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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루었다(요한복음 19장 28~30절)

by 【고동엽】 2024.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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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루었다(요한복음 19장 28~30절)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죽음이란 자기라는 개인의식에서 벗어나는 순간이다. 새는 죽는 순간에 슬픈 소리를 내지만 사람은 가장 착한 말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최후의 순간만은 선하게 되며, 제아무리 거짓된 자라해도 죽는 시간에만은 진실하다는 말입니다.

유언이란 순간적으로 생각하며 말 할 수는 없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죽음의 순간에는 자기의식이나 자체의식에서 벗어나 무의식의 의식으로 말하게 됨으로 가장 진실한 말을 하게 된다고 봅니다. 그 사람의 평소 생활은 어떠했던 지간에 그가 일생을 통하여 마음 깊이 간직하였던 생각이 진실된 말로 표현되는 것이라 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조작이 있을 수 없고 적어도 이 순간에만은 위선과 거짓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밖으로 나타난 행동이나 혹 주고받은 말은 거칠고 악했을지라도 그의 마음 깊숙이 담겨졌던 말이 잠재의식의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게 되는 것이 최후의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말은 우연한 말이나 순간적인 독백이 있을 수 없으며 인생을 통하여 쌓이고 간직된 말의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유언은 그 사람의 생의 목표되고 그 사람의 가장 귀한 진실이기도 한 것입니다.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는 세상을 떠나게 되는 순간에 말하기를 "아! 사랑하는 이들이여! 아무쪼록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고 하는 이 한마디 말은 명심해 주기를 바라오"라고 하였다 합니다. 이 말은 곧 그의 인생관을 단적으로 잘 표현해 주는 것으로 봅니다. 인생은 반드시 죽는다는 비관적인 철학을 가졌기에 그는 궁전을 버렸고, 가정을 떠나서 고행하며 해탈해 보려고 평생을 수도에 바친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말씀이 나타나 있습니다. "다 이루었다". 이 얼마나 장쾌한 말씀입니까? 이는 승전가요 성공을 노래한 환호이기도 합니다. 무슨 슬픔이나 미련이나 유감이 없는 말씀이며 만족감과 승리감에 찬 노래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그 한마디가 예수님의 일생을 집약한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잘 보여주는 귀한 말씀들이라 생각됩니다. 그의 평생 마음에 있었고 일생동안 위하여 힘쓰신 바가 그 일곱 마디 말씀 중에 잘 나타났다고 생각합니다.

"다 이루었다"라는 이 말씀의 뜻은 약속의 성취와 수고하시던 일의 완성과 지불완료, 그리고 성공과 승리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 누가 이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까?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 보면 여기에도 대체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뜻하는 말씀입니까? 생각해 보십시다. 33세의 청년으로 죽으면서 어찌 이 같은 말씀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사랑하는 제자에게 배반당하여 그에게 팔렸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대표자인 대제사장의 음모로 체포되어 로마 총독 빌라도의 법정에서 한 마디의 변명도 없이 변호인도 갖지 못한 채 죄목의 증거도 없는 불법재판을 받으시고 "유대인의 왕이라"는 누명을 쓰고서 억울하게 그리고 가장 비참한 처형법인 십자가에 달리시어 죄수 아닌 죄수로서 죽어 가시면서 어찌하여 이같이 "다 이루었다"고 승전가를 부를 수 있단 말입니까?

할 일이 많습니다. 복음을 전해야 할 곳도 많고 고쳐야 할 병자도 많았습니다. 굶주렸기에 먹여야 할 자도 많았으며 도와야 할 불쌍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는데 어찌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까? 뿐만 아니라 친히 세우신 제자들이 이렇다하게 정신차린 제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후계자 하나 바로 세우지 못하고 죽어지는 외로운 선생께서 어찌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까? 일생을 두고 의와 진리를 외치며 가르쳤으나 죄악은 충일하며 불의는 극도에 달하여 죄 없는 것을 알면서도 의인을 죄인으로 재판하였습니다. 인륜은 땅에 떨어져서 수 없이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건만 단 한사람도 그리스도가 곤욕을 당하실 때 달려와서 변호한 일도 없고 동정도 없는 포악한 세대를 그저 두고 가시면서 어찌 다 이루었다는 말씀입니까?

세상에서는 결혼하여 자식을 여럿 낳고 돈도 많이 모으며 많은 업적을 남기게 됨과 그가 죽을 때 그를 애도하는 자가 많아야 성공이라고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는 그러한 일이라고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그의 죽음이, 그 모진 십자가의 고초로 인하여 죽는 죽음이 다 이룬 바가 된다는 말입니까? 그 뜻을 살펴 보아야 하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는 깊은 면과 신령한 면을 생각하시면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언제나 극단적이요 이율 배반적인 두 가지 관점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는 사건 자체요, 다음은 그 사건 안에 있는 뜻입니다.

먼저는 형식적으로 나타난 사건 자체를 사실 그대로 폭로하고 비판하며 심판합니다. 죄와 불의와 모순 그리고 그 죽게된 절망적인 상태를 그대로 폭로합니다. 죄와 불의를 예리하고도 무섭게 심판하십니다. 여기에는 추호의 용서도 없습니다. 도저히 소망이란 찾아볼 수도 없고 생명은 기대할 수도 없는 절망적인 현실을 여지없이 비판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 속에 깊이 흐르는 생명에로의 가능성과 모든 것을 초월하여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믿음이 없기 때문에 죄와 멸망만 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 죄와 불의를 초월하여 역사 하시는 초월하신 하나님의 뜻을 구원을 보셨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결과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다고 하여 죄된 현실과 불의한 개인의 죄가 합리화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이들은 언제나 극에 서 있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말해 줍니다. 멸망과 구원을 동시에 말하며 심판과 구원은 동시에 있어질 것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사건 자체만을 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 깊은 곳을 보고 계시며 우리는 안목이 좁아서 현재만 보고 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멀리 먼 훗날에 되어 질 일들을 보셨습니다. 기독교회 역사관은 언제나 두 극을 말합니다. 피할 수 없는 종말적인 멸망과 동시에 이를 초월한 하나님의 온전한 구속적인 영원한 생명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신성 로마 제국이 하나님 없는 민족의 침입으로 인하여 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그는 세상 나라는 망해 없어지나 그 멸망을 통하여 새롭게 세워지는 신의 도성(City of God)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현실적인 불의와 죄와 모순과 배신을 보시면서 동시에 그 깊이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구속 사업의 완성을 내다보았습니다. 오늘 뿌린 씨가 싹이 날 것을 보았으며, 오늘 썩어지는 밀알로 인하여 장차 열매가 맺어질 것을 보았고 그 생명적인 역사를 보고 계셨다는 말씀입니다. 배신한 제자의 회개와 그리스도를 위한 충성과 나아가서는 열 한 제자가 다 순교의 제물로 죽게 될 것을 내다보고 계셨습니다.

이 귀한 역사관을 배운 바 있는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1장 52절에서 놀라운 말을 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어떻게 해서라도 예수를 죽이고자 스스로 괴변을 늘어 놓았습니다. "한 사람이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된다면 그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냐"고. 이 말은 어디까지나 예수의 무죄함을 인정하면서도 그를 죽이기 위하여서 한 말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이 말을 해석하여 말하기를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임으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해 죽으심 것을 미리 말함" 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놀라운 신앙적 해석에 주의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떤 죄악과 모순과 부조리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며 하나님의 구속사업은 결코 실패되지 아니하고 오히려 완성되며 성취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 -- 이루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둘째로는 목적에 의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완성이며 성공이라 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그가 세운 본래의 목적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그가 어떤 목적을 세우고 그 일에 임하였는가가 문제입니다. 예컨대 명예를 목적으로 한 것이라면 돈의 손해는 보았어도 명예만 얻었다면 성공일 것이요, 돈에 목적이 있었다면 어떤 치욕이 따른다해도 돈만 손에 쥐었으면 그는 성공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공 실패의 결정은 다른 사람이 평할 수가 없습니다. 그가 세운 본래의 목적은 본인만이 아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처참한 실패를 당했다 하겠으나 본인은 본인 나름대로의 세운 목적이 다른 곳에 있었다면 이 일은 결코 실패가 아니요, 오히려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큰 성공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미루어 볼 때 당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을 목적하고 계셨으며 그리스도의 심중에 무엇이 있었는가 하는 문제가 매우 중요합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의 마음에는 먼저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예언된 말씀이 있었으며 이를 성취하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복음서 제자들이 계속 증거하고 있는 것은 예언된 바 하나님의 말씀을 응하게 하기 위하여 "이런 말씀도 저런 말씀도 하셨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수난 사건은 사건 하나하나가 곧 예언된 바의 성취라는 사실을 역력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과 그 구속적인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완성되며 다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또한 백성을 사랑하시는 마음에서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 상에서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원수까지 사랑하셨고 "끝까지"(요 13 : 1) 사랑하셨습니다. 이 사랑의 다함을 뜻하며 나아가서는 자신의 충성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봅니다. 율법을 완전히 지켰으며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그에게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일 그리고 충성에 있어서의 "다함을"말합니다. 의의 완성이며 진리의 완성이요, 충성의 완성입니다.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심에 완성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함"에서의 완성을 뜻합니다. 목적이 여기에 있었다고 볼 때에 그리스도는 십자가 상에서 그 목적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여러 가지 말로 설명들을 합니다. 현대 신학자들 중에서는 젊은 혁명가의 죽음이라고도 하며 혁명의 실패가 그를 죽음에로 이끌었다고도 합니다. 유명한 슈바이쳐박사 같은 분은 그리스도께서는 종말사상의 주인공으로서 그가 기다리던 메시아가 오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확실히 믿고 기다리던 메시아를 죽음으로써 맞으려 했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확실하게 보여주는 바는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① 의인의 죽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백부장은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라"고 증거 하였습니다. 성경은 계속 이 죄악된 세상 안에서의 의인의 희생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참 의인으로서 죽으셨다고 증거 합니다. 이로써 세상은 그의 죄악 됨을 들어내었고 자신의 죄에 대하여 심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의인의 희생이란 말입니다.

② 고난의 종에 대한 예언의 성취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예언된 고난의 종, 수난의 메시아가 이처럼 죽으신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고난에 동참하는 메시아의 사랑이며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계시의 확증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구체적인 사랑이 계시의 완성됨을 뜻합니다.

③ 대신 죽으신 대속물이며 속죄제의 제사적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외쳤습니다. 어린양은 곧 제물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갈보리산의 십자가는 만인을 위한 속죄제를 드리는 지성소가 된다는 것입니다. 온 인류의 죄를 향하신 하나님의 진노가 한사람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는 그 시간에 그 위에 떨어졌으며 이로써 하나님의 율법적인 요구가 충족되었고 속전과 속량이 지불 완료되어 하나님과의 화해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성전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의의 완성과 하나님의 의의 계시(롬 1 : 17)가 완성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리스도의 본래적인 목적으로 미루어 보아서 그것이 완성된 것이며 참으로 다 이루신 것입니다.

다음은 그 과정과 그 방법에 있어서의 완성을 뜻합니다.

현대인의 가치관 중에 크게 잘못된 것은 결과에 치중하는 경향이라고 생각합니다. 방법이야 어쨌든 결과만 좋으면 그만 이라는 그릇된 생각이 이 사회를 이처럼 혼란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생활 철학입니다. 공산주의 사상의 방법론 중에 "결과는 방법을 정당화 한다"(the End justify means)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철학이 무자비한 혁명을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어떤 악한 방법을 써서라도 노동자 농민의 복지 국가만 이루면 그만 이라는 무서운 사상인 것입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도 같은 사상입니다.

기독교인은 서울까지 못 가는 한이 있어도 서울을 향하여 바로 가야하는 것입니다. 결과는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이고 우리는 최선을 다할 것뿐입니다. 끝까지 충성하며 끝까지 진실하고 끝까지 믿음으로 행하고 끝까지 사랑으로 하면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번영을 이루지 못하며 거짓된 수단으로 건설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불의한 방법으로 의를 이루지 못하며 악한 방법으로 선을 이루지 못합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방법과 과정에 있어서 의와 선과 진리와 충성과 최선을 다 하는 일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량을 잘 아실 것입니다. 전지 전능이라고까지 불리던 천재적인 모사 제갈량이 어느 날 꼭 성공되리라고 확신했던 화공(火功)이 느닷없는 소낙비로 인하여 실패로 돌아가자 "謀事在人, 成事在天 盡人事 待天命"(일의 도모는 사람이 하고 성패의 판가름은 하늘이 하니 사람은 그 할 바를 다하고 하늘의 명을 기다릴지니라)라고 말하였다 합니다. 이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제갈량이 결과만을 생각하였다면 어찌 큰 일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결과를 하늘에 맡기고 내 할 일의 최선을 다하는 그 믿음이 지혜와 용기의 원동력이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상 예수님께서는 결과는 온전히 하나님의 손에 부탁하셨고 또한 그의 운명도 하나님의 뜻에 맡긴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로서의 할 일을 다한 것입니다. 나에게 오늘 맡기신 일을 나로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결과를 성령께 맡기신 것이 또한 사실입니다. 성령께서 보시면 그간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고 행하신 바를 사람들로 알게 하고 기억나게 하며 감당하게 하고 열매맺게 할 것이니 이러므로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뿌린 씨를 성령의 역사로 거두게 될 것을 분명히 믿고 있었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새 사람되어 수고하고 증거하며 교회를 세우고 모든 은혜의 방편들이 동원되어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완성하게 될 것을 이미 내다보시고 계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진실로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 역시 그 거룩한 승리에 동참하며 "다 이루심"의 뒤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오늘 나를 통하여 이루며 목적을 바로 세우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 두고 나로서의 충성을 "다 이룸"에 있어서 늘 승리하여야 하겠습니다.

밤마다 잠자리에 들면서 다 이루었다 할 수 있어야 하고 숨질 때 또한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결코 개혁자 칼빈은 그의 임종 때에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알고 기억하는 대로는 성경을 알고 해석하며 가르침에 있어서 성경을 한번도 왜곡되게 한 일이 없었노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이 가는 대로 가고 성경이 멎는데서 멎었노라"고 하였습니다. 이 어찌 다 이룸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돌에 맞아 순교하면서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 또한 사랑의 승리가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의 유서라고 하는 디모데후서에서 달려갈 길을 다 갔다고 하였습니다. 이 또한 다 이룸의 승리를 뜻함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생의 끝 날에도 이와 같은 "다 이룸"의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어야겠으며 뿐만 아니라 현실 속에서의 매일 매일의 생활이 곧 다 이루었다고 간증되어질 수 있는 승리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 이루었다(요한복음 19장 28~30절)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죽음이란 자기라는 개인의식에서 벗어나는 순간이다. 새는 죽는 순간에 슬픈 소리를 내지만 사람은 가장 착한 말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최후의 순간만은 선하게 되며, 제아무리 거짓된 자라해도 죽는 시간에만은 진실하다는 말입니다.

유언이란 순간적으로 생각하며 말 할 수는 없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죽음의 순간에는 자기의식이나 자체의식에서 벗어나 무의식의 의식으로 말하게 됨으로 가장 진실한 말을 하게 된다고 봅니다. 그 사람의 평소 생활은 어떠했던 지간에 그가 일생을 통하여 마음 깊이 간직하였던 생각이 진실된 말로 표현되는 것이라 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조작이 있을 수 없고 적어도 이 순간에만은 위선과 거짓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밖으로 나타난 행동이나 혹 주고받은 말은 거칠고 악했을지라도 그의 마음 깊숙이 담겨졌던 말이 잠재의식의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게 되는 것이 최후의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말은 우연한 말이나 순간적인 독백이 있을 수 없으며 인생을 통하여 쌓이고 간직된 말의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유언은 그 사람의 생의 목표되고 그 사람의 가장 귀한 진실이기도 한 것입니다.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는 세상을 떠나게 되는 순간에 말하기를 "아! 사랑하는 이들이여! 아무쪼록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고 하는 이 한마디 말은 명심해 주기를 바라오"라고 하였다 합니다. 이 말은 곧 그의 인생관을 단적으로 잘 표현해 주는 것으로 봅니다. 인생은 반드시 죽는다는 비관적인 철학을 가졌기에 그는 궁전을 버렸고, 가정을 떠나서 고행하며 해탈해 보려고 평생을 수도에 바친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말씀이 나타나 있습니다. "다 이루었다". 이 얼마나 장쾌한 말씀입니까? 이는 승전가요 성공을 노래한 환호이기도 합니다. 무슨 슬픔이나 미련이나 유감이 없는 말씀이며 만족감과 승리감에 찬 노래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그 한마디가 예수님의 일생을 집약한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잘 보여주는 귀한 말씀들이라 생각됩니다. 그의 평생 마음에 있었고 일생동안 위하여 힘쓰신 바가 그 일곱 마디 말씀 중에 잘 나타났다고 생각합니다.

"다 이루었다"라는 이 말씀의 뜻은 약속의 성취와 수고하시던 일의 완성과 지불완료, 그리고 성공과 승리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 누가 이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까?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 보면 여기에도 대체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뜻하는 말씀입니까? 생각해 보십시다. 33세의 청년으로 죽으면서 어찌 이 같은 말씀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사랑하는 제자에게 배반당하여 그에게 팔렸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대표자인 대제사장의 음모로 체포되어 로마 총독 빌라도의 법정에서 한 마디의 변명도 없이 변호인도 갖지 못한 채 죄목의 증거도 없는 불법재판을 받으시고 "유대인의 왕이라"는 누명을 쓰고서 억울하게 그리고 가장 비참한 처형법인 십자가에 달리시어 죄수 아닌 죄수로서 죽어 가시면서 어찌하여 이같이 "다 이루었다"고 승전가를 부를 수 있단 말입니까?

할 일이 많습니다. 복음을 전해야 할 곳도 많고 고쳐야 할 병자도 많았습니다. 굶주렸기에 먹여야 할 자도 많았으며 도와야 할 불쌍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는데 어찌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까? 뿐만 아니라 친히 세우신 제자들이 이렇다하게 정신차린 제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후계자 하나 바로 세우지 못하고 죽어지는 외로운 선생께서 어찌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까? 일생을 두고 의와 진리를 외치며 가르쳤으나 죄악은 충일하며 불의는 극도에 달하여 죄 없는 것을 알면서도 의인을 죄인으로 재판하였습니다. 인륜은 땅에 떨어져서 수 없이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건만 단 한사람도 그리스도가 곤욕을 당하실 때 달려와서 변호한 일도 없고 동정도 없는 포악한 세대를 그저 두고 가시면서 어찌 다 이루었다는 말씀입니까?

세상에서는 결혼하여 자식을 여럿 낳고 돈도 많이 모으며 많은 업적을 남기게 됨과 그가 죽을 때 그를 애도하는 자가 많아야 성공이라고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는 그러한 일이라고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그의 죽음이, 그 모진 십자가의 고초로 인하여 죽는 죽음이 다 이룬 바가 된다는 말입니까? 그 뜻을 살펴 보아야 하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는 깊은 면과 신령한 면을 생각하시면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언제나 극단적이요 이율 배반적인 두 가지 관점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는 사건 자체요, 다음은 그 사건 안에 있는 뜻입니다.

먼저는 형식적으로 나타난 사건 자체를 사실 그대로 폭로하고 비판하며 심판합니다. 죄와 불의와 모순 그리고 그 죽게된 절망적인 상태를 그대로 폭로합니다. 죄와 불의를 예리하고도 무섭게 심판하십니다. 여기에는 추호의 용서도 없습니다. 도저히 소망이란 찾아볼 수도 없고 생명은 기대할 수도 없는 절망적인 현실을 여지없이 비판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 속에 깊이 흐르는 생명에로의 가능성과 모든 것을 초월하여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믿음이 없기 때문에 죄와 멸망만 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 죄와 불의를 초월하여 역사 하시는 초월하신 하나님의 뜻을 구원을 보셨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결과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다고 하여 죄된 현실과 불의한 개인의 죄가 합리화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이들은 언제나 극에 서 있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말해 줍니다. 멸망과 구원을 동시에 말하며 심판과 구원은 동시에 있어질 것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사건 자체만을 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 깊은 곳을 보고 계시며 우리는 안목이 좁아서 현재만 보고 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멀리 먼 훗날에 되어 질 일들을 보셨습니다. 기독교회 역사관은 언제나 두 극을 말합니다. 피할 수 없는 종말적인 멸망과 동시에 이를 초월한 하나님의 온전한 구속적인 영원한 생명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신성 로마 제국이 하나님 없는 민족의 침입으로 인하여 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그는 세상 나라는 망해 없어지나 그 멸망을 통하여 새롭게 세워지는 신의 도성(City of God)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현실적인 불의와 죄와 모순과 배신을 보시면서 동시에 그 깊이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구속 사업의 완성을 내다보았습니다. 오늘 뿌린 씨가 싹이 날 것을 보았으며, 오늘 썩어지는 밀알로 인하여 장차 열매가 맺어질 것을 보았고 그 생명적인 역사를 보고 계셨다는 말씀입니다. 배신한 제자의 회개와 그리스도를 위한 충성과 나아가서는 열 한 제자가 다 순교의 제물로 죽게 될 것을 내다보고 계셨습니다.

이 귀한 역사관을 배운 바 있는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1장 52절에서 놀라운 말을 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어떻게 해서라도 예수를 죽이고자 스스로 괴변을 늘어 놓았습니다. "한 사람이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된다면 그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냐"고. 이 말은 어디까지나 예수의 무죄함을 인정하면서도 그를 죽이기 위하여서 한 말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이 말을 해석하여 말하기를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임으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해 죽으심 것을 미리 말함" 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놀라운 신앙적 해석에 주의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떤 죄악과 모순과 부조리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며 하나님의 구속사업은 결코 실패되지 아니하고 오히려 완성되며 성취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 -- 이루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둘째로는 목적에 의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완성이며 성공이라 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그가 세운 본래의 목적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그가 어떤 목적을 세우고 그 일에 임하였는가가 문제입니다. 예컨대 명예를 목적으로 한 것이라면 돈의 손해는 보았어도 명예만 얻었다면 성공일 것이요, 돈에 목적이 있었다면 어떤 치욕이 따른다해도 돈만 손에 쥐었으면 그는 성공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공 실패의 결정은 다른 사람이 평할 수가 없습니다. 그가 세운 본래의 목적은 본인만이 아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처참한 실패를 당했다 하겠으나 본인은 본인 나름대로의 세운 목적이 다른 곳에 있었다면 이 일은 결코 실패가 아니요, 오히려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큰 성공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미루어 볼 때 당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을 목적하고 계셨으며 그리스도의 심중에 무엇이 있었는가 하는 문제가 매우 중요합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의 마음에는 먼저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예언된 말씀이 있었으며 이를 성취하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복음서 제자들이 계속 증거하고 있는 것은 예언된 바 하나님의 말씀을 응하게 하기 위하여 "이런 말씀도 저런 말씀도 하셨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수난 사건은 사건 하나하나가 곧 예언된 바의 성취라는 사실을 역력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과 그 구속적인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완성되며 다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또한 백성을 사랑하시는 마음에서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 상에서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원수까지 사랑하셨고 "끝까지"(요 13 : 1) 사랑하셨습니다. 이 사랑의 다함을 뜻하며 나아가서는 자신의 충성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봅니다. 율법을 완전히 지켰으며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그에게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일 그리고 충성에 있어서의 "다함을"말합니다. 의의 완성이며 진리의 완성이요, 충성의 완성입니다.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심에 완성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함"에서의 완성을 뜻합니다. 목적이 여기에 있었다고 볼 때에 그리스도는 십자가 상에서 그 목적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여러 가지 말로 설명들을 합니다. 현대 신학자들 중에서는 젊은 혁명가의 죽음이라고도 하며 혁명의 실패가 그를 죽음에로 이끌었다고도 합니다. 유명한 슈바이쳐박사 같은 분은 그리스도께서는 종말사상의 주인공으로서 그가 기다리던 메시아가 오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확실히 믿고 기다리던 메시아를 죽음으로써 맞으려 했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확실하게 보여주는 바는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① 의인의 죽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백부장은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라"고 증거 하였습니다. 성경은 계속 이 죄악된 세상 안에서의 의인의 희생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참 의인으로서 죽으셨다고 증거 합니다. 이로써 세상은 그의 죄악 됨을 들어내었고 자신의 죄에 대하여 심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의인의 희생이란 말입니다.

② 고난의 종에 대한 예언의 성취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예언된 고난의 종, 수난의 메시아가 이처럼 죽으신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고난에 동참하는 메시아의 사랑이며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계시의 확증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구체적인 사랑이 계시의 완성됨을 뜻합니다.

③ 대신 죽으신 대속물이며 속죄제의 제사적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외쳤습니다. 어린양은 곧 제물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갈보리산의 십자가는 만인을 위한 속죄제를 드리는 지성소가 된다는 것입니다. 온 인류의 죄를 향하신 하나님의 진노가 한사람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는 그 시간에 그 위에 떨어졌으며 이로써 하나님의 율법적인 요구가 충족되었고 속전과 속량이 지불 완료되어 하나님과의 화해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성전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의의 완성과 하나님의 의의 계시(롬 1 : 17)가 완성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리스도의 본래적인 목적으로 미루어 보아서 그것이 완성된 것이며 참으로 다 이루신 것입니다.

다음은 그 과정과 그 방법에 있어서의 완성을 뜻합니다.

현대인의 가치관 중에 크게 잘못된 것은 결과에 치중하는 경향이라고 생각합니다. 방법이야 어쨌든 결과만 좋으면 그만 이라는 그릇된 생각이 이 사회를 이처럼 혼란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생활 철학입니다. 공산주의 사상의 방법론 중에 "결과는 방법을 정당화 한다"(the End justify means)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철학이 무자비한 혁명을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어떤 악한 방법을 써서라도 노동자 농민의 복지 국가만 이루면 그만 이라는 무서운 사상인 것입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도 같은 사상입니다.

기독교인은 서울까지 못 가는 한이 있어도 서울을 향하여 바로 가야하는 것입니다. 결과는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이고 우리는 최선을 다할 것뿐입니다. 끝까지 충성하며 끝까지 진실하고 끝까지 믿음으로 행하고 끝까지 사랑으로 하면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번영을 이루지 못하며 거짓된 수단으로 건설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불의한 방법으로 의를 이루지 못하며 악한 방법으로 선을 이루지 못합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방법과 과정에 있어서 의와 선과 진리와 충성과 최선을 다 하는 일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량을 잘 아실 것입니다. 전지 전능이라고까지 불리던 천재적인 모사 제갈량이 어느 날 꼭 성공되리라고 확신했던 화공(火功)이 느닷없는 소낙비로 인하여 실패로 돌아가자 "謀事在人, 成事在天 盡人事 待天命"(일의 도모는 사람이 하고 성패의 판가름은 하늘이 하니 사람은 그 할 바를 다하고 하늘의 명을 기다릴지니라)라고 말하였다 합니다. 이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제갈량이 결과만을 생각하였다면 어찌 큰 일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결과를 하늘에 맡기고 내 할 일의 최선을 다하는 그 믿음이 지혜와 용기의 원동력이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상 예수님께서는 결과는 온전히 하나님의 손에 부탁하셨고 또한 그의 운명도 하나님의 뜻에 맡긴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로서의 할 일을 다한 것입니다. 나에게 오늘 맡기신 일을 나로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결과를 성령께 맡기신 것이 또한 사실입니다. 성령께서 보시면 그간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고 행하신 바를 사람들로 알게 하고 기억나게 하며 감당하게 하고 열매맺게 할 것이니 이러므로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뿌린 씨를 성령의 역사로 거두게 될 것을 분명히 믿고 있었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새 사람되어 수고하고 증거하며 교회를 세우고 모든 은혜의 방편들이 동원되어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완성하게 될 것을 이미 내다보시고 계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진실로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 역시 그 거룩한 승리에 동참하며 "다 이루심"의 뒤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오늘 나를 통하여 이루며 목적을 바로 세우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 두고 나로서의 충성을 "다 이룸"에 있어서 늘 승리하여야 하겠습니다.

밤마다 잠자리에 들면서 다 이루었다 할 수 있어야 하고 숨질 때 또한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결코 개혁자 칼빈은 그의 임종 때에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알고 기억하는 대로는 성경을 알고 해석하며 가르침에 있어서 성경을 한번도 왜곡되게 한 일이 없었노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이 가는 대로 가고 성경이 멎는데서 멎었노라"고 하였습니다. 이 어찌 다 이룸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돌에 맞아 순교하면서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 또한 사랑의 승리가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의 유서라고 하는 디모데후서에서 달려갈 길을 다 갔다고 하였습니다. 이 또한 다 이룸의 승리를 뜻함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생의 끝 날에도 이와 같은 "다 이룸"의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어야겠으며 뿐만 아니라 현실 속에서의 매일 매일의 생활이 곧 다 이루었다고 간증되어질 수 있는 승리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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