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새로운 피조물(고린도후서 5장 11~17절)

by 【고동엽】 2023. 5. 25.
처음 목차로 돌아가기
 
 

새로운 피조물(고린도후서 5장 11~17절)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노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워졌고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워 졌기를 바라노라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를 인하여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낳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을 대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인간의 값이 오늘처럼 떨어질 때는 일찍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옛날에는 인간을 동물과 신(神)사이에 있는 존재로 생각했었습니다. 동물임에는 틀림없으나 동물이어서는 안되며 그렇다고 인간은 신이 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계속 신이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신을 향하여 살아야 하는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이로써 동물이면서도 동물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하여 욕으로 들려지며 신이 아니면서도 신이란 말을 존경과 칭찬의 말로 들으려 하는 지극히 모순된 존재이었습니다.

오늘날 인간을 평할 때 동물과 컴퓨터 사이의 존재로 말하고 있습니다. 현대에 있어서 유감된 일은 인간을 그 소유에 의해서 평가하며 또한 그의 가진 바 기능에 의하여 평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많은 것을 소유한 자를 큰 사람으로 평가하고 못 가진 자를 적은 자로 평하고 있습니다. 한편 기능이 문제가 됩니다. 그가 가진 기능과 그 인간 자신과를 동일시하려는 것이 현실 사회의 인간 평가 기준입니다. 결국은 사회의 한 부속품으로서 평가하며 생산 기계로서 평가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 자체의 값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아득한 옛날에는 노예를 팔고 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간을 물건처럼 팔고 사다니 말이 될 수 없는 비인도적 행위라고 쉽게 정죄하고 맙니다만 실상은 그들은 물건만큼은 인정했으며 돈을 주고 살만큼의 그래도 필요한 존재로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문제가 전혀 다릅니다. 물건보다 낮게 평가되고 기계보다 헐하게 취급하고 좀더 나아가서는 없어야 될 존재가 있어진 것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인간 자신의 값이 이렇게 절하된 때가 일찍이 없었습니다.

성경이 말해주는 인간가치는 이같이 물질이나 기능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이 사람을 평가하는 하나님의 형상에 의한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피조물이란 뜻에서 의미가 있고 값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이 얼마나 분명하게 많이 남아 있느냐 하는 것이 그 인간의 값이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사람이 육체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육체만으로써의 인간 하나님의 형상이 전혀 없는 인간은 인간이 아닙니다. 육체일 뿐입니다. 기독교의 교리의 기초는 창조론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귀중한 교리에서 시작합니다. 이 창조의 교리는 모든 무신론과 허무주의와 유물사상과 자연주의 등을 배격합니다.

우연히 된 존재도 윤회로 되는 과정도, 자연도, 허무도 아닌 실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셔서 창조하셨습니다. 인간 가치는 오직 그 하나님의 창조와 그의 형상에 의하여 평가되어야만 합니다.

둘째 중요한 교리는 타락의 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만물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완전히 타락해서 인간 스스로는 전혀 구원의 길이 없다는 내용에서부터 구원론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전적인 타락을 말합니다. 기독교 구원론의 기초는 완전 타락입니다. 아무 가능성도 없는 인간을 말합니다. 어거스틴은 "사람이 최고의 선으로 생각한 그것도 악이며 이것이 하나님일 것이라고 최선을 다해 생각해 낸 것도 우상"이라고 말했습니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으며 구원을 생각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능력도 지혜도 기회도 아무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그간 유토피아적인 세계관을 그려왔으나 사실에 있어 이제는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을 날마다 의식하고 있습니다.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심리학적인 면이나 생태학적인 면에서 인류의 나갈 길은 없다는 것을 누구나 말하고 있습니다. 이 불가능한 처지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생각합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이고 효과적인 구원의 역사만이 기대됩니다. 이러한 역사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나타났으며 그 역사를 효과 있게 하고자 성령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객관적인 구원의 사역과 성령께서 이루시는 주관적인 사역이 합쳐서 구원의 역사는 이루어집니다. 전혀 불가능한 처지에서 하나님의 일방적이요 능동적인 역사로 인하여 이루어지는 구원의 역사이기 때문에 이를 재창조라고 부릅니다. 없는 것에서 창조하시고 불가능한데서 가능을 이루시고 멸망 중에서 구원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성경은 우리가 가지는 믿음까지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새피조물이란 전혀 불가능한 자가 구원받으며 영원히 죽을 자가 생명을 얻게 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생명은 그 자체가 창조에 속한 것이며 그의 생애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기적이며 창조적인 역사인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있던 것의 변화도 발전도 성장도 아니며 아는 바의 행함도 아닙니다. 옛 것의 새로워짐도 아니며 옛 생의 최선도 아닙니다. 다만 옛 생의 죽음에서 시작하며 옛 사상의 완전 부정에서 출발합니다. 없던 것, 생각지도 상상치도 못했던 것, 전혀 불가능했던 것에서 나오는 새로운 생명입니다. 창조적인 생명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길은 출생에서부터 아는데 있지 않고 그의 죽으심을 먼저 알고 부활하심을 아는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교리는 생명에서 죽음으로 향하지 않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향하는 역설적인 교리입니다.

그러면 새 피조물이란 무엇을 뜻합니까? 진정 오늘의 현실과 구체적인 상황에서 새 피조물의 생명을 체험할 수 있습니까? 구체적인 생활에 하등의 차이가 없는데 무엇을 가지고 새 피조물임을 증거 할 것입니까?

기독교와 칼 막스(Karl max)는 여기에서 정 반대편에 서게 됩니다.

막스(max)는 물질생활과 사회 구조를 먼저 바꿈으로써 인간을 개조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기독교는 인간 자신의 어떤 윤리적인 면이 먼저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 심령을 먼저 개조함으로써 물질 생활이나 사회 구조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인간 자신의 문제가 먼저요, 제도나 구조가 먼저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인간 문제는 인간 중에도 심령 즉 속사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 속 사람이 그리스도의 역사로 먼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혁명을 말하되 인간 혁명을 먼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혁명이라 함은 기존 질서나 가치관을 완전히 부정하며 부정에서 머물지 않고 좀 더 능동적으로 파괴하고 그리고 새로운 질서를 세운다는 뜻입니다. 인간 혁명을 먼저로 생각하며 그 속사람의 재창조가 근본적인 것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것이 실제적인 방법입니다. 구체적으로 새 피조물은 어떤 존재입니까? 먼저는 목적의 전환입니다. 목적의 전환은 곧 근본적인 전환을 뜻합니다. 그 목적에 따라서 생의 의미와 가치관이 모두 함께 변하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전적인 그리고 근본적이요 구체적인 변화를 새창조라고 성경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의문과 형식에는 이렇다 할 하등의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이나 사실은 예수를 믿는 순간, 즉 그리스도를 그의 구주로 영접하며 고백하는 순간에 실로 창조적인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본문 1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된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즉 "위하여"가 중요한 점입니다. 목적의 전환입니다. 자신을 위하여 살던 자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의 목적이던 자가 그리스도가 목적이 된 자로 완전히 소속이 바뀐다는 말입니다. 목적과 주인과 중심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목적은 그대로 두고 방법만 바꾸는 정도의 전환을 신앙으로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정욕에 매어서 단순히 복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무당도 찾고 우상도 섬기며 이곳 저곳을 헤매다가 이제는 교회를 찾아 나와서 그 목적 그대로 복을 구하고 있는 교인이 허다합니다. 방법만 바꾼 정도입니다. 이것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그 복 자체의 뜻부터 다시 해석하고 근본으로 복이 그리스도안에 있음을 알고 믿게 되는 변화를 신앙이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요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고백합니다. 목적 자체를 그리스도에게 두고 그에게 전 생명을 위탁하는 생활을 하였던 것입니다. 집으로 말하면 어느 부분을 개조하던가 수리한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그 집을 다 헐어 버리며 기초까지 뽑아 버리고 이제 다시 기초부터 새롭게 짓는다는 뜻입니다. 일본의 신학자 우찌무라간조는 "실패는 죄가 아니다. 목적이 잘못된 것이 죄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목적이 온전히 그리스도께 있다면 현실적인 굴곡과 고난은 문제가 되지 아니합니다. 어떤 변화 속에서도 목적만은 먼저 분명해야 합니다.

아무리 바빠도 목적지로 향해서 가는 차만은 바로 타야 합니다. 급행이냐 완행이냐 자리가 편하냐 불편하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요는 목적지로 가는 차를 타야 합니다. 자리가 좋다고 다른 방향으로 가는 차를 탈수는 없는 일이 아닙니까? 차만은 바로 타야 합니다. 나를 목적하고 중심하던 생활이 그리스도를 중심하며 그리스도만이 나의 목적이요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다음은 이에 따라 가치관이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달라지는 것입니다.

목적이 변하면 가치관도 자연히 변하게 마련입니다. 가치판단의 기준이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본문 16절에 보면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 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 기록한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육체대로, 즉 보이는 것, 세상적인 것에 기준하여 판단하였으나 이후로는 보이지 않는 것, 신령한 것 그리고 그리스도 중심인 것에 기준하여 판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훌륭한 집을 부럽게 쳐다보십니까? 이제는 생각을 달리 하십시다.

집보다는 그 속에 사는 사람이 귀중한 것이고 사람도 외모보다는 인격이 중요합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 것입니다. 기독교 윤리의 가치판단의 기준은 언제나 보다 신령한 것, 보다 영원한 것, 보다 하나님께 향한 것, 보다 그리스도의 생과 교훈에 가까운 것, 보다 이웃을 위하는 것을 값비싼 일로 그리고 가치 있는 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부러워하는 것이 있다면 오직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3장에서 전에 좋아하고 중요하게 여겼던 것들을 이제는 분토 즉 배설물과 같이 여겼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는 가치관의 전적인 변화를 뜻하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서 바라는 소원도 달라집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너는 내게 구하라. 네 소원을 이루어 주리라"하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나는 당신(곧 그리스도)외에는 아무 소원도 없습니다."라고 했다 합니다. 마치 입맛이 싹 변해 버리듯이 그의 마음속에 있는 가치관이 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세상 정욕적인 일에 매력을 느끼며 세속적인 권세를 부러워하고 있다면 이 사람은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불의한 재물을 저주스럽게 알고 죄된 부귀와 권세를 치욕적인 것으로 느끼며 동시에 진실한 가난의 길을 부러워하고 의인의 고난을 영광된 것으로 알며 그리스도와 함께 당하는 수난의 길을 가장 큰 행복의 길로 아는 그러한 가치판단이 있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의식구조의 변화입니다. 그의 의식구조가 변하면 습관이 달라지며 생활이 달라지고 따라서 운명도 변화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의식구조의 변화입니다. 본문 13절에 "미쳤다"는 말이 나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미친 자를 뜻하는 것입니다.

처녀들이 결혼 전에는 자기를 낳고 키워준 부모님께 효도를 다하여 부모를 기쁘게 합니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보면 언제부터 알았다고 그같이 속히 변하여 친정 집에 와서도 남편과 시집만 생각하며 심지어는 한 가지 물건이라도 시집으로 더가져 가려고 애쓰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결혼하면 즉시 친정집 중심하던 의식구조가 시집 중심의 의식구조로 바꾸어집니다. 결혼한지 한 달도 못되는 어떤 여자는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렇게 쉽게 마음이 변할 수 있습니까? 이제야 딸을 낳으면 부모들이 섭섭해하는 뜻을 알 것 같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같이 의식구조가 변화되어야 그의 생활도 따라서 변화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축구 경기장에 경기를 보러 갔었는데 한참 경기가 무르익어 갈 때 흥분된 관중들은 자주 일어서고는 하였습니다. 그때마다 뒤에 앉은 사람은 앞에서 일어서는 사람에게 앉으라고 소리를 질렀고 때로는 입에 못 담을 욕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욕설을 들은 사람이 뒤돌아보고 빙그레 웃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축구 구경에 미친 사람들은 욕설 좀 들었다고 해서 화를 내든가 싸우지도 않습니다. 경기에 미쳤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새로운 윤리관이 있다고 봅니다.

그리스도께 진정 미친 사람은 이 세상 문제가 문제되지 않고 적은 실패나 성공 따위가 그의 마음에 가득찬 사랑을 결코 빼앗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랑에 끌린 자, 그리스도의 사랑에 미친 자가 되어야 합니다(로마서 8장). 꿈을 꾸어도 그리스도의 꿈을 꾸어야 합니다.

이 같은 의식구조는 그리스도를 만나는 역사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발트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는 없으나 만날 수는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만남은 종합적인 인식입니다. 이 만남이 나를 미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불만의 원인을 스스로 모르고 있습니다.

사실은 꼭 만나야 할 분을 못 만났기 때문이며 들어야 할 음성을 못 들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제는 근본적으로 차원을 달리해서 오직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온전히 위탁하고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그리스도가 보여 주시고 인도하시는 길로만, 그리스도를 따라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음성만에 귀를 기울이며, 그의 뜻을 사랑하며 그에게 완전히 미쳐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하면 그가 우리의 생명과 오늘의 현실과 운명을 주장하여 주실 것입니다. 새 피조물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시며 새 피조물에게 만물을 새롭게 하는 역사를 보이실 것이며 새로운 기업과 사명을 주실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고린도후서 5장 11~17절)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노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워졌고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워 졌기를 바라노라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를 인하여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낳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을 대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인간의 값이 오늘처럼 떨어질 때는 일찍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옛날에는 인간을 동물과 신(神)사이에 있는 존재로 생각했었습니다. 동물임에는 틀림없으나 동물이어서는 안되며 그렇다고 인간은 신이 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계속 신이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신을 향하여 살아야 하는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이로써 동물이면서도 동물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하여 욕으로 들려지며 신이 아니면서도 신이란 말을 존경과 칭찬의 말로 들으려 하는 지극히 모순된 존재이었습니다.

오늘날 인간을 평할 때 동물과 컴퓨터 사이의 존재로 말하고 있습니다. 현대에 있어서 유감된 일은 인간을 그 소유에 의해서 평가하며 또한 그의 가진 바 기능에 의하여 평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많은 것을 소유한 자를 큰 사람으로 평가하고 못 가진 자를 적은 자로 평하고 있습니다. 한편 기능이 문제가 됩니다. 그가 가진 기능과 그 인간 자신과를 동일시하려는 것이 현실 사회의 인간 평가 기준입니다. 결국은 사회의 한 부속품으로서 평가하며 생산 기계로서 평가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 자체의 값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아득한 옛날에는 노예를 팔고 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간을 물건처럼 팔고 사다니 말이 될 수 없는 비인도적 행위라고 쉽게 정죄하고 맙니다만 실상은 그들은 물건만큼은 인정했으며 돈을 주고 살만큼의 그래도 필요한 존재로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문제가 전혀 다릅니다. 물건보다 낮게 평가되고 기계보다 헐하게 취급하고 좀더 나아가서는 없어야 될 존재가 있어진 것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인간 자신의 값이 이렇게 절하된 때가 일찍이 없었습니다.

성경이 말해주는 인간가치는 이같이 물질이나 기능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이 사람을 평가하는 하나님의 형상에 의한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피조물이란 뜻에서 의미가 있고 값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이 얼마나 분명하게 많이 남아 있느냐 하는 것이 그 인간의 값이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사람이 육체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육체만으로써의 인간 하나님의 형상이 전혀 없는 인간은 인간이 아닙니다. 육체일 뿐입니다. 기독교의 교리의 기초는 창조론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귀중한 교리에서 시작합니다. 이 창조의 교리는 모든 무신론과 허무주의와 유물사상과 자연주의 등을 배격합니다.

우연히 된 존재도 윤회로 되는 과정도, 자연도, 허무도 아닌 실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셔서 창조하셨습니다. 인간 가치는 오직 그 하나님의 창조와 그의 형상에 의하여 평가되어야만 합니다.

둘째 중요한 교리는 타락의 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만물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완전히 타락해서 인간 스스로는 전혀 구원의 길이 없다는 내용에서부터 구원론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전적인 타락을 말합니다. 기독교 구원론의 기초는 완전 타락입니다. 아무 가능성도 없는 인간을 말합니다. 어거스틴은 "사람이 최고의 선으로 생각한 그것도 악이며 이것이 하나님일 것이라고 최선을 다해 생각해 낸 것도 우상"이라고 말했습니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으며 구원을 생각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능력도 지혜도 기회도 아무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그간 유토피아적인 세계관을 그려왔으나 사실에 있어 이제는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을 날마다 의식하고 있습니다.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심리학적인 면이나 생태학적인 면에서 인류의 나갈 길은 없다는 것을 누구나 말하고 있습니다. 이 불가능한 처지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생각합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이고 효과적인 구원의 역사만이 기대됩니다. 이러한 역사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나타났으며 그 역사를 효과 있게 하고자 성령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객관적인 구원의 사역과 성령께서 이루시는 주관적인 사역이 합쳐서 구원의 역사는 이루어집니다. 전혀 불가능한 처지에서 하나님의 일방적이요 능동적인 역사로 인하여 이루어지는 구원의 역사이기 때문에 이를 재창조라고 부릅니다. 없는 것에서 창조하시고 불가능한데서 가능을 이루시고 멸망 중에서 구원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성경은 우리가 가지는 믿음까지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새피조물이란 전혀 불가능한 자가 구원받으며 영원히 죽을 자가 생명을 얻게 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생명은 그 자체가 창조에 속한 것이며 그의 생애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기적이며 창조적인 역사인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있던 것의 변화도 발전도 성장도 아니며 아는 바의 행함도 아닙니다. 옛 것의 새로워짐도 아니며 옛 생의 최선도 아닙니다. 다만 옛 생의 죽음에서 시작하며 옛 사상의 완전 부정에서 출발합니다. 없던 것, 생각지도 상상치도 못했던 것, 전혀 불가능했던 것에서 나오는 새로운 생명입니다. 창조적인 생명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길은 출생에서부터 아는데 있지 않고 그의 죽으심을 먼저 알고 부활하심을 아는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교리는 생명에서 죽음으로 향하지 않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향하는 역설적인 교리입니다.

그러면 새 피조물이란 무엇을 뜻합니까? 진정 오늘의 현실과 구체적인 상황에서 새 피조물의 생명을 체험할 수 있습니까? 구체적인 생활에 하등의 차이가 없는데 무엇을 가지고 새 피조물임을 증거 할 것입니까?

기독교와 칼 막스(Karl max)는 여기에서 정 반대편에 서게 됩니다.

막스(max)는 물질생활과 사회 구조를 먼저 바꿈으로써 인간을 개조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기독교는 인간 자신의 어떤 윤리적인 면이 먼저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 심령을 먼저 개조함으로써 물질 생활이나 사회 구조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인간 자신의 문제가 먼저요, 제도나 구조가 먼저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인간 문제는 인간 중에도 심령 즉 속사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 속 사람이 그리스도의 역사로 먼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혁명을 말하되 인간 혁명을 먼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혁명이라 함은 기존 질서나 가치관을 완전히 부정하며 부정에서 머물지 않고 좀 더 능동적으로 파괴하고 그리고 새로운 질서를 세운다는 뜻입니다. 인간 혁명을 먼저로 생각하며 그 속사람의 재창조가 근본적인 것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것이 실제적인 방법입니다. 구체적으로 새 피조물은 어떤 존재입니까? 먼저는 목적의 전환입니다. 목적의 전환은 곧 근본적인 전환을 뜻합니다. 그 목적에 따라서 생의 의미와 가치관이 모두 함께 변하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전적인 그리고 근본적이요 구체적인 변화를 새창조라고 성경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의문과 형식에는 이렇다 할 하등의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이나 사실은 예수를 믿는 순간, 즉 그리스도를 그의 구주로 영접하며 고백하는 순간에 실로 창조적인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본문 1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된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즉 "위하여"가 중요한 점입니다. 목적의 전환입니다. 자신을 위하여 살던 자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의 목적이던 자가 그리스도가 목적이 된 자로 완전히 소속이 바뀐다는 말입니다. 목적과 주인과 중심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목적은 그대로 두고 방법만 바꾸는 정도의 전환을 신앙으로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정욕에 매어서 단순히 복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무당도 찾고 우상도 섬기며 이곳 저곳을 헤매다가 이제는 교회를 찾아 나와서 그 목적 그대로 복을 구하고 있는 교인이 허다합니다. 방법만 바꾼 정도입니다. 이것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그 복 자체의 뜻부터 다시 해석하고 근본으로 복이 그리스도안에 있음을 알고 믿게 되는 변화를 신앙이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요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고백합니다. 목적 자체를 그리스도에게 두고 그에게 전 생명을 위탁하는 생활을 하였던 것입니다. 집으로 말하면 어느 부분을 개조하던가 수리한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그 집을 다 헐어 버리며 기초까지 뽑아 버리고 이제 다시 기초부터 새롭게 짓는다는 뜻입니다. 일본의 신학자 우찌무라간조는 "실패는 죄가 아니다. 목적이 잘못된 것이 죄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목적이 온전히 그리스도께 있다면 현실적인 굴곡과 고난은 문제가 되지 아니합니다. 어떤 변화 속에서도 목적만은 먼저 분명해야 합니다.

아무리 바빠도 목적지로 향해서 가는 차만은 바로 타야 합니다. 급행이냐 완행이냐 자리가 편하냐 불편하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요는 목적지로 가는 차를 타야 합니다. 자리가 좋다고 다른 방향으로 가는 차를 탈수는 없는 일이 아닙니까? 차만은 바로 타야 합니다. 나를 목적하고 중심하던 생활이 그리스도를 중심하며 그리스도만이 나의 목적이요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다음은 이에 따라 가치관이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달라지는 것입니다.

목적이 변하면 가치관도 자연히 변하게 마련입니다. 가치판단의 기준이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본문 16절에 보면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 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 기록한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육체대로, 즉 보이는 것, 세상적인 것에 기준하여 판단하였으나 이후로는 보이지 않는 것, 신령한 것 그리고 그리스도 중심인 것에 기준하여 판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훌륭한 집을 부럽게 쳐다보십니까? 이제는 생각을 달리 하십시다.

집보다는 그 속에 사는 사람이 귀중한 것이고 사람도 외모보다는 인격이 중요합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 것입니다. 기독교 윤리의 가치판단의 기준은 언제나 보다 신령한 것, 보다 영원한 것, 보다 하나님께 향한 것, 보다 그리스도의 생과 교훈에 가까운 것, 보다 이웃을 위하는 것을 값비싼 일로 그리고 가치 있는 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부러워하는 것이 있다면 오직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3장에서 전에 좋아하고 중요하게 여겼던 것들을 이제는 분토 즉 배설물과 같이 여겼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는 가치관의 전적인 변화를 뜻하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서 바라는 소원도 달라집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너는 내게 구하라. 네 소원을 이루어 주리라"하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나는 당신(곧 그리스도)외에는 아무 소원도 없습니다."라고 했다 합니다. 마치 입맛이 싹 변해 버리듯이 그의 마음속에 있는 가치관이 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세상 정욕적인 일에 매력을 느끼며 세속적인 권세를 부러워하고 있다면 이 사람은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불의한 재물을 저주스럽게 알고 죄된 부귀와 권세를 치욕적인 것으로 느끼며 동시에 진실한 가난의 길을 부러워하고 의인의 고난을 영광된 것으로 알며 그리스도와 함께 당하는 수난의 길을 가장 큰 행복의 길로 아는 그러한 가치판단이 있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의식구조의 변화입니다. 그의 의식구조가 변하면 습관이 달라지며 생활이 달라지고 따라서 운명도 변화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의식구조의 변화입니다. 본문 13절에 "미쳤다"는 말이 나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미친 자를 뜻하는 것입니다.

처녀들이 결혼 전에는 자기를 낳고 키워준 부모님께 효도를 다하여 부모를 기쁘게 합니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보면 언제부터 알았다고 그같이 속히 변하여 친정 집에 와서도 남편과 시집만 생각하며 심지어는 한 가지 물건이라도 시집으로 더가져 가려고 애쓰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결혼하면 즉시 친정집 중심하던 의식구조가 시집 중심의 의식구조로 바꾸어집니다. 결혼한지 한 달도 못되는 어떤 여자는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렇게 쉽게 마음이 변할 수 있습니까? 이제야 딸을 낳으면 부모들이 섭섭해하는 뜻을 알 것 같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같이 의식구조가 변화되어야 그의 생활도 따라서 변화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축구 경기장에 경기를 보러 갔었는데 한참 경기가 무르익어 갈 때 흥분된 관중들은 자주 일어서고는 하였습니다. 그때마다 뒤에 앉은 사람은 앞에서 일어서는 사람에게 앉으라고 소리를 질렀고 때로는 입에 못 담을 욕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욕설을 들은 사람이 뒤돌아보고 빙그레 웃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축구 구경에 미친 사람들은 욕설 좀 들었다고 해서 화를 내든가 싸우지도 않습니다. 경기에 미쳤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새로운 윤리관이 있다고 봅니다.

그리스도께 진정 미친 사람은 이 세상 문제가 문제되지 않고 적은 실패나 성공 따위가 그의 마음에 가득찬 사랑을 결코 빼앗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랑에 끌린 자, 그리스도의 사랑에 미친 자가 되어야 합니다(로마서 8장). 꿈을 꾸어도 그리스도의 꿈을 꾸어야 합니다.

이 같은 의식구조는 그리스도를 만나는 역사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발트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는 없으나 만날 수는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만남은 종합적인 인식입니다. 이 만남이 나를 미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불만의 원인을 스스로 모르고 있습니다.

사실은 꼭 만나야 할 분을 못 만났기 때문이며 들어야 할 음성을 못 들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제는 근본적으로 차원을 달리해서 오직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온전히 위탁하고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그리스도가 보여 주시고 인도하시는 길로만, 그리스도를 따라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음성만에 귀를 기울이며, 그의 뜻을 사랑하며 그에게 완전히 미쳐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하면 그가 우리의 생명과 오늘의 현실과 운명을 주장하여 주실 것입니다. 새 피조물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시며 새 피조물에게 만물을 새롭게 하는 역사를 보이실 것이며 새로운 기업과 사명을 주실 것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