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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독교 역사를 배워야 하는가?

by 【고동엽】 2021. 10. 20.

왜 기독교 역사를 배워야 하는가?

(Why Should Christian Study the History of Church?)

 

 

김병혁 목사(캘거리 개혁신앙연구회)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말의 허와 실

 

미국의 텍사스(Texas)주의 휴스톤(Houston)에 있는 레이크우드(Lakewood Church) 교회의 조엘 오스틴(Joel Osteen)이라는 목사는 매주일 설교를 하기 전에 약 30,000명의 교인들을 기립시키어 성경을 손에 들고 다음과 같이 기도를 하고 설교를 시작한다고 한다.

 

“이것은 나의 성경책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내가 나입니다. 나는 성경이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성경이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됩니다. 나의 정신은 깨어있고 마음은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담대하게 고백합니다. 나는 이제 섞지 않고, 불멸하며,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의 씨를 받게 됩니다. 나는 예전과 같지 않게 될 것입니다.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나는 절대로 예전과 같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용으로만 본다면 성경의 무오성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대단히 보수적인 교회의 예배 실황을 전해 듣는 것 같다. 그런데 지난 달 초,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지도자 중 한사람으로 인식되는 ㅅ 교회 원로인 옥한흠 목사가 주일 예배 시간에 조엘 오스틴에 대해 공개적인 비난을 한 내용이 화제가 되고 있다. 그는 오늘날 한국 교회의 가장 심각한 병폐를 기복신앙과 맘몬주의 사상에 물든 신앙이라고 진단하면서, 이미 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조엘 오스틴의 책들을 비판하였다. 오스틴은 긍정적인 자아를 회복하는 것을 기독교의 복음인 양 왜곡할 뿐만 아니라 이단적인 사상을 지닌 주의해야 할 인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대안으로 한국 교회가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촉구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두 사람 모두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고 있지만 전혀 다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조엘 오스틴과 그의 교회는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시키는데 가장 혁혁한(?) 공훈을 세우고 있는 대표적인 거짓 선생과 거짓 교회이다.(자료 참조). 그런 점에서 기본적으로 옥 목사의 지적은 옳다. 하지만 그렇다고 옥 목사의 단편적인 주장을 근거로 그가 말하고자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내용에 무조건 동의할 수는 없다. 그의 말조차 하나님의 말씀으로 검증되는 한에서만 진실된 내용이기 때문이다.

 

사실 현대 교회의 다양한 문제들의 해결책으로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말만큼 호소력있는 표현도 드물다. 하지만 놀랍게도 기독교 역사상 이 말만큼 생각없이 남발되고 있는 표현또한 찾아보기 힘들다. 중요한 것은 목청껏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구호를 외치는 일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이 정말 성경으로 바르게 돌아가고 있는가” 하는 사실이 중요하다.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말과 ‘진짜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과는 엄연히 구분되어야 한다.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진실로 성경으로 돌아가는 일’은 오직 신자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오늘날 우리는 어느 시대보다도 주관적이고 경험적인 자기 만족과 자기 확신의 신앙을 추구하는 세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신앙을 추구하는 이들도 결코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말에 반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을 더 강조하고, 성경으로부터 많은 교훈을 얻으며, 성경 구절을 삶의 적재적소에 적용할 것을 권면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신앙이 오고 오는 모든 세대를 통틀어 진리로서 수납되고 적용되어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즉 어느 시대에나 진리로서 통용되는 기독교 신앙의 객관성과 보편성을 담지한 참된 신앙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인간의 주관과 체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신앙은 결코 좋은 신앙이 될 수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보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유대인만큼 오랜 세월동안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 익숙한 사람들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시킨 민족도 없었다. 우리는 성경에 언급된 그들의 삶을 통해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말과 실제로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 사이에 얼마나 커다란 간격이 존재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즉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말이 함의하는 내용을 정당화하는 구체적이고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의 기준 없이는, 이 말은 어떤 형태로든 거짓되고 변질된 신앙을 지지하는 썩은 버팀목 구실을 할 수 있음을 성경은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문구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성경으로 돌아가는 진정한 과정과 방식’에 대한 심도 있는 고민과 이해가 있어야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경의 참된 정신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기독교는 역사적 종교이다

 

혹자는 이 물음을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성경 공부를 하면 된다”고 답한다. 틀린 답이 아니다. 하지만 당신이 알고 있는 성경 상식과 성경 이해가 바람직하지 못한 기준을 갖고 있다면 어떠하겠는가? 부분적일지라도 성경에 기록된 본의와 정면으로 충돌되거나 모순된 내용을 신심(信心)을 다해 믿고 있는 것이라면 어찌하겠는가? 이것은 가정된 상황이 아니라 너무나 현실적인 일들이다.

 

우리 시대가운데 가장 뛰어난 기독교 지성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데이비스 웰스(David F. Wells)는 『신학실종』이라는 책에서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 안에 이교도적이며 세속적인 사상으로 무장된 신학이 성경적이며 정통적인 신학의 자리를 빼앗고 있는 현실에 대해 강렬한 어조로 경고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그의 지적은 이미 현실이 된 지 오래되었다.

 

오늘날 교회의 아이콘이 된 교회성장과 연합운동의 여세에 밀려 정통 신학을 경시하고 매도하는 풍조가 일반화되고 있다. 이에 따라 잘못된 신학적 기준에 근거한 성경 공부 프로그램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모든 신학이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고백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신학자, 목사, 장로라는 직업이나 직분이 바른 성경 해석을 담보하는 기준인양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무조건 신학 책을 많이 읽고, 성경 공부를 한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신학, 바른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작금의 교회 현실을 통해 깨닫는 가장 중요하고도 현실적인 교훈이다. 어떤 내용을 담은 신학인가, 성경 공부인가를 확인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이 객관적, 보편적인 동시에 왜 역사적인 성격을 지녀야 하는지에 관해 말해 준다. 20세기 가장 탁월한 성경해설가요, 설교가중 한 사람인 마틴 로이드 존스(M. Lloyd Jones) 목사는 이 부분에 대해 “우리는 역사로부터 배울 수 있는가”라는 강연을 통해 매우 의미있는 통찰력을 제공하고 있다.

 

“우리는 교회 역사를 읽음으로써 신학 서적을 읽는 것만으로, 성경을 공부한다는 것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것을 보충하는 것이 언제나 필수적인 일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신학을 역사적인 방법으로 취급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의 진리관이 추상적이고 이론적이며 학문적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 삶의 실제와 일상생활에 적용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금방 문제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 (중략) … 만일 우리가 역사의 교훈을 배우는 데 주의를 기울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신학 서적과 성경 공부를 통해 오는 부족을 보충한다면, 우리는 이미 준비가 된 셈이며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반드시 빠질 여러 가지 함정과 위험을 피하게 될 것입니다”(마틴 로이드 존스, 『청교도신앙 그 기원과 계승자들』, 생명의 말씀사, pp.227-228)

 

교회 역사 이해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로이드 존스의 지적은 사실 성경에서 유래된 생각이다. 성경은 이 부분에 관해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수없이 많은 말씀들을 통해 매우 강조해서 언급하고 있다. 구약의 예레미야서와 신약의 고린도전서에 언급된 말씀을 살펴보자.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 …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 (중략) …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전 10:6,11)

 

신학 서적을 읽든지 성경을 공부하든지, 한 가지 인정해야 할 사실이 있다. 성경은 역사를 다루고 있는 ‘거대한 역사책이다’라는 점이다. 성경은 역사에 관한 진술이 집대성되어 있는 문서이다. 신구약에 기록된 내용을 보더라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구약의 모세 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의 절반 이상의 내용이 창조와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를 다루고 있다. 여호수아로부터 에스더까지는 가나안 정복으로부터 이스라엘 국가 탄생과 실패, 바벨론 포로와 회복의 역사를 언급한다. 대선지서(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와 소선지서(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로

구분되는 선지서 전체의 내용도 분열 이후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조명하고 있다.

 

신약은 어떠한가? 사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부터 공생애 전 기간을 역사적인 관점에서 다루고 있으며, 신약의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시초와 성장과 쇠락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미래 세계를 종말론적 역사적 시각에서 다루고 있다. 신약의 나머지 서신서들도 초대 교회의 역사를 언급하고 있다. 이처럼 성경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세계 전 역사의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까지도 기록한 인류 역사상 가장 방대하고도 구체적인 자료를 소장한 인류 최고의 역사책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서 성경이 완결된 이후에 성경의 내용이 실제적으로 실현된 현장이 바로 역사이다. 물론 하나님의 섭리는 일반 역사속에서도 증거되며 나타났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 계시로서의 특별한 섭리가 집중된 곳은 교회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의 실제적으로 실현되는 실제적인 역사의 주(主) 무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고 성취되는 장(場)으로서의 교회 역사를 살피는 일은 곧 역사가운데 심어두신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의 수단들을 확인하는 과정이며, 역사라는 밭에 감추신 진리의 보물을 찾는 일이다. 이 때, 성경은 은혜의 보물 창고에 이르게 하는 없어서는 안 될 지도이다.

 

성경은 교회 역사 속에 드러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다. 따라서 교회 역사를 제대로 살피고자 하는 사람은 한 손에 성경을 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성경이 조명하는 빛을 따라 교회 역사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분별한 신학과 결코 성경적이지 않은 성경 프로그램들에 의해 매몰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열 가지 이유

 

이제, 성도로서 마땅히 교회 역사를 살펴보아야 하는 구체적인 이유들에 대해 생각해 보자. 교회 역사와 성경의 불가분리의 관계임이 판명된 만큼, 교회 역사로부터의 배움을 중단해서는 안 되는 실제적인 이유들을 성경 구절과 연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1. 교회 역사를 아는 일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적 행위이다.

“청컨대 너는 옛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열조의 터득한 일을 배울찌어다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지식이 망매하니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 그들이 네게 가르쳐 이르지 아니하겠느냐 그 마음에서 나는 말을 발하지 아니하겠느냐”(욥 8:8-10)

 

2. 교회 역사 연구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하며, 지혜를 제공한다.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8-10)

 

3.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깊은 이해와 확신을 갖게 된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계 2:11)

 

4.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과 믿음의 패배자를 만나서 그들로부터 교훈을 얻게 된다.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약 5:10,11)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딤후4:10)

 

5. 교회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구체적인 섭리의 손길을 본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6. 믿음을 부패케 하는 원인(누룩)을 제거하는데 힘쓰게 된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갈 5:9)

 

7. 신앙의 옳고 그름을 분별하며 이단과 이단적 사상을 경계한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

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고후 6:14,15).

 

8. 영적인 안정감과 확신을 준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시 11:3,4)

 

9. 현재의 처한 상황을 설명해준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찌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전 1:9)

 

10. 미래에 대해 선견적 지식을 갖게 한다.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계 4:8)

 

교회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다짐

 

일찍이 변증법적 철학의 대가 헤겔(Hegel)은 “우리는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함을 역사로부터 배운다”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틀린 격언이 아니다. 적어도 불신앙적인 관점에서 세계와 역사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말이다. 이들은 과거를 신중하고 겸손하게 돌아보지 않으려 한다. 역사로부터 반성과 배움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늘 역사는 같은 문제로 골치를 앓고 근심을 쌓아간다. 과거에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은 여전히 그들을 곤경에 빠트린다.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교회 역사로부터 진리에 대한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안목을 얻는데 실패한 사람은 믿음의 좌절과 실패 그리고 정죄라는 신앙의 악순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사실 우리는 이전 시대의 믿음의 선조들보다 진리를 보다 풍요롭게 알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놓여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 수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역사로부터 얻는 이 엄청난 영적 유산들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이러한 현상은 역사를 주관하시고, 역사를 통하여 친히 정하신 뜻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께 대한 무지와 불신앙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교회 역사에 대한 새로운 각성과 바른 앎은 요동치는 세속의 풍파속에서 오늘날 교회와 성도를 지켜내는 강하고 튼튼한 닻(anchor)이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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