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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주신 생명(시 8:1-9 ) / 박조준 목사

by 【고동엽】 2021. 12. 27.

하나님이 주신 생명

시편 8:1~9

 

 

 

오늘 읽은 말씀은 다윗이 쓴 시입니다. 이 시편은 모든 시편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시편이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하늘을 보고,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달과 별을 볼 때에 사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늘과 땅에 나타난 주님의 영광을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찬송합니다. 하늘과 땅에 가득한 만물은 조물주 하나님의 지혜로운 솜씨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 만물을 바라볼 때 그냥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눈이 어두워져서 이 놀라운 세계를 몰라봅니다. 이것은 비극입니다. 미국이나 구라파가 어디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마는 어떤 곳은 정말 경치가 아름답고 물이 좋고 공기가 맑은 곳이 있습니다. 거기에 사는 교포들을 만나 보면 외국에서 사노라고 고생이 많아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 좋은 환경,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만나는 분에게 "이렇게 좋은데 살아서 좋겠어요"라고 말씀하면 "무엇이 좋은데요?"라고 반문합니다. "아니, 이렇게 물 좋고, 공기 맑고, 경치 좋은데 사시는데 종지 않으세요?"라고 말하면 "뭐 경치 좋은게 밥 먹이나요?"라고 아주 볼멘 소리로 대답합니다. 가슴 아픈 일입니다. 얼마나 쪼들리면 그럴까?

 

오직 어린아이 같은 깨끗한 마음의 소유자만이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지혜와 그 손의 자취를 바르게 믿고, 알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어른보다 편견이 적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나 의지를 그대로 시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어린아이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 갈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어린아이의 눈을 보셨습니까? 얼마나 맑고, 깨끗합니까? 어린아이의 눈에는 티가 없습니다. 속담에 "눈은 마음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옳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에서도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마음이 깨끗해야, 마음의 눈이 밝아야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어른들의 눈을 보셨습니까? 많은 사람의 경우 어른들의 눈동자에는 혈관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눈이 벌건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화내고, 미원하고, 시기하고, 욕심부리고, 정욕 품고 그러는 동안에 눈 흰자위가 붉은 혈관이 나오기 시작해서 출현된 눈처럼 되어 버리고 맙니다.

 

어른도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남을 미워하거나, 혈기 부리지 아니하고, 시기심이 없이 사는 분의 눈을 보세요. 깨끗합니다.

 

어린아이는 겸손합니다. 어린아이는 부모를 온전히 신뢰합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에게 부모만 있으면 아무런 걱정도 염려도 없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걱정과 근심에 싸여 밤에 잠을 자지 못하고 혈압이 오른다, 당이 나온다 야단입니다.

 

우리에게도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의 소유자가 되는 것이 정말 필요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3,4절을 보세요.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주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죄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큽니까? 따라서 기대 역시 큰 것입니다.

 

5절 말씀을 보세요.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저'는 우리 인간을 가리킨 것입니다. 인간을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 '천사'라는 말을 히브리어로 '엘로힘' 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에 보면 '천사'라는 말 대신에 '하나님'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지으실 때 그저 하나님 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셨습니다.

 

여기 인간의 존엄성이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입니까?

 

이사야 40장 6절에는 '풀과 같다'고 했습니다.

 

시편 62편 9절에는 '거짓'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에는 '질그릇' 같다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4장 14절에 보면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다고 했습니다. 혹은 장막에다 비유했습니다.

 

동양철학에서도 인생의 허무함을 말해서 창해일속(滄海一粟)이라고 합니다. 혹은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고 합니다. 어떤 짓궂은 사람은 표현대로 하면 '없고, 없고, 없고, 없다가 없어지는 것이 인간이다'라고 하기도 합니다. 어린 때는 철없고, 젊어서는 정신없고, 중년 되면 시간 없고, 늙어지면 형편없다가 없어지는 것이 인간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부정적인 면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심을 받은 것입니다. 스스로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의 관을 씌우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창세기 1장 27절에 보면 "하나님이 곧 자기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의 관을 씌우신 것입니다. 다른 피조물에게 이런 관을 씌워준 일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성령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는 로댕의 명장 '하나님의 손'이 있습니다. 하얀 대리석으로 아름답게 조각한 로댕의 걸작입니다. 이 작품 앞에서는 사람마다 너무 아름답고, 신비스러워서 발걸음을 멈추고 넋을 읽고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인간의 생명이 처음으로 탄생하는 위대한 창조의 순간을 그린 역작입니다. 벌거벗은 두 남녀가 서로 꼭 안고 하나님의 손에서 태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순간인지 모릅니다. 위대하고 신비롭고 장엄한 순간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창조했습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만남과 사람에서 수많은 생명들이 탄생했습니다. 여기서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은 아름답습니다. 생명의 탄생처럼 위대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생명의 창조처럼 놀라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19세기의 천재적인 예술가 로댕은 '하나님의 손' 이라는 작품에서 생명의 탄생과 창조를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창조의 손입니다. 하나님의 손은 사랑의 손입니다. 하나님의 손은 지혜의 손입니다. 하나님의 손은 평화의 손입니다. 하나님의 손은 신비의 손입니다.

 

하나님은 미의 천재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아름다운 대자연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자연은 하나님의 위대한 예술품입니다. 하나님의 마드신 놀라운 작품입니다. 자연 중에 아름답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높은 산, 푸른 바다, 큰바위, 뭉게 구름, 넓은 하늘, 흘러가는 강물, 녹색의 잔디밭, 무성하게 우거진 나무,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꽃들, 온 세상을 덮는 흰 눈 모두가 아름다운 것뿐입니다. 자연은 미의 대향 연이요, 아름다움의 일대파노라마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은 신비합니다.

 

봄에 밭을 갈고 작은 씨를 땅에 뿌립니다. 이 딱딱한 작은 씨앗에서 생명의 푸른 싹이 도저히 나올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땅의 습기와 따뜻한 햇볕을 받으면 굳은 땅을 헤치고 파릇파릇한 새싹이 힘차게 돋아납니다. 굳은 껍질을 깨뜨리고 새 생명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생명은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바위를 뚫는 힘이 있습니다. 새 생명이 탄생하는 것처럼 신비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젊은 남녀가 깊은 사랑을 합니다. 그러면 새로운 생명이 탄생합니다. 그 어린 아기는 엄마를 닮고 아빠를 닮습니다. 눈매를 닮습니다. 코 모양이 닮습니다. 입 모양이 닮고 음성이 닮습니다. 얼굴 표정도 닮고, 재주나 성격도 닮습니다. 심지어 걸음걸이까지도 엄마와 아빠를 닮습니다. 생물학자들은 유전자와 염색체의 작용이라고 말합니다. 이 얼마나 신비로운 일입니까? 어떻게 아기가 엄마를 닮고 아빠를 닮을까? 신비한 일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가지고 오직 한번뿐인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 세상에 생명을 둘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시 세상에서 두 번 사는 사람도 없습니다. 세상에 한번 나고, 한번 죽는 것은 생명의 철칙입니다. 대 우주 속에 오직 하나만 주어진 생명이요, 영원 속에 오직 한번 허용된 생애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명이 한없이 소중하고, 우리의 인생이 더할 나위 없이 엄숙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광대무변한 대 우주 속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은 귀한 것입니다. 이것을 소위 '고유 명사적 존재'라고 합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을 우리는 고유명사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름은 고유명사입니다. 나와 꼭 같은 사람은 이 넓은 천지에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라는 존재는 개성을 가진 인격적 생명입니다. 사람이 왜 소중합니까?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개성이 있기 때문에, 인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개성이 있습니다. 저마다 얼굴이 다르고, 목소리가 다릅니다. 저마다 생각이 다르고 표정이 다릅니다. 나는 내 길을 가는 것이지 남이 내 인생을 살 수 없고 내가 남의 인생을 살아줄 수도 없습니다.

 

사람은 물건이나 기계가 아닙니다. 인간은 생명이요, 인격이요, 정신이요, 영혼입니다. 사람의 얼굴은 개성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얼굴을 보고 그 사람을 알아봅니다. 손이나 발을 보고는 그 사람을 알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거의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볼 때 사람의 얼굴은 그 사람의 개성을 가장 강하게 가장 뚜렷하게 나타내는 것입니다. 눈과 코와 입을 주축으로 하는 사람의 얼굴은 개성의 기념비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지구상에는 60억이 넘는 사람이 제작기의 얼굴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얼굴이 저마다 다르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요 신비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저 눈과 코와 입, 이 세 가지 요소를 가지고 어떻게 그 많은 사람의 얼굴을 각각 다르게 만들 수 있을까? 신비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저는 사람의 얼굴을 볼 때마다 어떻게 저렇게 사람을 만들 수 있을까 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밝은 얼굴, 어두운 얼굴, 잘생긴 얼굴, 못생긴 얼굴, 상냥한 얼굴, 무뚝뚝한 얼굴, 온순한 얼굴, 사나운 얼굴, 우아한 얼굴, 냉랭한 얼굴, 부드러운 얼굴, 딱딱한 얼굴, 웃는 얼굴, 화가난 얼굴, 둥근 얼굴, 갸름한 얼굴, 순한 얼굴, 험한 얼굴, 기뻐하는 얼굴, 슬퍼하는 얼굴 인간의 얼굴처럼 개성을 표현한 세계가 또 있을까요?

 

인간은 말하자면 나를 대표합니다.

 

사람들은 내 얼굴을 보고 나를 압니다. 얼굴은 단순한 생물학적 모형이 아닙니다. 얼굴은 그 사람의 인품이요 성경의 반영이요, 교양의 상징이요, 사람됨의 표현입니다. "사람의 나이 40이 되면 자기 얼굴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에이브라함 링컨의 말은 너무 의미 있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얼굴을 선택할 자유가 없습니다. 태어날 때 이미 결정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인간의 얼굴은 살아가면서 많이 달라집니다.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면 자연히 아름다워 집니다. 추한 마음을 가지면 그 얼굴이 자연히 추해집니다. 인생을 성실하게 살아가면 얼굴 표정에 성실의 향기가 저절로 풍깁니다. 음탕한 마음으로 살아가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음탕한 표정이 얼굴에 깊이 배어 버립니다. 인생을 곱게 살아가면 얼굴도 곱게 늙습니다. 인생을 거칠게 살면 얼굴도 자연히 거칠게 마련입니다. 얼굴은 마음의 거울입니다.

 

얼굴은 자기 자신이 만드는 것입니다. 내 마음과 행동이 내 얼굴의 표정을 변화시킵니다. 어떤 이의 말대로 "얼굴은 정신의 이력서요, 행동의 성적표요, 과거의 생활사(生活史)입니다"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 하는데 따라서 그 사람의 얼굴이 달라집니다.

 

태어날 때의 얼굴은 이미 결정되어 있지만 태어난 다음부터는 내가 내 얼굴을 서서히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좋은 얼굴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닮은 사람이 되어야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은 이처럼 아름답고, 신비하고, 귀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귀한 생명에 대해서 책임을 바로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생명을 정말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을 사랑하는 것은 도덕의 제일 원리요, 윤리의 기본 원칙입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남의 생명을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남의 생명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악입니까? 생명을 미워하고, 생명을 저해하고, 생명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한다는 말은 이기심과는 다릅니다. 이기심이란 나만 이롭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이롭게 하기 위해서는 남을 해치는 것까지 사양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몸가짐을 조심하고, 품행을 바르게 하려고 힘씁니다. 반면에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자포자기하고, 자학자멸 합니다. 자포자기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불평과 불만이 가득하여 되는대로 행동하고 자기자신을 마구 다루게 되는 것입니다. 자학은 자기를 헤치고 학대하는 것이요, 자멸을 스스로 멸시하고 모독하는 것입니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한 자세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부정적인 자세요, 다른 하나는 긍정적 자세입니다. 부정적인 삶의 자세를 가진 사람은 언제나 자기를 멸시하고, 자기를 학대하고, 자기 스스로를 업신여깁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사람은 쉽게 좌절감에 빠지고, 열등감에 사로 잡혀 자포자기하고, 자학자멸 합니다. 이런 사람은 무슨 일에든지 의욕이 없고 소극적이고 피동적입니다. 부정적인 삶의 자세를 가진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려는 진취적인 정열이 없고, 무엇을 해 보려고 하는 적극적인 기상이 부족하고, 자기의 목표를 기어코 달성하고야 말겠다는 씩씩한 개척정신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현상유지가 고작이고, 무사안일에 주의에 흐릅니다. 그에게는 기백이 없고, 정열이 없고, 용기가 없고, 의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부정적인 삶의 자세에서 벗어나야 하고, 이를 극복해야만 합니다. 이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가슴을 펴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깨를 펴고, 아랫배에 힘을 주고, 앞을 향하여 바울처럼 하나님이 위해서 부르실 상급을 위하여 힘차게 나아가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스스로 학대합니까? 왜 자기자신을 모멸합니까?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바람직한 것은 긍정적인 삶의 자세입니다. 내가 나를 보는 눈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이고, 진취적이어야 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런 강한 신념이 필요합니다. 일곱 번 넘어지면 여덟 번 일어난다는 칠전팔기의 씩씩한 기상, 끈질긴 정신을 가지고 힘차게 전진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도 넘어집니다. 그런데 넘어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넘어졌어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는 용기가 더욱 중요합니다. 긍정적인 자아관을 가진 사람에게는 전진과 도전 그리고 승리가 있을 따름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실패하는 것이 절대로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한 두 번의 실패는 다 있을 수 있습니다. 정말 부끄러운 것은 실패한 다음에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긍정적인 삶의 자세를 가진 사람은 강한 의욕과 불타는 목표의식과 확고부동한 신념을 가지고 승리와 성공을 위하여 꾸준히 전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생명은 성장해야 합니다.

 

생명의 특색은 성장입니다. 성장하지 않는 생명은 생명이 아닙니다. 죽을 물건은 성장하지 않습니다. 돌멩이나 흙은 성장을 모릅니다. 사실 성장한다는 것처럼 기쁘고, 보람되고, 흐뭇한 것은 없습니다.

 

봄에 땅을 갈고 씨앗을 뿌리면 새싹이 나고, 뿌리가 돋고, 줄기가 뻗치고, 가지가 생기고, 잎이 퍼지고, 꽃이 피어 열매를 맺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신비한 일입니까? 성장에는 기쁨이 있고 보람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위대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고, 놀라운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잠재력과 가능성을 최고도로 발휘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배워야 합니다. 자장 유능한 사람은 끊임없이 배우는 사람입니다. 배우는 것처럼 보람있고, 흐뭇하고, 생산적인 것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배울 수 있습니까?

 

배우려는 사람은 겸손해야 합니다. 교만한 삶은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배우려는 사람은 향상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끊임없이 앞으로 전진하려는 자세, 위로 올라가려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하나님 주신 귀한 생명을 가진 우리는 날마다 새로워지고, 날마다 전진 발전해야 합니다.

 

배우려는 사람은 활동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왜 우리가 배웁니까? 활동하기 위해서입니다. 왕성한 활동을 하는 사람이 부지런히 배웁니다. 활동이 무엇입니까? 글자 그대로 살아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생명은 곧 활동입니다. 산다는 것은 움직이는 것입니다. 움직일 때 성장합니다.

 

사람이 언제 가장 많이 자랍니까? 세상에 태어나서 1년안에 제일 많이 자란다고 합니다. 그때가 제일 많이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어른은 갓난애의 활동을 따를 수 없습니다.

 

심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사람은 일반적으로 자기 능력의 25퍼센트밖에는 사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자기 능력의 4분의 1정도밖에는 발휘하지 않으면서 내 능력의 전부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천재는 자기 능력의 100퍼센트 발휘한다고 합니다. 우리 인생의 전부를 쏟아 부을 때 거기에 승리가 있고, 성공이 있고,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승자와 패자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생명의 전부를 쏟느냐? 아니면 절반만 쏟느냐? 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귀한 생명을 몽땅 쏟아 헌신하므로 인생에 결코 절망은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며, 보람되고 의미 있는 성공적인 삶의 자취를 남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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