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전신갑주> 엡6:10-18
내일은 6월 25일, 즉 김일성의 명령에 따라 북한공산군이 기습남침함으로써 한국전쟁이 시작된지 51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 전쟁은 세계전쟁사 속에서도 가장 파괴적이고 비극적인 전쟁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족상잔의 전쟁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 비극성은 더욱 큰 것입니다. 제가 대여섯 살 때에 겪은 전쟁이지만 휴전 후 10여년이 지난 고등학생시절까지도 종종 저는 무시무시한 폭격으로 천지가 불바다가 되는 꿈을 꾸면서 두려움에 떨다가 깨곤 했었습니다. 그만큼 6.25전쟁의 그 끔찍한 기억은 전쟁을 겪은 모든 이의 뇌리 속에 지워질 수 없이 깊게 새겨진 것입니다. 그래서 6.25는 다시는 이 땅에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안보의 자세와 국방의 의지를 다지고 새로이 하는 계기가 되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참 변해도 너무 정신없이 변한 것 같습니다. 그 엄청난 민족의 비극을 일으킨 장본인의 뒤를 이어 북한의 수령이 된 사람, 아버지 이상으로 반인륜적 민족적 범죄를 저지른 그 아들에게 사과 한 마디 요구하는 것은 고사하고 내놓으라는 대로 다 갖다 퍼주면서 대통령이 앞장서서 제발 좀 우리 한국을 방문해달라고 애걸하다시피 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얼어붙은 북한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보자는 것이 햇볓정책이라면 누가 반대하겠습니까? 그런데 주로 우리 국민의 안보의식과 군인들의 국방의지를 녹이는 것이 우리 정부의 햇볓정책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정책은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음은 우리 영해 안으로 북쪽의 배들이 무단 침범을 하고 있는데도 국방장관, 합참의장, 육해공군 참모총장들이 몽땅 골프장에만 몰려가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햇볓정책은 군수뇌부에게서만 그 성과를 거둔 것이 아닙니다. 일선지휘관들에게서도 그 성과는 확실한 것 같습니다. 축구경기에서 상대방 선수가 공을 몰고 와서 골을 넣으려고 하면 막고 봐야지 감독에게 막을지 말지 물어보며 경기합니까? 북쪽의 배들이 우리 해역으로 침범해 들어오는데도 막을 생각도 하지 않고 정말 상선인지 아닌지, 그 안에 머지 않은 장래에 우리의 국방에 큰 위협이 될 무기의 핵심부품이라도 실어 나르는 위장선인지 아닌지 직접 우리 눈으로 확인할 생각도 하지 않고 다음부터는 미리 알려만 주면 더 편히 잘 모실 수도 있을 것이라는 식의 통사정만 하고 있었으니 이제 국민들은 누굴 믿고 발뻗고 잘 수 있을지 불안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국방장관은 북한의 배들을 저지하지 않은 것은 잘 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잘 한 것이라면 계속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지 왜 다시 한 번 그런 일이 발생하면 그 때는 장관자리를 걸고 저지하겠다고 공언을 합니까? 또 공언을 했으면 그 다음에는 확실하게 저지했어야지요. 그런데 침범이 계속되는데도 여전히 막지도 않고 장관직도 내놓지 않으니 얼마나 국민을 바보로 여기면 그러는 것입니까? 그런데도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여당사람들은 그것이 아주 잘 대처한 일이라고 칭찬하며 감싸기에 바쁘니 지금 우리나라가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6.25를 즈음해서 이제 우리는 이 나라의 안전을 위한 대책을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정부나 군에서 말하는 안보논리나 국방계획보다 더 본질적인 몇 가지 생각, 즉 우리의 신앙적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모든 전쟁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전쟁이 나고 안 나는 것, 전쟁에 이기고 지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을 위시한 국정책임자들, 외교·국방 등 관계부처의 담당자들이 가능한 한 전쟁을 피하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하리라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날 수 있습니다. 만일 전쟁이 나면 그 때에는 그 전쟁이 오래 가지 않고 이길 수 있도록 있는 힘을 다 동원하리라 봅니다. 그러나 이기고 지는 것도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인 장수 골리앗을 앞세우고 침공해온 블레셋 앞에서 이스라엘이 풍전등화 같은 처지에 있을 때 소년 다윗이 골리앗에 맞서 나아가며 한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17:47) 한 것입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위기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힘과 지혜와 위로와 평안과 담대함과 의연함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나라를 위하여 항상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쟁의 재앙을 면하게 해주실 것을 전쟁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한반도에 다시 전쟁이 나면 그것은 6.25보다 훨씬 더 큰 비극이요 재앙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 전쟁은 피난 갈 곳도 틈도 없는 전쟁일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 속에서 아브라함 당시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땅의 사람들의 부패와 타락과 죄악이 극에 달하자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멸망시키고자 하셨으나 아브라함이 그 성 안에 의인 50명이 있어도 멸하시겠느냐고 하며 자비를 베풀어주실 것을 간청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의인 50명이 있다면 그 사람들을 위해서 그 성을 멸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으며, 나중에는 의인 열 명만 있어도 그 재앙을 면하게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며 뜻을 돌이키실 수도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은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의인 열 명만이라도 있으면 멸망을 면하게 해달라는 아브라함의 간구를 하나님께서는 들어주셨으나, 끝내 회개할 줄 모른 소돔과 고모라에게 하나님께서는 유황과 불을 비같이 내리셔서 멸하셨다고 창세기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끔 전쟁불사의 협박이 북쪽으로부터 올 때 우리는 그것을 단지 호전적인 미치광이들의 망언으로만 보거나 또 뭔가 얻어내기 위한 술책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사회를 향해 각성과 회개를 촉구하시는 경고의 말씀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할 줄 압니다. 북한의 지배층의 반인륜적, 반민족적 도발행위와 범죄는 그것대로 하나님께서 응징하시겠지만, 그들의 잘못된 행위를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회의 타락상과 죄악을 벌하시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실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김일성이 살아있었을 때도 그렇고 지금 김정일에 대해서도 종종 민족의 학살자이고 1급 전범인 사람을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오랫동안 그대로 두시는지 자문해보곤 했는데, 늘 남는 답은 갈수록 극심해지는 한국사회의 죄악상을 경고하시고 회개시키시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시고자 아직 그들에 대한 조치를 미루고 계신 것이라는 결론이었습니다. 북한의 존재가 우리에게 위협이 되는 것은 우리 나라와 사회가 정치, 경제, 사회, 도덕적으로 부패하고 불의할 때입니다. 우리가 정치, 경제, 사회,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정의로운 나라와 사회를 이룬다면 북한은 우리에게 위협이 될 수 없다고 믿습니다. 그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평화로운 통일을 선물로 주시리라 확신합니다. 문제는 우리입니다. 따라서 만일 다시 전쟁의 재앙이 이 땅을 덮친다면 그것은 더 있을 가치가 없다고 판단된 이 총체적으로 부패하고 거듭나기를 거부하는 사악한 사회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또한 이 사회를 구할 의인 열 명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이 땅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나라를 위하여 정말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해지리라 믿습니다. 그것은 의인을 찾는 것입니다. 의인을 다른 데서 찾으려고 할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먼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우선, 나 자신이 앞서서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의의 열매를 맺도록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라를 안전히 지키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군사적으로 전쟁억제력을 지녔다 해도 미친 자의 도발은 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객관적으로 월등한 물량적 전쟁수행능력을 지녔다 하드라도 이기고 지는 것은 다른 데에 달려있습니다. 베트남과 싸운 미국이 경제력이 약했거나 군사력이 부족해서 패전했습니까? 그렇다면 이 땅에서 전쟁의 재앙을 막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진짜 준비, 가장 확실한 준비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믿음의 준비입니다. 소년 다윗이 가졌던 그 믿음의 무장만 우리가 확실히 하면 북한은 제 아무리 핵무기, 미사일, 생·화학무기를 갖고 있고 아무리 많은 땅굴을 파고 기습도발을 하드라도 물맷돌 한 방에 쓰러지는 골리앗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의 강함은 근본적으로 군사력이나 경제력에서 찾으려 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강함은 하나님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우리가 진정 싸워야하는 싸움이 무엇이고, 그 싸움에서의 우리의 강함이 어디에 있으며, 그 싸움을 이겨내기 위하여 우리가 갖추어야 할 무장이 어떤 것임을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선 본문 12절 말씀에 보면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싸워야할 싸움은 일시적으로 우리를 위협하는 사람들과의 싸움이나 세상의 전쟁이 아니라 영적 싸움이요 사탄과의 전쟁이라는 말입니다. 사탄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강하고 악하고 교활하고 집요합니다. 의인을 넘어지게 하고 사회를 파괴하며 인류를 무너뜨리려는 그의 의도와 간교는 당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 사탄 앞에서 우리 스스로 강할 수는 없습니다. 또 우리 스스로의 준비 가지고는 그를 대항할 방도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본문 10-11절에서 사도바울은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전신갑주, 즉 온몸을 빈틈없이 감싸주고 막아주는 갑옷을 입으라는 것은 그만큼 우리를 공략하는 사탄의 수법이 얼마나 다양하고 치밀한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조금이라도 방심하거나 약점을 보이면 어김없이 그 틈으로 파고들어오는 것이 사탄의 공격입니다. 이 다양하고도 치밀한 사탄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시는 무장들,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해서는 안될 무장들이 어떤 것이겠습니까?
본문 14절에 보면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라"고 했습니다. 허리띠는 우리의 몸과 동작에 힘과 안정감을 줄뿐 아니라 칼을 차는 수단입니다. 그런데 진리로 그 허리띠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힘은 하나님 진리와 그 진리를 따라 사는 진실된 삶에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와 함께 하지 않을 때 우리는 사탄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탄과 싸워 이길 우리의 힘은 오직 진리라는 것입니다.
또 "의의 호심경을 붙이라"고 했는데, 호심경은 가장 치명적이면서도 넓은 표적인 앞가슴을 가려주는 것입니다. 의로 그 호심경을 삼으라고 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만이 우리의 확실한 보호임을 말하며, 그 십자가의 은혜에 대한 확신과 그에 응답하는 의로운 삶이 사탄의 공격을 막아내는 방편임을 말해줍니다.
15절에 보면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으라" 했습니다. 신이란 군인에게 있어서는 군화를 말합니다. 군화는 군인이 막상 움직일 수 있게 해주고 어떤 상태의 길바닥 위에서도 달리며 적을 향해 뛸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평안의 복음의 준비한 것"을 군화로 신으라고 합니다. 그것은 사탄과의 가장 효과적이고 실제적인 대결은 평화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언제나 준비되어 있는 것임을 가리킵니다. 직접적인 전도를 통해서나 말없는 우리의 삶 자체를 통해서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평화의 복음을 증거 하는 것 보다 사탄이 싫어하는 것은 없으며, 그 것 보다도 더 사탄의 영토를 좁혀가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에 좋은 전투는 없을 것입니다.
16절에 보면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라"고 했습니다. 불화살이란 요즈음말로 하면 다연발 미사일과도 같은 것일 겁니다. 그것은 사탄의 발악적 공격이 얼마나 맹렬한 것임을 보여 주는데 그것을 막을 방패는 믿음밖에 없음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북한의 미사일공격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줄 무기는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임을 확실히 기억합시다. 믿음은 격추율 100%의 방어무기입니다. 패트리어트 미사일의 적중률에 대해서 의구심을 갖고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 염려보다 더 중요한 일은 우리의 믿음의 명중도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17절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투구는 제일 중요한 우리의 머리를 보호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 위에 울긋불긋한 깃털 등으로 장식하여 군대의 위용을 과시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의 투구를 가지라"고 합니다. 즉 우리의 머리, 우리의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에 의해 확실히 보장된 것이며, 우리의 자랑과 뽐냄은 오직 그 구원의 은혜이어야 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은혜의 향기가 풍기는 삶을 살고, 은혜 받은 자의 증거가 뚜렷한 삶을 살라는 뜻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검은 방어용 무기이기도 하며 동시에 공격용 무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탄이 가장 겁내는 것, 사탄을 막을 뿐 아니라 쫓아내고 섬멸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는 것임을 가르쳐주는 것이라 봅니다.
이 여러 가지 무장을 소개한 후 사도바울은 18절에서 이렇게 덧붙이고 있습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한 마디로 기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또 하나의 무장이 아니라 아예 하나님 편에 원군을 요청하는 행동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대신 싸워달라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확실한 승리의 보증은 없을 것이기에 기도는 우리의 가장 큰 전술이고 전략인 것입니다. 의인 열 명만 있으면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에 불을 내리지 않겠다고 하셨듯이, 이렇게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바로 입으면 하나님께서는 이 나라를 그 어떤 위협과 재앙으로부터도 지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확실한 안보와 승리의 길을 다 보여주셨습니다. 진정한 국방, 그것은 우리의 신앙적 무장에 달린 것입니다. 진리와 의와 복음전도와 믿음과 말씀과 기도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는 일에 전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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