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백성의 표> 출4:24-26
새문안교회 주일예배
설교 이수영 목사
오늘은 지난 수요일부터 시작된 사순절기간 중의 첫 주일입니다. 본래 사순절은 교회가 세례 받고자 하는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마지막 단계로 삼은 기간이었습니다. 부활절을 세례 받기에 가장 적합하고 의미있다고 여겼던 고대교회에서는 세례지원자들이 사십 일 동안 금식 등 상당히 고된 준비를 거친 후 부활주일에 세례를 받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사순절은 세례 받을 사람들뿐 아니라 모든 교인들이 동참하는 절기가 되었고, 그러면서 세례를 받기 위한 준비의 기간으로서 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수난을 명상하며 회개하는 기간으로서 그 성격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사순절기간은 처음에는 일정하지 않다가 4세기 이후 여러 지역에서 6주간으로 표준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순"이란 말이 의미하는 40일 가운데 주일은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일을 뺀 6주는 36일임으로 첫 주간 전의 수요일부터 4일을 더해 40일을 사순절기간으로 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순절기간은 실제로는 여섯 번의 주일을 합하여 부활주일로부터 46일 전인 수요일부터 시작되며 그 수요일을 참회의 수요일(Ash Wednesday)라고 부릅니다. 이 기간 중 마지막 주일부터 토요일까지의 한 주간을 고난주간이라 하며 그 주간 중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금요일을 성 금요일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기 위해 준비하는 일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수난을 명상하며 회개하는 일이나 모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기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사순절은 교회공동체와 그리스도인 각자가 자기정체성,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의 표를 확실하게 하는 기간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세례가 갖는 의미와 하나님의 백성의 표를 분명히 지니는 일에 상응하기도 하고 그것들을 예표한 것 가운데 하나가 오늘 본문의 사건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출애굽기 전체에서 가장 이상하고 모호하며 그 의미를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의 하나입니다. 24절에서 "모세가 길을 가다가 숙소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 했는데 원문상으로는 하나님께서 죽이려 하신 그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가 모세라면 오랫동안 공들여 설득하고 얼르고 달래서 동족을 구하러 바로에게로 가게 해놓으시고는 왜 죽이려 했는지 이해하기 힘듭니다. 25절에서는 "십보라가 돌칼을 가져다가 그의 아들의 포피를 베어 그의 발에 갖다 대며 이르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했는데 십보라가 누구의 발에 갖다 댔는지도 불분명하고, "피 남편"이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26절에서는 "여호와께서 그를 놓아 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 때문이었더라" 했는데 하나님께서 누구를 놓아 주셨다는 것인지도 아리송합니다. 이렇게 본문은 그 답을 확정짓기 힘든 많은 문제점을 안고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부인할 수 없을 만큼 분명한 사실 몇 가지는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진노하셨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모세가 아들 게르솜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었다는 사실이며, 셋째는 십보라가 아들 게르솜에게 할례를 행하자 하나님의 진노가 누그러졌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오늘 본문의 내용을 다시 한 마디로 줄인다면 할례와 관계있는 하나님의 진노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을 앞서는 21-23절의 내용이 애굽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때 받을 징벌을 예고한 것과 연관시켜 볼 때,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의 명령을 지키지 않을 때 있을 화를 경고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아무리 이스라엘이라 해도 하나님께서 언약의 백성에게 그 표지로서 명하신 할례를 행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언약의 복을 누릴 수 없음을 보여주신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처음 맺으신 언약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 1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2절),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5절),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7-8절)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10-11절),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14절) 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할례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고, 그 할례를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에서 끊어지며, 약속된 가나안 땅에서의 복을 누릴 수 없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 본문의 사건은 이제 애굽을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려는 시점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표를 확인시키고자 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드러내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이 40년간의 광야에서의 여정을 거쳐 요단 강을 건너고 드디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로 하여금 온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게 하신 일을 연관시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두 사건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백성의 표를 분명히 지녀야 함을 상기시키는 하나님의 행위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정말 중요한 것은 몸에 행해진 할례행위와 그 흔적 자체가 아니라, 할례라는 표징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일입니다. 할례라는 외형적 의식이 자동적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몸에 남은 할례의 결과가 곧 하나님의 백성의 표는 결코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할례이해는 이미 "마음의 할례"를 말하는 구약의 율법서와 선지서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마음의 할례"로 의미되는 하나님의 백성의 표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할례를 명하시면서 하나님께서 함께 명하신 것들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먼저 신10:16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하셨으며, 신명기 30장에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네게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네게 생명을 얻게 하실 것"(6절)이라 하신 후, "너는 돌아와 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 모든 명령을 행할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이 율법책에 기록된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라"(8-10절)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아 선지는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렘4:4) 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할례를 명하실 때 처음하신 말씀인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신 말씀은 이것들을 포괄적으로 표현하신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목을 곧게 하지 않는 것,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그가 명령하시는 모든 명령을 행하는 것, 하나님께 속하는 것, 달리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 행하며 완전한 것, 이것이 마음의 할례요 하나님의 백성의 참 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할례의 진정한 의미이해는 신약시대에도 이어지며 더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더 심화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2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25-26절),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28-29). 또 고전7:19에서는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하며, 갈5:6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갈6:15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합니다. 그리고 빌3:3에서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어서 육신적으로는 다른 누구보다도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나서는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길뿐더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만이 그의 자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진정 할례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또 골2:11-12에서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합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 주신 말씀들을 다시 한 번 요약하면,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 더 이상 육체를 신뢰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로만 우리의 자랑을 삼는 것,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성령으로 봉사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마음의 할례요 참된 하나님의 백성의 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부활절을 준비하는 사순절 기간 중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그 약속의 성취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누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우리에게는 그 표가 분명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오늘 본문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백성의 표가 있어야 우리는 이 세상을 향하여 빛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태어나야 합니다. 항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그만이 우리의 자랑이 되어야 합니다. 그의 말씀을 알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사랑이 함께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것들을 우리 가운데 되찾고 확고히 하고자 하는 열망과 노력이 부활절을 준비하는 이 사순절에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입니다. 이번 사순절을 바르고 의미있게 보내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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