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장 제네바 정통신학의 승리와 쇠퇴
개혁신학은 칼빈을 비롯한 여러 개혁자들의 노작을 통해서 기본적인 체계가 세워졌지만, 몇 사람이 모든 신학의 내용을 다 체계화한 것은 아니다. 칼빈의 사상과 정신을 이어받은 후대 수많은 신학자들이 계속 발전시켜 온 것이다. 먼저, 유럽의 여러 나라 중에서도 스위스와 프랑스 개혁 교회의 교리사를 연구하되 그 두 지역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의 개혁 신학자들을 함께 고찰하려는 이유는, 제네바가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있고 여러 프랑스 신학자 및 목회자들과 상호 교류했다는 점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신학 체계가 공고해졌고, 동시에 국가마다 교회정치 체계가 채택되었다.
제 2 헬베틱 신앙 고백
1546년 마틴 루터가 서거한 이후 약 20여 년 가깝도록 칼빈의 목소리는 거의 개신교 전체를 대변하였다. 칼빈의 서거로 인해서 루터파와 개혁주의자들 사이에 갈등이 깊어지고, 로마 교회와 재세례파, 그 밖의 많은 분파 그룹에 대해서 다양한 토론과 논쟁이 있었다.
스위스 개혁 교회들은 이런 모든 논쟁의 중심에 있었고, 그들의 지도자들이 발표하는 논문에 따라 논쟁의 해결책을 얻고자 했다. 칼빈 이후, 그의 친구 쮜리히의 불링거가 스위스 신학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블링거는 자신이 만든 첫 번째 신앙 고백을 토대로 ‘제 2 헬베틱 신앙 고백’을 작성하여 스위스 여러 지역의 교회들에게 신앙의 표준으로 제시하였다.
이 신앙 고백서는 1장에서 교회 개혁의 필요성과 권위 근거로 오직 성경만이 유일함을 강조한다. 2장에서는 로마 카톨릭의 허점을 공격하고, 3장에서는 소시니언주의자들을 배척하고 삼위일체를 거듭 천명하였다. 5장에서는 우상타파주의 사상이 깃들어 있는 바, 우리의 경배와 예배와 찬양의 대상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임을 주장하였다. 6~9장은 창조와 섭리, 타락과 자유 의지에 대해 논의 하고 있다. 10장에서는 세례와 성찬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 외에도 지나치게 과시적인 기도나 장황한 기도가 되지 않도록 가르치고 있으며, 찬송의 필요성, 거룩한 날의 의무 사항들, 신앙 문답을 가르치는 일, 장례와 연옥설, 교회 재산의 상속, 군주나 행정 당국과 교회의 재산에 대한 내용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베자의 제네바 정통 신학
제네바를 중심으로 칼빈주의자들은 개혁신학을 좀 더 체계화 하는 작업을 전개하였다. 다소 모호하던 주제들을 좀더 분명히 하고, 신학의 주제를 세분화하며, 논리적으로 빈틈 없는 구조를 제시하고 하였다. 이를 개혁주의 스콜라 정통신학이라고 부르는데, 개신교 신학 중심으로 칼빈이 죽은 후부터 돌트 신경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16세기 말과 17세기 초엽의 종교 개혁 후기 개혁신학의 특징이었다.
이런 새로운 시도의 기초 작업에 간여한 영향력 있는 신학자는 제네바에서 칼빈의 후계자인 테오도르 베자였다. 칼빈보다 40년을 더 살았던 베자는 칼빈이 죽은 다음에 개신교 진영을 대표하는 중요한 역할을 부여받게 되었다. 베자는 매우 ‘체계적인 신학’, ‘논증적인 정통신학’을 세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 베자를 비롯한 칼빈의 제자들은 논리적인 신학을 추구하던 나머지, 구원에 있어서 로마 가톨릭의 공로 사상이나 반펠라기우스자들 내세우는 인간 혀동설이 틈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예정론을 강조하고, 엄격한 작정 교리를 체계화 하였다. 신학의 다른 항목들은 하나님의 작정이라는 항목에 부수되는 것으로 만들었으며, 하나님의 작정이 실제화되는 행동으로 풀이했다. 그리고 그는 작정과 역사 속에서 그 작정의 시행이 확연히 구별했으며, 그리스도와 성령을 하나님의 목적(타락 전 선택설)을 성취하는 ‘수단들’로 보았다.
베자는 개혁신학의 발전에 큰 공헌(칼빈 전기, 헬라어 신약 성경 편집 출판, 성경 필사본 발견 등등)을 하였지만, 불행하게도 베자는 칼빈의 신학을 이탈하여 ‘개혁주의 스콜라 신학’을 만들어 내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러나 베자의 신학을 칼빈의 신학의 변형으로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발전으로 인정해야 할 측면이 너무 많다. 종교 개혁의 제 2 세대에 이르러 보다 정확한 개념 정립이 요구되었고, 그러한 노력을 기울인 끝에 정통신학이라고 명명하는 새로운 체계가 세워진 것이다.
스위스 종교 개혁 후기 신학자들
-개혁신학의 계승자와 도전자들
야콥 그리네우스 : 구원론과 성찬론에서 칼빈 신학을 고수
아만두스 폴라누스 아 폴란스도르프 : 속죄론을 강하게 주장
요하네스 볼렙 또는 볼레비우스 : ‘기독교 총론’ 집필. 그는 신학이란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구원을 찬양하고 에배하기 위해서 알려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라고 정의하였다. 첫째, 신학의 주제는 하나님이시다. 둘째, 하나님은 알려지신 분이시다. 셋째,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에 대한 예배는 불가분의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넷째, 이 지식은 인간의 구원과도 연결되어 있다.
데오도르 쯔빙거 : 칼빈의 무조건적 선택론을 강하게 옹호, 제 2 스위스 신앙고백서를 받아들이도록 영향을 미침으로서 성찬 시 가톨릭처럼 특수한 성단을 만들어 사용하지 않고 단순히 제조한 빵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아브라함 무스쿨루스 : 베자의 예정론을 옹호.
죠반니 디오다티 : 구약 성경을 원어로 강의
테오도르 트론친 : 히브리어와 근동어를 가르침
플레시스 모르네가 설립한 소뮈르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한 학자 : 네델란드 칼빈주의자들이 세운 돌트 신경 채택을 거부
죠쉬에 드 라 쁠라스 : 원죄의 직접 전가설을 부정하고 간접 전가설을 주장.
루이 까펠 : 구약 성경의 문자적 영감을 부정하고 맛소라 사본의 완전성에 정면으로 도전
모와즈 아미로 : 가설적 보편주의를 주장. ‘예정론에 대한 소고 및 그것에 의존하는 근본적인 원리들’출판(알미니우스 쪽으로 기움)
삐에르 뒤 물랭과 앙드레 리베 : 알미니우스에 맞서 칼빈주의자의 입장 옹호.
유감스럽게도 점차 합리주의의 영향을 받은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목사들은 알미니우스의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 프리드리히 쉬판하임
아미로에 맞서서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정통시학을 고수한 프리드리희 쉬판하임은 안타깝게도 오늘날 영어권의 독자들에게는 거의 잊혀진 신학자 가운데 하나이다. 1629년 그는 탁월한 교수 사역을 인정받아 제네바 시민권을 취득했다. 이것은 1541년부터 1559년 사이에 오직 유일하게 칼빈만이 수여받았던 명예로운 시민권과 같은 것으로, 시 전체가 존경을 표시하는 매우 이레적인 사건이었다.
- 프랑수와 뒤르땡
17세기 후반에 제네바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신학자는 1648년 제네바 교회의 이탈리아 회붕을 인도하는 목사로 부름을 받고 1653년부터 제네바 대학의 신학교수로 봉직한 프랑수와 뒤르땡이다. 제네바 교수로 취임한 이후에는 학창 시절 친구들의 가설적인 보편 구원론을 막는데 앞장섰는데, 프랑스 개혁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자비와 특수한 자비로 나우어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변증 신학의 체계’에서 그는 확고한 칼빈의 입장과 개혁신학의 전통에 서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의 신학은 18세기 미국 프린스톤의 찰스 핫지 교수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예정은 복음의 핵심 중 하나였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한다는 이유에서 보편 은총을 거부하였다. 하나님의 참된 영광은 그의 선하신 뜻대로 오직 구원을 위해 선택된 자들을 통해서만 드러난다고 보았다. 하나님의 선택은 단지 그분의 자애로우심에 의존하는 것이지 어떤 공로나 어떤 업적을 미리 알고 있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개혁교회가 공통적으로 완전히 합의한 신학의 기초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에 상응하게 하나님의 유기도 역시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일정한 사람들만을 선택하셨다면 그 말은 반드시 일정한 사람들을 버리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려 한다는 것은 서로 모순이라고 보았다.
뒤르땡의 신학이 무미건조하고 메마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의 따스하고 온화한 내용을 미처 파악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뒤르땡은 ‘거룩한 성경의 권위’에서 칼빈과 마찬가지로 성경의 무오성을 입증하되, 그 기원과 권위가 신적인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이적 증거나 내적 증거에 의해서 뿐 아니라,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신하게 되어 진다는 것이다. 뒤르땡은 개인적인 학문 성취 외에도 여러신학자들과 함께 ‘헬베틱 합의 신조’를 작성하여 스위 자치 도시 내에서 신앙의 일치를 도모하는데 노력하였다.
- 베네딕트 삑테
제네바 정통신학의 말기와 쇠퇴기 사이에 신학자는 베네딕트 삑테이다. 삑테는 마지막 정통신학의 옹호자이자 새로운 학문의 주창자로서의 양면성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는 스콜라적인 방법론을 거부하면서도 자연신학을 광범위하게 채택하였고, 기본적으로 교회의 일치와 정교한 신학의 정립을 도모하였다. 삑테는 26개 항목으로 된 ‘합의 신조’의 옹호자로서 스위스 개신교의 신앙의 일체성을 강조하고 소뮈르 학파를 정죄하는 데 앞장섰다. 칼빈의 신학적인 역동성을 회복하고자 노력하고, 스콜라적인 방법론의 경직성을 회피하며, 열린 학문적 방법을 추구하면서 교회의 일치를 도모했던 탁월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정통신학의 쇠퇴
17세기 중반부터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신학자들 가운데서 서서히 칼빈주의를 신봉하지 않고 새로운 경향과 학설을 제창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런 영향으로 제네바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던 인물은 베자의 사위인 테오도르 트로친의 아들 루이 트로친과 프랑수아 뒤르땡의 아들 쟝 알퐁스 뒤르때이었다. 루이 트로친에서부터 정통신학을 벗어나기 시작한 제네바 아카데미는 쟝 알퐁스 뒤르땡에 의해서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기울어지고 말았다. 쟝 알퐁스 뒤르땡은 제네바와 라이덴 대학에서 수학한 후 1693년에 제네바 교회의 목사가 되었고, 1697년에 제네바 대학의 교회사 교수가 되었다. 이때를 전후하여 그를 따르는 스위스 지성계는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에 빠지게 된다. 그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물려주었고 아버지가 칼빈주의 정통신학의 형성을 위해서 체계화한 ‘스위스 일치 신조’보다 이성적이요 합리적인 방향으로 신학을 전개하고 말았다. 소뮈르 학파의 영향으로 그리고 네델란드 항론파의 사상의 영향을 입어서 그는 개혁교리를 강조하지 않고 자연주의의 주창자가 되었으며, 이성주읭에 사로 잡히게 되었다.
차디찬 교리주의, 자만심에 도취한 자기 만족주의, 외부에서 밀려온 이성주의로 인해서 칼빈주의는 점차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 오늘날 스위스 전역에서 칼빈주의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스위스 칼빈부의는 사회의 세속화에 밀려서 옛날의 명성이 사라진 지 오래이다. 쯔빙글리와 칼빈, 베자가 살던 시대로부터 약 100년간은 매우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지만, 계몽주의 시대 이후로 그 역사적 신앙이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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