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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강 선교사들은 한국종교를 어떻게 여겼을까요?

by 【고동엽】 2021. 12. 18.

* 첨부파일에는 각주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8강 선교사들은 한국종교를 어떻게 여겼을 까요?

 

 

선교사들은 한국종교를 어떻게 여겼을 까요?

선교사들은 서양 사람들입니다. 선교사들의 한국종교 이해는 기록을 통해서도 찾을 수 있는데, 그 중 한 가지를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에서 조선의 종교에 대해 몇 마디 언급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불교(佛敎), 유교(儒敎), 그리고 도교(道敎)가 이 나라를 지배했지만, 점차 그들이 한때나마 가졌던 영향력은 거의 사라져 가고 있다. 대개의 사람들은 종교를 신봉하지 않는다. 논리의 단순한 철학 체계인 유교는 조상숭배를 요구하는 원칙 때문에 사람들을 강하게 끌고 있다. 조선 사람들의 마음에 가장 강력하고 가장 만연된 미신을 야기하는 이러한 관습은 강철보다 더 강하게 그들을 구속하고 있다. 아주 사소한 규칙에 관한 것이라도 격식을 차려 조상을 숭배하지 않으면 성나고 무시된 영혼의 분노로 무서운 재앙이 있을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따라서 강제된 노역이 힘들고 피곤하지만, 하나라도 빠뜨려서는 안 된다. 만일 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어서 이러한 예식을 수행하지 않는 가엾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재난을 겪게 된다. 여자든 남자든 그 사람은 가장 신성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반역자 이상으로 취급 된다. 불교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으며, 최근에 와서는 승려들이 도시에 출입하는 것도 금지 되었다. 그들의 사회적 서열은 조선에서 가장 하층 계급인 백정 다음이다.(중략) 여자들과 어린 아이들, 그리고 특히 무지한 사람들은 아직도 어느 정도 불교를 숭배하고 믿는다. 또한 이 계층들은 모든 종류의 수많은 악신들, 즉, 땅, 하늘과 바다에 몰려드는 신 또는 악마, 여러 질병의 신, 직업의 신을 경배하고 두려워한다. 대체로 악마인 이들은 북을 치고 종을 울리며 또 언급할 수도 없는 무수한 다른 의식을 행하며 기도 자와 헌신 자(獻身者)들의 비위를 맞추어야 한다. 그들이 믿는 신중에서 가장 위대한 신은 현세의 신들의 화신(化神)인 하늘인데, 그것을 우리가 찾을 수 있다면 구약성서에서 나오는 바알신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나 이러한 낡은 미신을 바탕으로 하는 그들의 신념은 점점 약화되고 있다. 대개의 경우 옛 풍습이나 이에 대한 여론은 종교의 외형적인 모습만을 유지하고 있다. 그들은 마치 양치기 없이 황야에서 길을 잃어 ‘기운이 없고 배고프며 죽을 지경이 된’양과 같다. 따라서 기독교 복음이 이르렀을 때는 예수의 존재를 받아들여 안식을 찾을 준비가 되어 있는 많은 지친 영혼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 감리교 신자를 포함하여 여나믄 명도 안 되는 우리 일행 앞에 산적해 있던 과제가 아무리 막막하게 보였더라도, 우리들 대 부분은 그때까지도 조선어 단어 몇 마디를 더듬거릴 수 있을 뿐인 상태에서 이 나라의 오래 정착된 종교 대신에 1,400만 명 이상의 국민들에게 기독교를 소개하고자 했다. 우리는 가난한 농부들과 나이 든 여자들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성공의 요소인 승리의 확실성은 신앙의 신성함에 있었으며, 우리를 보낸 전능한 하느님에게 있었다. 이러한 생각만이 우리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래서 선교사는 한국종교가 더 이상 조선 사회에서 희망을 줄 수 없었음을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릴리아스 호튼 여사(언더우드 부인)는 한국종교로 ‘불교, 유교, 도교’를 꼽았습니다. 그런데 불교, 유교, 도교는 한국에만 있는 종교가 아닙니다. 적어도 불교와 유교는 외국으로부터 이식된 ‘외래종교’입니다. 불교는 아시아에 널리 퍼져 있고, 유교는 중국 및 한국 그리고 일본에까지 전파되어 있던 철학의 사조였습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이 세 종교가 희망이 없었다기보다는 조선이라는 사회 자체가 희망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문제가 많았던 겁니다. 이런 사정은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중국은 여진족에게 지배를 당하면서 변발(辮髮)을 하였고, 청나라는 영국과의 전쟁에서 졌으며, 일본과의 전쟁에서도 졌던 영향력을 잃은 나라였습니다. 인구도 많고, 땅도 넓었지만 중국은 힘을 잃었던 나라였습니다. 그렇다면 종교의 발상지 중 하나였던 인도는 어떠했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였습니다. 동남아시아야 말로 불교의 온상이었지만 그 동남아시아가 힘이 있었습니까? 그 당시 아시아의 국가들 중 일본 말고 제대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나라가 몇 개였습니까? 그 시대에는 확실히 유럽이 강세였습니다. 다만 아시아의 국가들 중 일본 만 예외적으로 유럽에 견주어 질 만큼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조선의 종교가 그 시대에 영향력을 잃었음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일본의 전통종교는 영향력이 컸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 시대의 추세는 ‘서세동락(西勢東落)’이었습니다. 즉 서양은 올라가고, 동양은 저물어 가던 때였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조선의 종교들에서 희망을 찾기는 쉽지 않았을 겁니다. 이는 단지 종교나 이념만의 문제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 시기에는 과학혁명이 일어난 이후여서 더욱 서양이 돋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철학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위 ‘덱·깐·쇼’라고 하여, 데카르트, 칸트, 쇼팬하우어라는 유럽의 철학자들이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래서 자동적으로 서양이 주목받을 수밖에 없던 상황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의 조선인들로서는 우선 서양을 이해부터 하고 봐야 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서양의 전통 종교였던 개신교가 주목받는 것은 당연하였습니다. 천주교만 하더라도 조선 중기를 지나면서 어느 정도는 조선에 소개되어 있었지만(西學) 개신교는 달랐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놀랄만한 것은 서양인들의 관찰력과 학문적 노력입니다. 그 당시 내한선교사들의 조선에 대한 이해는 대단하였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여기에 수록된 여러 장(章)들은 모든 동방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특이하고 흥미로운 나라에서 유난히 매력적이며 사랑스러운 사람들 틈에서 몇 년 동안 살아온 나의 생활을 단순히 회고(回顧)한 것이다.

 

이곳(熙州)에는 인디언이나 야만족은 없다. 그곳은 그림 같은 곳이었다.

 

그들의 복장을 제외하고는 청국인이나 일본인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대개는 그들(일본인?)보다 키가 크고 모든 특성으로 볼 때 몽고인종이었다.

 

저는 이 대목을 읽고 놀랐습니다. 즉 조선인들의 의복은 어떠하며, 인상은 어떻고, 특별히 인종적으로 어디에 속하는지조차 관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감리교의 선교사였던 호머 B. 헐버트의 저술이었습니다. 그가 쓴 책 가운데에는 <<한국어와 드라비다어 비교연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의 책을 쓰려면 탁월한 학문성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쉽게 말하면 한국인들도 몰랐을 자기 나라말(自國語)의 뿌리를 서양 선교사가 찾아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흔히 ‘우리는 북방인이다, 알타이 민족이다, 부여족으로부터 유래했을 것이다, 고조선 민족일 것이다’라는 등 여러 가지의 주장을 펼치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조선인들은 구체성이 부족하였습니다. 그 당시 서양은 이미 고고학, 역사학 및 과학적 기재 등을 활용하여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던 때였습니다. ‘드라비다어’라는 것은 남(南)인도인들이 쓰는 언어로서 인도어의 일종입니다. 아마 최근의 언어학자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은 한국어의 뿌리가 알타이어라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한국 인종의 다수는 북방계일지 몰라도 언어는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굳이 추론해 보자면 과거에 한반도의 신라가 통일을 하면서 ‘드라비다어(남인도어)’를 공용어로 택한 게 아닌지 궁금할 뿐입니다. 자세한 사안은 언어학자들에게 질문해야 할 것 같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말하기를 근세 서유럽의 선교사들 중 상당수는 ‘교회 주변의 단체들(파라 처취 무브먼트)’에서 파송되었으며, 더러는 대학생 선교부와 유사한 패턴을 가진 사람들이어서 신학적 깊이는 약했을 것으로 추정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랬다고 하더라도 이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19세기에 미국에서 대학교까지 졸업할 정도였다면 그는 확실히 지성인입니다. 그 당시 조선은 낫 놓고 기억자정도 깨칠 수준의 사람들이 수두룩하였을 텐데, 그 시기에 미국에서 대학교까지 졸업할 정도의 사람이었다면 매우 우수한 인텔리입니다. 조선의 입장에서 볼 때 서양의 선교사들은 국빈급이었습니다. 특히 릴리아스 호튼은 의사입니다. 19세기 말 경에 미국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할 만한 수준이라면 그는 인텔리 아닐 까요?

 

조선 말의 중요한 사조 중 한 가지로 우리는 동학(東學)을 꼽을 수 있습니다. 소위 ‘서학(西學)’에 반대하여 자발적으로 일어난 운동입니다. 조선 말 동학농민운동은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언더우드 여사(L. H. Underwood)의 기록을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

 

동학집단은 청일전쟁(淸日戰爭)의 시작에 분명한 작용을 했다. 그들의 명분은 문자 그대로 동방의 신조를 의미했으며, 그들의 목표는 간단히 말해서 동방인을 위한 동방 또는 조선인을 위한 조선이었다. 그들은 모든 서구인들, 서구적 사상, 개혁과 변화를 물리치고 옛날의 법과 관습으로 돌아가서 그것을 다시 확립하고자 하는 요구와 뜻을 선언했다.(중략) 동학 교도들은 청국에서의 의화단(義和團) 사건 때의 사람들과 많은 면에서 흡사했으며 자신들이 죽음에서 면제되었고 총알을 맞아도 다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믿고 있었다.(중략) 그들은 모든 작은 신위를 숭배하기를 그만 두고 오직 하늘의 주신만을 경외했다. 그들은 각지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대열에 합세할 것과 상하귀천 모두에게 세금을 부과하며 그들의 지지를 위해 기부하라고 강요했다.(중략) 동학은 관리의 탐학(貪虐)을 없애고 제도를 개혁하고자 하는 훌륭하고 애국적인 결심으로 출발했으나 점차 전국에서 커다란 해악과 폭력으로 변했다.(중략) 동학도들은 다른 많은 사람들과 합세했기 때문에 이름이 동학 교도이지 강도와 다를 것이 없었다.

 

이를 따르면 언더우드 부인은 그 당시 조선의 상황을 잘 파악한 듯합니다. 그리고 동학의 핵심교리나 그들의 활동 상 및 그들의 신념 또한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동학교도 중에는 개신교로 개종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을 해 보십시다. 동학에서 개신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더 많았을 까요? 개신교에서 동학으로 개종한 사람들이 더 많았을 까요? 이에 대한 답은 여러분도 알고 계시겠지요. 굳이 경쟁력으로 한다면 그 당시에는 동학이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개신교회보다 약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현상적으로만 본다면 그 당시의 개신교회는 소수였기 때문에 동학이 월등하게 우위에 있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사태는 지속적이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종교 인구를 파악해 보면 천도교 신자보다는 개신교회의 신자가 더 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교리적으로 동학에 더 많은 매력을 느꼈다면 광복이후 사람들은 개신교회보다도 천도교를 더 많이 선택하지 않았을 까요? 물론 수치가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동학은 한국민족을 지속적으로 설득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한 듯합니다.

 

오늘날 종종 회자되는 것 중 하나는 소위 기독교인들 중 불상(佛像)을 훼손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기독교는 불교와 대립하면서 존재해야 할 까요? 초기 개신교의 선교사는 불상을 훼손하라고 시켰을 까요? 언더우드 부인의 기록을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 선교단 중 몇 명은 종종 이곳에 와서 덥고 건강에 좋지 않은 여름의 몇 주를 이 깍아지른 바위의 서늘한 그늘에 있는 불교 사원에서 지낸다. 주위에는 야생적이며 그림 같은 경치와 깨끗하고 시원한 물웅덩이 가까이에 몇 개의 유쾌하고 작은 정자가 있다.

 

아니, 이럴 수가 선교사님들이 절에서 지내다니요! 이 선교사님들은 소위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말하는 오늘날의 그 선교사님들이 아닙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조선에서 활동하셨던 분들입니다. 그런데도 그 분들은 불교의 사원을 훼손하시지 않았을 겁니다. 오히려 그 곳에서 더위를 피하며 휴식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그 곳 자연의 경치도 즐겼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어떤 기독교인들은 불교의 기물을 훼손하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다고 해서 자신의 신앙심이 돈독해 지는 것은 아닙니다. 상대를 무시하고, 짓밟으면 자신이 올라갑니까? 그 당시의 내한(來韓)선교사님들도 불교를 좋아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내한 선교사님들이 조선에 있는 타 종교인들에게 경멸의 태도로 공격을 했을 까요? 그럴 이유는 충분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기독교가 구원의 종교이고, 훌륭하다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야 하는 것이지 상대를 무시하고, 경멸해가면서까지 전도를 한다면 경우에 따라서는 종교 갈등을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생각해 보십시오. 불교인이 예배당에 와서 교회의 기물을 훼손한다면 기독교인들은 가만 계시겠습니까?

 

자신의 신념이 돈독하다는 말이 상대를 깔아뭉갠다는 뜻은 아닐 겝니다. 그렇다면 선교사님들은 한국종교를 존중했을 까요? 그럴 필요도 없었을 겁니다. 다만 그 당시의 선교사님들은 한국인들을 기독교인으로 개종 시켰겠지요. 이론상으로 경쟁을 한다고 해도 그 당시의 선교사님들은 다른 종교철학에 뒤지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 정도의 신앙도 없이 한국에 오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그 당시 선교사님들은 전통의 한국종교와는 어떤 연관성을 가졌을 까요? 일부에서는 조우했다고 말하고, 일부에서는 배타적이었을 것으로 여깁니다. 그런데 내한 선교사님들의 태도를 하나로 뭉뚱그려 말하는 것은 그다지 타당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관심을 가져보아야 할 것은 ‘종교적 복합성’의 문제입니다. 지난 번 강의에서도 밝혔듯이 고대 한국인들은 복합적 종교성을 가졌습니다. 즉 한국인들은 혼자서 두 개 이상의 종교를 가질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조선시대라 하여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조선시대에는 유교가 국가 이념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불교를 따르거나 민간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조상에게 제사를 지낸다고 하여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조선 시대의 왕들 중에는 종종 절에 가신 분도 있었습니다. 다만 조선시대에는 스님들의 신분이 높지 않았지요. 조선시대에도 사찰은 조선인들의 생활과 동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19세기 말에 들어온 개신교가 전통 종교나 문화와의 관계가 어떠했을 까요? 내한 선교사님들의 의도는 어떠했을 까요? 이 문제를 다루려면 많은 지면이 소모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제를 좁혀 보십시다. 내한 선교사님들의 고민 중 한 가지는 성경의 번역이었습니다. 그 중 특히 신경 쓰였던 것은 ‘신명(神名)’이었습니다. 즉 기독교의 ‘신’을 무엇으로 번역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오늘날 개신교인들의 성경에서는 ‘하나님’으로 쓰고, 천주교와 함께 쓸 수 있는 공동번역에서는 ‘하느님’으로 씁니다. ‘하나님’과 ‘하느님’은 다릅니까?

 

이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논문이나 책들도 많이 있습니다. 허호익 교수님이나 옥성득 님을 비롯한 여타의 분들이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그런데 쉽게 말하면 구약성경의 신명은 직역한 것이 아니라 한국인들의 언어에 맞게 의역한 셈입니다. 예를 들어 보십시다. ‘엘샤다이’라는 단어를 ‘산신(山神)’으로 옮길 수 있겠습니까? ‘산신(山神)’은 한국인들의 관념 속에도 있어요. ‘엘로힘’이란 단어는 복수(複數)입니다. 이는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유일신(唯一神)’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직역이 가능할 까요? 물론 초기 한국인들의 성경은 로스 역이나 이수정 역을 중요한 자료로 썼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명문제 만큼은 쉽지 않았습니다. 호튼 여사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 하였습니다:용어문제는 아직까지도 모든 선교단의 동의를 얻지 못해 해결을 찾지 못한 논쟁점이다. 이 문제는 God를 부르는 적당한 말이 어느 것이냐에 관련된다. 청국, 일본과 조선은 다같이 한자를 사용하며 신으로 떠받들리는 것들 또는 숭배되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신으로 떠받들리는 것들을 영어로 The God 또는 God으로 바꿀 수 있는 것처럼 명확한 대상이나 고유명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또 아주 다른 문제로서 각각의 신을 나타내는 이름들을 가지고 있는데, 예를 들어 하늘의 주신은 상제(上帝) 또는 하느님이며, 땅의 신은 땅님과 같이 부른다. 어떤 선교사들은 이러한 하늘의 주신(主神)의 이름을 사용하고 사람들에게 그들이 모르면서 숭배하는 신의 성격과 특성을 설명한다면 그들이 보다 쉽게 우리의 설명을 이해하고 보다 빨리 받아들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하늘의 주신을 숭배하는 모든 이교도들은 동시에 다른 무수한 하찮은 신위들을 숭배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이름이 유일신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지만 그 이름은 사실 하늘의 위대한 신을 언급한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은 믿고 있다.(중략) 그들은 하늘의 신이든 땅의 신이든 간에 이들 신위의 하나인 이교도의 명칭을 사용하는 것은 안 될 뿐만 아니라, 누구나가 신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은 나도 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함으로써 아직 초기의 조선 교회의 구성원들의 마음에 위험한 오해를 유도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랬군요. 신명자체가 신앙과 관련된 중요한 쟁점 일수밖에 없었습니다. 신에 대한 개념이 잘못 잡혀 버리면 설령 기독교의 신을 설명하여도 이교도 식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관습이 있었습니다. 결국 칼빈의 주장처럼 ‘인간의 두뇌는 우상을 만들어내는 공장이다’라는 것과 유사하게, 동양의 관습에 익숙한 조선인들에게 전도를 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어려운 이유는 조선인들로 하여금 교회로 나오게 하는 데 있었다기보다는 조선인들로 하여금 신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갖게 하고, 조선인들을 바른 기독교인들로 만드는 것이 어려웠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초기 내한 개신교의 선교사들이 조선의 전통 종교를 선호했을 리는 만무해 보입니다. 당연히 선교사들의 과제는 한국의 전통 종교와 기독교와의 차이를 설명해야 했을 겁니다. 즉 초기 내한 선교사들의 주요 과제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아니라 개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개종은 나쁜 것일 까요? 이는 후대 서양 사람들의 평가일 뿐 조선인들 스스로의 평가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조선인들은 서양 선교사들로부터 개종을 강요당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조선인들은 미국이나 유럽의 식민지를 겪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의 개신교인들이 다른 종교인들에 비해 압도적인 다수였을 까요? 당연히 그럴 리가 없었습니다. 서양 선교사들이 조선의 정부를 향해 강압적으로 무언가를 요구할 힘이라도 있었을 까요? 당연히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서양 선교사들은 전통의 조선 종교와 경쟁해야 했습니다. 만일 서양 개신교회의 교리가 전통의 조선 종교보다 설득력이 약하였다면 조선인들은 그 서양 종교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어느 사회윤리 학자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인상 깊이 남습니다: “미국 선교사들이 전하였던 복음과 꼭 같은 내용의 복음을 아프리카 사람들이 전하여 주었다면 한국 사람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복음을 미국 사람들이 전하여 주었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은 예수를 믿었다.”

 

쉽게 말하면 그 당시의 조선인들은 서양 세계가 가진 눈에 보이는 힘과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가상적으로 존재하였던 그 힘을 동경하였습니다. 그게 종교의 형태를 입었다 하더라도 그 당시의 조선인들은 그 서양 종교를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허약해져 있었습니다. 릴리아스 호튼 여사의 말처럼 “조선인들은 마치 양치기 없이 황야에서 길을 잃어 기운이 없고 배고프며 죽을 지경이 된 양과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조선은 굳이 일본이 점령하지 않았더라도 망해 있었습니다. 조선의 정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만큼 무기력해 져 있었습니다. 아니, 조선은 임진왜란에서부터 병자호란을 겪었을 때 이미 망하였습니다. 다만 누군가가 그 조선을 점령하지 않았을 뿐이지, 조선 그 자체가 무슨 힘이 있어 나라를 유지할 만큼의 능력을 가졌다고 보기는 힘들 만큼 조선은 몰락해 있었습니다. 내한 선교사님들은 그 조선의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선교사님들은 ‘어떻게 해야 조선인들에게 기독교를 전할 수 있는지’를 최대한 고민하였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조선의 전통종교가 개신교회와는 어떤 차별성을 가질 수 있는지가 관건이었을 겁니다. 전통의 조선 종교와 서양 개신교회가 비슷한 패턴이었다면 아마 조선인들은 서양 종교를 선호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 이유는 이미 조선인들은 다종교성을 가진 이들로서 해볼 만 한 것은 다 해보았을 테니까요. 그렇게 하고서도 망한 나라가 조선이었으니까요. 조선 후기에는 다양한 종교적 운동들이 일어났습니다. 이를테면 원불교, 대종교, 동학, 정감록 등 여러 가지의 종교적 운동들이 일어났습니다. 당연히 조선의 민중은 이와 같은 자생적 종교운동들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적지 않은 수의 조선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던 전통의 종교 패턴과는 아주 이질적인 종교를 받아들였습니다. 교리적으로도, 신명(神名)에 있어서도 그리고 정치적 역량에 있어서도 자신들이 미처 알지 못하였던 서양의 종교를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 종교를 가져온 서양의 선교사들이 과연 조선의 전통 종교와 조우할 필요가 있었을 까요? 그 당시 조선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새로운 종교나 이념이나 사상이 필요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조선인들은 전통의 종교보다는 새로운 종교를 원했을 것 같습니다. 물론 동학이나 원불교도 새롭게 일어난 종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종교들만으로는 조선인들이 충분히 만족하지는 못하였던 것 같습니다. 적지 않은 조선인들은 더 낯선 종교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 낯선 종교는 적지 않은 매력을 가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의 조선인들은 서양인으로 거듭나는 데에는 충분히 성공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초기의 한국 개신교회는 서양의 개신교회와는 달랐으니까요. 아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조선인들은, 기독교적 신앙생활을 서양인들처럼 할 만큼의 능력을 갖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일제시대가 끝날 때까지도 조선예수교 장로회의 헌법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조차도 수록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종교학자들 중에는 현대 한국의 기독교를 서양 기독교와 동일하다고 여기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즉 이름은 기독교이지만 그 내면에 잠재해 있는 모습은 무속이나 동양 종교적이라고 주장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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