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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에 있어서 오직 성경

by 【고동엽】 2021. 10. 20.

칼빈에 있어서 오직 성경

 

1. 성경의 원칙(Regula scriptura sive Regula verbi Dei)

 

 

칼빈(Calvin)은 자신으로부터 자신을 향하여 생각하고 말했던 인문주의적인 학자는 아니었다. 처음 이레니우스(Irenaeus)가 모든 이단들 안에서 잘못으로 인식하였던 그런 인간들의 생활 양식을 오히려 그는 하나의 커다란 신학적인 문제로 간주하였다. 어거스틴(Augustinus) 역시 그 인간문제에서 모든 문제의 원천을 응시할 수 있었다: “절대자이신 그 분으로부터 떠나 절대자가 아닌 그들이 그들 스스로에게 돌아가는 것… 이것이 그 본성에 있어서 첫 타락이요 첫 결점이며 첫 잘못이다… 왜냐하면 절대자이신 그 분으로부터 비절대자인 것으로 떨어지는 것이 바로 악한 의지를 갖는 시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알아야 될 그 알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을 배우는 것 이외에, 어느 누구도 나로부터 내가 모른다고 알고 있는 것을 알고자 하여서는 안된다”

 

 

칼빈에 의하면, 자아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앞서가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 없이는 바른 자아에 대한 지식도 없다. 더구나 이런 신적 지식의 근원과 관련하여서도 칼빈은 성경의 진리가 예리한 논지, 심중의 온 힘으로 하는 논쟁들, 열기찬 쟁론이나 교회의 공동일치를 통해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위로부터 오는 성령님의 내적 조명(interius Spiritus testimonium)을 통하여 확신됨을 믿었다. 그러한 한 그의 신학은 실증적인 과학의 의미에서의 과학이 아니다. 왜냐하면 실증적인 과학은 인간 일반으로부터 보편적 혹은 인간의 천재성을 통하여 증명되어지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성경에 대한 확신은 무엇보다도 먼저 말씀 안에서 성령님의 직접적인 조명으로부터 야기되는 참된 믿음과 더불어 얻어진다는 것을 그는 강하게 강조하였다.

 

 

칼빈은 이런 입장에서 성령님이 현재의 인간 안에서 증거 하시는 것 이외에 다른 방식으로는 성경 진리의 절대적 실재성이 그들 안에서 증명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근본 원리에 관련하여 역사 신앙, 일시적 신앙 그리고 지적신앙에 대한 어거스틴의 비판을 상기시킬 수 있으며, 종교개혁자들 중에 특히 불링거(Bullinger)가 그 어거스틴의 비판을 다시 영적으로 새롭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근본원칙에 관해서 최고의 종교개혁적 교리의 총체인 “오직 들음으로(fidei)”라는 루터의 종교개혁 이전의 소리를 상기하게 되며, 그 엄밀한 성격은 갈라디아 서신에 대한 그의 강의(1516/1517)에서 증거해 주고 있다. 즉 “믿음의 들음으로부터(ex auditu fidei)”는 “믿음으로부터(ex fidei)”나 “행위로부터(ex operibus)”와는 의미가 다르다는 것이다. 즉 사도행전 10장 44절의 근거에 의하면 성령은 믿고 행하기 이전에 선물로 받는다.

 

 

들음은 들을 수 있는 힘이나 듣는 행위에 따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객관적인 말씀 자체나 말로 선포된 복음에 따른 것이다. 그 때문에 들음은 다른 말씀들로 뿐만이 아니라, 또한 쓰여졌던 복음으로부터 혹은 그 자체에나 그것을 통하여 유발하는 생각과 구별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은 들을 수 있는 능력(organ)이나 듣고 있는 행위를 통해서 믿을 수 없고, 말씀을 통해서 믿을 수 있다.

 

 

비록 루터가 후기 칭의론에 있어서 “믿음으로부터(ex auditu fidei)”를 “듣는 능력(vis auditiva)” 과 “듣는 행위(actio audiendi)” 및 “믿음의 사역(opus fidei)”과의 대립에서 포기해 버렸지만, 위에서 본대로 칼빈은 루터의 출판되지 않은 글을 직접 접촉함이 없이도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진정한 루터의 칭의 교리의 근원적 이해를 모든 기독교 교리의 자기 체계의 기초로서 그의 성경이해에 사용하고 있다.

 

 

그 때문에 칼빈이 불링거의 글 “성경의 권위와 확실성과 확고성과 절대적 완전성(de scripturae sanctae authoritate, certitudine, firmitate et absoluta perfectione)”을 이미 읽었다고 가정한다 해도 그 자신의 발전을 “단순히 체계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없는 것이다. 그가 모든 자신의 인간적인 행위에 앞서가는 성령의 역사와 그로부터 선물 받은 믿음 위에 기초한 성경의 자기 해석 안에서, 스콜라적인 방법과는 근본적으로 전혀 다른 인상을 받게 된다. 이런 근본 테도를 가지고 칼빈은 성경의 자기해석의 방법을 위한 근거를 타당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종교개혁적인 근본원칙에 대한 최고의 소리를 높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학적인 방법의 정당한 이해를 위해서 성경에 대한 확신과 성경의 구원적 사용(salvificus scripturae usus)에 대한 그의 근본원칙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환에 관하여, 뮐러(J. M?ller)는 “성경은 성경을 통해서 해석한다”는 해석학적 순환논증에 관한 문제가 종교개혁 당시에 이미 하나의 커다란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부쩌(M. Bucer)로부터 마치 “긴급한 것으로 추천되었다”고 주장하였고, 그 이유로 “여기에서는 성령으로부터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의 일괄적인 통일성이 전제되어졌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반면에 쉬텔케(J. Staedtke)는 성경의 자기해석의 근본원칙이 인문주의로부터 넘겨받은 것이라는 주장을 하였지만, 하우자만(S. Hausamann)에 의하면, 불링거 자신이 오직 성경이란 사상이나 성경을 성경으로부터 해석한다는 사상에 대한 증인들로서 어거스틴과 게르손(Gerson)과 힐라리우스(Hilarius)를 들고, 파버(Faber)나 에라스무스(Erasmus)는 들지 않았다고 하였다.

 

 

물론 칼빈은 기독교 강요 재판들에서와 많은 성경 주석들에서 문헌 참조의 일반 희랍적인 방식인 외부로부터의 인용(παρ?θετα ?ξωθεν) 뿐만 아니라, 성경구절들의 비교 취급 방법을 도움의 수단으로 자유롭게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의 후자의 방법론은 표제에 있어서 개념의 평형을 기한다든지 문헌적인 그리고 상황적인 문맥에 있어서 의미의 평형을 다만 뜻하지 않는다. 역시 칼빈이 그의 글에서 수사적이고 역사적인 분석 방법을 사용하려고 할 때조차도, 그는 성경 본문의 모든 비교들 안에서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Consilium Dei) 혹은 성령의 뜻(consilumm Spiriti sancti)을 찾고 있다. 그 때문에 다른 종교개혁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런 외적인 방법들은 칼빈의 자기해석의 근본 원칙에 있어서 결정적인 의미가 없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래도 여기에 다만 근본적인 두 가지 질문들이 남아 있는 것이다. 성경본문과 성경 개념들을 특별히 비교하는 것이 칼빈 신학의 특색에 있어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의 성경의 이해가 삼위일체에 대한 신적 지식에 어떻게 관련되어지고 있는지?

 

 

우리가 이 근본문제에 들어가기 전에 불링거의 해석학적 방법론을 소개하면서 그 첫 번째 문제를 취급하고자 한다.

 

 

2.0.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방식(Modus tractandi scripturas per locorum collationem)

 

 

불링거는 1527년에 쓴 “성경연구 규범(Studiorum Ratio)”이라는 그의 책자에서 칼빈의 성경의 해석 방법과 비교되는 “성경의 취급 방법(omnes scripturas tractandi rationes)”을 다루고 있다. 즉 문맥 관찰(observatio contextus), 수사적 분석(tropi orationum et dictionum), 역사 배경과 인물 배경 등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불링거는 이 소책자에서 앞에 있는 질문에 관련하여 성경 본문의 비교방법(Modus tractandi scripturas per locorum collationem)에 대한 중요한 증거를 제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네가 성경을 유용하게 읽거나 취급하기를 원한다면, 가능한 한 많은 본문을 준비한다는 것을 염두 하도록 하라 그러면 준비된 많은 본문이 빈곤하고 아주 복잡한 본문에서 너를 구해 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성경 분문에 대해서 차곡차곡 쌓이도록 이용하는 것에 무엇보다도 주의 깊게 신중함을 기하고 그렇게 다루어진다면, 얼마큼 많으냐가 아니라 얼마나 잘 읽고 그것을 얼마나 확실하게 기억에 남게 할 것인지 그것을 염려하게 될 것이다. 너는 가능한 한 자주 읽도록 하며, 읽은 것은 너에게 주지하여 능하게 하고, 그것을 충분히 정리하는 것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도록 하라. 그러나 본문 비교를 동일한 것으로 혹은 구별된 것으로 비교 사용하라.”

 

 

여기에서 성경을 신중함과 판단력을 가지고 읽고, 쉬지 않고 성경에 몰두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는 성경이 자체의 유일한 주석이라는 주장을 기초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링거가 성경의 전체 문맥과 관련하여 “성경의 유일한 목적이요 모든 성경이 그 위에 세워진 그 언약(foedus)을 사려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거기에 중심점이 존재하고 모든 사실들이 그것 주위를 전적으로 맴돌며 전적으로 그것에 대해서 논쟁이 되면서도 모든 논거들이 그것에 의존하는”, 그 성경의 핵심 질문들을 사려하였다는 점을 제외하고 성경비교에 의한 불링거의 이러한 방법은 해석학에 있어서 그의 고유한 방법이 아님을 의미하였다.

 

 

이미 에라스무스(Erasmus)는 이와 같은 성경 비교의 일찍 사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무엇에 설명을 주고자 했을 때, 본문들이 스스로 쉽게 증명하도록 하라. 즉 우리가 애매한 본문을 다른 것과 비교로부터 분명하게 해야 할 때, 그리고 신비적인 말씀을 다시 신비적인 말씀을 통해서 설명하고자 할 때, 결국 이러한 뛰어난 방법을 오리게네스(Origenes)뿐만 아니라, 어거스틴이 성경해석에 사용하고 있다”

 

 

위에서 증거했던 해석학적 과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링거의 종교개혁적인 근본원칙에 있어서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와 관련해서 불링거는 성경본문의 적절한 취급을 위해서 신뢰할 만한 세 가지의 중요한 조건의 근본원칙을 제시하였다. 첫째로 불링거는 그것으로부터 주장된 영감론을 근거로 해서(nam scriptura sancta spiritus sancti inspiraio est) 성경의 무오성에 인간적인 판단의 유오성을 대조시키고 있다. “성경에 관하여 사람들의 주석들을 읽으려고 할 때, 바로 처음부터 너에게 분명하게 해야 할 것은 판단 없이 모든 것을 취하지 말고, 또한 가장 좋고 가장 기독교적인 것만을 취하는 것이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선한 사람들이 타락하게 되었을 때, 왜곡될 수 있고 잘못으로 눈이 멀 수 있기 때문이요, 대개 가장 감사치 못하는 사람의 경우, 모든 타락에 있어서 비극적인 소리를 향하여 높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째로 불링거는 성경을 읽기 위한 지침서를 공개적인 성경해석이 아니라, 단지 개인적인 성경해석을 위해 그 도움수단으로 사용하기를 원하고 있음을 덧붙이어야 하였다.

 

 

마지막으로 불링거의 경우 적정의 규범이 성경의 정당한 사용을 위해 조건으로 되어 있다.

 

 

“너는 시간 자체가 스스로 가르치는 대로 주목하게 될 것이고, 너는 어떤 것을 아주 강제로 굽게 하였을 때, 스스로 지나치게 호기심을 갖고, 결국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태도를 어디에서 취했는가? 그 외에도 무엇을 변경해야 하고, 무엇을 지우거나 다시 복구시켜야 하는지를 인식하게 될 것이다”

 

 

“성경은 성경 그 자체로 해석한다(scriptuam sui ipsius esse commentarium)”는 그의 해석방법론적인 근본원칙을 위해 이런 불링거의 마지막 세 가지의 핵심원리들이 그에게 실제적으로 중요시 되고 있다.

 

 

2.1. 적정과 절도의 원리(Regula modestae et sobrietatis)

 

 

앞에서 본 불링거의 마지막 사고의 단계는 칼빈의 신중하고 엄정한 적정과 절도의 근본원리와 일치하고 있다.

 

“여기에서 모든 종교적인 교리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적정과 절도의 규범을 지켜야 함을 기억하고 있다. 즉 감추어진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전해 내려온 것 이외에 다른 것을 말하거나 생각하고 알고자 욕망 하지 않는 것이다”

 

 

불링거와 다르게, 짧게 진술된 이 증거가 인식하도록 하는 것은 칼빈 신학의 독특한 방식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다. 여기에서 생각과 말에 있어서 적정과 절도의 규범은 두 가지 근본원리, 즉 “오직 성경과 호기심의 거절”이라는 원리들에 의해서 규정되어지고 있다. 이렇게 정해진 정의 아래에 모든 과학적인 행위와 기독교적인 생의 태도들에 있어서 엄밀하고 신중한 적정의 규범이 정확하게 1539년 판 기독교강요에 있는 하나님의 십계명의 세 번째 명령에 대한 해설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정신과 말에 있어서, 하나님과 그의 신비에 대하여 아주 경건한 절도를 가지지 않고는 어떤 것도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는 것, 즉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의 판단에 있어서 그를 지극히 영광스럽게 하는 것 이외에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

 

 

역시 같은 1539년 판 기독교강요로부터 두 가지 다른 증거들이 확증되고 있다.

 

 

“물론 여기에서, 다르게 한 번 성경의 감추어진 신비에 대한 경우 규범에 맞게 매우 적합하도록 사색하는 것, 즉 매우 주의 깊게 행하면서, 사고나 말에 있어서 하나님 말씀의 한계를 벗어나서 더 멀리 나아가지 않도록 한다. ”

 

“적정의 이러한 최선의 한계는, 우리가 배움에 있어서 항상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지 않을 때, 스스로 교리의 결말을 지어야 함에 있어서 조차도, 생각하고자 원하는 것을 그만두는 것이다. ”

 

 

이런 준칙과 관련해서 칼빈은 동일한 판에서 특히 로마서 12장 1-2절을 인용하여 논증했다. “이제 이것이 큰 일이다. 즉 우리가 지금으로부터 그의 영광을 위하지 않는 다른 것을 생각하고 말하며, 심사숙고하고 행하지 않은 것만큼, 하나님께 바치고 헌신되어지는 일이다. ”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근본원리는 적정의 엄밀한 규범을 통해서 조건 되어 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 기독교적인 삶의 목적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노력을 가지고 충족되고 있다.

 

 

그래서 엄밀한 절도의 표상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의 원리의 고유한 방식으로서 그의 성숙의 외적인 단계를 드러내 주고 있다. 그러나 그 엄밀한 “적정과 절도의 규범(Regula modestae et sobrietatis)”은 일찍이 1537년 공동고백에 대한 글에서 카롤리(P. Caroli)와의 싸움에 관련하여, 화렐(G. Farellus)과 칼빈, 비레(P. Viretus)가 합의하였고, 카피토(V. Capito)와 부쩌(M. Bucerus), 미콘니우스(Os. Myconius), 그리네우스(S. Grynaeus) 등이 서명했던 하나의 의미 있는 증거 문서에서 발견되고 있다. 거기에서 그들 모두는 오직 성경의 말들로부터(ex solis scriptuae verbis)의 근본적인 엄밀한 규범이 앞세워 지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그의 말씀밖에 어떤 다른 곳에서 찾지 않고 그의 말씀을 가지지 않고는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말씀을 통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말하지 않을 때, 우리는 만족스럽고 긍휼로 주워진 피조물들 가운데 그 모든 재화들로부터 저를 확신하고 있다. ”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밖에는 어떤 것도 찾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지 않고는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말하지 않는 것”과 같은 그 엄밀한 적정과 경외의 규범이라는 해석학적인 근본원리를 가지고 이제 정통주의로부터 전혀 내려온 “삼위일체(trinitans)”와 “인격체들(persona)”등의 용어들을 참된 성경적 삼위일체 교리 일반을 위해 사용해야 함을 주장했던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 말씀의 한계에 그의 말들을 제한하는 것은 동시에 하나님 말씀의 한계에 그의 생각을 제한하는 것을 통해서 엄밀히 되고 있다. “오직 성경”이라는 종교개혁주의적인 원리는 여기에서 이미 기독교인의 엄격한 매일의 삶과 더불어 결합되어진 것을 또한 잘 인식할 수 있다. 즉 기독교인들은 성경말씀을 향하여, 그 안에서 물어야 하고, 그 말씀과 함께 생각하여야 하며, 그 말씀을 통해서 말하여야 한다.

 

 

그러나 엄밀한 규범의 정확한 세세한 것에 대해서 그의 1536년 기독교강요의 제 일판을 지금 분석해 보아야 한다. 칼빈은 그 기독교강요의 제 일판에서 근본적으로 오직 성경을 근거로 하여 생각하고 말하는 명료한 규범을 언급하였고, 그것을 이미 적정의 사고 과정과 호기심을 삼가는 일과 관련시켰다. 예를 들면, 본질(essentia)과 위격(persona)과 같은 삼위일체의 개념들의 전통적인 언어의 관용을 비난한 현학자들에 대해서, 칼빈은 기독교강요의 제 일판의 제 이권에서 성경으로부터 생각하고 말하는 간소하고(parce) 절도있는(modeste) 규범을 내세웠다.

 

 

그래서 칼빈은 그 외래어들이 성경으로부터 증거 되어지는 그것보다 다른 것을 설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용어들을 사용해도 지장 없다고 간주하였다. 동시에 칼빈은 역시, 그런 방식의 언어들의 혁신은 우리들의 두뇌 안에서 혼돈 되고 성경에서 발견되는 어려운 문제들의 분명한 의미를 위해서 유용할 뿐만 아니라, “우물쭈물하면서 진리를 밀어내”는 거짓 탄원자들(adversus caluminatores)에 반대하여 진리를 확실하게 세우기 위해서도 유용함을 강조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그 “성경으로부터 생각하고 말하는 규범(ex scripturis et loquendi regula)”은 “그것에 따라서 우리들의 마음의 모든 생각과 입의 모든 말들이 측정되는”, 즉 “어떤 척도나 표준”으로서 확고히 되어지고 있다. 그의 주석들에서뿐만 아니라 그의 기독교강요의 후대 재판들에서도 그렇게 독특한 의미에 있어서 완전히 되어진 이런 규범은 계속 정당하게 입증되고 있다.

 

 

이러한 신중한 규범을 사려함이 없이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그의 일반 개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음이 그 결과가 된다. 오히려 칼빈신학의 독자성은 단순히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그의 개념이 기초를 두고 있는 “성경으로부터 생각하고 말하는 규범(ex scripturis et loquendi regula)”으로부터 비로소 시작하고 있다.

 

 

2.2. 오직 성경(Sola Scriptura/Locum ipse per se satis clarus esse)

 

 

사람들이 때때로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칼빈은 사실 성경의 자기해석의 표현들, 예를 들면, 위클리프(J.Wicliff)의 경우 “종종 성경의 한 부분을 다른 부분으로 해석하는 것이 필연적이다”하고, 루터(M. Luther)의 경우 “성경은 그 자체로 해석한다((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하며, 부쩌(M. Bucer)의 경우 “우리는 성경을 성경을 통하여 해석한다(das wir schrifft durch schrifft u legan)”하고, 불링거(H. Bullinger)의 경우, “성경이 그 자체의 해석이다(scripturam sui ipsius esse commentarium)”하며, 의학자이기도 한 파라켈수스(Th. Paracelsus)의 경우 “오직 성경 자체로부터 성경해석(ex scriptura ipsa tantum interpretatio scripturae)”이고

 

 

네테스하미의 아그리파(Agrippa von Nettesheim)의 경우 “성경은 그 자체가 충분하여 그 자체로 해석하고 그것이 모든 것을 판단하며 어떤 이로부터 판단 받지 않는다(Dieser Heiligen Schrift…sondern es ist dieselbe an sich selbst genug, interpretiert sich selbst, sie judiziert alle und wird von niemanden judiziert)”는 등등의 표현들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성경해석의 이런 원리들은 물론 해석의 목적으로부터 형성되어진 것도 아니고, 다만 원전으로(ad fontes) 혹은 원전 자체로부터(ex ipsis fontibus)와 같은 그 근본원리들을 가지고 성경의 어거스틴적인 자기해석에 대해서 동의를 주고 있다.

 

 

그러나 “오직(sola)”이라는 그 특별한 종교개혁주의적인 강조는 때때로 문헌학적이거나 법적인 정신뿐만 아니라, 역시 어거스틴적인 자기해석과도 구별됨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을 통해서 칼빈은 분명히 종교개혁적인 자기해석을 거절하지 않았다. 악의 있고 비루한 적대자들을 대항할 뿐만 아니라, “사탄의 공공연한 미혹”에 맞서서, 그는 그 근원에 있어서 그렇게 오래되고 잘 알려진 원리를 실제적인 의미에 있어서 다시 정확하게 발굴해 냈다. 언제든지 기독교인들이 “오직(sola)” 성경을 통해서 모든 사실에 대하여 그리고 전 삶에 있어서 주의 깊고 절제 있게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칼빈에게 중요했다.

 

 

그 때문에 역시 강조할 수 있는 것은 칼빈은 다른 위험스러운 급진주의자들과 비록 신중하고 중용적이라 생각하나 실제적으로 학문적 절충주의자들일 수 있는 현학자들에 대항하여, 다른 과학적인 방법에 전혀 의존하지 않는 성경의 자기해석론을 확고히 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러한 해석학적 규범을 통하여 “전 기독교 교리(tota doctrina christiana)”와 “기독교 철학의 기초(fundamentum christianae philosophiae)”를 굳게 세우기를 원했다는 사실이다. 칼빈은 이런 확고한 원리에서 출발하여 성경이 말하지 않은 것에 관하여, 혹은 그 성경의 증거들을 넘어선 것에 대해서는 엄밀하고 확실하게 침묵하기를 원했다.

 

 

 

- 남포교회 김영규 협동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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