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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든 자에게 의원을(누가복음 5장 27~39절)

by 【고동엽】 2024.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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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든 자에게 의원을(누가복음 5장 27~39절)

 

그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는지라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저희가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뇨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저희가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현대인의 60%가 정신병자라는 통계를 보고 있습니다. 어디에 기준을 두고 하는 말인지 모르나 우리가 한가지 아는 것은 오늘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정상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 몸, 그 육체도 공해로 인하여 정상이 아닙니다. 30%이상이 소화불량이고 소화기 병중에 90%가 신경성이라고 합니다.

기형아는 나날이 늘고 불구자도 점점 증가하고 있습니다. 공해로 인한 신체적인 질병만이 아니라, 불안과 초조 때문에 오는 정신적 장애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것이 사실이며 지금도 우리 모두가 피부에 직접 느끼고 있는 형편입니다.

병자! 병자란 무엇이며 건강한 자란 어떤 사람입니까? 온전한 사람이 없으니 병자를 규정할 수도 없는 형편이 아닙니까? 의인이 없이 죄인을 모르고, 건강한 자를 모르고 병자를 규정하지는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누가복음 4장 23절에 "의원아 너를 고치라"는 말씀이 인용되었습니다만 사실상 의원 자신도 하나의 병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병리와 생리를 가려서 평가한다면 모든 사람이 병리적으로 살고 있으며 정상적인 형상이나 정상적인 행위란 전혀 없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말도, 생각도, 행위도 그 어느 면으로 보아도 정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분노도, 슬픔도, 그리고 웃음도, 모두가 독선적이며 정치적이요, 외교적이고 또 수단적이며 형식적입니다. 어린이 같은 깨끗한 마음에서의 웃음을 보기 힘듭니다. 억지로 웃기고, 억지로 웃어 주고 있는 형편입니다.

법관은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보며, 종은 모든 사람을 상전으로 보고, 의사는 모든 사람을 환자로 보는 것이 사실입니다. 의사 앞에는 모두가 환자며, 또 공평한 것입니다. 의사 앞에 명예나 권세가 결코 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그 앞에서는 진실해야 합니다. 의사 앞에서는 비밀이 없으며, 또 없어야 합니다. 사실대로만이 나타나야 합니다. 법관 앞에는 자기를 숨기려 하는 자가 있어도 의사 앞에는 자기 병을 숨기려 하는 자는 없습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내어놓아야 합니다. 의원 앞에는 만민이 평등하고 또 진실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역시 병중에서 정신병이 가장 불쌍한 병입니다. 마가복음 10장에서 귀신 들린 어린애를 데려온 아버지의 가련한 호소가 있는 것을 봅니다.

불 속에, 물 속에 뛰어 들고, 자기 몸을 자신이 상하게 합니다. 겉으로는 멀쩡한 데 속이 병든 것. 참으로 불쌍한 병이 아니겠습니까? 외형적인 병이 아니라 속병입니다. 예수님께서 고치신 병들도 대체로 이런 병이 더욱 많은 것을 봅니다. 귀신들린 자를 깨끗케 하신 것 등등 말입니다.

의사는 증상을 보고 그 깊은 병을 알아냅니다. 손발이 식고, 머리에 땀이 날 때 음식 먹은 것이 잘못되었다고 알아내듯 말입니다. 눈에 나타난 색을 보고 깊은 간장병을 말하듯, 겉으로 나타난 증상 또는 표(Symbol)를 보고 그 깊이든 병을 알아내는 것이 진찰이 아닙니까? 외형적으로 나타난 것을 그것 그대로만 보는 것이 아니고 깊이 든 것, 그 병의 원인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언제나 병은 깊은 곳에 있습니다. 그리고 치료도 겉에다 하는 것이 아니고 그 근본 원인에다 가하는 것입니다.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명의의 치료 방법일 것입니다. 암이 난치병인 것은 그 증상이 희미하게 시작되며 또 그 근본 원인을 확실히 모르기 때문에 지금도 못 고치는 것이 아닙니까? 원인은 깊이 숨어 있고 나타난 것은 적은 잘못처럼 보이며, 적은 불편으로 느끼고 있을 따름입니다. 이것이 바로 난치병이며 병이 병된 원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원으로서 인간을 보실 때, 모두를 구원받아야 할 죄인으로 보시며, 고쳐야할 환자로 보고 계십니다. 또한 당시 예수를 따르던 환자들을 보실 때에도 단순한 육체적인 병으로만 보신 것이 아니고 깊이 병든 죄의 병으로 보고 계셨던 것을 성경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본문 누가복음 15장에도, 침상에 들려온 환자를 향해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한 것은 분명히 그의 병의 원인은 죄에 있었던 것을 아셨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요, 그것이 원인이기에 근본적으로 치료하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실입니다. 모든 병의 원인은 깊은 데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를 지적하여 평하기는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병의 원인은 언제나 깊은 데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도덕적인 관점에서 불행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환자를 죄인 시 했고 특히 문둥병환자를 정죄하고 저주한 것입니다. 오늘도 전문가는 문둥병의 60%가 정신병에 속한 것이라고 합니다. 정신적 치료가 먼저 있어야 치료가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육체적 불행의 원인을 죄 문제로 돌려서 해결하고자 하는 유대적인 사상을 그리스도께서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죄에서의 해방은 곧 모든 불행에서의 해방이 될 수 있다는 견해였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병이 들고도 자신의 병들었음을 모르고 있다는 점이 더욱 큰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있었던 큰 견해의 차이가 바로 이점이었습니다. 정말로 난치병은 이것입니다. 자기가 병들고서도 그 병든 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나 병이 깊이 들어서 나타나지 아니하며 또 있는 증상을 숨기고 있는 그러한 특수한 병자 말입니다. 겉으로는 건강합니다.

그러나 속이 병들었습니다. 내적인 병입니다. 심지어는 본인 자신도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무서운 병입니다

예수께서 보신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때문에 "차라리 눈이 멀었다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기로 죄가 그저 있느니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안다고 하는 모르는 자, 본다고 하는 장님, 바로 이런 죄인 이러한 병자가 문제의 죄인이었습니다.

본문에는 이러한 문제가 심각하게 다루어져 있습니다. 마태라고 하는 세리가 예수의 부르심을 받고 예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세리는 큰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종주국인 로마를 위하여 세금을 거두는 사람들인데 그들의 권리를 남용해서 강제로 세금을 거두는 등 횡포가 심했고 이 때문에 모든 유대인들은 그들을 멸시했고 멸시받는 저들은 더욱 단결하여 돈을 벌었습니다. 이처럼 멸시와 천대를 받는 세리를 부르셨습니다. 저는 감사하여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시고 잔치를 베풀었고 친구들까지 청하여 음식을 나누며 천국 복음을 다같이 듣게 되었습니다.

이 때에 당시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교인과 서기관들은 신랄한 비판을 내렸습니다.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고, 그리스도께서 대답하시기를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가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세리는 병자입니다. 그런고로 의원인 그리스도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건강하다는 말입니까? 결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저들은 건강하다고 하는 병자요, 세리는 병자임을 스스로 아는 병자라는 뜻인 것입니다. 건강하다고 교만하며 자만하는, 저 또 하나의 병자에게는 구제의 길이 없습니다. 의사가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육체적 불행을 크게 보지 아니했고 외적으로 나타난 죄인을 큰 죄인으로 보시지 아니했습니다.

이 때문에 죄인과 친했고 세리의 친구가 되었으며 막달라 마리아 같은 더러운 여인을 높이고 바리새인을 저주하셨고, 세리와 창기가 먼저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강도를 불러 낙원 길에 동행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차라리 병자가 좋았고, 세리가 의로웠으며 실수 많은 어린이가 반가웠습니다.

병든 자! 최소한 내가 병든 것만은 인정합시다. 사회가 병들었고 세대가 절망이란 큰 병에 걸려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음을 솔직히 고백합시다. 그리고 의원께 나와서 고침을 받읍시다.

예수께서 나사로에게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 없고 곧 생명에 이르는 병이 됩니다.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입니다.  

병든 자에게 의원을(누가복음 5장 27~39절)

 

그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는지라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저희가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뇨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저희가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현대인의 60%가 정신병자라는 통계를 보고 있습니다. 어디에 기준을 두고 하는 말인지 모르나 우리가 한가지 아는 것은 오늘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정상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 몸, 그 육체도 공해로 인하여 정상이 아닙니다. 30%이상이 소화불량이고 소화기 병중에 90%가 신경성이라고 합니다.

기형아는 나날이 늘고 불구자도 점점 증가하고 있습니다. 공해로 인한 신체적인 질병만이 아니라, 불안과 초조 때문에 오는 정신적 장애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것이 사실이며 지금도 우리 모두가 피부에 직접 느끼고 있는 형편입니다.

병자! 병자란 무엇이며 건강한 자란 어떤 사람입니까? 온전한 사람이 없으니 병자를 규정할 수도 없는 형편이 아닙니까? 의인이 없이 죄인을 모르고, 건강한 자를 모르고 병자를 규정하지는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누가복음 4장 23절에 "의원아 너를 고치라"는 말씀이 인용되었습니다만 사실상 의원 자신도 하나의 병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병리와 생리를 가려서 평가한다면 모든 사람이 병리적으로 살고 있으며 정상적인 형상이나 정상적인 행위란 전혀 없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말도, 생각도, 행위도 그 어느 면으로 보아도 정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분노도, 슬픔도, 그리고 웃음도, 모두가 독선적이며 정치적이요, 외교적이고 또 수단적이며 형식적입니다. 어린이 같은 깨끗한 마음에서의 웃음을 보기 힘듭니다. 억지로 웃기고, 억지로 웃어 주고 있는 형편입니다.

법관은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보며, 종은 모든 사람을 상전으로 보고, 의사는 모든 사람을 환자로 보는 것이 사실입니다. 의사 앞에는 모두가 환자며, 또 공평한 것입니다. 의사 앞에 명예나 권세가 결코 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그 앞에서는 진실해야 합니다. 의사 앞에서는 비밀이 없으며, 또 없어야 합니다. 사실대로만이 나타나야 합니다. 법관 앞에는 자기를 숨기려 하는 자가 있어도 의사 앞에는 자기 병을 숨기려 하는 자는 없습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내어놓아야 합니다. 의원 앞에는 만민이 평등하고 또 진실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역시 병중에서 정신병이 가장 불쌍한 병입니다. 마가복음 10장에서 귀신 들린 어린애를 데려온 아버지의 가련한 호소가 있는 것을 봅니다.

불 속에, 물 속에 뛰어 들고, 자기 몸을 자신이 상하게 합니다. 겉으로는 멀쩡한 데 속이 병든 것. 참으로 불쌍한 병이 아니겠습니까? 외형적인 병이 아니라 속병입니다. 예수님께서 고치신 병들도 대체로 이런 병이 더욱 많은 것을 봅니다. 귀신들린 자를 깨끗케 하신 것 등등 말입니다.

의사는 증상을 보고 그 깊은 병을 알아냅니다. 손발이 식고, 머리에 땀이 날 때 음식 먹은 것이 잘못되었다고 알아내듯 말입니다. 눈에 나타난 색을 보고 깊은 간장병을 말하듯, 겉으로 나타난 증상 또는 표(Symbol)를 보고 그 깊이든 병을 알아내는 것이 진찰이 아닙니까? 외형적으로 나타난 것을 그것 그대로만 보는 것이 아니고 깊이 든 것, 그 병의 원인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언제나 병은 깊은 곳에 있습니다. 그리고 치료도 겉에다 하는 것이 아니고 그 근본 원인에다 가하는 것입니다.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명의의 치료 방법일 것입니다. 암이 난치병인 것은 그 증상이 희미하게 시작되며 또 그 근본 원인을 확실히 모르기 때문에 지금도 못 고치는 것이 아닙니까? 원인은 깊이 숨어 있고 나타난 것은 적은 잘못처럼 보이며, 적은 불편으로 느끼고 있을 따름입니다. 이것이 바로 난치병이며 병이 병된 원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원으로서 인간을 보실 때, 모두를 구원받아야 할 죄인으로 보시며, 고쳐야할 환자로 보고 계십니다. 또한 당시 예수를 따르던 환자들을 보실 때에도 단순한 육체적인 병으로만 보신 것이 아니고 깊이 병든 죄의 병으로 보고 계셨던 것을 성경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본문 누가복음 15장에도, 침상에 들려온 환자를 향해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한 것은 분명히 그의 병의 원인은 죄에 있었던 것을 아셨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요, 그것이 원인이기에 근본적으로 치료하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실입니다. 모든 병의 원인은 깊은 데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를 지적하여 평하기는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병의 원인은 언제나 깊은 데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도덕적인 관점에서 불행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환자를 죄인 시 했고 특히 문둥병환자를 정죄하고 저주한 것입니다. 오늘도 전문가는 문둥병의 60%가 정신병에 속한 것이라고 합니다. 정신적 치료가 먼저 있어야 치료가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육체적 불행의 원인을 죄 문제로 돌려서 해결하고자 하는 유대적인 사상을 그리스도께서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죄에서의 해방은 곧 모든 불행에서의 해방이 될 수 있다는 견해였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병이 들고도 자신의 병들었음을 모르고 있다는 점이 더욱 큰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있었던 큰 견해의 차이가 바로 이점이었습니다. 정말로 난치병은 이것입니다. 자기가 병들고서도 그 병든 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나 병이 깊이 들어서 나타나지 아니하며 또 있는 증상을 숨기고 있는 그러한 특수한 병자 말입니다. 겉으로는 건강합니다.

그러나 속이 병들었습니다. 내적인 병입니다. 심지어는 본인 자신도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무서운 병입니다

예수께서 보신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때문에 "차라리 눈이 멀었다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기로 죄가 그저 있느니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안다고 하는 모르는 자, 본다고 하는 장님, 바로 이런 죄인 이러한 병자가 문제의 죄인이었습니다.

본문에는 이러한 문제가 심각하게 다루어져 있습니다. 마태라고 하는 세리가 예수의 부르심을 받고 예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세리는 큰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종주국인 로마를 위하여 세금을 거두는 사람들인데 그들의 권리를 남용해서 강제로 세금을 거두는 등 횡포가 심했고 이 때문에 모든 유대인들은 그들을 멸시했고 멸시받는 저들은 더욱 단결하여 돈을 벌었습니다. 이처럼 멸시와 천대를 받는 세리를 부르셨습니다. 저는 감사하여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시고 잔치를 베풀었고 친구들까지 청하여 음식을 나누며 천국 복음을 다같이 듣게 되었습니다.

이 때에 당시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교인과 서기관들은 신랄한 비판을 내렸습니다.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고, 그리스도께서 대답하시기를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가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세리는 병자입니다. 그런고로 의원인 그리스도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건강하다는 말입니까? 결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저들은 건강하다고 하는 병자요, 세리는 병자임을 스스로 아는 병자라는 뜻인 것입니다. 건강하다고 교만하며 자만하는, 저 또 하나의 병자에게는 구제의 길이 없습니다. 의사가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육체적 불행을 크게 보지 아니했고 외적으로 나타난 죄인을 큰 죄인으로 보시지 아니했습니다.

이 때문에 죄인과 친했고 세리의 친구가 되었으며 막달라 마리아 같은 더러운 여인을 높이고 바리새인을 저주하셨고, 세리와 창기가 먼저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강도를 불러 낙원 길에 동행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차라리 병자가 좋았고, 세리가 의로웠으며 실수 많은 어린이가 반가웠습니다.

병든 자! 최소한 내가 병든 것만은 인정합시다. 사회가 병들었고 세대가 절망이란 큰 병에 걸려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음을 솔직히 고백합시다. 그리고 의원께 나와서 고침을 받읍시다.

예수께서 나사로에게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 없고 곧 생명에 이르는 병이 됩니다.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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