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신 주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20:19~29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주님이 다시 사심을 기념하는 이 기쁜 부활 주일에 우리 주님의 부활의 권능과 축복이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돌무덤에 깊이 모셨습니다. 그런데 장사한 지 사흘만에 돌무덤을 헤치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은 기적입니다. 이 기적을 우리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설명할 수 있다면 기적이라고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부활절은 이 세상의 모든 어두움을 헤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는 부활의 권능이 나타난 날입니다. 그래서 이 우주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이 우주와 인간 역사를 다스리고 계신 사실을 보여주신 날입니다.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과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고난 주간에 된 일을 기억하시지요?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 때, 모든 사람이 나와 예수님을 환영하며 "호산나"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며칠이 못되어 예수를 적대하던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 그리고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반역자 가룟 유다의 협력을 얻어 예수를 체포했습니다. 공회에서는 예수님에게 불의한 재판을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게까지 압력을 가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민중들의 마음을 조작해서, 말하자면 데모를 일으켜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소리지르게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 빌라도로 하여금 본의는 아니지만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내어주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가시게 될 때, 원수들은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이제야 우리가 생각한 대로 목적을 다 이루었다'고 가슴을 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될 때는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했고, 못박히시는 예수님을 보고 희롱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면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원수들은 개가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고, "우리가 이겼다"며 흡족해 했을 것입니다.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시원해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불의가 정의에게 승리했습니다.
선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악은 개가를 부르게 된 것입니다. 미움이 사랑을 무색하게 만들었습니다. 어두움이 빛을 삼켜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원수들과는 정반대로 환멸과 좌절에 빠져버렸습니다. 실망했습니다. 모두가 상심이 되어 있었습니다. 허무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씩 둘씩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현상이 오래 갈 수 있습니까? 살아 계신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이 세상에 어두움의 세력이 오래 지배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어두움을 헤치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이 시간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을 만나 뵙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서 제자들에게, 혹은 여러 사람에게 나타나셨는데, 사도 요한이 기록한 복음서에 보면 네 차례 나타나셨습니다. 어쩌면 주님께서 찾아오신 네 종류의 사람은 오늘 우리를 대표한다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발견되는 사실 중에 공통되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이 좀 쉬려고 자리를 피하시면 사람들은 예수님이 쉬러 가신 곳까지 찾아가서 실상 한가히 쉬기도 어려우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여러 가지 형편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와 만나주셨습니다.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를 찾아와 만나주십니다. 생각하면 감사하고, 감격스럽고, 황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이것은 바로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기독교는 죄의 값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 편에서 먼저 일하시는 종교입니다. 인간의 탐구나 노력에 의해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선물로 준비해 놓으시고 누구든지 믿음의 팔을 벌리면 받게 되는 것이 기독교의 도리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세상에 나신 크리스마스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이 우리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희생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것이 우리 주님의 고난의 십자가요, 죽음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 예수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감격 속에 지키는 부활주일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 위해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다시 사신 예수님을, 아니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나 뵙는 일입니다. 그래서 슬픔과 고독, 두려움과 의심, 그리고 낙심과 절망의 자리에서 돌아앉는 일입니다.
그러면 부활하신 주님이 누구를 찾아오셨습니까?
슬픔 속에 있는 마리아를 찾아오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렸던 여인입니다. 사람들에게 멸시와 냉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 여인이 예수님에 의해 고침을 받고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전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믿고, 소망 중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독실한 신앙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에게 있어서 전 소망이요 생명이었던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참혹하게 세상을 떠나시게 되니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 젖어드는 슬픔과 고독은 무엇으로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그녀는 만나서 마음 털어놓고 이야기할 만한 가까운 친구도 없었습니다. 그녀의 사랑을 전적으로 쏟아 바칠 만한 애인도 없었습니다. 더구나 마리아의 인생을 선히 지도하며 때때로 충고해줄 만한 후견자도 없었습니다.
사실 마리아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친구요, 애인이요, 선생이요, 후견자와 같았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비참하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마리아는 한없이 울었습니다. 예수님이 빌라도의 궁전에서 심판 받으실 때, 연약하신 몸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가시다가 쓰러지고 거꾸러지실 때, 십자가에 못박혀 운명하실 때, 마리아는 밤을 새워가며 울었습니다.
사흘째 되던 날,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라도 발라드리고 싶어서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무덤의 문이 열리고 예수님의 시신도 없었습니다. 마리아는 정신없이 울고 서 있었습니다. 이때 한없이 울고 서 있는 마리아의 등뒤에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셔서 조용하고도 인자하신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아, 어찌하여 울고 있느냐? 그리고 누구를 찾느냐?" 여기서 "어찌하여"란 말은 "이제는 울 만한 이유가 없는데 왜 우느냐?" 하는 뜻입니다. "누구를 찾느냐?" 이 말은 "이미 죽은 예수를 찾을 필요가 없고, 죽었던 예수는 다시 산 예수로 네 앞에 있지 않느냐?" 하는 뜻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슬픔을 주는 것은 가까운 사람의 죽음입니다. 그러나 죽음보다 더 슬픈 것은 죽음 후에 찾아오는 고독입니다. 사랑하던 사람이 육신으로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죽음의 세계로 가 버렸을 때, 가슴 치고 땅을 치며 슬피 우는 것은 그때부터 찾아드는 고독이란 것 때문입니다. 빌리 그래함(Billy Graham)은 현대인의 가장 큰 고민이 '고독의 병'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고독에 사로잡혀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돌아서서 주님을 뵙는 순간 마리아의 슬픔, 마리아의 고독은 안개처럼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와 같다고 느끼며 외로워하고 고독해 합니다. 혼자여서 외로워합니다. 그런가 하면 군중 속의 외로움이 있습니다. 심지어 이렇게 교회에 나와도 아는 사람이 없으니 외롭습니다. 병으로 고통을 당할 때 외롭습니다. 동정을 해주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아픔을 겪는 문제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혼자입니다.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이 오늘 슬픔과 고독 속에서 몸부림치며 울고 있는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너는 왜 울고 있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돌아서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뵐 수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 뵘으로 슬픔이 사라지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누구를 찾아오셨습니까?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9절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자기들이 모인 집의 문을 모두 잠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으니 이제 다음은 그를 따르던 우리 차례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아마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가룟 유다를 내놓고는 평소에도 그렇게 담대한 사람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가 겁쟁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원수들에게 체포되니까, 겟세마네에서 아예 다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큰소리치며 장담하던 베드로도 얼마 동안은 멀리 서서 따라가다가 가야바의 뜰에서 심문 받으시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에 질려 두려운 생각에 어린 비자에게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게 되니까, 아무래도 자기들에까지 화가 미칠 것으로 생각되어서 두려워 떨면서 예루살렘에 있는 어떤 신앙의 동지의 집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두려운 나머지 저희들은 문을 꼭 잠그고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하고 숨소리마저 죽여가면서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빌라도를 대표하는 로마의 정치적 권력을 두려워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가야바를 대표하는 유대교 신봉자들을 두려워했습니다.
또 다른 하나의 이유는, '3년 동안이나 예수님만 따라다녔는데 세상에 대하여 어두워졌을 뿐만 아니라 누가 이제 우리를 이 사회에서 받아줄까' 하는 불안에서 두려워했습니다.
이렇게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하여 "너희에게 평안이 있으라"고 평안을 비셨습니다. 이 평안은 육신적인 평안이 아니라 두려운 생각을 없애는 마음의 평안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 장차 예루살렘에 입성하면 고난을 당하게 되고 십자가를 지게 될 것에 대해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주님이 안 계신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될까' 해서 근심에 쌓이게 되었습니다. 근심하는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용기와 함께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오늘도 나의 신념을 받아주지 않는 사회 앞에서, 나의 정의를 꺾어버리고 마는 권력 앞에서, 나의 진실을 막아버리고 마는 교권 앞에서 할 말을 하지 못하고 골방의 문을 잠그고 두려워하는 분은 안 계십니까?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공포 속에서 움츠리고 있는 우리에게 참 평안과 용기를 주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누구를 찾아 오셨습니까?
의심에 잠겨 있는 도마를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열 사람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뵙고 그렇게 두렵던 두려움도 사라지고, 평안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뵙게 된 것이 그렇게 감격스러워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도마라는 제자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주님이 부활하신 것을 만나 뵈었다고 하면서 감격해 할 때 도마는 주님의 부활을 믿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의심 많은 도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경우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도마가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고 한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왜요?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일은 일찍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더라도 다시 살았으면' 하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일은 도무지 없었습니다. 아무리 친구들의 말이라고 하지만,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입을 모아 같은 말을 하면 할수록 도마는 더 강하게 주님의 부활을 부정했습니다. 도마는 실증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여드레를 지난 후에 부활하신 주님이 도마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전과 같이 도마를 향하여 평안을 비셨습니다. 이 평안은 의심하는 마음에 주는 평안입니다. 왜요? 의심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평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평안이 없는 이 시대를 회의의 시대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을 의심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자기 자신도 못 믿고 사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서로가 의심하는 이 시대는 한 마디로 불안한 시대입니다. 내가 너를 믿지 못하고, 네가 나를 믿지 못하는 데서 불안이 생깁니다.
문호 괴테는 그의 명작 {파우스트}에서 이런 내용의 말을 했습니다. "파우스트가 세상의 모든 학문과 기술을 통달하고는 그 마음에 평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삶의 수수께끼를 해결하지 못해서 독약을 마시고 스스로 자기 생명을 끊으려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새벽 공기를 타고 멀리서 들려오는 예배당 성가대의 '예수 다시 사셨다'는 부활 찬송을 듣는 순간, 그는 새로운 용기와 소망을 얻게 되어 자살 기도를 중단하고 재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반드시 의로운 사람이 잘되고 형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때는 악하고 불의한 자가 땅위에서 잘 되고 번영하는가 하면, 의롭게 살아보려는 사람이 까닭 모를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그럴 때 우리 마음에는 의심이 생깁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롱펠로우(Longfellow)의 말은 의미심장합니다. "하나님의 연자맷돌은 매우 천천히 돌아갑니다. 그러나 아주 부드럽게 갑니다." 그렇습니다.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역사가 이렇게 진행되고 있는데 왜 가만히 계실까?' 회의를 품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은 우리 모든 인간의 회의에 대한 최후의 해답이 되십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진실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도 모든 의심 버리고, 확신 가지고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누구를 찾아오셨습니까?
실패를 거듭하는 제자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후 제자들의 실망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실망한 나머지 3년 전에 떠났던 디베랴 바다에 "나는 고기나 잡으러 가겠네" 하며 나섰고, 고기잡이 경험이 있는 다른 사람들도 함께 따라나섰습니다.
오랜만에 고기 그물을 던졌지만 이상할 정도로 고기가 잡히지 않았습니다. 날이 밝아 동이 트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실패를 거듭하고 있는 제자들을 찾아 바닷가에 오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오셨으리라는 기대도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제자들은 지나가시던 어떤 어른이 하시는 말씀인줄 생각하고, 그저 "없는데요"라고만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말씀하셔서 그렇게 했더니, 이게 웬일입니까? 밤새 고기를 잡느라고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었는데, 그 어른의 말씀대로 했더니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배에 있던 제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눈치 빠른 요한이 베드로에게 "베드로 형님, 주님이십니다"라고 귀뜸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는 순간 놀랍기도 하고 감격스럽기도 하여 겉옷을 두른 채 바다에 뛰어내려 주님께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미리 준비해 놓으신 조반을 함께 나눈 다음, 주님께서 베드로를 따로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시며, 인간의 영혼을 먹이고 기르는 큰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의와 사랑과 진리를 위해서 생활하다가 실망한 사람에게 찾아오셔서 새 소망을 안겨주십니다.
불의가 정의를 이기는 것 같고, 양심이 권력에게 무참히 짓밟히고, 미움이 사랑을 무색하게 하며, 어둠이 빛을 삼켜버리고, 거짓이 진실을 희롱하는 때가 있어도 이런 현상이 오래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실증하고 있습니다.
정말 감사한 것은 실패한 베드로에게 실패의 원인을 따지지 않으시고 "지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며 사랑을 다짐하신 후에 귀한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서 우리의 과거를 물으신다면 누가 감히 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 마음 중심으로 "주님을 세상보다 더 사랑하느냐?"고 다짐하십니다.
우리도 과거를 생각하면 주님 앞에 설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 "제가 주님을 정말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시면 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기쁨과 용기와 확신, 그리고 새 소망을 안겨주실 줄 믿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셨는데, 모셔들이기만 하면 이런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기쁜 부활주일,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을 영접함으로 놀라운 삶의 변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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