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개혁신학의 교리사적 배경
손용환
예수와 사도들의 신앙 계승
칼빈주의 신앙과 신학의 모범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칼빈주의는 어떤 한 사람의 신학자나 천재가 만들어 낸 신학체계가 아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기원을 두고 있다. ‘개혁신학’이나 ‘칼빈주의’라는 용어가 사용된 시기는 약 5백여 년 전 이다. 이에 비해 로마 가톨릭은 2천년이라는 긴 역사는 갖고 있다. 일부에서는 로마 가톨릭의 비해 개혁신학의 짧은 역사를 두고 평가 절하하는 사람도 있다. 세월의 전통만으로 우열을 가린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유교나 불교 역시 로마 가톨릭에 버금가는 무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칼빈주의 신앙 체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남기신 보편적 기독교의 가르침을 물려받았다. 또한 신약 성경 이후에 형성된 사도들과 교부들의 가르침을 정통신학으로 삼고 있다. 성경적인 가르침에 근거한 것이라면 외적인 교회전통은 인정하는 가운데 지역이나 역사에 따른 다양성은 용납하고 있다. 칼빈주의가 믿는 진리들은 로마 주교 클레멘트(90-100), 이레니우스(Irenaeus of Lyons, 175-195), 터툴리안( Tetullian)에 의해 전수되었다. 복음의 본질적인 교리가 처음으로 확정된 것은 니케야공회(A.D 325)에서 였다. 여기서 결정된 가장 중요한 사항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동등하심에 대한 교리였다. 이후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공식화되었다. 초대교회의 신학은 사도신경, 니케야 신경, 칼세돈 신경, 아다나시우스 신경 등으로 요약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초대 교회의 신조를 기초로 하여 좀더 체계적인 개혁주의 신앙 고백을 작성하게 된다.
어거스틴: 칼빈주의의 뿌리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 354-430)은 기독교 신학을 매우 체계적으로 종합하고 정돈하였다. 칼빈주의는 Ag의 신학을 정화하고 순화하여 각 교리를 재창출 하였다. Ag에 의해 초기 기독교 신앙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칼빈주의자들의 신학은 Ag에게 뿌리를 두고 있으며, 사도 바울과 초기 교부들의 글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았다.
하나님이냐 인간이냐?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에 대한 논쟁은 매우 오래된 논쟁이다. 그러나 누구 하나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사도 바울은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다고 설명하였다. 바울에 맞선 유대주의자들은 믿음과 더불어 행위도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에 대한 논의는 누가 구원의 주도권을 갖고 있느냐는 것이다. 한편은 하나님이 주도적이며 인간이 반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주도적이며 하나님이 반응하는 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논의는 펠라기우스에 의해 새롭게 등장하게 된다.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의 주권보다는 인간의 의지에 초점을 두었다. 하나님의 주권을 약화시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는 원죄의 교리를 부정하였다. 성인으로 태어난 아담은 이성을 사용해서 충분히 죄악을 피할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반면에 인류는 아기로 태어났기 때문에 무죄한 상태에 있다는 주장이다.
Ag는 펠라기우스의 주장을 반박하며, 원죄론을 옹호하였다. 아담은 타락 전에는 완전한 자유의지를 갖고 있었지만 타락 이후에는 더 이상 순종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Ag는 부모의 성적인 행위로 죄가 후손에게 전가 된다고 보았으나, 후에 칼빈주의자들은 좀 더 포괄적으로 해석하여 아담을 인류의 대표로 보는 ‘언약 대표설(fedrealism)’로 해석하였다.
Ag는 전적부패의 교리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속죄를 강조했다. 대속적 속죄를 받아들이는 의미에서 세례를 반드시 필요한 요소라고 주장했다. Ag는 초기에는 로마 가톨릭에서 강조하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교리를 주장했으나, 후기에는 은총의 교리로 강조점을 옮긴다. 칼빈주의자들은 Ag의 후기 사상을 받아드려,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에게 주신 은혜를 통해 구원을 얻게 됨을 강조한다. (초기 Ag은 은총을 구하는 인간의 간구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그 후에 Ag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으로 수정하였다.) 선택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이다. 선택하시기로 작정하였다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중간에 바꾸시지 않으신다.
Ag의 신학은 중세의 일부 서부 유럽의 교회와 수도원뿐만이 아니라, 13세기의 신학자들, 종교개혁자들에게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종교 개혁자들은 모두 Ag문하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을 만큼 그의 영향은 대단했다. 루터는 Ag이 발견한 사도 바울의 은총론을 재발견하고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을 강조하고, 믿음으로 인한 칭의를 대표적인 교리를 내세웠다. 그러나 루터는 의지의 노예 상태에 대해서는 Ag의 주장을 넘어서서 지나치게 강조하였다. 칼빈은 Ag의 신학을 좀더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믿음도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받는 것이며,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함이라고 강조한다.
철학이냐 하나님의 지혜냐?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한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결정의 주체를 하나님이 아닌 인간으로 보고 있다. 에피큐리언들은 우주가 미결정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연을 강조한다. 스토아 철학은 결정론을 주장한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기적이나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인간의 책임을 회피하며, 다른 존재에게 책임을 떠넘기려는 인간의 철학이다.
반펠라기우스주의의 오류 시정
중세의 신학은 반펠라기우스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종교 개혁의 신학은 중세의 반펠라기우스주의를 극복하고 Ag의 가르침을 토대로 새로운 발전을 모색한 시기였다. 반페라기우스주의는 Ag이 주장하였던 전적인 부패교리를 부정하였다. 인간에게 선한 의지가 남아있음을 주장했던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속죄가 모든 사람에게 유효하다고 주장하며 하나님의 선택은 확정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후 반펠라기우스주의는 오렌지 총회와 발렌스(529)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 받는다.
동방과 서방 교회에서 얻은 교훈
칼빈주의는 터툴리안과 Ag외에도 다른 여러 교부들, 그리스 동방 정교회에서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칼빈은 동방 교회 초기 교부들의 신학 가운데서도 삼위일체론의 영향을 받았다. 동방교회 초기 교부들은 그리스도의 신성, 성육신, 성령의 인격성과 신정을 정립하였다. 칼빈은 요한 크리스톰의 설교와 갑바도기아 신학자들에 대해 깊이 공감했다.
동방 신학의 기독론 정립에는 헬라 철학에서 얻어온 개념들이 많다. 성자의 동일 본질설을 정통신학으로 채택한 이후에도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결합에 관한 물음은 계속되었다.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결합의 문제는 종교 개혁자들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양성의 교류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단성론으로 치우쳤으나, 칼빈은 신성과 인성의 근본적인 분리와 각각의 고유한 특성 유지에 대해 ‘양성의 교류(communicatio idiomatum)’라는 개념을 설명한다.
동․서방 교회의 교제는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대립으로 치닫는다. 주후 1054년 동․서방 교회는 ‘필리오쿠베(Filioque)’논쟁 이후로 완전히 교제를 단절한다. 동․서방 교회는 신학적인 차이점을 보이기 시작한다. 동방 교회가 시도 요한과 깊은 연관이 있다면, 서방 교회는 바울의 전통을 물려 받았다. 동방 교회는 성육신을 중요시하고, 그리스도의 인격을 배경으로 하여 그 통일성에 관심을 둔다. 서방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중요시하며 그리스도의 사역을 배경으로 그리스도의 중보자 역할을 강조한다. 동방 교회가 예식과 신비를 강조한 반면, 서방교회는 정치와 법률적인 요소가 지배적이었다. 또한 삼위일체의 이해에서도 차이점을 드러낸다.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신 분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이는 신학적인 이유보다는 교회의 정치적인 입장에 의한 것이다. 동방교회는 서방교회와의 교제를 단절하며 자신들의 체계와 내부에서만 신앙의 체계를 쌓아간다. 결국 초대교회의 순수한 신앙에서 변질되어 간다. 기독교적 신비 체험에 맞춘 예식을 중시하고 성상기도와 묵상을 통한 하나님과의 만남을 강조한다.
스콜라 신학의 거부
개혁신학은 초대교회로부터 흘러온 교회의 역사와 신앙의 전통을 중요시했다. 그러나 바르지 못한 가르침에는 목숨을 걸고 거부하였다. 16세기 개혁자들, 특히 칼빈주의자들은 ①교황과 종교회의의 선언을 성경의 증거와 동일시하는 것을 거부하고, ②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얻기 위하여 자연 신학을 신뢰 할 수 없으며, ③모든 신자가 성경을 읽고 해석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고, ④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이 값없이 주신 은혜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됨을 믿는다.
중세 후기 신학교육 기관에서는 대부분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을 가르쳤다. 토미즘으로 불리는 스콜라주의 신학 체계는 철저히 이성 중심의 신학이다. 아퀴나스는 이성을 신뢰하며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으로 하나님의 관한 진리를 논증하려고 했다. 중세 후기 토마스주의자들을 자연신학으로 특징 지을 수 있다. 토마스주의자들은 인간 세계나 자연 세계를 자세히 관찰함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르네상스 이후 14세기에서 15세기 초엽 유럽의 대부분 신학 대학에서는 아퀴나스와 둔스 스코투스의 ‘구파 스콜라 신학’의 실재론에 대응하는 ‘신파’가 차츰 보급되었다. 구파 스콜라주의는 하나님의 존재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반면 신파-유명론의 주창자인 옥캄은 하나님의 존재를 이성과 논리적 기준에 따라서 알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신파 역시 신인 협력설을 근간으로 하는 반펠라기우스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후에 발전된 ‘신파 어거스틴주의(schola Augustiniana moderna)’라는 새로운 사조 역시 Ag의 은총론과 인간의 열심을 절충시킨 새로운 형태의 스콜라주의였다.
루터는 옥캄의 신파 방법론에 영향을 받았으나, 그를 훨씬 벗어나는 결론을 내린다. 쯔빙글리와 칼빈을 비롯한 개혁 신학자들은 중세 후기의 스콜라주의와 과감하게 단절한다. 인간의 구원에 관한 ‘오직 은혜로만’의 교리를 손상시키는 스콜라신학의 학문 방법과 인간의 노력과 선행을 근본으로 하는 구원론을 철저히 거부했다.
손용환
예수와 사도들의 신앙 계승
칼빈주의 신앙과 신학의 모범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칼빈주의는 어떤 한 사람의 신학자나 천재가 만들어 낸 신학체계가 아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기원을 두고 있다. ‘개혁신학’이나 ‘칼빈주의’라는 용어가 사용된 시기는 약 5백여 년 전 이다. 이에 비해 로마 가톨릭은 2천년이라는 긴 역사는 갖고 있다. 일부에서는 로마 가톨릭의 비해 개혁신학의 짧은 역사를 두고 평가 절하하는 사람도 있다. 세월의 전통만으로 우열을 가린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유교나 불교 역시 로마 가톨릭에 버금가는 무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칼빈주의 신앙 체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남기신 보편적 기독교의 가르침을 물려받았다. 또한 신약 성경 이후에 형성된 사도들과 교부들의 가르침을 정통신학으로 삼고 있다. 성경적인 가르침에 근거한 것이라면 외적인 교회전통은 인정하는 가운데 지역이나 역사에 따른 다양성은 용납하고 있다. 칼빈주의가 믿는 진리들은 로마 주교 클레멘트(90-100), 이레니우스(Irenaeus of Lyons, 175-195), 터툴리안( Tetullian)에 의해 전수되었다. 복음의 본질적인 교리가 처음으로 확정된 것은 니케야공회(A.D 325)에서 였다. 여기서 결정된 가장 중요한 사항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동등하심에 대한 교리였다. 이후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공식화되었다. 초대교회의 신학은 사도신경, 니케야 신경, 칼세돈 신경, 아다나시우스 신경 등으로 요약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초대 교회의 신조를 기초로 하여 좀더 체계적인 개혁주의 신앙 고백을 작성하게 된다.
어거스틴: 칼빈주의의 뿌리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 354-430)은 기독교 신학을 매우 체계적으로 종합하고 정돈하였다. 칼빈주의는 Ag의 신학을 정화하고 순화하여 각 교리를 재창출 하였다. Ag에 의해 초기 기독교 신앙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칼빈주의자들의 신학은 Ag에게 뿌리를 두고 있으며, 사도 바울과 초기 교부들의 글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았다.
하나님이냐 인간이냐?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에 대한 논쟁은 매우 오래된 논쟁이다. 그러나 누구 하나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사도 바울은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다고 설명하였다. 바울에 맞선 유대주의자들은 믿음과 더불어 행위도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에 대한 논의는 누가 구원의 주도권을 갖고 있느냐는 것이다. 한편은 하나님이 주도적이며 인간이 반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주도적이며 하나님이 반응하는 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논의는 펠라기우스에 의해 새롭게 등장하게 된다.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의 주권보다는 인간의 의지에 초점을 두었다. 하나님의 주권을 약화시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는 원죄의 교리를 부정하였다. 성인으로 태어난 아담은 이성을 사용해서 충분히 죄악을 피할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반면에 인류는 아기로 태어났기 때문에 무죄한 상태에 있다는 주장이다.
Ag는 펠라기우스의 주장을 반박하며, 원죄론을 옹호하였다. 아담은 타락 전에는 완전한 자유의지를 갖고 있었지만 타락 이후에는 더 이상 순종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Ag는 부모의 성적인 행위로 죄가 후손에게 전가 된다고 보았으나, 후에 칼빈주의자들은 좀 더 포괄적으로 해석하여 아담을 인류의 대표로 보는 ‘언약 대표설(fedrealism)’로 해석하였다.
Ag는 전적부패의 교리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속죄를 강조했다. 대속적 속죄를 받아들이는 의미에서 세례를 반드시 필요한 요소라고 주장했다. Ag는 초기에는 로마 가톨릭에서 강조하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교리를 주장했으나, 후기에는 은총의 교리로 강조점을 옮긴다. 칼빈주의자들은 Ag의 후기 사상을 받아드려,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에게 주신 은혜를 통해 구원을 얻게 됨을 강조한다. (초기 Ag은 은총을 구하는 인간의 간구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그 후에 Ag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으로 수정하였다.) 선택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이다. 선택하시기로 작정하였다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중간에 바꾸시지 않으신다.
Ag의 신학은 중세의 일부 서부 유럽의 교회와 수도원뿐만이 아니라, 13세기의 신학자들, 종교개혁자들에게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종교 개혁자들은 모두 Ag문하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을 만큼 그의 영향은 대단했다. 루터는 Ag이 발견한 사도 바울의 은총론을 재발견하고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을 강조하고, 믿음으로 인한 칭의를 대표적인 교리를 내세웠다. 그러나 루터는 의지의 노예 상태에 대해서는 Ag의 주장을 넘어서서 지나치게 강조하였다. 칼빈은 Ag의 신학을 좀더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믿음도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받는 것이며,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함이라고 강조한다.
철학이냐 하나님의 지혜냐?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한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결정의 주체를 하나님이 아닌 인간으로 보고 있다. 에피큐리언들은 우주가 미결정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연을 강조한다. 스토아 철학은 결정론을 주장한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기적이나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인간의 책임을 회피하며, 다른 존재에게 책임을 떠넘기려는 인간의 철학이다.
반펠라기우스주의의 오류 시정
중세의 신학은 반펠라기우스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종교 개혁의 신학은 중세의 반펠라기우스주의를 극복하고 Ag의 가르침을 토대로 새로운 발전을 모색한 시기였다. 반페라기우스주의는 Ag이 주장하였던 전적인 부패교리를 부정하였다. 인간에게 선한 의지가 남아있음을 주장했던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속죄가 모든 사람에게 유효하다고 주장하며 하나님의 선택은 확정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후 반펠라기우스주의는 오렌지 총회와 발렌스(529)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 받는다.
동방과 서방 교회에서 얻은 교훈
칼빈주의는 터툴리안과 Ag외에도 다른 여러 교부들, 그리스 동방 정교회에서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칼빈은 동방 교회 초기 교부들의 신학 가운데서도 삼위일체론의 영향을 받았다. 동방교회 초기 교부들은 그리스도의 신성, 성육신, 성령의 인격성과 신정을 정립하였다. 칼빈은 요한 크리스톰의 설교와 갑바도기아 신학자들에 대해 깊이 공감했다.
동방 신학의 기독론 정립에는 헬라 철학에서 얻어온 개념들이 많다. 성자의 동일 본질설을 정통신학으로 채택한 이후에도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결합에 관한 물음은 계속되었다.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결합의 문제는 종교 개혁자들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양성의 교류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단성론으로 치우쳤으나, 칼빈은 신성과 인성의 근본적인 분리와 각각의 고유한 특성 유지에 대해 ‘양성의 교류(communicatio idiomatum)’라는 개념을 설명한다.
동․서방 교회의 교제는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대립으로 치닫는다. 주후 1054년 동․서방 교회는 ‘필리오쿠베(Filioque)’논쟁 이후로 완전히 교제를 단절한다. 동․서방 교회는 신학적인 차이점을 보이기 시작한다. 동방 교회가 시도 요한과 깊은 연관이 있다면, 서방 교회는 바울의 전통을 물려 받았다. 동방 교회는 성육신을 중요시하고, 그리스도의 인격을 배경으로 하여 그 통일성에 관심을 둔다. 서방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중요시하며 그리스도의 사역을 배경으로 그리스도의 중보자 역할을 강조한다. 동방 교회가 예식과 신비를 강조한 반면, 서방교회는 정치와 법률적인 요소가 지배적이었다. 또한 삼위일체의 이해에서도 차이점을 드러낸다.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신 분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이는 신학적인 이유보다는 교회의 정치적인 입장에 의한 것이다. 동방교회는 서방교회와의 교제를 단절하며 자신들의 체계와 내부에서만 신앙의 체계를 쌓아간다. 결국 초대교회의 순수한 신앙에서 변질되어 간다. 기독교적 신비 체험에 맞춘 예식을 중시하고 성상기도와 묵상을 통한 하나님과의 만남을 강조한다.
스콜라 신학의 거부
개혁신학은 초대교회로부터 흘러온 교회의 역사와 신앙의 전통을 중요시했다. 그러나 바르지 못한 가르침에는 목숨을 걸고 거부하였다. 16세기 개혁자들, 특히 칼빈주의자들은 ①교황과 종교회의의 선언을 성경의 증거와 동일시하는 것을 거부하고, ②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얻기 위하여 자연 신학을 신뢰 할 수 없으며, ③모든 신자가 성경을 읽고 해석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고, ④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이 값없이 주신 은혜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됨을 믿는다.
중세 후기 신학교육 기관에서는 대부분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을 가르쳤다. 토미즘으로 불리는 스콜라주의 신학 체계는 철저히 이성 중심의 신학이다. 아퀴나스는 이성을 신뢰하며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으로 하나님의 관한 진리를 논증하려고 했다. 중세 후기 토마스주의자들을 자연신학으로 특징 지을 수 있다. 토마스주의자들은 인간 세계나 자연 세계를 자세히 관찰함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르네상스 이후 14세기에서 15세기 초엽 유럽의 대부분 신학 대학에서는 아퀴나스와 둔스 스코투스의 ‘구파 스콜라 신학’의 실재론에 대응하는 ‘신파’가 차츰 보급되었다. 구파 스콜라주의는 하나님의 존재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반면 신파-유명론의 주창자인 옥캄은 하나님의 존재를 이성과 논리적 기준에 따라서 알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신파 역시 신인 협력설을 근간으로 하는 반펠라기우스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후에 발전된 ‘신파 어거스틴주의(schola Augustiniana moderna)’라는 새로운 사조 역시 Ag의 은총론과 인간의 열심을 절충시킨 새로운 형태의 스콜라주의였다.
루터는 옥캄의 신파 방법론에 영향을 받았으나, 그를 훨씬 벗어나는 결론을 내린다. 쯔빙글리와 칼빈을 비롯한 개혁 신학자들은 중세 후기의 스콜라주의와 과감하게 단절한다. 인간의 구원에 관한 ‘오직 은혜로만’의 교리를 손상시키는 스콜라신학의 학문 방법과 인간의 노력과 선행을 근본으로 하는 구원론을 철저히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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