에 있는 수레처럼 밑으로 밑으로 떨어지는 방종하고 타락한 존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자기에게 자유를 허락치 않았습니다. 자기를 굴레로 씌웠습니다. 야고보서에 있는 말씀처럼 자갈을 물렸습니다.

우리들의 결심은 조석으로 변합니다. 과연 나 스스로가 믿을 만한 존재입니까? 공부하는 아이들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 위해 자명종 시계를 맞춰 놓고도 또 어머니께 깨워달라고 부탁합니다.

자기 스스로를 믿는다는 것을 일단 포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못 믿으니 이제는 어머니의 의지를 믿어야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믿을 것이 못됩니다. 그러므로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육신이 하자는 대로 다 하면 되는 일이 없습니다. 자고 싶은 대로 자면 24시간 다 자도 모자랍니다. 이토록 나는 형편없고 구제 불능함을 두 손들고 선언해야 합니다. 빨리 선언하고 이제 예수님의 의지를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자기 의지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고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뜻합니다. 이제 내가 나를 다스리지 못하므로 그리스도가 나를 다스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의 말씀으로 나를 다스리게 하여 그저 묵묵히 순종할 뿐입니다.

여러분,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기 마음을 믿지 않습니다. 자기를 다스립니다.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께만 순종하고 나의 모든 것, 즉 나의 판단, 감정까지도 그 분께 위탁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은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는 유명한 말씀입니다. 순간적인 분노와 순간적인 감정의 노예가 되어 일생동안 후회하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 마음을 바로 다스린다는 것은 정말 어렵고 중요한 일입니다. 모세를 보십시다. 그는 시내산에서 40일 동안 주야로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올 때 얼굴에 광채가 빛나 백성들이 쳐다볼 수가 없어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울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며 내려온 모세지만 우상을 숭배하는 백성들을 볼 때 격렬한 분노가 터져나옵니다. 자제할 틈도 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 돌 비석을 그대로 내던집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아무리 화가나도 십계명은 잠깐 땅에 내려놓고 다른 돌을 던져야지 어쩌자고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의 돌비석을 그대로 던집니까? 바로 이 모습이 모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그렇게 입었는데도 옛날에 애굽 사람을 때려죽인 솜씨가 그대로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할 때 가데스에서 반석을 두 번씩 내리칩니다. 혈기를 그대로 뱉었습니다. 패역한 놈들이라고 욕설을 하며 불신앙적 발언을 했습니다. 한 사람이 바로 되는 것이 이렇게 어렵습니다. 마술적이나 기계론적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얼마나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신학대학 동창회가 열렸는데 많은 목사님이 모였습니다. 그 중 제일 고령자 목사님께서 후배들에게 인사를 하시는데 "여러분 화내지 마십시오. 화를 안 내면 나 만큼 살 수 있습니다"라는 한 말씀외에는 아무 말씀이 없었습니다. 이 분은 92세였습니다. 오랜 목회 경험과 인생 경험으로 하신 단 한 마디가 화내지 말라는 당부였습니다. 큰 감명으로 가슴으로 그 말씀을 받았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화내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는 목적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한 번 자신에게 물어 보십시다. 누구를 위하여 오늘 내가 이 말을 하며 행동하는가를 말입니다. 어떤 상황하에서라도 목적 의식을 상실해서는 안 됩니다.

둘째로 진실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거짓된 사람 비양하다가 내가 더 거짓말 많이 하고 사실에서 떠나버리고 과장과 궤변으로 치우칠 때가 있습니다. 끝까지 진실 합시다. 끝까지 웃음과 친절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개를 쓰다듬으면서 영어로 "I hate you"(내가 너를 미워한다) 하면 개는 좋다고 꼬리를 칩니다. 그러나 개를 향하여 "I love you"(나는 너를 사랑한다)하면서 소리를 지르면 꽉 물어 버린다고 합니다. 사랑한다고 했느냐, 미워한다고 했느냐 에는 아랑곳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웃으면서 말하면 무슨 말이든 통합니다. 그러나 혈기로 하는 말은 백해 무익입니다. 진리를 말해도 소용없고, 아무리 귀한 말을 해도 혈기가 있으면 전달이 되지 않습니다. 끝까지 사랑과 웃음과 친절을 잃지 말아야겠습니다. 셋째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 있다는 신 임재 의식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있고 하나님이 들으시고 하나님이 보십니다. 바로 그 신앙으로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모습을 바로 보십시다. 하나님 앞에 있는 내 모습을 보십시다. 그리고 이야기합시다. 사도행전 4:19에 베드로와 요한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으냐. 너희가 판단하라"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있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창세기 4:7에 보면, 분노한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어느 한 순간에야 죄스러운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머리 위로 지나가는 새는 막을 수가 없으되 내 머리 위에 둥지를 트는 새는 막아야 한다"는 마틴 루터의 말이 있습니다. 슬쩍 지나가는 죄의 생각이야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마음에 쌓이면 안 됩니다. 잉태하면 안 됩니다.

후회라고 하는 것은 전부가 자신을 다스리지 못한 것의 고통입니다. 자기 상실에서 오는 것입니다. 돈을 벌지 못해서 후회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나를 바로 다스리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입니다. 믿음과 겸손과 사랑으로 다스립시다. 잘 안 된다고 실망해서는 안 됩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값을 치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에게 맡기면 그가 나를 다스릴 것입니다. 그가 내 마음을 지배하고 그가 내 뜻을 주관하실 것입니다. 말씀과 성령이 내 인격과 내 마음을 다스려 주실 것입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기도 은혜로우신 아버지시여, 모든 것을 얻은 것 같으나 자기를 잃어버리고 모든 것을 다스리는 것 같이 느끼나 자기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어리석고 우둔한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기도하옵나이다. 아버지 하나님, 이제는 더 나를 믿지 않게 하시고 오직 예수를 믿으며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고 묵묵히 순종하는 중에 말씀과 성령에 의하여 자기를 다스릴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하옵나이다. 이제 남은 생을 오직 주님 안에 있는 나로서 온전하며 그 영광과 그 능력에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자기를 다스리는 자(잠 16:24~33)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노력하는 자는 식욕을 인하여 애쓰나니 이는 그 입이 자기를 독촉함이니라. 불량한 자는 악을 꾀하나니 그 입술에는 맹렬한 불 같은 것이 있느니라. 패려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말장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느니라. 강포한 사람은 그 이웃을 꾀어 불선한 길로 인도하느니라. 눈을 감는 자는 패역한 일을 도모하며 입술을 닫는 자는 악한 일을 이루느니라.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서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현대인의 결정적인 약점은 자기 자신을 잘 모른다고 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척이나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이렇게 많은 것을 아는 동안에 자기 자신을 아는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를 배우면서, 또 하나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연을 다스리기도 하고 자동차를 운전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마음은 자기가 운전하지 못하는 그러한 방임된 인격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특별히 인간에게만은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 의미는 거룩한 속성을 지녔다는 뜻이요, 지혜와 능력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또는 사랑하는 자로, 사랑을 아는 자로서의 사랑의 속성을 지니고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것은 다스림의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모든 생명은 본능을 지녔고 그 본능에 의해서 살아가며, 본능에 의해서 질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먹고 싶은 본능이 있기에 굶어 죽지 않습니다. 서식 본능이 있고, 귀소 본능이 있기에 나름대로 자기들 생활을 유지하며 살아갑니다. 그러고 보면, 모든 행복은 본능과 관계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능 자체를 속된 것으로 여기는 것은 헬라 철학이며 이원론적인 사상이며, 이방 사상입니다. 기독교는 본능을 소중히 여깁니다. 어떤 본능이든 근본은 하나님께로 온 것이며 본능을 통해서 행복하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본능은 아름다운 것이요,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본능을 인간 스스로 다스리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본능은 넓게 주시고 우리가 소유하는 것은 선택해서 좁은 길로 내 본능을 다스려 나가도록 했습니다. 예를 들면, 가질 수 있는 마음을 주셨지만 무엇이든 다 가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가능한 것을 많이, 넓게, 생활의 영역으로 우리에게 주었지만 그러나 먹을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은 구분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넓은 본능에 대한 좁은 제재요 제한입니다. 그러므로 이성으로 본능을 다스려야 하고 양심에 의해서 다스려야 하고, 지성과 의지에 의해 본능을 다스리도록 특권을 주셨습니다. 좀더 나아가면 믿음으로, 성령의 감화로 우리의 본능을 다스려야 합니다. 본능을 잘 다스리고 바로 다스리면 그 다스리는 것만큼의 그만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먹고 싶은 마음, 가지고 싶은 마음, 되고 싶은 마음, 보이고 싶은 마음, 사랑하고 싶은 마음, 이것들은 다 귀한 본능입니다. 생존 본능이든 생식 본능이든 본능은 원래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 중에서 다스린다는 본능을 심리학자들은 정치적 본능이라고 합니다. 이 본능은 특히 남자에게 강한 것 같습니다. 가정도 다스리고, 직장도 다스리고, 무엇인가를 지배하면서 느끼는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주가 우리 인간에게 주신 아름다운 최고의 선물입니다. "만물을 다스리라"고 태초에 인간에게 권한을 주신 것은 잘 간수하고, 잘 보존하고, 잘 주관하라는 뜻이지 파괴하고 마음대로 잡아 먹으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을 잘 다스릴 때만이 선물일 수 있고, 복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다스리라는 말씀 속에는 자유와 자율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상당한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 자유는 인간에게 주어진 큰 주권이며, 자유가 있는 만큼 책임성이 있는 것입니다. "네가 자유한 만큼 네가 책임을 져라." 즉, 이 만큼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의 한계입니다. 책임을 질 줄 모르는 정치는 허세입니다. 그것은 폭력입니다. 권리만 행사하고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것은 권리를 가질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남을 다스린다고 하는 것은, 그의 책임까지 다스리는 자가 맡아야 합니다. 책임지는 것만큼 자유의 영역도 넓어지는 것입니다.

윗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그만큼 책임을 크게 많이 져야 합니다.

자기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사람은 항상 남의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책임지는 만큼 자유의 영역은 넓어지며 그만큼 큰 정치적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제 나의 마음을 다스리는 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내 뜻으로 내가 다스렸다면 내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것이 다스림의 뜻입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잊어버린 나 자신에 대해 의식을 돌려 무의식화된 자기 자신의 의식에 대해서, 혹은 자기 다스림에 대해 생각을 돌려보아야 합니다. 다스린다고 하는 말은 바로 자유한다는 뜻입니다. 왕은 언제나 자유합니다. 다스리는 자는 자유합니다. 아무에게도 어떤 일에도 매이지 않는 사람은 바로 왕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를 다스리는 자입니다. 특별히 증오의 노예가 된 사람은 아주 불행합니다. 미워하는 감정 때문에 잠을 못 이루고, 자기 몸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고생하고 있습니다.

증오의 노예가 되었기에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심지어는 빼앗긴 것도 모르고 살아가는 형편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나친 욕심의 노예, 지나친 명예욕의 노예, 지나친 질투심의 노예가 된 사람은 정말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욕망과 희망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사랑과 욕정도 다릅니다.

사랑은 무한히 자유롭습니다만 욕정은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누구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계속 그로 말미암아 괴로움을 당한다면 그는 사랑을 모르는 자입니다. 그것은 욕정에 매인 것으로 결코 사랑이 아니란 말입니다. 사랑은 자유롭고 욕정은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내 마음이 얼마나 자유로우냐 하는 만큼 인간은 자기 특권을 향유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에 억지로 끌려가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저는 특히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을 아주 불쌍한 사람으로 봅니다. 자기 마음을 또는 자기 감정을 마음대로 다스리지 못해서 술의 힘을 빌려 좀 이겨보겠다고 하는데 정말 한심한 것입니다. 술이 깨어날 때 더 처참해지는 자기 모습 즉, 자기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한 자책이 더 비참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로마서 7장에 보면 자유 없는 자기 자신을 개탄하는 바울의 고백이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저내랴. 원하는 선은 행할 수 없고 원치 않는 죄만 짓는 자기 모습, 즉 무엇인가에 끌려가는 처참한 자기모습을 객관시하며 슬퍼하고 있는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어떤 상황 아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다스림이란 또한 굴복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린도전서 9: 27에 보면 사도 바울은 "나를 쳐서 복종케 하라." 즉 나 자신을 때려서 굴복시킨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길들인다는 뜻입니다. 자기를 놓치게 되면 실패합니다.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으면 무엇을 얻었다 하겠습니까? 자기 스스로를 아는 자는 자신에게 자유를 주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아는 자는 자기를 믿지 않습니다.

내가 나됨을 알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습니다. 자기는 죄인의 괴수로서 언덕 위에 있는 수레처럼 밑으로 밑으로 떨어지는 방종하고 타락한 존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자기에게 자유를 허락치 않았습니다. 자기를 굴레로 씌웠습니다. 야고보서에 있는 말씀처럼 자갈을 물렸습니다.

우리들의 결심은 조석으로 변합니다. 과연 나 스스로가 믿을 만한 존재입니까? 공부하는 아이들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 위해 자명종 시계를 맞춰 놓고도 또 어머니께 깨워달라고 부탁합니다.

자기 스스로를 믿는다는 것을 일단 포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못 믿으니 이제는 어머니의 의지를 믿어야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믿을 것이 못됩니다. 그러므로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육신이 하자는 대로 다 하면 되는 일이 없습니다. 자고 싶은 대로 자면 24시간 다 자도 모자랍니다. 이토록 나는 형편없고 구제 불능함을 두 손들고 선언해야 합니다. 빨리 선언하고 이제 예수님의 의지를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자기 의지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고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뜻합니다. 이제 내가 나를 다스리지 못하므로 그리스도가 나를 다스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의 말씀으로 나를 다스리게 하여 그저 묵묵히 순종할 뿐입니다.

여러분,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기 마음을 믿지 않습니다. 자기를 다스립니다.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께만 순종하고 나의 모든 것, 즉 나의 판단, 감정까지도 그 분께 위탁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은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는 유명한 말씀입니다. 순간적인 분노와 순간적인 감정의 노예가 되어 일생동안 후회하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 마음을 바로 다스린다는 것은 정말 어렵고 중요한 일입니다. 모세를 보십시다. 그는 시내산에서 40일 동안 주야로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올 때 얼굴에 광채가 빛나 백성들이 쳐다볼 수가 없어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울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며 내려온 모세지만 우상을 숭배하는 백성들을 볼 때 격렬한 분노가 터져나옵니다. 자제할 틈도 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 돌 비석을 그대로 내던집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아무리 화가나도 십계명은 잠깐 땅에 내려놓고 다른 돌을 던져야지 어쩌자고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의 돌비석을 그대로 던집니까? 바로 이 모습이 모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그렇게 입었는데도 옛날에 애굽 사람을 때려죽인 솜씨가 그대로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할 때 가데스에서 반석을 두 번씩 내리칩니다. 혈기를 그대로 뱉었습니다. 패역한 놈들이라고 욕설을 하며 불신앙적 발언을 했습니다. 한 사람이 바로 되는 것이 이렇게 어렵습니다. 마술적이나 기계론적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얼마나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신학대학 동창회가 열렸는데 많은 목사님이 모였습니다. 그 중 제일 고령자 목사님께서 후배들에게 인사를 하시는데 "여러분 화내지 마십시오. 화를 안 내면 나 만큼 살 수 있습니다"라는 한 말씀외에는 아무 말씀이 없었습니다. 이 분은 92세였습니다. 오랜 목회 경험과 인생 경험으로 하신 단 한 마디가 화내지 말라는 당부였습니다. 큰 감명으로 가슴으로 그 말씀을 받았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화내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는 목적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한 번 자신에게 물어 보십시다. 누구를 위하여 오늘 내가 이 말을 하며 행동하는가를 말입니다. 어떤 상황하에서라도 목적 의식을 상실해서는 안 됩니다.

둘째로 진실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거짓된 사람 비양하다가 내가 더 거짓말 많이 하고 사실에서 떠나버리고 과장과 궤변으로 치우칠 때가 있습니다. 끝까지 진실 합시다. 끝까지 웃음과 친절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개를 쓰다듬으면서 영어로 "I hate you"(내가 너를 미워한다) 하면 개는 좋다고 꼬리를 칩니다. 그러나 개를 향하여 "I love you"(나는 너를 사랑한다)하면서 소리를 지르면 꽉 물어 버린다고 합니다. 사랑한다고 했느냐, 미워한다고 했느냐 에는 아랑곳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웃으면서 말하면 무슨 말이든 통합니다. 그러나 혈기로 하는 말은 백해 무익입니다. 진리를 말해도 소용없고, 아무리 귀한 말을 해도 혈기가 있으면 전달이 되지 않습니다. 끝까지 사랑과 웃음과 친절을 잃지 말아야겠습니다. 셋째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 있다는 신 임재 의식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있고 하나님이 들으시고 하나님이 보십니다. 바로 그 신앙으로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모습을 바로 보십시다. 하나님 앞에 있는 내 모습을 보십시다. 그리고 이야기합시다. 사도행전 4:19에 베드로와 요한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으냐. 너희가 판단하라"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있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창세기 4:7에 보면, 분노한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어느 한 순간에야 죄스러운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머리 위로 지나가는 새는 막을 수가 없으되 내 머리 위에 둥지를 트는 새는 막아야 한다"는 마틴 루터의 말이 있습니다. 슬쩍 지나가는 죄의 생각이야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마음에 쌓이면 안 됩니다. 잉태하면 안 됩니다.

후회라고 하는 것은 전부가 자신을 다스리지 못한 것의 고통입니다. 자기 상실에서 오는 것입니다. 돈을 벌지 못해서 후회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나를 바로 다스리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입니다. 믿음과 겸손과 사랑으로 다스립시다. 잘 안 된다고 실망해서는 안 됩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값을 치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에게 맡기면 그가 나를 다스릴 것입니다. 그가 내 마음을 지배하고 그가 내 뜻을 주관하실 것입니다. 말씀과 성령이 내 인격과 내 마음을 다스려 주실 것입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기도 은혜로우신 아버지시여, 모든 것을 얻은 것 같으나 자기를 잃어버리고 모든 것을 다스리는 것 같이 느끼나 자기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어리석고 우둔한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기도하옵나이다. 아버지 하나님, 이제는 더 나를 믿지 않게 하시고 오직 예수를 믿으며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고 묵묵히 순종하는 중에 말씀과 성령에 의하여 자기를 다스릴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하옵나이다. 이제 남은 생을 오직 주님 안에 있는 나로서 온전하며 그 영광과 그 능력에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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