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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의 광맥 [제 8장 남부독일의 개혁신학과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

by 【고동엽】 2021. 11. 10.

「개혁신학의 광맥」- 1부 제8장: 남부 독일의 개혁신학과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
발제자: 송용환http://cafe.daum.net/CPI2002/aFf/45


제2 개혁 운동
독일에서는 봉건적인 통치 단위를 세습적으로 지배해온 군주들과 귀족들이 제2단계로 접어든 종교개혁의 발전 단계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이러한 배경에서 루터가 삭소니 지방의 중심지 비텐베르크에서 1517년 10월 31일 라틴어로 쓴 95개 토론 조항을 내걸면서 루터파 개혁운동이 시작되었다.
반면에 프랑스 경계 지방에 있는 남부 독일 지역에는 ‘스트라스부르그’라는 자유 도시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1521년 매튜 젤이 복음적인 설교를 전하면서 새로운 복음 운동이 일어났다. 이어서 카피토, 마틴 부써, 헤이도 등이 동지가 되어서 루터파와는 또 다른 개혁 교회를 구성하게 되었다. 부써와 카피토는 「테트로폴리탄」신조를 발표하였다. 성만찬과 교회당 내부의 장식에 있어서 루터파 교회와는 다른 의미와 생각을 가졌다. 칼빈은 이곳에서 3년 동안 머무르면서 성찬론을 연구하였고, 갈등의 요인을 철저히 분석하는 기회를 가졌으며, 부써의 성찬론을 좀더 정교하게 발전시켰다.
독일 개혁 교회의 교회 정치를 발전시킨 사람은 북서 프리스탈트 교회의 존 라스키이다. 그는 노회와 총회의 권한을 규정하고, 특히 각 지역 교회의 당회보다는 좀더 큰 규모로서 도시 전체 목사와 장로가 모이는 당회를 제안했다. 그리고 장로들은 각각 담당구역을 돌아보도록 했다. 목사들의 연합 모임을 정례화하여, 상호 감독과 토론을 도모하고 교리적인 통일을 가하도록 하였다. 평신도의 참여와 역할이 별로 자연스럽지 못했던 루터파 교회에서는 장로들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해 세세한 부분까지 관심을 갖는 조직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독일은 종교개혁을 누구보다도 먼저 받아들인 북부 삭소니의 현자 프레데릭3세가 루터를 지지하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펴나감으로써 국가적으로 거의 신앙적 통일을 이루었다. 또한 독일 남부 지방 선후제로 통치권을 물려받게 된 경건한 자 프레데릭 3세의 주도하에 남구 개혁 교회는 약 60년 동안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였다.
프레데릭 3세의 재위 시기부터 30년 전쟁이 한창이던 1622년 스페인 군대에 의해서 하이델베르크가 함락될 때까지 칼빈주의 개혁교회는 학문과 출판과 철학의 꽃을 피웠다. 물론 하이델베르크뿐만 아니라 비텐베르그, 나싸우, 라인강 주변의 저지대 도시들도 개혁 교회를 받아들여 영향을 발휘하였다. 이렇게 루터파 신도들이 있는 도시에 칼빈주의 신앙이 보급되면서 서로 갈등을 빚게 됨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러나 차츰 군주들이 칼빈주의 신앙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독일 남부 지방의 개혁신학은 발전을 하였고 그 발전 가운데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이 나왔다.
1559년부터 1622년까지의 기간을 제 2 종교 개혁 기간으로 부르는데, 독일 루터파 교회가 개혁 교회라는 새로운 신학의 전파로 인해서 보다 철저한 삶의 갱신 운동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는 상당한 교리적인 변화, 교육과 복음 전파의 원칙들이 달라지고 있었다.


프레데릭 3세
1557년 팔라틴 지방 선제후의 자리를 물려받은 프레데릭 3세는 1559년부터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그 당시 팔라티네 지방은 과열된 대립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 루터파의 성찬론과 스위스 개혁교회의 성찬론 사이에 대결 양상이 전개되어 대립구도가 심화된 것이다. 프레데릭은 어느 쪽이 더 성경적이냐에 대해 하이델베르크에서 논쟁을 주선하였는데, 칼빈과 불링거를 따르는 개혁파 노선이 더 옳다는 판단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새로운 선제후가 칼빈주의 쪽으로 기우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게 되었고, 루터파와 개혁파의 대립이 첨예화되었다.
프레데릭 3세는 루터파와 갈등을 보이고 있는 개혁파의 신앙을 받아들이기까지 심사숙고를 거듭하였다. 그는 그의 부인을 통해서 칼빈주의 신앙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는데 2년여 동안 고심하다가 마침내 칼빈주의 신앙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이 지역 교회들은 성찬식에 있어서 루터파의 성례전을 시행하지 않게 되었다.
칼빈주의적인 개혁파가 독일의 남부에서 새롭게 신앙고백을 작성하자, 막시밀리안 황제는 이에 반대하고 즉각 루터파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물론 가톨릭 측에서도 즉각 이문서의 이단성을 정죄하고 나왔다. 그는 이 요리문답은 성경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성경에 의하지 않고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개인적으로는 루터의 소요리 문답을 좋아하고 멜랑히톤의 정신에 공감하여 온 프레데릭 3세는 루터파와 개혁파의 연합과 일치를 도모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었다. 1562년 프레데릭 3세는 두 사람의 출중한 젊은 신학자들에게 가장 순수하고 일관된 복음의 교리 체계를 세워서 자신의 영지 내에 신앙적 통일을 도모해 다라고 요청하였다. 이 두 사람 - 카스파르 올레비아누스와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 - 에 의해서「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은 작성되었다. 이 문서는 1563년 1월 19일 인쇄를 마치고 출판되었는데, 아홉 쪽에 이르는 서문에서 프레데릭은 이것이 신앙의 통일을 기하기 위한 목적으로 준비된 것임을 거듭 주장했다.
1563년 5월 초에는 세명의 루터파 영주들이 새로운 요리문답의 오류를 지적하는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다. 신학자들의 도움을 얻어서 프레데릭 3세는 1563년 9월 14일 답변을 보냈다. 이 편지에서 그는 이전에 쯔빙글리나 칼빈의 글을 전혀 읽어 본 바도 없었고, 성찬론에 있어서는 성경이 증거하는 그리스도의 영적인 임재를 받아들이며,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는 도구로 쓰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프레데릭 3세는 자신이 가장 성경적인 신앙 문서를 작성하게 되었음을 확신하면서 루터파의 신앙과 비교해 볼 것을 권유하였다. 더구나 그는 성경을 제외한 그 어떤 권위도 허망한 것임을 인정하였고, 파라티네 지방의 교회들은 오직 이런 목표 아래서 세워져야 한다고 확신했다.
이 신앙 고백에서 성만찬의 해석은 유럽 전역에서 최고의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왜냐하면 독일 루터파에서는 성경 해석의 가장 핵심을 성만찬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개혁파에서는 성육하신 그리스도의 존재방식이, 그의 부활과 승천으로 인해서, 지상에 계식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임재하시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칼빈주의자들은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계속하기 위하여 성령으로 역사하고 계시며, “영적으로 임재하심”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개혁주의자들은 루터파의 기초 교리들을 대부분 인정하면서도, 이를 좀더 명확하게 성경적으로 밝혀 주었던 것이다.
그 외에도 이 요리문답에 관한 루터파의 강경파들의 공격이 있었다. 루터파의 진영에서는 자신들이 1555년 로마 가톨릭과 맺은 화해 조약의 보호 대상에 프리데릭 3세의 영지를 포함시켜야만 하느냐는 의문을 제기하기까지 하였다.
1566년 아우구스부르그에서 열린 회의에서 프레데릭 3세는 자신이 발표한 요리 문답을 옹호하면서 매우 훌륭한 연설로 감동을 주었다. 그의 주된 논지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그 누구라도 이 요리 문답이 성경에 비추어서 틀린 점이 있다고 증명한다면, 나는 언제라도 수정하고 다시 고칠 용의가 있다.’이러한 프레데릭의 태도로 인해서 위험스럽게 대립하던 공격이 멈추어지게 되었다. 삭소니의 영주가 그 자리에 참석했던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듯이 어깨를 두들기면서 격려해 주었다. “프릿츠, 귀하는 우리와 똑같이 경건한 사람이오”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
개혁주의 정통신학의 발전사를 돌아보면 하이델벨크 요리문답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된다. 불링거는 칼빈과 베자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 문서를 프랑스어로 번역해서 사용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는 누구보다도 이 문서를 높이 평가하였다. 칼빈은 올레비아누스가 보낸 라틴어 판을 평가해 달라는 편지를 받고 아무런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올레비아누스의 편지를 받은 후 3개월이 되었을 때, 칼빈은 자신의 예레미야 주석을 프레데릭 3세에게 헌정하였다. 아홉장에 달하는 이 서문을 살펴보면 칼빈의 태도가 매우 긍정적임을 알 수 있다.
신앙 고백적 칼빈주의는 특히 독일 남부 지방 여러 도시들에서 소중한 신학적인 결실을 맺었고, 1560년대부터 1620년까지 일반 성도들과 지도자들에게 신앙의 지침을 제공하고 많은 감돌을 주었다. 그 중에서도 1563년에 나온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은 가장 훌륭한 초기 개혁신학의 집대성으로서, 칼빈이 극찬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를 작성한 학자들과 채택한 교회들을 통하여 후대의 교회와 학자들에게 끼친 영향이 지대하였다.


우르시누스와 올레비아누스
우르시누스의 신학의 기초는 루터파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후에 그는 쮜리히를 방문하여 불링거와 피터 마터 버미글리의 가르침을 경청하게 되었고 개혁신학에 눈을 뜨게 되었다. 다시 제네바에 한동안 머물면서 개혁신학을 확고히 정립하였다.
그는 1561년 가을 27살에 버미글리의 추천으로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신학 교수직에 취임하여 오랜 기간 머물면서 남부 독일의 칼빈주의 정립에 크나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1561년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의학 교수로 취임한 우르시누스는 「신학 개요」또는 ‘요리 문답 주제’라는 책자를 간략한 형태지만 이미 지어낸 바 있었으므로, 신앙 교육용 문서 작성에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이 첫 번째 요리문답은 323개의 질문으로 되어 있어서 일반 시민들에게는 매우 복잡하게 생각되었다. 그래서 108개 항목으로 축소한 요리 문답이 나오게 된 것이다.
올레비아누스는 극적인 회심의 경험을 하고 제네바에서 칼빈으로부터 신학을 배우게 되었다. 공부를 마치고 고향 트리에로 가서 로마 가톨릭의 지배에서 벗어나도록 종교 개혁 운동을 전개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러한 실패를 체험한 1559년부터 2년 동안 하이델베르크 대학 교의학 교수로 봉직하다가 성령교회의 궁정 설교자로 초빙되었다. 1662년부터 우르시누스와 함께 교리의 순수성과 단순성을 기하려는 의도에서 요리 문답을 작성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요리문답 작성에 있어서 올레비아누스의 역할이 정확하게 무엇이었는지 밝혀져 있지 않다. 아마도 우르시누스가 내용을 정리했고, 올레비아누스가 쉽게 이해하도록 표현을 손질하지 않았나 짐작할 뿐이다.


신학적 특징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은 신학적 접근 방식에서 몇 가지 특징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첫째, 실생활 중심의 실천적인 요리 문답이라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을 향해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할 매우 경건하고 헌신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의 욕구와 인간적인 관심사를 가장 핵심적인 주제로 선택하여 다루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역이 핵심이면서도, 복음이 인간의 필요를 어떻게 채워주는가, 은혜로운 축복으로 인해서 사람이 받는 유익과 위로와 혜택이 무엇인가를 거듭해서 관심을 가지고 다룬다.
둘째, 이 신앙 고백은 고난과 박해를 받던 당시 성도들에게 주는 최고의 위로가 되었다. 바로 첫 문항에서부터 자기 백성들에 대해 위로하심이 강조되어 있고,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초월적인 선하심이 항상 지배하시고 통치하심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세상에서는 버림을 받을지라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구원을 얻게 된다고 확신을 심어 주었다.
셋째, 복음적이요 보편적인 기독교 신앙을 압축한 접이다. 신학적인 설명을 매우 평이하게 도입하여 단순하게 이해를 도모하고 있다. 오늘의 시점에서 비교할 때에는 보잘 것 없는 분량이라고 할 수 있지만, 로마 가톨릭의 오류를 밝히는 데 주력하던 1563년의 시대 상황을 살펴보면, 개혁신학의 자료가 부족하던 시대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 문서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독일 개혁신학의 확산
브라덴부르그
제2의 개혁교회와 신학운동은 독일의 북부 브라덴부르그와 삭소니 지방에서도 일어났다. 개혁파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가장 널리 용납되었던 곳은 역시 브라덴부르그였다. 1613년에는 선제후 존 지기스문트가 새롭게 회심하여 개혁 교회에 가담하면서 이 지역에서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귀족으로서 칼빈주의 확산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인물은 융커 파비안 폰 도나와 그의 조카 아브라함 폰 도나가 있었다. 아브라함 폰 도나는 브라덴부르그의 군주 시기스문트가 1613년 12월 15일 개혁 신앙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개혁 신앙을 고백하게 된 군주는 그때부터 국내적으로는 보수적인 루터파와 싸워야하고, 국내에서는 가톨릭의 반종교개혁 군대들과 대적해야만 되었다.


브레멘 신앙고백
알버트 하르덴베르크는 마인쯔에서 박사를 공부하면서 라스코와 교제를 했고, 비텐베르크를 방문하여 멜랑히톤을 접촉한 후에 종교 개혁에 헌신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독일의 북서부에 위치한 브레멘에 개혁 신앙을 소개하였다. 그는 브레멘 시를 루터파의 일원으로 남게 하려는 압렵에 대해 페첼 목사의 영도하에 저항했으며, 1595년 ‘브레멘 신앙 고백’을 채택하여 강력한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하였다.
여기서 칼빈주의 신학의 초기 발전 과정에 대한 고찰을 통해서 몇 가지 교훈을 되새기고자 한다. 첫째, 개혁신학의 소중한 전통과 유산을 가볍게 생각하거나 소홀히 취급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과연 어떻게 믿어야 하고 어떻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타당한 예배인가를 가려야 할 때에, 어떻게 우리의 복잡한 문제들을 풀어 나가야 할지 고뇌할 때, 이들 신앙 고백적 칼빈주의자들이 남긴 교훈은 크나큰 길잡이가 되어준다.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선 시대의 신앙인들이 어떻게 살아갔는가를 알아야 하고, 그 시대와 문화 속에서 무엇을 추구했는가를 알 때에 비로소 우리 시대에 범할 수 있는 오류를 줄일 수 있다.
둘째, 개혁신학의 장점을 더욱 되살리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성경의 절대 권위를 깊이 이해하여,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바른 인생관과 가치관과 세계관을 심어주고 역사와 인류 문화의 범죄와 방탕을 방지하는 능력을 발휘하여야 할 것이다.
칼빈은 초기부터 철저히 성경의 무오함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그 권위에 의존하여 신학을 전재하였다. 성경이란 신학의 자료에 불과할 뿐 모든 것을 인간의 이성으로, 감성으로, 경험으로 대치하려는 교묘한 신학들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진리에 입각한 성경 지식을 갖추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의 열매를 매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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