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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용납이 안 되는 사람, 어떻게 하나? (행 15:36-41)

by 【고동엽】 2022. 1. 6.

도무지 용납이 안 되는 사람, 어떻게 하나? (행 15:36-41)

 

 

세계에서 제일 부흥된 교회, 유명한 교회를 꼽으라면 대부분 미국에 있는 윌로우크릭 교회를 꼽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꼭 2년 전인 2007년 10월, 32년 간의 사역 결과를 담은 일종의 보고서를 냈는데, 한 마디로 ‘우리는 실패했다.’는 폭탄 선언을 했습니다. 이 보고서를 받은 빌하이벨스 목사는 천지가 진동하는 것과 같은 충격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숫자로는 성공을 했는지 몰라도, 예수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를 만드는 일에는 실패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윌로우크릭 교회는 불신자를 전도하고 교인들을 영적으로 성숙하게 하기 위하여 예배, 성경 공부, 소그룹, 자원 봉사, 전도 등 엄청나게 많은 프로그램을 실시하였습니다. 교인들은 그 프로그램에 열심히 참여했고, 교회는 날로 부흥했습니다. 그런데 왜 실패라는 것입니까? 교인들이 하나님과 이웃을 ‘정말로’ 사랑하고 있는가? 그 물음에 자신 있게 ‘예스’라고 대답할 수 없더라는 것입니다. 보고서를 작성한 사람들은 교회가 근본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윌로우크릭 교회의 보고서를 보면서 선한목자 교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어떤가? 우리도 외형적으로는 많이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점에서도 그처럼 성숙하고 있습니까?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교회가 [사랑으로 소문나 교회]가 되도록 하는 것을 제 목회의 핵심 가치로 삼기로 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도전받은 것은 오래 전 이지만, 이제 목회 핵심 가치를 교우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최근에 제 마음에 이 문제에 대한 것이 더 늦어져서는 안된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부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소문난 교회라고 써붙이는 것이 꼭 좋은 방법이 아닐 수도 있지만, 항상 우리 자신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자는 뜻에서는 중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많은 교인들이 [사랑으로 소문난 교회]가 되는 것은 좋은데, 솔직히 도무지 사랑이 안되는 사람, 용납이 안되는 사람 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부담스럽다고 합니다. 현실적으로 가족 중에 사랑이 안되는 사람이 있고 도무지 용납이 안되는 사람이 교우 중에 있는 것을 어떻게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겠는가 하는 답답함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참 놀라우십니다. 마치 우리 교회가 이와 같은 상황이 올 것을 미리 아시기라도 한 것처럼 사도행전 말씀을 계속해서 그 말씀을 우리에게 하나 하나 짚어주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본문 말씀을 통해서 도무지 용납이 안되는 사람을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는 것에 대한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은 참 설교하기 힘든 성경 중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위대한 사도인 바울과 바나바가 싸우다가 갈라진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표현이 심히 다투었다고 할 정도였으면 어느 정도였는지 상상이 갈 것 같습니다. 두 분이 심히 다투었는데 그렇게 다투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결국은 하나가 됐더라. 그러면 진짜 할렐루야지요. 그런데 심히 다투어서 갈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본문으로 무슨 설교를 해야 합니까? 그렇게 믿음 좋은 분 위대한 사도들이 싸워서 갈라졌다 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도무지 용납이 안되는 사람, 사랑이 안되는 사람에 대하여 어떻게 하라고 하시는지에 대한 말씀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주시겠는가 하는 기대감이 생겼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왜 그렇게 싸웠을까? 그 이유는 마가 요한이라는 사람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않기로 예루살렘 교회와 명확히 합의를 한 후, 사도 바울은 소위 2차 전도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이번에 성지 순례팀이 가보게 되는 선교지가 대부분 그 지역입니다. 그런데 바나바와 심하게 다투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나바가 마가 요한을 데리고 떠나자고 했기 때문입니다.
마가 요한은 초대 교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성령 강림이 자기 집 다락방에서 임하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그의 다락방을 빌어 예배나 기도회를 했습니다. 게다가 선교 여행을 가고자 하는 헌신적인 사람이었습니다. 1차 선교 여행 때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선교 여행을 떠났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마가 요한을 전도여행에 데리고 가는 것을 크게 반대합니다. 그것은 요한이 제1차 전도 여행에 동행하였다가 밤빌리아 지방 버가라는 지역에서 너무 힘들다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린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가의 이러한 행동이 1차 선교 여행에 큰 차질을 주었음에 틀림 없습니다. 당시 바울은 마가의 행동에 대단히 화가 났었고 이런 문제아를 더 이상은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실 어려운 선교 여행을 하면서 한 사람이 중도에 탈락하는 일이 생기면 남은 사람들도 다 힘이 빠질만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때 ‘도무지 하나님의 종이 못 되겠구나.’ 이런 생각도 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선교 여행을 다 마치고 예루살렘에 와서 그동안 1차 선교 여행에서 있었던 일을 보고했습니다. 그 자리에 마가도 있었습니다.
마가는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 보고를 들으면서 한편으로는 부끄럽고 한편으로는 너무 미안하고 ‘나도 끝까지 같이 갔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깊이 후회하였던 것 같습니다. ‘나는 왜 끝까지 참지 못했을까? 왜 나는 중간에 포기하고 말았을까?’ 너무너무 좌절에 빠진 것입니다. 이것을 본 바나바는 마가 요한이 좌절감을 극복하도록 다시 한번 기회를 주자고 제안했던 것입니다. 그때 마가 요한은 “그렇습니다. 제가 이제는 나약한 지난 날처럼 하지 않고 끝까지 사명을 감당해보겠습니다.” 이렇게 서로 약속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거기에는 아마 바나바가 마가 요한의 삼촌이어서 더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이번에 성공적으로 선교 여행을 마치게 하므로 교회의 큰 일꾼으로 만들어야 되겠다.’ 하고 생각하는데, 사도 바울은 펄펄 뛰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전도가 제대로 되려면 준비된 사람이 전도를 나가야 한다는 것이고, 바나바는 실패한 사람에게도 다시 한번 기회를 주어 그를 세워주자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려는 바나바를 자격이 없는데도 자기 조카라고 감싸고 도는 무책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바나바는 사도 바울이 너무 성격이 강하여 큰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여튼 바울은 선교 여행 자체를 중요시했고, 바나바는 실패했어도 마가라는 사람을 세워줄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되겠다 하고 사람에 대한 관심이 더 컸던 것입니다. “우리 서로 헤어집시다. 당신은 마가를 데리고 가세요. 나는 실라를 데리고 가겠습니다.” 그리고 두 사도는 팀을 따로 꾸리고 갈라져버렸습니다.
39절에 보면 이들은 결국 심히 다투어 피차에 갈라섰다고 기록합니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 누가 옳았을까요?
성경은 사도 바울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도행전 16장 이후 사도행전의 기록은 바울과 실라 전도팀의 기록입니다.
그리고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전도하다가 채찍에 무수히 맞고 지하 감옥에 착고가 채워서 갇히는 핍박을 당합니다. ‘과연 마가 요한이 같이 갔다면 끝까지 견디며 한 밤중에 찬송까지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판단을 잘 했구나.’ 이런 생각도 듭니다.

반면에 바나바 전도 팀에 대한 기록은 성경에서 사라집니다.
그러면 바나바 팀은 실패였을까요? 바나바가 잘못 판단한 것일까요? 길게 보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바나바의 선교 여정에 대한 기록은 성경에 나와 있지 않지만, 바나바로 말미암아 마가가 중요한 사명자로 변화된 것을 성경이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마가 요한이 나중에는 바울의 귀중한 동역자가 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후에 마가는 바울과 함께 감옥에 갇히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관계가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나요?
골 4:10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사도 바울이 마가 요한은 전도자가 될 사람이 아니라고 그렇게 하던 관계가 지금은 사도 바울과 같이 옥에 갇혀있는 형편에 대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죽음을 앞두고 생애의 마지막 편지를 쓸 때도 마가가 옆에 있어주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딤후 4:11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바울이 죽은 후에는 베드로의 통역자가 되어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베드로가 죽은 후에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홀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했다는 전승이 내려옵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성경에는 그의 이름을 딴 복음서가 있습니다. 마가 복음서입니다. 성경 학자들은 4복음서 중 제일 먼저 기술된 복음서가 바로 마가 복음서이었을 것이라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얼마나 그는 하나님 나라에 유익한 인물입니까? 한때 문제아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바나바 때문입니다. 바나바가 아니었다면 마가는 큰 실패와 좌절 속에 묻혀있었습니다.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우리가 [사랑으로 소문난 교회]가 되자고 하니,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사람,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문제에 답을 주신다고 느꼈습니다. 도무지 용납이 안되는 사람, 어떻게 합니까?

우리 자신도 도무지 용납 받을 수 없었는데 용납 받은 사람임을 명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가 요한을 다시 데려가자는 바나바가 이해할 수 없는 무책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사실 사도 바울 자신도 도무지 용납받을 수 없었을 때 용납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마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용납받기 어려운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한 후, 곧바로 제자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바울은 스데반 집사가 순교를 당하게 한 주동자였고 무서운 핍박자였습니다. 당시 바울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이중간첩 정도로 이해될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가 바울을 적극 변호하고 중재자로 나서서 바울을 구해주었습니다. 바나바가 그렇게 해주지 않았다면 사도 바울은 제자들에게 인정 받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처음에 예수님을 만나고 사람이 완전히 바뀌고 난 다음에 이제는 정반대로 예수님이 그리스도 되심을 얼마나 강하게 주장하고 전도를 하고 다녔는지 유대인들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했습니다. 왜? 조금 전까지 자기들 편이었는데 하루아침에 바뀌어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전하고 다니니까 아마 유대인들은 더 바울을 미워했던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로서는 난감한 존재였습니다. 열심히 전도하는 것은 좋은데, 가는 데마다 부디치고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교회 안정과 평안을 생각하면 바울은 뜨거운 감자입니다.
그 이후에 바울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나타나 바울이 다소로 피신하게 합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과 분란을 일으키며 교회를 위태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다소에 내려가 있던 바울을 찾아내 안디옥으로 데리고 가서 그와 함께 안디옥 교회를 세웠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바나바는 지도자적 위치를 바울에게 물려주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3장부터는 지도자가 바나바에서 바울에게로 완전히 바뀌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바나바는 대단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통해 역사하실 것이라고 마음에 믿어지니까 과감하게 자기는 2인자가 되고 바울을 앞세워준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마가 요한보다 더 용납하기 힘들었던 사람이었음을 몰랐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나중에 깨닫고 빌립보서에 이렇게 썼습니다.
빌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사랑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사랑으로 소문난 교회를 세우라고 하시는데, 어떤 교회가 사랑으로 소문난 교회인가? 모델이 되는 교회를 찾으려고 고심을 하고 있습니다. 저 교회를 본받으면 되는가? 저 교회처럼 하면 되는가? 참 찾기가 어렵습니다.


저는 지난 주간 진정으로 [사랑으로 소문난 교회]가 실제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아미쉬 그레이스]라는 책을 통하여 미국에 있는 한 기독교 분파인 아미시 공동체를 보았습니다, 아미시라는 말이 생소하겠지만 영화같은 곳에서 혹 보셨을지 모릅니다, 500년 전 중세 시대의 옷차림을 하고, 턱수염을 기르고 보넷 모자를 쓰고 망아지가 끄는 이륜마차를 타고 다니며 현대 문명(자동차, 전화, 텔레비전, 전기)을 거부하고 밤에는 등불을 켜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20년 전 쯤만 해도 이단 취급을 받았던 사람들이었지만, 지금은 한해 수 백만 명이 이 세상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고요함과 평화로움을 느끼려고 아미시 마을을 찾는다고 합니다.
아미시 사람들을 세상 사람들이 더 깊이 알게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매우 불행하고 끔찍한 사건입니다. 2006년 10월 2일 미국 필라델피아의 아미시 작은 마을 '니켈 마인스'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동네 사람인 찰스로버트가 자기 딸이 태어나자마자 죽은 일로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행복해 보이는 아미시 학교 어린 소녀들을 한 줄로 세워 놓고 총을 쏜 후 자살한 사건입니다. 어린 소녀 다섯 명이 죽고 다섯 명이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아미쉬 마을에서도 총격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는데 놀랐습니다. 그러나 점차 더욱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아미시 사람들이 살인자와 그 가족들에게 보여준 사랑과 자비였습니다.
[아미시 그레이스]라는 책은 아미시 사람들이 끔찍한 살인자를 어떻게 용서했으며 어떻게 살인자의 가족에게 자비를 표현했는지 쓰고 있습니다.
사건이 일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 희생자의 가족인 아미시 사람들은 살인자 챨스로버트의 가족들을 찾아갔습니다. 그 아내를 붙들고 함께 울었습니다,
“나는 죽은 아이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부엌에서 만나 악수를 하고 서로 얼싸 안았습니다.” 로버트의 친척이 회상했습니다. “그들은 어떤 원한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용서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정말 믿기 힘든 말이었고 알아듣기 힘든 말이었습니다.” 아미시 사람들은 살인자 로버트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였습니다. 남편과 아버지가 사라진 그 가정을 위하여 기금도 모았습니다.
아미시 사람들은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아미시 그레이스]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기도문 대로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그들은 예수님께서 갖은 모략과 조롱을 당하시고 채찍을 맞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도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고 기도하셨던 것을 그대로 행하였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자기를 돌로 쳐죽이는 사람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라고 기도하고 순교했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리 억울한 일이 생겨도 그것에 저항하거나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용서해야 하는 것이 최선의 길임을 그들은 문자 그대로 믿고 있습니다.
아미쉬마을 학교에서 사용하는 교과서에 소개된 ‘피터밀러의 복수’라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미국 독립 전쟁 당시 피터밀러라는 기독교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전쟁 중에 탈영병을 돕는 일을 하였습니다, 한번은 조지워싱턴의 캠프에서 도망 나온 ‘허기진’ 탈영병을 돌보고 있을 때, 그 탈영병으로부터 위트만이란 사람이 교수형을 당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밀러는 위트만이 교수형을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워싱턴장군을 만나려고 깊은 눈길을 헤치고 사흘 길을 걸어갑니다. 워싱턴장군은 인내를 가지고 밀러의 이야기를 들고 나서는 위트만이 공정한 재판과 정당한 판결을 받았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장군은 ‘당신의 친구를 용서해주면 나도 좋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밀러가 ‘내 친구요? 그는 나의 가장 쓰라린 원수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워싱턴장군은 그 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기 원수를 위해 관용을 요청하기 위하여 이렇게 위험과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간청하는 밀러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감동을 받은 워싱턴은 사면장을 써주고 밀러는 그것을 시간에 맞게 처형장에 제출했습니다. 밀러의 원수였던 위트만은 ‘내가 당신을 늘 괴롭혔는데도 어떻게 당신은 나를 용서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며 흐느껴 울었습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배웠기에 살인자와 그 가족을 사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산 이유는 자신들도 그런 용서를 받았고, 그런 용서가 항상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은 도무지 용납할 수 없다! 는 사람이 있습니까? 사람을 보는 눈이 뜨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자신을 보고 나면 어떤 사람도 다 용납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이 어떻게 용서받았는지 안다면 그렇게 말할 자격도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장로님이 너무나 미워 죽이고 싶었던 사람이 있었는데, 어느 날 실제로 그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죽이고 나니 큰 일이었습니다. 어찌 할 줄 모르고 당황하여 있다가 깨어보니 꿈이었답니다, 그리고 그 즉시 그 사람을 용서하겠다고 기도했답니다.
그렇습니다. 눈이 뜨이면 용서 못할 사람 없습니다.


어느 전도사남이 교인으로부터 일을 잘 못 처리했다고 비난을 받았습니다. 너무 속상하더랍니다. 자기 잘못이 아니고 동역자가 실수한 것 때문에 오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속상하여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밝히고 싶었는데, “우리는 한 몸이라.” 하신 말씀이 생각나더랍니다, ‘그렇다. 그 전도사님과 내가 한 몸인데, 그가 실수한 것이 곧 내가 실수한 것이지.’ 깨닫고 그 교인에게 자기가 잘못했다고 사과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 전도사님이 너무 감사하였습니다.


이전 교회에서 교회에 도둑이 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전날 밤에 도둑 두 명이 든 꿈을 꾸었습니다, 새벽 기도회에 나가 보니 교회 사무실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너무나 놀라면서 마음에 의심이 드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행려자들입니다. 마침 그때 행려자 급식을 하고 있었는데, 주위에서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많이 찾아오면 반드시 험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한 적이 있었습니다, 너무 속상하고 너무 섭섭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도 중에 ‘도둑이 둘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둑이 또 하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제 마음에 감사와 사랑을 도둑질 해가는 존재가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우선 행려자가 그 일을 저질렀다는 증거가 없이 그들을 의심하고 있었고, 몇 가지 물품을 도둑 맞았지만 교회에서 주무시던 권사님들이 문을 뜯어낼 정도였는데, 못 듣고 주무심으로 인명사고 없이 안전했으니 감사할 제목이었습니다.
새벽 기도회가 끝나고 내려오는데 행려자들이 아침 식사를 하려고 들어오다가 교회 로비에서 인사를 하는데 ‘큰 일 날 뻔하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비에 양말이 젖어서 그런데, 양말 하나만 주실 수 있습니까?” 하는데 신고 있는 양말을 벗어 드렸습니다. 많은 사람이 돈 잃어버린 것은 큰 일이 난 것처럼 생각하면서 마음에 기쁨, 감사, 사랑을 도적맞은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우리가 정말 기도해야 될 제목은 도무지 용서가 안되고 용납이 안되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 생각, 주님만이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또 해결 받으셔야 됩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의 역사가 교회 뿐만이겠습니까? 여러분의 가정에도 기업에도 나타납니다.
진정 용서하고 용납하는 삶, 가능합니다.
십자가 복음과 성령의 능력으로 주님이 하십니다.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박종태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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