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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도울까요? (막 2:1-12)/ 박조준 목사

by 【고동엽】 2021. 12. 27.

어떻게 도울까요?

마가복음 2:1~12

 

 

 

예수님은 전도사업을 시작하신 후 거의 쉬실 수 있는 날이 없이 격무에 시달리셨습니다. 한번은 모처럼 시간을 내서 가버나움이라는 곳에서 쉬려 하셨는데, 예수님이 지금 가버나움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고 많은 사람이 또 모여들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왜 사람들이 이렇게 예수님이 계신 곳이라면 입추의 여지가 없이 모여들었습니까?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환자를 보면 불쌍히 여기시고 그 병을 낫게 해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사람들의 필요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시고 돌보셨기 때문에 많은 환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누구나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에게 거절하신 적이 한 번도 없으셨습니다. 이 사실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서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어디나 많은 사람이 운집했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사람을 돕고자 하시는 주님의 노력을 알았습니다. 주님은 나에게 무엇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무엇을 주려 하신다는 사실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 메마른 땅에 단비가 내리는 것 같았고 목마른 심령이 생수를 마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분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너무 중요했습니다. 예수님이 산상보훈을 말씀하신 후 성경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는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사람들은 마음속 깊은 곳에 품고 있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았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 듣기를 그렇게 원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는 많은 사람이 모였습니다. 마가복음 12장 37절에 보면 "백성이 즐겁게 듣더라"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거창한 말씀으로 사람들을 감동시키려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공부하지 않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진리를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에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가셨을 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조금도 놀랄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곳에 열심히 모인다는 사실에 대해서 놀랍게 생각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적으로는 몹시 피곤하셨지만, 주님을 만나 뵙기 위해서 찾아온 사람들을 조금도 귀찮게 생각하시거나 짜증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요구를 아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요구에 언제나 응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을 보니까 "예수님은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시고 계시는데 지붕이 뚫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구멍이 뚫리고 지붕 위에서 들것에 실린 환자 하나가 내려왔습니다.

 

여기에 이런 일이 생기는 데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계시다는 소문이 났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 뵙고 그분의 말씀을 듣기 원해서 물밀듯이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예수님을 만나 뵙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중풍병에 걸려서 마음은 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아서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처음에 병이 났을 때는 많은 사람이 찾아와서 위로도 하고 동정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 환자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잊지 않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들의 이름을 모릅니다. 어쨌든 그 사람들은 주님을 기쁘시게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싶어했을 뿐 아니라 그 기쁨에 동참하지 못하는 사람을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게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서 이 병든 친구를 예수님께 데려온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예수님이 계신 집에 이르렀을 때는 발을 들여놓을 틈새도 없었습니다. 보통사람 같았으면 "아이구, 안되겠다. 이 친구는 예수님을 만날 운명이 아닌가봐" 하면서 돌아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길을 찾았습니다. 우리가 찾고자 하면 언제나 방법을 있게 마련입니다. "정문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 창문으로 들어갈까? 창문으로도 들어갈 수 없으니 어떻게 하나?" 그러다가 생각해낸 것이 지붕을 뚫고 구멍을 내서 그리고 환자를 내려보내 예수님이 보시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대중을 향해 말씀하실 때에도 개인의 요구를 언제나 살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단체로 취급하지 아니하십니다. 이 시간에 여기 여러분이 계십니다만, 주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시던 말씀을 멈추시고 들것에 눕혀 지붕에서 내려오는 환자에게 눈길을 돌리셨습니다. 여기서 바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놀라운 기적입니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일어 날 수 있었습니까? 기적이 일어나는 데는 반드시 그 배경이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보세요.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환자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환자를 예수님께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에는 역사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이 있으면 삶의 자세가 적극적이 됩니다. 적극적인 사람이라야 일을 합니다. 소극적인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고, 믿음이 없는 사람은 일을 하지 못합니다. 인류 역사를 통해 보세요. 큰 일을 한 사람들은 큰 믿음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크게 믿으면 큰 축복 받고, 적게 믿으면 적게 축복 받고, 아무 것도 안 믿으면 아무 축복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믿는 대로 됩니다.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못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은 언제나 그 삶의 자세가 적극적이고 긍정적입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 열두 사람의 정탐을 미리 보내지 않았습니까? 명한 대로 40일 동안을 다 다녀보고 와서 보고하는데, 열두 사람 중에 열 사람, 그러니까 대다수의 사람들은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그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요, 이렇게 두 사람이 꿰메고 올 정도의 포도가 열리고 이런 석류가 맺는 아름다운 땅입니다. 그러나 그곳의 성곽은 높고 견고하고, 거기 사는 아낙 자손은 키가 큰 거인인데, 아마 그들이 우리를 보면 메뚜기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땅은 차지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보고를 들은 백성들이 얼마나 낙심하고 원망했습니까?

 

그러나 나머지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은 같은 곳에 가서 같을 것을 보았지만, 그 관점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산이 험하고 골짜기가 깊고 성곽이 견고하고 거기 사는 아낙 자손이 키가 큰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땅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시면 반드시 지키십니다. 물론 거기 사는 아낙 자손이 우리보다 키가 큰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지키시던 신이 떠난 지 이미 오랩니다.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두려워 말고, 주저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갑시다."

 

여러분, 믿음으로 사는 사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아가는 사람의 앞날에는 어려움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은 이 어려움을 극복합니다. 이것이 다릅니다. 우리의 가는 앞날에 태산 같은 것이 가로막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산을 넘든지, 돌아가든지, 넘지도 못하고 돌아가지도 못하게 되면 힘들고 시간이 걸려도 산을 뚫고 터널을 만들면서 산 속의 금광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앞날에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렵다는 것과 못한다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가 아무리 믿음으로 산다고 해도 앞날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만 있으면 능치 못함이 없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더구나, 믿음 있는 사람은 이런 확신이 있을 뿐더러 열의가 있습니다. 내가 이런 확신이 있을 때는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내가 죽을 병에 걸렸다가 어떤 약을 썼더니 신비할 정도로 나아서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그런데 내가 아는 사람이 나와 똑같은 병에 걸렸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내가 먹고 나은 약을 소개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멀리 갈 것 없습니다. 우리는 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아니 우리의 죄와 허물로 죽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함을 받아서 새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받은 백성이 되어 이런 자유와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쁘고 감사한데, 아직도 내 주변에 주님을 모르고 믿지 않아 그 심령이 죽어가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나만 구원받았으면 되고, 나만 잘 있으면 됐지, 그 사람까지 상관할 것이 있나'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이 바른 생각이니까? "당신도 예수 믿으면 고침 받을 수 있습니다. 당신도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라고 확신을 가지고 열심히 증거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저희에게는 동정심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돕는 데는 동정심,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에게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환자들이 찾아오면 한 사람도 그냥 돌려보내신 적이 없습니다. 다 고쳐 주셨습니다. 어려운 자리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무엇입니까? 동정하는 마음입니다. 영어로는 'Compassion'이란 말을 쓰는데 본래는 라틴어에서 나온 말입니다. 'Com'이란 '함께 한다'는 뜻이고 'Passion'이란 말은 '고통한다, 아파한다'는 뜻입니다. '함께 아파하는 것'이 동정입니다. 나는 배가 고프지 않지만 배고픈 사람을 볼 때 배고픈 사람의 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나는 건강하지만 병든 사람을 볼 때 병든 사람과 같이 아파하는 것이 동정입니다. 동정심이 있어야 도울 수 있습니다.

 

중풍병환자를 들것에 메고 온 사람들은 중풍병으로 고통하는 친구를 볼 때, 팔을 들려 해도 들려지지 않고 다리를 움직이려 해도 움직여지지를 않고, 얼굴 한쪽이 마비가 되어서 침이 줄줄 흐르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이 친구를 볼 때, '만일 내가 저런 자리에 있다면 어떻게 할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오셨다는데, 주님은 못 고치는 병이 없으신데, 주님께만 가면 고칠 수 있을 터인데' 하는 확신과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이 중풍병 환자를 도운 것입니다. 어떻게 도울 수 있습니까? 주님의 사랑을 통한 동정심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는 사람이 가질 마음의 자세입니다.

 

더구나 저희는 마음을 합해서 도왔습니다.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일할 때 마음을 합해서 도와야 합니다. 우리 나라에 내려오는 말에도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혼자 들 수 있는 종이이지만 함께 들면 큰 도움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양보하고 서로 존중해야 합니다. 나를 너무 내세우게 되면 협력이 잘 되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저희들이 중풍병 환자를 예수님께 데려온 것이 그냥 된 것이 아닙니다. 환자를 들것에 눕히고 오는데 수평으로 눕혀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의 키가 차이가 있지 않겠습니까? 키가 큰 사람, 키가 작은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키가 큰 사람은 들것을 드는 데 높아졌을 것이고, 키가 작은 사람은 낮아졌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환자의 수평을 위해서는 키가 큰 사람이 아래로 손잡이를 낮추었을 것이고 키가 작은 사람은 들 것 손잡이를 높이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 쏟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데려오는 일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들것에 환자를 눕히고 들고 걸어오는 일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키가 큰 사람은 다리가 기니까 성큼성큼 걸어가는데, 키가 작은 사람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키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이 보조를 맞추려니까 빠른 사람은 속도를 늦추고, 느린 사람은 속도를 더해서 보조를 맞추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서로 양보하고 존경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갈보리교회의 큰 무리가 모든 생각이 다르고 주장이 다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처럼 화평하게 지낼 수 있습니까? 어떻게 서로 협력할 수 있습니까? 비결은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마음을 품으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서, 우리 서로가 다르지만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서로가 양보하고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 하고 화목함으로 한국뿐만 아니라 온 세계에 아름답고 신령한 노래로 감동을 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소문난 교회가 될 줄 믿습니다. 협력이 필요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은 개인의 재능이나 능력이 우수합니다. 그런데 협력하는 것이 좀 부족합니다. 협력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 협력이 위대한 일을 합니다.

 

여러분, 우리 한국 민족이 협력하면 세계 어느 민족도 따라올 수 없는 우수한 민족이 되리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협력합시다. 그래서 위대한 역사를 이루는 위대한 민족이 되십시다.

 

 

 

뿐만 아니라, 저희에게는 인내심이 있었습니다.

 

저희가 중풍병자를 예수님이 계신 집까지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집안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현관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창문으로도 들어 갈 수가 없었습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포기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뚫기 시작했습니다. 남의 집 지붕을 뜯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빈집도 아니고 집안에는 사람이 꽉 차 있는데 어떻게 지붕을 뜯습니까? 어느 교회에서는 주일예배를 드리는데 천장이 무너져 내려 인명의 피해를 입은 참사가 생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어려움을 무릅쓰고, 무례함을 개의치 아니하고 한 심령을 살리기 위해서 남의 집 지붕을 뚫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 귀한 일, 보람된 일,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하지만 쉽게 되는 것은 없습니다. 좋은 일일수록, 선한 일일수록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선한 일입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면 거두리라." 선한 일을 하는 데는 반드시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있다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끝까지 힘쓰면 반드시 열매 맺게 될 날이 올 것을 믿습니다.

 

20세기의 성자라고 일컫는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박사가 한 말은 유명합니다. "너희는 우물을 파되 한 우물을 파라. 샘물이 날 때까지 파라." 많은 사람들이 우물을 파다가 물이 안나오면 다른 데를 파고, 거기서 또 안나오면 또 다른 데를 파고, 그래서 왔다갔다하다가 평생을 다 허비합니다. "그러지 말고 10m 파서 나오지 않으면 50m 파고, 50m 파서 물이 안나오면 100m 파고, 100m 파도 안나오면 150m 파라. 그 이하로 내려가라. 시간이 걸리고 힘들어도 계속 파라. 샘물이 나올 때까지 파라." 옳은 말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생수를 팠는데, 100m 이하로 내려가 반석이 있는데, 그 반석에서 생수가 솟아났습니다. 물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또 얼마나 수량이 많은지 모릅니다. 6개월마다 한 번씩 수질검사를 하는데, 아주 양질의 물로 판정을 받았습니다. 지금 용인에 기도동산을 건축중인데, 100m 이하로 내려갔더니 아주 좋은 생수가 풍성하게 솟아나고 있습니다. 가뭄을 모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땅속 깊은 곳에 흐르는 물을 뽑아 올리기 때문입니다. 힘들어도 땅을 파면 샘물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하는 일이 선한 일이라 믿을 때 계속하면 반드시 열매 맺게 될 줄 믿습니다.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입니다.

 

예수님은 들것에 들려 지붕의 구멍을 통해 내려온 환자에게 "소자야 네 죄 사람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환자의 병의 원인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의사는 환자의 반수 이상이 약이나 치료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대신에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필요로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만병의 의사이십니다.

 

그러므로 "네 병이 나았다"고 말씀하신 대신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기적입니다. 그 사람의 육체가 고침을 받지 못했다고 해도 그의 영혼은 두려움의 멍에로부터 자유함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중풍병 환자를 낫게 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항상 그렇게 사하신 것은 아닙니다.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갔을 때 주님은 언제나 가장 절실한 요구를 들어주십니다.

 

 

 

예수님은 때때로 무거운 짐을 들어주시고, 한편 무거운 짐을 참아낼 수 있는 힘을 더해 주십니다. 우리의 삶의 환경을 변화시켜 주실 때도 있지만,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해 주십니다. 때로는 상황을 만드시며, 그 상황에서 새로운 인간을 만드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영과 육을 치료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중풍병자의 병을 고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낙심할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중풍병자를 어떻게 도울까요? 중풍병자를 만병의 의사이신 예수님께 데려오는 것입니다. 데려오면 병을 고치시는 것은 주님이 하십니다. 주님이 죄를 사해주시고, 육신의 병까지 고쳐주시고, 온전케 하십니다.

 

내가 내 남편, 내 아내, 내 부모, 내 자녀, 내 친구, 내 이웃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이웃을 주님께 모시고 올 수는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게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께 가기만 하면 고침 받고 구원받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어려움이 있어도 인내함으로 주님께 데려오면 주님께서 그 심령을 고쳐주시고 구원해주시는 기적이 나타날 줄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 삶의 주변에 반신불수 된 심령이 얼마나 많습니까? 몸은 건강한데, 그 영혼 구원받지 못했으면 반신불수입니다. 자식은 많은데, 그 영혼 구원받지 못했으면 반신불수입니다. 재물은 많은데, 영혼이 구원받지 못했으면 반신불수입니다. 권력은 있는데, 영혼이 구원받지 못했으면 반신불수입니다. 이런 사람을 구원하는 길은 내가 하는 것 아닙니다. 영혼의 반신불수를 어떻게 도울 수 있습니까? 주님께 데려와야 합니다.

 

우리가 다가오는 부활주일 3.3.1 새생명 초청잔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일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못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병든 심령을 고치지는 못해도 예수님께 데려올 수야 있지 않습니까? 빌립도 나다나엘을 만나 예수님 이야기를 했더니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긴 논쟁을 한 것이 아닙니다. "와 보라"(Come and See) 했습니다.

 

구원은 주님이 주시는 선물이고 우리는 내 이웃을 주님께로 데려오면 됩니다. 이제 이 초청의 날을 위해서 마음 정하시고 간절히 기도하시고, 최선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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