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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바람 비유(요한복음 3 : 1 - 13)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해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중생에 대한 교리를 말씀해 주시는 장면입니다. 특별히 유대인의 관원이요 지성인이며 종교인의 대표자인 니고데모와 일 대 일로 대화하시는 가운데 주신 매우 소중한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역시 지극히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간결한 말씀으로 하나님의 귀한 진리를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히브리적인 방법의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우선 생각할 것은 지금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 니고데모는 히브리적인 종교 배경을 가진 바리새인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가 알고 있는 지식이나 경험들을 비유로 하나님의 진리를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세 가지의 비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첫째가 출생한다는 비유이고 둘째는 물로부터 난다는 것이며 셋째가 성령으로부터 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출생한다는 문제를 두고 생각할 때 왜 본문에 제시된 중생이라는 말 대신에 특별히 출생이라는 말을 사용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본래 중생이라는 말은 헬라원어로 '겐네세 아노센' 이라는 두 낱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겐네세 라고 하는 말은 출생이라는 말입니다. 영어로 말하자면 비긴(begin) 이 아니고 본(bom)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뱃속으로부터 으앙 하고 울면서 태어나는 것과 같은 장면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노센이라는 말은 태어난다는 말에 대한 장소를 가리키는 부사로서 무엇 무엇으로부터, 특별히 여기에서는 위로부터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땅에서 나는 것은 육체요 위에서 나는 것은 영입니다.
이제 여기에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그렇다면 히브리 사람들의 생명관이란 어떤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는 곧 히브리 사람들이 출생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됩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니고데모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비유를 비유로 이해하지 못하고 나타난 사건으로 받아들였다가 망신을 당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다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데 이에 대한 니고데모의 반응은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다시 날 수가 있습니까하고 반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젊으면 날 수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또한 하는말이 어머니의 배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날 수 있습니까라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반응은 비유는 비유로 이해되어져야 함에도 그 비유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비유의 내용을 사건자체로 받아들임으로 가지게 되는 실수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 '태어난다'는 문제를 두고 히브리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보면 저들은 우선 육체는 어머니와 아버지로부터 태어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태아가 어머니 뱃속으로부터 밖으로 나와 으앙하고 울면서 스스로 호흡을 하게 되는 그 시간을 하나님께서 영을 불어넣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공기를 호흡한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생리학적인 문제인 것이고 저들은 공기보다는 그 시간에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생명이 그에게 불어 들어가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뱃속에 있을 때의 생명은 완전한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볼때 인간은 복합적인 존재인 것이며 이러한 사상은 창세기에 기록된 인간 창조로부터 이해하고 있는 바인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를 보면 먼저 흙으로 빚어 형태를 만드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흙으로 빚는 형태 그것만 가지고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흙 자체요 단순한 육체이며 고깃덩어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했듯이 어디까지나 질그릇과 같은 것이란 말입니다. 이것은 매우 약하고 잘 부서지며 흙에서 나서 흙에서 난 것을 먹고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인 것입니다. 육은 아무리 좋아도 역시 질그릇일 뿐 그 이상의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호흡하게 하시므로 생령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영과 육이 합쳐진 복합적인 존재입니다. 창세기에 의하면 육체는 만들어진 바요 영은 창조된 것입니다. 이는 육은 이미 있는 흙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이고 영은 하나님께서 넣어주신 창조적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입장은 창세기 2장에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육은 땅으로부터 온 것이고 영은 하나님께로부터 창조된 것으로 이 둘이 합쳐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생일이 언제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생의 기원을 육이 생겨난 것에서부터 계산할 것이냐 아니면 영과 육이 만나진 때를 말할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서양사람들은 세상에 태어난 날에서부터 계산하여 만 몇 세 몇 개월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1년, 곧 뱃속에 있던 열 달을 더하여 계산합니다. 이것은 생각해 보면 지극히 육적인 데가 있는 것으로 보아지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분명히 알아야 되는 것은 사람은 역시 영이 있어서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영이 없는 몸은 죽은 몸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살다가 영혼이 떠나게 되면 그때부터는 육체만 남는 것입니다.
간혹 며칠 동안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자기가 중량을 느끼지 않고 떠나가는 동안 저 멀리 누워서 버둥거리고 있는 자기의 몸둥이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사람이란 육체와 영이 살아있음으로 사람인 것이며 어느 순간에라도 영이 훌쩍 떠나고 몸만 남게 되면 그 다음에는 썩게 됨으로 공동묘지로 옮겨 묻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는 몸도 중요하고 영도 중요하지만 분명한 것은 둘이 합쳐졌을 때에만 인간인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참된 기원은 육이 아니라 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영혼이 없다면 그것은 인간이 아닙니다. 생명이 없다면 그것은 고깃덩어리요 하나의 흙덩어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철저히 히브리적인 생명관을 놓고 귀중한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이 타락하고 병들었으며 잠들어버린 것입니다. 도대체 있는지 없는지 조차도 알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여기에 프라스 알파인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야 될 것이란 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과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함으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고린도전서 12:3말씀을 보면 "성령으로 아니 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로마서 8:9말씀에는 "누구든지 그리스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이 있음으로 비로소 우리의 영이 재생을 하며 하나님의 자녀로 나타나게되는 재창조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를 향해 다시 나야 하리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네가 고깃덩어리가 되었고 영은 잠들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육체만 남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다시 성령이 임하게 함으로 창조시에 하나님께서 흙덩어리에 생명을 불어넣어 사람이 되게 하셨던 것처럼 네 코에 생명을 불어넣어야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출생이라는 생명의 신기원을 비유로 하여 우리의 영적 생명의 신기원을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말하는 출생의 신기원이란 지난날의 모든 생명을 부정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분명한 것은 성령의 역사가 있음으로부터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생이 시작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날이 생일이요 그날부터가 사실상 나로서의 진정한 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전까지의 생은 생이 아니라 죽어 꿈틀거리며 발악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 됩니다. 이에 창세기 6:3말씀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몸도 있고 영도 있어서 다니는 것 같지만 사실상 그 영은 떠나버리고 고깃덩어리만 남아 육체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홍수로 그들을 쓸어버리셨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산 사람들을 죽이신 것 같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실 때는 이미 죽은 사람들을 쓸어다 장례식만 치루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점을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보실 때에는 모두가 육체가 되어 버린 것이요 고깃덩어리만 남아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지만 신령한 안목으로 보는 '출생' 혹은 '생명'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있음으로 생명이요 사람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지 않을 때 그것은 사람이 아닌 한갓 육체로서 참으로 무서운 인간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저에게도 그런 연유들이 쌓여서 목사가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공산 치하에 있을 때에 공산 당원들이 하는 짓을 보면 저들은 완전히 사람이 아닙니다. 아마 어느 잔인한 동물도 그렇게 악할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악마가 있다면 바로 그게 악마일 것입니다. 북한에 있는 동안 매일처럼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사람이 악해지기로 들면 이렇게 되는구나하는 생각에 괴로워하면서 여기로부터 자신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다음 두 번째로 생각할 것은 물로 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는 세 가지의 전통적인 해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인간이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는 동안 물 속에 떠 있었다는 것에 비롯되는 해석으로 인간의 생명은 처음부터 물 속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책에서 읽은 바에 의하면 건강을 위해서 이런 저런 운동들을 하지만 가장 좋은 운동은 수영이며 그 이유는 나기 전부터 물 속에 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일리가 있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아무튼 생명이 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니냐는 해석은 사실 그 출발에 있어서는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고 하는 것은 고대 그리이스의 유명한 철학자 탈레스(Thales)가 주장한 유명한 학설인 것입니다. 바로이러한 배경과 의미에서 물을 생명의 근원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해석은 예수님의 말씀을 물로 생각하는 그런 대로 권위 있는 해석입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4:14에서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며 예수님의 말씀 자체를 생수에 비교하신 일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물로 난다'는 말은 말씀을 듣고 말씀으로 말미암아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보다 신빙성이 있는 해석은 요한의 세례를 뜻하는 것으로 보는 해석입니다. 본래 이방 사람들이 개종을 하여 이스라엘 사람이 될 때에는 두 가지의 예식이 행해졌다고 합니다. 그 하나는 할례로서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성전 안에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비밀한 일이요 공개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저 말로서 할례 받았음을 이야기 할 뿐입니다. 거기에 비해 공개적인 또 하나의 예식이 있으니 그것이 세례였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 세례가 본래는 이방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되는 과정에서 베풀어졌던 예식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세례 요한은 유대 사람에게 또 세례를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거짓 이스라엘 사람을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며, 자연인인 보통 이스라엘 사람을 그리스도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는 예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의미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참 백성이 되는 표식이 되는 것이며 보다 세밀한 의미로는 죄를 씻는 표식이 됩니다. 그러면 왜 하필 물이냐고 할 때 그 이유는 물은 더러운 것을 깨끗이 씻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죄를 씻는다는 의미에서 세례를 말하고 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 5:26에도 보면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본래 세례를 준다는 말의 헬라 원어인 '밥티조' 라는 말은 잠근다는 의미가 보다 강한 말입니다. 그러니까 옛사람은 완전히 죽어 물 속에서 장례를 치른다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회개와 함께 우리의 옛사람인 교만한 마음과 그 인격이 완전히 수장되어 버려야 합니다. 따라서 물로 난다는 것은 옛 사람과는 관계가 없는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이 물로 난다는 말을 할 때에 강조해야 하는 것은 공중 앞에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례란 본래 둘이 앉아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끔 어떤 이들이 기회를 놓치고서는 따로 세례를 받았으면 하고 찾아오는 이들이 있습니다마는 세례는 이렇게 행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는 마치 결혼식을 몰래해서는 안 되는 것과도 같습니다. 결혼식이란 손님을 많이 청하거나 적게 청하거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습니다마는 어쨌든 공개적으로 여러 사람 앞에서 두 사람이 결혼함을 선포하면서 사랑을 고백하는데 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례라고 하는 것이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것입니다. 세례란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합니다! 내 일생은 이제 그리스도에게 바칩니다 하는 예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33)고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그러므로 세례 교인이라면 십자가 목걸이나 뺏지는 달지 않았어도 어디에서나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며 교인이요 하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어디를 가나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몰래 믿게 되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공개적인 신앙 생활을 함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물로 난다'라고 하는 말은 회개와 신앙고백, 그리고 그에 따른 확실한 고백적 생활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번째로 생각할 것은 성령으로 난다는 말씀입니다. 이 성령이라는 말은 바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8절에 기록된 "바람이 임의로 불매"할 때의 그 바람이라는 말인 '프뉴마'와 같은 단어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한가지 기억할 것은 우리는 쉽게 신이라는 말을 쓰기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은 신이라고 하는 말과 성령, 혹은 영이라는 말과는 다른 것입니다. 성령이란 본래 어원적으로 바람이라는 뜻의 말입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것일 뿐 하나님의 영 자체가 바람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저 우리가 가장 가깝게 쓸 수 있는 용어가 그것 밖에 없기에 쓰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왜 굳이 바람이라는 말을 사용했는가 할 때 그것은 첫째 바람의 생명적 신비성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바람이란 동풍, 서풍 혹은 태풍 하는 식의 바람 자체를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본래 바람의 신비적인 의미는 호흡, 곧 숨을 쉬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숨을 쉬어야 살수가 있습니다. 요즈음은 의학이 발달한 탓으로 숨이 끊어지고 맥박이 멎은 다음에도 산소 호흡이다 약물 투여다 하여 다시 심장이 뛰고 하게 하여 며칠씩 생명을 연장해 나감으로 죽는 시간이 모호해 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견해는 물론, 이천년 전인 당시로 돌아가 보면 숨이 끊어지면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말에 "목숨 갔다" 혹은 "숨을 거두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목숨이란 임종 직전의 사람이 숨을 몰아쉬는 것을 보면 가슴에서 배에까지 내려가지를 못하고 목에서만 조금씩 공기가 들락날락하다가 종내는 그것마저 하지를 못하고 멈추게 되는 것을 보고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목에 숨이 있으니 목숨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호흡되어지고 숨쉬어짐으로 생명체로 존재케 하는 그 바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육체가 숨을 쉬어야 사는 것처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생명인 우리의 영혼은 그리스도의 영에 접하여 그로부터 계속 호흡을 하는 인격적 관계를 맺고 있음으로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과 맺어진 이 줄이 끊어지면 어느 사이에 악령에 사로잡혀 영적인 죽음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예수님께서는 성령, 곧 바람으로 나야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호흡함으로 나야할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영적 호흡활동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영적 활동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바람의 신비로움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 바람은 의식 이전의 이루어짐을 가지고 있다는데 그 사용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보면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바람이 임의로 불매", 즉 헬라 원문대로 말하자면 바람이 자기 마음대로 부는데 그것이 어디에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바람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바람의 마음대로 동풍이 불고 싶으면 동풍으로, 서풍이 불고 싶으면 서풍이 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건 한가지 알아야 되는 것은 이러한 현상이 의식 이전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신비로운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간혹 어떤 민감한 이들은 나는 몇 년 몇 월 몇 일 몇 시에 중생 했다는 이야기들을 합니다마는 사실은 그보다 먼저 이루어지는 역사가 더 많은 것입니다. 어떤 분이 세상을 떠나기 전 병상에서 예수를 믿겠다기에 세례를 베푼 적이 있습니다. 그분의 말에 의하면 국민학교 3학년 때에 연필을 준다기에 두 번 교회에 나갔던 것 외에 오십 평생 달리 한번도 교회를 나가본 일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이후로 누구든 교회를 나쁘다고 하면 그렇게 싫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교회가 너무 많다며 무슨 말을 하면 교회가 많으면 좋은 것이지 하는 마음이 들면서 언젠가는 내가 저 교회를 나가야지 하는 생각을 하곤 했었는데 그것을 못하고 이렇게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람을 보십시오. 성령이 언제부터 역사 하신 것입니까? 철부지로 아무 것도 모르는 채 장난만 치다가 연필만 받아온 것 같지만 바로 그 시간에 이미 겨자씨와도 같이 생명의 역사는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그야말로 어느 사이에 이루어지는지 우리는 그 역사를 알 수가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저는 "교회에 오늘 처음 나왔다"는 분들과 인사를 나눌때마다 "오늘 교회에 나오신 것 축하합니다"하고서는 몇마디 더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저 처음에 나오시면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고 어리벙벙 하시더라도 꾹 참고 6개월만 나오십시오. 그러시면 무엇인가 이루어질 것입니다"하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그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무엇을 많이 기억하고 많이 깨닫고 알라는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나가보면 바람이 임의로 불듯이 성령의 역사가 있을 것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생명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의식이나 지식의 문제가 아니며 내 비판이나 결단의 문제도 아닙니다. 신비로운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이제 바람이라는 말을 쓰게된 마지막 이유를 생각해 봅니다. 바람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으면서도 역사가 있고 그 증거가 나타납니다.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낙엽이 굴러간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성령 자체를 우리의 육체적인 감각으로 감지할 수는 없습니다. 성령은 눈으로 보는 것도 아니요 귀로 듣는 것도 아니며 손으로 만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역사는 참으로 강하게 역사 되어 각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인격을 움직이며, 뜻을 움직여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나갑니다. 우리 육체의 오관으로 감지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면서 이루어나가는 역사! 이것은 생명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거룩하게 하는 역사요 영화롭게 하는 역사며 믿음과 소망, 사랑을 주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신비한 역사입니다.
그 때문에 저는 그런 생각을 해보고는 합니다. 이따금 이유 없이 슬플 때가 있는가 하면 성령이 내 안에서 역사 할 때는 이유 없이 기쁠 때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누군가가 무슨 좋은 일이 있느냐고 물으면 특별히 대답할말도 없으면서 무작정 기쁘고 좋은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을 비유하여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바람으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성령은 보이지 않으나 있으며 그리고 항상 생명의 역사로 존재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중생 하는 생명의 신비로운 역사를 '출생이다' '물로 난다' '바람으로 난다'는 비유들을 통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 셋을 종합해 봄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재창조의 신비로운 역사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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