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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얻은 영광! (요 13:31-38)
얼마 전에 매우 흥미로운 제목을 가진 책 한 권이 출간됐습니다.
"제 장례식에 놀러 오실래요?"라고 하는 이름의 책입니다. 이 책의 저 자는
"내가 알아야할 모든 것은 유 치원에서 배웠다"라고 하는 책을 쓴, 로버트 풀검이라고 하는
분입니 다. 이로써 그는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된 분입니다. 흥미 있 지 않습니까?
제 장례식에 놀러 오 실래요. 이 책은 말입니다 출생에 서부터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모습 속에 결국은 계속적으로 축제 적인 것이 있다는 것이죠. 생일축 하, 졸업식, 결혼식, 동
창회 그리고 영결식, 영안실 앞에서의 장례식. 이렇게 사람들은 나서부터 죽을 때 까지 의식
과 의례로 연결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어쩌면 항상 여기다가 마음을 두고 그것
을 하나의 작은 정점으로 해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죠. 아마도 특 별히 여인들이 더
그런 거 같아요. 뭐 결혼식? 거 대단하게 생각하잖 아요 지나가보면 별 것도 아니지만. 그런
데 재미있는 건 여자 분들은 결 혼식을 몇 달 전부터 준비하고, 한 달 전부터 마사지하고
그런데요. 그 한 시간을 위해서. 그런데 남자 들은 결혼식 날 아침에도 직장에 갔 다 오는
사람들이 있어요. 제시간 되서야 헐레벌떡 뛰어들어와서 어디 갔다 오느냐, 그러면 직장에
갔다 왔다고.
"아니 너 결혼식인데?"
"우두커니 앉아 있으면 뭘 합니까?"
자 이게 예전이라는 게, 식전이라는 것이 우리 삶의 의미를 전부 평가해 주고 있거든요. 그
런데 죽음에 대 한 교과과정은 여기에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긴급상황, 혹은 의술의 한계,
뭐 이런 것으로 인해서 안타 깝게 닥쳐오는 사고처럼 생각을 해 요. 죽음은 Accident가 아
닙니다. 죽음은 절대로 사고가 아닙니다. 당연한 일이죠. 마치 우리에게 졸 업식이 있고 결
혼식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장례식은 그 절정이 아 니겠어요? 그런데 가장 소중한 예 전
이 빠졌고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 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없고 아무 준비도 없어요. 거기
에 문제가 있 는 거죠. 마치 피치 못할 사건인 것처럼, 병과 사고로 인해서 없어야 할 일이
있는 것처럼, 아주 죽지 말 아야 할 사람이 죽은 것처럼. 그게 그런 겁니까? 적어도 우리가
죽음 에 대해서만은 노코멘트! 어떤 모 양으로 죽었던, 언제 죽었던, 그 죽 음 자체는 그대
로 우리가 받아들여 야 하는 것이거늘 그럼에도 불구하 고 마치 안 죽을 사람이 사고로 잘
못돼서 뭔가 잘못돼 가지고 죽었다 고. 또 죽은 다음에 의사를 걸어서 고소하는 사람이 없
나, 네가 누구를 죽였다고. 이게 이게 이래서야 되 느냐? 저도 한 번 뭐 의사가 실수 해서
죽였다고 야단해서, 아주 강하 게 말려본 일이 있습니다. 믿는 사 람은 죽음에 대해서는 그
렇게 발광 을 하는 게 아닙니다. 어떤 과정으 로 죽었던 죽은 건 죽은 거고 그건 하나님이
부르신 것이라고 받아 들 여야 되는 겁니다. 여러분, 자 이러 다 보니 죽음에 대한 준비가
전혀 없다 하는 얘기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합니다. 죽음은 결코 Accident 가 아닙니다. 가
장 자연스럽고, 모 든 의전 중에 모든 우리가 당하는 모든 축제적 사건 중에 가장 큰 사 건
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이 책에 서 아주 멋진 장례식 하나를 소개합 니다. 사실로 있었던 이
야기입니다. 마샤 카터라고 하는 할머니가 있는 데 그가 세상을 떠날 때, 자기 삶도 명랑하
게 아름답게 살았고 또 삶의 절정인 죽음을 가장 아름답게 스스 로 장식하고 세상을 떠났습
니다. 그는 유서를 통해서 모든 손님들에 게, 자기에게 올 손님들에게 절대로 상복은 입지
말고 화사한 옷을 입으 라고, 절대로 그날 슬픈 이야기나 슬픈 노래를 부르지 말고, 아주 밝
은 노래, 기쁜 노래를 부르고 박수 를 치고 만장하게 웃음을 웃어가면 서 아름답고 경쾌한
프로그램으로 장례식을 지내달라고 목사님께 부탁 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고인 의 편
지가 낭독됩니다.
"지금까지 저는 멋진 인생을 살았습니다. 제 게 베풀어준 모든 고마운 분들에게 대하여 감
사를 드립니다. 문 앞에 죽음이 얼른거리면 저는 따라나설 겁니다. 춤신발을 바꾸어 신고 훌
쩍 떠날 겁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안녕히 사랑을 띄우며 마샤."
이렇게 세상을 떠났 고 그 장례식은 그야말로 굉장한 음 악회요 굉장한 축제로 그렇게 치루
어졌습니다. 여러분 이게 남의 나 라 얘기만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 에서 틀별이 교육계의
지도자로 높 이 존경을 받던 김활란 박사님. 특 별히 마지막쯤 가서는 얼마나 전도 율이 높
았는지 우리 나라에서 거행 되는 모든 전도대회에는 그 분이 언 제나 거기에 주동적 역할을
했습니 다. 선교와 전도에 열을 올렸습니 다. 그가 세상 떠날 때,
"내 장례식 에 장송곡을 부르지 마라! 음악회 와 같이 축제와 같이 지내다오. 절 대로 눈물
을 흘리지 마라!"
그래서 그 장례식은 훌륭한 음악회로 그렇 게 치러졌던 것을 아시는 분은 기억 하실 것입니
다. 여러분 이것이 남 의 얘기입니까? 왜 남의 얘기처럼 듣고 있습니까. 여러분 지금 누구
얘기를 듣고 있는 겁니까? 내 자신 의 이야기라는 걸 잊지 말아야 되 요. 내가 가야할 길이
에요. 이게 바로 내 눈앞에 있는 거예요.
왜 오늘 이 말씀을 드리는고 하 니, 예수님께서는 지금 바로 열두시 간쯤 앞에 십자가가 있
습니다. 단 적으로 말하면 죽음이 있습니다. 억울하고, 비참하고, 도대체 역사상 가장 비참하
다고 하는 십자가의 죽 음이 있습니다. 그걸 아십니다. 그 리고 제자들과 함께 소위 최후의
만 찬을 하십니다. 성만찬 예식을 행 합니다. 이건 마지막 사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
러 차례 말씀하 십니다.
"바로 이 시간을 기다리고 기다렸노라!"
어떻습니까? 여러분 이 마지막 세상을 떠날 때,
"나는 이 시간을 한 평생 기다렸노라"하는 거룩하고 찬란한 작품을 만들어야 죠, 작품을. 그
럴 생각 없습니까? 자, 예수님께서는 앞에 다가오는 모 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모
르고 있습니다. 지금도 허황한 꿈만 꾸고 있습니다. 모름지기 예 수를 파는 가롯유다 한 사
람은 예수 님의 죽음에 대한 것을 그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이 참 묘 한 시간입
니다. 그 분위기가 아주 특별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시간에 제자들의 발을
씻 기십니다. 손수 세숫대야에다 물을 떠다가 허리를 굽혀서 한 제자 한 사람, 한 사람, 이
철없는 제자, 이 멍청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이 놀라운 사건이 아닙니까. 그리 고 이
이야기를 사도요한은 뒤늦게 이렇게 봅니다. 오늘 13장 1절에서 보면은 2절에서 봅니다. 그
런 말씀 을 합니다.
"자기 제자들을 사랑하 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끝까 지 사랑하시니라, 이것을 사랑의 계 시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서는 계속 이 제자, 가롯유다의 마음이 걸려요. 이게 마음에 걸립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이
하신 일이 다 옳고, 다 놀랍게 영광을 받으실 만한 일이지만은 예 수님의 생애에 가장 흠점
이 있다면, 인간적으로 비판을 한다면 자기 제 자에게 팔렸다는 거죠. 이건 영 마 음에 걸리
거든요. 그 제자가 지금 이 성만찬, 이 최후의 만찬에 거기 앉았단 말이예요. 그래 예수님
제 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내가 이렇 게 발을 씻기면 너희가 다 깨끗하다 만은 다는 아니
니라. 크리소스톰의 말에 의하면은 예수님께서는 가롯유 다의 발을 가장 먼저 씻었다고 합
니 다. 이렇게 사랑을 베풀고 이렇게 발을 씻기시면서 그 마음이 변하질 않아요, 그 마음에
회개가 없어요, 그 완악한 마음. 예수님 가슴이 아 픕니다. 바로 이런 문제로 상당한 시간
고민한 거 같아요. 그리고 예 수님께서는 이제 결단을 내립니다.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네가 하고저하는 일을 하라!"
끝내 이 제자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맙니다. 예수님은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 위 하여
"너희 중에 나를 팔 자가 있느 니라",
"나와 함께 떡을 먹는 자가 나를 팔 것이니라",
"나와 함께 떡 그릇에 손을 넣는 자가 팔 것이니 라", 마지막엔
"네가 나를 팔 것이 니라". 이 정도 되면 회개할 것도 한데 끝내 회개하지 않을 때,
"네가 하고저하는 일을 하라."
그는 문을 차고 나가버립니다. 나가는 등뒤를, 등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 이제 이렇 게 말씀
하십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었도다."
승리하신 거죠. 이제 여기서 결정적으로 십자가 사건은 이루어집니다. 이제는 되돌이킬 수
가 없습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었 다!"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깊은 뜻 이 있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2 장 23절∼24절 보면은
"인자가 영광 을 얻을 때가 왔도다"
말씀하십니 다. 그리고 곧 이어서 말씀하시기 를
"하늘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그대로 있고 땅에 떨어져 죽 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
니라"
그 말 씀과 함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 가 왔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 니다. 예수님이 이 최후의 만찬을 축제로, 영광으로 받아들
일 수 있었 던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것 은 선택적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든 지 피할
길이 있습니다. 적어도 이 시간 피할 길이 있습니다. 예루살 렘에 올라오시지 않아도 되는
것이 고, 이 가롯유다와의 관계를 바로 잡아도 되는 것이고, 어쨌든 기회는 얼마든지. 빌라
도 법정에서까지도 한 말씀만 하셔도 십자가를 안 질 수 있는데 예수님은 지금 선택적으 로
고난의 길을 택하십니다. 선택 적으로 십자가의 길을 택하십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 18 절에 보면
"누가 내 생명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버리노라"
스 스로 버리노라.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사는 길이 선택한 것입니까, 아니면 억지로 주어
진 것입니까, 형 벌로 주어진 것입니까, 아니면 저주 로 주어진 운명을 살아가고 있는 겁 니
까? 내가 사는 현실은 내가 선택 한 것이다. 알고, 신앙으로 확실한 믿음에서 내 스스로 선
택한 것이다. 이 고난은 내가 선택한 것이다. 그 것만이 의미가 있어요. 여러분 한 평생 가
족을 위해서고 남편을 위해 서 수고하는 그 주부의 마음도 그래 요. 이것은 내가 선택한 것
이다. 오늘도 내가 선택한 것이라 할 때, 이게 사랑이 되는 거지 아무리 수고 를 해도
"아이고 내 팔자야"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아무 의미도 없는 거예요. 이걸 내가 선택했을 때, 이 고난의 길을
내가 스스로 선택할 때 만이 그에게 영광이 있는 거예요. 자랑스러워요. 이건 내게 주신 특
별한 복이에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게만 주신 거예요. 그리 고 그 선택된 수고가
이제 절정에 달합니다. 세상에 오셨고, 많은 고 난 당하셨고, 이제 십자가에서 그 크라이막
스에 도달합니다. 절정에 도달한 바로 그 감격입니다. 나는 영광을 얻었다! 하나님께서 나에
게 영광을 주신다. 아, 놀라운 얘기가 아닙니까. 최후의 만찬에서 영광의 축제를 예수님은
느끼고 있었습니 다. 가롯유다에 대한 복잡한 문제 도 이제는 다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이것
이 하나님의 뜻이요, 이것이 하 나님의 원하시는 바라면, 그 마치 예수님의 사역에 흑점과
같이 주어 지는 아주 불미스러운 사건이지만은 이것도 하나님께 맡기십니다. 그리 고 자유
하십니다. 이제 영광을 얻 었다.
또 십자가 사건에 대한 확신입니 다. 이 십자가 뒤에 부활이 있습니 다. 그래 오늘 예수님께
서는 계속 해서
"나는 간다. 갔다가 다시 올 것이다."
어디로 가시는가? 죽음 을 간다고 설명하시면서 가시는 노 정에 대한 것이 확실합니다. 그
래 서 제자들에게 말씀하기를
"조금 후 에는 너희가 나를 못 보겠고 조금 후에는 나를 보리라"
말씀하십니다. 이 엄청난 십자가 사건 뒤에 있을 일에 대하여 확실한 믿음이 있고 그 야말
로 확신이 있어요. 부활의 아 침을 바라봅니다. 이 골고다 언덕 넘어서의 부활의 아침을 환
하게 바 라보기에 그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영광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 죽음은 놀라운 의미가 있 는 것이요. 이로서 만백성이 구원 을 받게 됩니다. 내가
죽어서 썩어 지는 밀알이 됨으로 많은 열매를 맺 는다. 내가 사망권세를 이김으로 온 우주
적인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 진다. 사실입니다. 대속하시는 역 사가 이루어집니다. 예수님 마
태복 음 20장 28절에 보면 나는 섬기러왔 고 대속물로 주려왔다.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 내
죽음이 가지는 의 미,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가지 는 만백성을 향한 구원의 의미, 사 망
권세를 이기는 의미, 모든 백성을 구원하시는 크고 놀라운 위대한 그 의미를 예수님은 알고
있었기에 나 는 영광을 느낀다 말씀하시죠. 그 리고 또 이런 일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후
계자를 생각하지 않을 수 가 없어요. 내가 이렇게 삼년동안 일하고 이렇게 죽어 가면 그 다
음은 어떻게 되노? 후속 결과, 후속, 그 이후가 궁금한 거예요. 이대로 끝 나는 거 아닌가?
그렇지요? 그렇 게 끝나서는 안되죠. 그래서 오늘 예수님은 보세요. 놀라운 말씀을 합니다.
제자에 대한 신뢰 또한 그 확신이 있습니다. 현재는 제자들이 한심합니다. 그러나 이 제자들
의 저 앞에 있는 미래를 확신하고 있습 니다. 요한복음 13장 8절에 보면 제자들의 발을 씻
길 때, 베드로가
"내 발은 영원히 씻기지 못합니다"
하고 사양할 때,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지금은 네가 모 르지만 이 후에는 알리라. 왜 내가 네 발을 씻기는지 이것이 얼마나 중 요
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지금은 모 른다. 그러나 먼 훗날에는 알 것이 다."
또 13장 36절에 보면
"나의 가는 곳에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네가 따라오리라"
놀라운 말 씀 아닙니까. 베드로가 지금 한심 한 소리하고 있어요. 무슨 말인지 도 모르고
"죽을지언정 따라가겠습 니다. 내가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 습니다"하고 장담을 하지만 예수
님 이 왜 모르겠습니까.
"이 사람아 너는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모른 다고 할거야."
이렇게 한심하고 비 열한 제자의 모습을 다 알고 계시면 서도 예수님 마음속에는 깊은 자신
감이 있습니다. 이 후에는 나를 따 라오리라. 지금은 네가 나를 부인 하겠으나 먼 훗날에는
네가 로마에 서 거꾸로 못 박혀 죽을 거야. 네 가 십자가에 죽듯이 너도 십자가에 죽을 때
가 올 거다 이거예요. 확신 합니다. 여러분 혹 자녀들을 가르 치면서 이런 자신감이 없습니
까? 뭐 아이들이야 뭐 장난도 심하고 그 렇잖아요. 그 장난도 심하고 사고 를 치지만은 이
거를 꾸중할 게 아니 고 이것을 새로운 용기로, 그 의미 를 바꿔 놓아야 되거든요. 그것이
부모의 책임이 아닙니까? 그런데 아이들이 뭘 좀 잘못한다고 해서, 어디 가서 한번 싸우고
들어 왔다고 그래가지고 아이고 이건 가문의 망 신이다, 싹이 노랗다, 그럼 되겠습니 까? 용
기 있다, 괜찮다, 이제 네가 생각을 바꾸게 되면 지도자 될 체질 이 있다, 요새 말로 보스기
질이 넉 넉하다, 왜 그렇게 생각하질 못합니 까? 지금은 이 모양이지만 장차 한 바퀴 휙 돌
아서 그때는 알리라. 내 가 너를 사랑하는 것, 내가 너를 얼 마나 사랑하고 기대하는 것, 내
뜻 을 네가 알고 네가 나를 따르리라. 예수님의 말씀이에요. 그 형편없는 제자를 놓고 예수
님은 걱정하지 않 으세요.
"이 후에는 네가 나를 따 라올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영광을 누립니다.
영광을 얻었다, 그건 놀라운 승리 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 가 서 보면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선포하십니다. 이게 바로 최후의 만찬에서 하신 말씀이에요.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최후의
만찬은 확실히 예수님의 마음에는 큰 축제 였습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 다. 독일의 신
학자 몰트만은
"성령 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라고 하는 책에서 '예수의 영광'이라는 제목 하 에 그는 이
렇게 말합니다.
"예수님 께서는 죽음을 선택하셨기에 부활의 영광을 누렸다. 예수의 생애라고 하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하면 축제적 생애였다. 지배자의 생을 산 것도 아니요 노예적인 생을 산 것이 아
니 다. 자유와 자유의 선포와 사랑의 실천과 그 자유 속에 있는 영광을 누리며 살아가는 생
이었다. 이 영 광의 절정이 바로 십자가에서 이루 어진 것이다."
여러분 예루살렘을 입성할 때, 모든 사람들은 뜻도 모 릅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 지. 그
러나 예수님 만은 아십니다. 그 렇기에 승리의 축제로, 앞에 십자가 가 있지만은 십자가를
향해서 나귀 를 타고 만세를 부르며 올라가십니 다. 축제 아닙니까? 최후의 만찬, 그것은 십
자가를 앞에 놓고 이루어 지는 큰 축제요 절정적인 축제입니 다. 뜻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슬픈 이별 송별회입니다. 슬픈 이별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뜻을 다 알고 계시는 예수께는 이
것은 승리의 시 간, 축제의 시간이었습니다. 오랫동 안 기다리고 기다리던 일이 오늘 이 자
리에 와서 열매를 맺고 절정에 도 달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마지막을 어떻게 맞고 싶습니까? 승리와 자유와 종 말적 축제로 그 날을 맞
아야 할 것 입니다. 바로 그 마음으로 오늘을 사는 겁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무 슨 일을 당
해도 이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요 내게 주어진 자유요 내게 주 어진 영광입니다. 축제, 승리,
영원 한 자유, 영광, 그것이 예수님의 마 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그 승리, 그 마음
으로 오늘을 살아 가는 것이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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